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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3.7.17]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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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은근의 미학과  피아니시모의 힘1
      - 은묘, 무심한 얼굴의 은밀한 표정들

: 불화는 중도성 갖기에 보는 이 마음 그대로 반영

멀리서 보면 무표정하지만 가까이 보면 여러 느낌의 다표정
매혹의 힘은 감동으로 덮쳐오는 게 아니라 잔잔히 스며들어
수많은 표정·느낌 섞인 채 무심한 얼굴에 은밀히 숨어 있어

2023-0718_불교를 미학하다37.jpg
일본 카가미 신사 소장 수월관음도(얼굴 부분)

 

전에 누군가 내게 ‘이 한 장의 그림’이라 할 게 있느냐고 물었을 때, 일본 카가미 신사 소장 ‘수월관음도’가 그렇다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다. 그 그림을 처음 본 것은 가산불교문화연구원에서였다. 흔히 ‘탱화’라고들 하던 그림들을 절에 가면 보았으나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솔직히 없었는데, 그 그림은 눈을 뗄 수 없도록 아름다웠다. 덕분에 이후 불화나 불상을 유심히 보게 되었으니, 내게는 불교미술로 난 문을 열어준 그림인 셈이다. 언젠가부터는 핸드폰 잠금 화면에 얼굴부분을 저장해두곤 관상(觀想)을 한다.

그렇게 그 그림을 매일 수차례 보고 있는 셈인데, 묘하게도 볼 때마다 보살의 표정이 달라 보인다. 어떤 때는 부드럽고 자비로운 얼굴이었다가 어떤 때는 단아하고 근엄해 보이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온화하고 다정한 느낌이었다가 어떤 때는 냉정까지는 아니어도 서늘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여기서 보면 고운 자태의 여성처럼 보이고, 저기서 보면 원숙한 남성처럼 보인다. 때로는 가볍게 미소 짓는 것처럼 보이다가, 때로는 묵직하고 심각해보이며, 종종 부드러우나 진지해 보이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무표정(無表情)한데, 가까이서 보면 뭐라 말하기 힘든 여러 느낌으로 다표정(多表情)하다. 그렇게 표정이 다양한 것은 아마도 그려진 그림이 그 모든 상태를 오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여주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려진 상에 내 신체나 마음의 상태가 섞여 들어가 그런 것이라 할 터이다.

이 그림만 그럴 리 없다. 수많은 불상들 또한 그렇게 ‘무표정’하지만 다표정한 얼굴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무표정’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렇다고 그저 아무 표정이 없다고 할 순 없다. 어떤 표정이 있긴 있다. 그러나 어떤 표정이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답할 수 없다. 불보살이니 ‘자비’나 ‘연민’ 같은 표정을 가질 거라고 흔히 생각할 듯하지만,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강진 무위사 ‘아미타삼존도’의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의 얼굴에서는 근엄함과 더불어 뭔가 못마땅해 하는 표정마저 느껴지는 표정이 매력적이다. 일본 사이후쿠지(西福寺) 소장 관음보살도의 보살 얼굴은 어찌 보면 장난스런 표정이, 달리 보면 근심스런 표정이 연민보다 더 강한 느낌이 눈을 끈다.

