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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3.4.24]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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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티베트 고원의 낯선 ‘모더니즘’

: 티베트 사원들 구조 특성은 ‘매달림의 기하학’

기둥 없는 벽 위에 줄에 걸린 그림처럼 창들이 드려진 형태
기둥들이 중심이 되는 그리스적 ‘떠받침의 기하학’과는 달라
연기적 조건 따라 다른 유형의 기하학적 미감의 존재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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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포탈라 궁 전경. [법보신문 DB]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하는 신라의 비석(경주박물관)은, 기하학주의와 거리가 먼 신라에서도 글자의 크기를 일정하게 하기 위해 사각형의 격자를 사용한 흔적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비례나 크기를 조절하기 위해 기하학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렇게 구성된 것이 미감이 기하학적인 것은 아니다. 기하학적이지 않다고 비난받던 고딕성당 또한 기하학적 선이나 격자를 사용했다. 기하학적 미학이란 황금비나 인체의 비례 같은 ‘특정한’ 비례, 혹은 원이나 정방형, 원기둥이나 원뿔 같은 입방체 등 ‘특정한’ 형태(form)를 보편적 모델로 하는 미학이다. 피타고라스 이론대로 서양음악의 화음이 1:1이나 1:2, 2:3 같은 특정한 비례로 환원된다고 하지만 5:6이나 3:7 같은 비례는 화음과 무관하다. 반면 정방형의 변과 대각선의 비는, ‘비로 표시될 수 없는(irrational)’ 비였지만, 시각예술에선 빈번히 사용된다. 수많은 비례 중 특정한 비례만이 기하학적 미학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기하학적 미학이란 기하학을 사용할 때면 언제나 출현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비례나 형태를 초월적 본질이나 기준으로 사용할 때 출현한다.

티베트의 라싸에 가기 전에만 해도 나는 이런 방식으로 서구의 기하학주의적 미학을 상대화했고, 기하학을 사용한다 해서 모든 미적 형상을 기하학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자족하고 있었다. 기하학적인 서구의 미학과 기하학적이지 않은 비서구의 미학을 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라싸와 인근의 티베트 사원과 건축물들은 서구 못지않게 정형화된 기하학적 미학이 서구와 멀리 떨어진 이 오지의 고원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었다. 수평으로 긴 평지붕을 가진, 사각형으로 조형되고 사각형의 창문들로 가득한 건물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멀리서 본 대붕 사원은, 크게 그려놓은 왼쪽 상단의 벽화만 없다면, 도시의 산자락에 들어앉은 근대 도시의 건물들 같았다. 식민주의적 침략이 지구상을 뒤덮은 이후에도 서구인들이 한참 동안 그 존재마저 알지 못했던, 해발 3700미터 고원 오지의 고립된 이곳에 20세기 모더니즘을 수백 년 앞서간 기하학적 건물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 기하학을 그저 서구의 경계 안에 가둘 순 없겠구나’ 싶은 생각이 적지 않은 당혹을 동반하며 일어났다.

포탈라 궁은 사진으로 처음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직접 보니 더욱더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기하학적으로 멋진 건축물이었지만, 무언가 아주 낯설었다. 거기서 보이는 기하학은 내게 익숙한 기하학과는 무언가 크게 다른 낯선 감각의 기하학이었다.

무엇보다 낯선 것은 그 거대한 궁전에서 기둥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기둥 없는 건물이라니! 보이는 건 온통 벽이었다. 거대한 입체임에도 평면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다가오는, 흰 색과 붉은 색의 단순명쾌한 대조가 아름다운 장대한 벽들뿐이었다. 게다가 그 높이 솟은 건물에서는 기단도 보이지 않았다. 기단 없는 건물이라니! 건물의 기단이란 서구의 고전적 건물이나 근대의 기하학적 빌딩뿐 아니라 중국이나 한국 절의 전각들에서도 어디서나 발견되는 ‘기초’ 아닌가.

