태국 수코타이 왓 창럼 불탑의 코끼리들(왼쪽)과 태국 아유타야 왓 랏차부라나 쁘랑의 가루다와 야크샤(오른쪽).
불교사찰은 동물들로 가득하다. 한국의 사찰 대들보나 거기 걸쳐놓은 보, 기둥과 방이 만나는 곳 등에는 호랑이나 코끼리, 사자, 용, 물고기 등이 새겨져 있다. 태국의 수코타이에 있는 왓 창럼이나 왓 소라삭은 불탑 하단을 빙 둘러 코끼리가 받치고 있다. 미얀마의 아난다 사원에서는 입구나 모퉁이, 지붕이나 건물 상단 곳곳에서도 포효하듯 고개를 쳐든 사자를 볼 수 있다. 티베트의 조캉 사원 불전들의 벽 모서리에는 사자가, 지붕의 모서리에는 용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불전이나 불단 주위에 모여들어 불보살의 설법을 듣고 있는 중생의 존재를 가시화하려고 거기 새겨넣었을 것이다. 사찰을 둘러싼 동물은 인간을 크게 능가하는 그들의 힘을 빌어, 감당할 수 없는 사태로부터 사원이나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이는 교회 등은 물론 세속적 건축물에는 동물 아닌 인간들, 혹은 인간의 형상을 한 성자나 영웅들이 주로 들어서 있는 서양과 대비된다. 그림이나 조각에서 다루어질 때에도 등장하는 것은 양과 늑대처럼 인간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상징적 은유가 된 동물이나, 말 같은 도구적 동물, 개나 고양이처럼 인간의 ‘친구’인 동물들이다. 모두 인간화된 동물들이다. 불교미술에서 동물들은 인간에겐 없지만 인간이 선망하는 어떤 특이성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다면, 서양미술에서 동물들은 인간적 특징들의 은유적 재현을 위해 등장한다.
‘동물이 가득하다’고 했지만, 사실 ‘괴물이 가득하다’고 해야 더 적절할 것이다. 인간과 사자, 용과 새, 인간과 새 등이 섞인 기이한 동물들이 그에 못지않게 많기 때문이다. 미얀마 사원과 파고다 모퉁이에는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지만 몸은 두 개의 사자로 갈라진 마누시하라는 괴물이 앉아 있다. 방콕의 왓 아룬의, 쁘랑이라 불리는 옥수수처럼 생긴 크메르 양식의 탑에는 탑신 중간중간마다 날개를 활짝 벌리고 선 가루다가 서 있다. 이러한 괴물을 만들어낸 상상력은 동물들을 종에 따라 뚜렷하게 구별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오래된 발상과 반대로 간다. 종을 섞어 혼-종(混-種)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종의 경계를 횡단하는 운동이 여기에 있다. 이 상상력의 운동은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여 넘볼 수 없는 특별한 지위를 인간에게 부여하려는 인간중심주의마저 쉽게 넘어선다.
그리스나 북유럽 등의 신화 등에도 상이한 동물들이 섞이며 만들어진 혼-종적 괴물들이 등장하지만, 용이나 히드라 등 대부분은 인간들을 괴롭히고 인간세계를 파괴하는 것들이고, 영웅적인 인간에 의해 제압당하는 존재다. 수수께끼로 사람들을 잡던 사자와 인간의 혼-종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패하여 죽고, 성 게오르기우스나 영웅 지그프리트는 용을 죽여 명성을 얻는다. 여기서 괴물성은 인간을 위협하는 적의 자리에 있다. 그 혼-종적 형상의 끔찍함에는 그 낯선 힘에 대한 공포가 깃들어 있다. 괴물을 죽이는 영웅의 서사는 그 힘을 끝내 이겨내고 정복하는 인간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 사원 여기저기에 가득한 혼-종적 괴물들은 대부분 인간을 비롯한 중생들의 삶을 악으로부터 지켜주는 존재다.