불보살들의 얼굴이 볼 때마다, 혹은 보는 이마다 다른 것은 특정한 표정이나 두드러진 표정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볼 때마다 보는 이의 마음 상태가 오는 그대로 비추어 보이는 것이라 한다면 그 또한 이 때문이다. 눈에 들어오는 그림과 보는 이의 마음이 섞이며 어떤 상이 형성되는 것일 텐데, 그림이 무심한 ‘중도성’을 갖기에 보는 이의 마음 상태를 오는 그대로 비추어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아무리 좋은 상이라도 표정이 선명하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는 이의 마음이 비추어 드러난다고는 하지만, 이를 두고 그저 ‘주관적인’ 상이라고 할 순 없으며, 착각이나 허상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다. 그림에 없는 것이 그렇게 나타날 리는 없는 것이다. 그 모든 표정의 싹이 실은 거기 그림 속에 있었을 터이다. 거기 싹처럼 숨어 있던 많은 표정 가운데 어떤 것이, 다가온 이의 마음에 응답하며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던 것들이, 다가온 이의 감각이나 감정, 신체와 마음과 섞여들며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본성도 없기에 오는 대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맑은 거울 같은 ‘청정법신’을 여기서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렇다 생각하면, 그림의 표정은 미약한 게 아니라 없는 것이, 상 있는 그림이 아니라 아무 상 없는 텅 빈 화면이 좀 더 법신에 가까우리라고, 그림 없는 그림이 더 나았으리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텅 빈 화면을 볼 때, 거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안 드러난다. 거기 그림이 있고 불상이 있고 거기 얼굴이 있어서, 우리의 감각과 감응을 촉발하여 불러낸 것이다. 그로써 우리의 마음이 불려나가, 그것들과 섞이며 그때 그 표정이 드러난 것이다. 상 없는 여래는 상 있는 것을 통해 드러나지, 아무것도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불도가 전해진 지역이면 어디나 어김없이 불화가 그려지고 불상이 조성되었던 것일 터이다.

그려진 상의 표정이 강렬하면, 우리는 ‘자신을 잊고’ 그 강렬한 것에 빠져든다. 그렇게 우리의 감각은 그 강렬함으로 채색되고, 우리의 마음은 그 강렬한 상을 따라가게 된다. 거기에는 감동도 있고 감화도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삶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무심한 얼굴은 보는 이의 감응을 사로잡으려 하지 않으며, 우리의 마음을 어딘가로 애써 이끌려 하지 않는다. 마음을 사로잡는 강렬함이 없기에 사실 감동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종교적 감화의 힘을 강하게 행사하지도 않는다. 카가미 신사 소장 ‘수월관음도’처럼 극히 수려하고 아름다운 그림조차 매혹의 힘은 감동의 파문으로 덮쳐오며 압도하는 게 아니라, 이유를 알지 못하는 모호한 감응의 파문으로 잔잔하게 스며든다. 그 감응의 모호함으로 인해 보는 이의 마음은 상이한 방향의 느낌 사이를 떠돌고, 그 표정의 무심함으로 인해 우리의 시선은 수많은 표정들 사이를 오간다.

그렇게 무심한 얼굴은 우리를 우리 마음대로 가게 둔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 배어나오는 모호한 대기(atmosphere)는 고요한 평온의 분위기(atmosphere)로 보는 이를 감싼다. 선명하지도 않고 강렬하지도 않지만 쉽게 지워지지도 않는, 상이한 표정들이 섞인 듯 하나의 표정인 듯 모호하게 숨소리에 섞여든다. 아마도 그리곤 조용히 사라지며 다른 표정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혹은 사라지듯 물러서면서 동시에 다른 표정 속에 섞여 들어갈 것이다. 길을 찾는 눈에 희미하게 스며드는 향연(香煙)이 될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표정과 느낌들이 최소 강도로 섞인 채 무심한 얼굴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 은밀(隱密)이란 희미함(隱)의 강도 속에 상이한 많은 감응들을 깊숙이(密) 감추는(隱) 것이다. 거기서 은(隱)이란 말이 갖는 동사적 의미를 강조하여 은-밀(隱-密)이라고 다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밀(密)은 밀도와도 같은 강도를 뜻하는 목적어가 될 터이다. 은밀이란 이런 방식으로 무심이라는 그 미약함의 강도 속에 수많은 표정들을 촘촘하고(密) 강밀(强密)하게 접어넣는 것이다. 그렇게 접어넣은 감응들과 표정들은 조건에 따라, 또한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상이한 감응과 표정이 섞인 듯 별개인 듯 은묘하게 나타난다. 은묘(隱妙)란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무심한 표정 속에 숨어서 상이한 표정들이 그때마다 다르게 나타남이고,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행하길 지속함이다. 그로 인해 그 다른 표정들이 하나인지 여럿인지, 같은 건지 다른 건지 구별할 수 없도록 미묘(微妙)하게 섞여서 펼쳐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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