높이 솟은 평면상의 벽에 새겨 넣은 창문들의 배열도 아주 이채로웠다. 아래쪽 벽은 넓게 비워 두고 지붕에 닿을 듯 벽 위쪽에 몰려 있는 창문들의 모습은 마치 줄에 걸린 걸개그림, 아니, 빨랫줄에 걸려 있는 빨래들 같았다.

든든한 기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으로 건축물 전체를 떠받치는 양상의 구조를 전혀 볼 수 없는, 그럼에도 대단히 아름다운 기하학적 건축물이었다. 이토록 기하학적인데, 이토록 다를 수 있다니! 다른 감각의 기하학적 건축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감각에 의해 다르게 사용되며 다른 양상으로 조성되는 다른 기하학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닐까? 해발 3700미터 높이의 고통을 찢어질 것 같은 두통으로 체감하며 사원에서 사원으로 돌아다니다, 답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갑자기 한 단어가 마치 무슨 깨달음인 양 툭 튀어 올랐다. ‘매달림’. ‘그래 이건 매달림의 기하학이야!’ 그러고 보니 약간 안으로 기울며 물매진 벽의 선도 곧고 강직한 직선이라기보다는 안쪽으로 살짝 오목하게 흘려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천개에 매달린 탕카나 커튼이 살며시 부는 바람에 살짝 휘날리며 휘어지듯…. ‘배흘림’ 아닌 ‘허리흘림’이라 해야 할까?

그들의 그리스에서 기하학이 갖는 중요성은 흔히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현실에 없는 완벽한 모델이자 불변의 진리인 이데아의 기원이 된 것도, 질료와 대비되는 형상 개념의 오랜 지배를 확립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모두 기하학으로부터 탄생한 것이었다. 신전을 특권적 모델로 하는 그리스 건축의 개념 또한 그러했다.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기둥으로 표상되는 고전적 건축 개념은, 기하학적 형태의 박공과 엔터블러처를 갖는 지붕과 그것을 버티는 기둥, 그리고 바닥에서 그것을 떠받치는 기단을 핵심요소로 한다.

고전주의 건축이론의 중요한 지표가 되었던 로지에 신부의 ‘건축론’은 원시인의 오두막이 바로 그렇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사실 오두막이라면 없어선 안 될 벽마저 제거해버렸다. 기단 위에서 지붕의 무게를 견디는 기능은 기둥으로 환원되어야 했고, 따라서 기둥은 벽체 없이 홀로 지붕을 버티는 독립적 기둥이어야 했다. 내부공간을 벽으로 둘러치는 게 중요했던 로마 건축은 이로써 그리스와 분리되었다. 벽기둥은 벽에 새겨진 장식이란 점에서 기둥의 본질을 등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기단이 기초를 제공하고, 그 위에 선 기둥이 지붕의 무게를 떠받치는 기하학적 최소구조, 그것이 그리스 건축의 본질로 요약된다. 18세기의 고전주의자뿐 아니라, 19세기의 신고전주의자, 그리고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20세기 모더니스트 모두가 이것이 건축 자체의 본질이며 건축의 진리라고 주장한다. 모든 지식이나 판단의 확고한 기초를 마련하고, 그 위에 명제들의 구축물을 세우려는 철학적, 논리적 발상도, 혹은 구체적인 현상의 근저에 있는 근거를 묻는 것도 이런 건축적 은유와 동형적인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적 건축의 구조는 철학적 사유의 구조를 구축하는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 포탈라 궁이나 티베트의 사원들에는 다른 구조의 건축, 다른 구조의 기하학이 있었다. 확실하고 단단한 기단을 근거로, 그 위에서 기둥들이 모든 구축물을 지지하는 ‘떠받침의 기하학’이 아니라, 기둥이라곤 없이 잘린 듯 수평선을 그리는 벽 위에, 줄에 걸려 그림처럼 아래로 창들이 드려진 ‘매달림의 기하학’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정반대인 듯 보이기도 하는 아주 다른 미감의 기하학적 건축을 나는 거기서 보았다.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다른 유형의 기하학적 미감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았다. 기하학이 연기법 안에 있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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