동물이나 괴물들은 사원의 건축물 인근에 모여 있을 뿐 아니라 불보살 바로 옆에 있기도 하다. 심지어 불보살 자신이 되기도 한다. 미얀마나 태국, 캄보디아에선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 나가가 불좌와 광배가 되어 불신을 호위하고 있다. 북방불교에서 반인반조의 킨나라는 뱀의 머리를 한 마후라가와 더불어 팔부중에 속하는 인물이다. 티베트에서는 새뿐 아니라 말, 물소, 용 등이 섞여 혼-종된 동물들이 불보살의 화신이나 명왕이 되어 불법을 수호한다. 하야그리바는 말머리에 인간의 몸을 갖고 있고, 야만티카는 사람 몸에 물소머리를 하고 있다. 평온하고 곱상한 인간의 얼굴을 한 천사들과 반대로, 웃음기 섞인 분노상을 한 괴물의 얼굴을 한 이들이 불법과 중생을 악으로부터 지켜주는 보호자인 것이다.
인간과 동물들을 섞어 이런 혼-종적 존재들을 만들어낸 이유는 동물에게서 발견한 특이한 힘과 자질을 합치고 섞어 최대한 증폭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선망하는 힘의 특이성이나 그걸 표현하는 동물적 자질들은 지역마다, 조건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반인반조라도 어느 지역에선 새의 부리와 날개면 충분했을 것을 다른 지역에선 물소의 뿔을 더하기도 하고, 어느 지역에선 머리를 사람으로 바꾸고, 날개 아래에 팔을 덧붙이고 했을 것이다. 역으로 불교의 가르침과 함께 전래된 강력한 괴물이나 신은, 외부에서 온 낯설고 기이한 존재들에 대한 경외감 속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수호자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만남을 긍정하는 연기적 사유는 혼-종적 괴물을 창안하는 미감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물들의 종을 횡단하는 혼-종의 미감은 남녀의 성차를 횡단하는 혼-성의 미감과 다른 이유를 갖지만, 어느 경우든 성이나 종 등의 경계를 횡단하는 미감이 불보살이나 불법의 수호자 모두의 형상을 관통하고 있다.
불교미술에서 혼종적 괴물들이 범람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불교 자체가 악귀나 악신조차 정복하고 제거해야 적으로 삼지 않으며, 앙굴리말라 같은 살인마조차 징치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하든 악하든, 신이든 인간이든, 동물이든 야차, 아수라든, 아귀나 지옥의 중생마저 모두 제도하여 해탈로 인도해야 할 중생일 뿐이다. 그래서 야차나 아수라 같은 귀신, 악신, 도깨비 등마저 모두 신중이 되고 인왕, 명왕이 되어 불법을 수호하는 인물로 변신한다. 이는 선악의 본성이 따로 없으며, 조건에 따라, 관계가 달라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는 연기적 사유와 다시 연결된다. 정해진 본성은 없으며, 어떤 존재자의 본성도 관계에 내재적이라는 내재성의 사유, 거기에는 악마와 선신이 따로 없다.
이런 요인들에 더해, 종의 경계를 가로지르게 하는 또 하나의 성분이 불교미술의 횡단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추가되어야 한다. 불교적 사유에서는 동물과 인간, 인간과 신, 사물과 귀신, 유정과 무정 모두가 중생일 뿐이며, 인간도, 신도 다른 존재가 넘볼 수 없는 특별한 지위를 선점하고 있지 않다는 게 그것이다. 즉 모든 존재자는 중생으로서 평등하다. 초월자도 없고 초월적 지위도 따로 없다. 부처란 어떤 중생이든 깨달음을 얻으면 도달하게 되는 상태를 뜻하니, 고귀하다 하지만 저기 어딘가 따로 있는 존재자가 아니다.
심지어 부처라는 생각 자체가 부처의 길을 막는 마구니라고까지 하니, 부처조차 초월적 지위가 되지 못한다. 모두가 중생으로 평등하다는 존재론적 평면 위에서, 인간과 동물, 신과 아수라, 야차가 서로를 넘나들며 쉽게 섞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