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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3.4.10]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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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파격의 미학과 평상심

: 불상 태우고 고양이 죽여 무엇을 얻으려는가

선사들 기이한 말과 행동은 정해진 답들을 깨주기 위한 것
상식적 관념 부서지는 체험이 상을 떠난 사고·감각 시작점
모든 격식 벗어나 자유로이 흐르게 하는 파격이 선의 미학

인다라의 ‘단하소불도’. 
인다라의 ‘단하소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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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머리를 위한 선(禪)’.

 

앞에서 모든 일상사에서 도를 행하라는 평상심의 가르침을 여래의 미학으로 번역해보았지만, 이제 역으로 다시 물어도 좋을 것이다: 선에 고유한 미학이 있는가? 있다. 선사들의 언행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놀랄 만큼 멋지고 더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그 아름다움과 매혹의 힘이 우리를 불법으로 잡아당긴다. 그 아름다움의 강렬함은 파격에서 나온다. 불상을 뽀개 장작불을 지피고, 담장과 기왓장의 불성을 보며, 고양이를 매달아 불법을 묻는 파격은 통쾌함을 지나 경악스럽기도 하다. 부처, 불법, 불성, 자성청정 같은 개념들을 물음으로 바꾸고, 불문(佛門)의 모든 양식화된 틀을 깨는 파격에서 나온다. 제대로 된 부처는 부처가 죽을 때 만날 수 있고, 진정한 불법이란 불법이 깨질 때 알게 되리라는 근원적 역설, 그것이 무장무애한 선가의 스타일을 만든다. 그 파격의 스타일 자체가 바로 선의 미학이다.

틀(格)이나 의미에 매이지 않은 일상의 삶, 그것이 무장무애의 자유다. 부처도 도도 따로 찾을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하나하나에서 찾으라는 것, 적정한 열반도, 고요한 탈속도 따로 찾지 말고 세간의 소란스런 삶 속에서 편안하게 살라는 것, 애써 불법도 구하지 말고, 애써 공적함이나 해탈을 얻으려 애쓰지도 말고, 불도에 대한 욕망마저 내려놓음으로써 순간순간의 현재 그 자체를 살라는 것. 그러니 자성청정을 말하지만, 청정을 따로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도에서 벗어나게 된다. 멋지게 장엄된 울타리에 갇히게 된다. 이것이 선이 가르치고자 한 불법의 요체다.

이를 가르치기 위해 선은 불법을 가르치는 방법에서 다른 모든 유파와 다른 아주 특이한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불법 내지 도를 말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말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가르치고, 잘 알려진 교리나 개념을 설하는 게 아니라 그걸 깨주는 방식으로 가르치는 것. 그래서 선에서는 앉아서 참선하거나 경전을 읽는 것보다, 선사들을 참방하여 묻고 답하며 ‘깨지는 게’ 중요했다. 내가 가진 생각이나 관념은, 그것이 부처에 대한 것이든 공에 대한 것이든, 선에 대한 것이든 공안에 대한 것이든, 이미 내가 아는 상 안에서 이해된 것이란 점에서 아상 안에 있다.

선사들이 학인의 물음에 말도 안 되는 답을 하고, 때론 소리를 지르고 뺨을 때리는 것은, 불문에 들어와 배우고 익힌 정해진 답들을 깨주기 위한 것이다. 그 답들은 ‘옳음’ 내지 ‘정설’의 형태로 양식화(樣式化)된 지식이다. 양식화된 모든 것은 감각과 사고, 행동을 패턴화되고 고정된 방식으로 반복하게 하는 틀(格)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해 도를 깨쳤다는 왕양명 같은 이도 있지만, 틀 안에서 얻은 도란 우리의 삶을 틀 안에 가두고 그 안에서 맴돌게 하는 회로일 뿐이다. 부처나 불법, 불이와 공, 자성과 청정, 열반과 적정 등 아무리 지고한 의미를 갖는 개념들이라도 양식화된 것이라면, 그것은 만물을 그 틀에 가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식이나 양식이 작용할 때 우리는 사고하지 않는다. 상식이 생각하고, 양식이 사고할 뿐이다. 고정된 상들을 반복하여 불러낼 뿐이다.

상식적인 관념이, 양식화된 언행이 더는 통하지 않는 어떤 철벽과 만나 남김없이 부서지는 ‘즉비(卽非)’의 체험이야말로 상을 떠난 사고와 감각이 시동되는 지점이다. 상식화된 답이 깨질 때 발생하는 물음이야말로 사유와 감각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대의심이나 대사(大死), 의정(疑情)이라는 말이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언제나 쓸 수 있는 확실한 답들이 모두 사라지고, 양식화된 사고와 감각의 틀이 박살날 때 발생하는 물음, 그것이 진정 ‘크다’고 할 의심이고, 신체마저 사로잡는 의정이다. 부처를 똥막대기로 만들고, 달마가 온 이유를 잣나무 끝에 매달며, 불법이나 부처에 대한 모든 의미를 지워 무의미로, 말도 안되는 ‘난센스’로 뒤집어버리는 선사들의 언행은, 정해진 답들의 체계를 깨 물음으로 바꾸고, 정해진 의미에 갇혀 생각할 것 없는 자명성에 찬물을 끼얹어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즉비의 방망이다. 이것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선가 특유의 분방하고 통쾌한 스타일을 만든다. 여래의 미학과 구별되는 선의 미학, 그것은 바로 이 파격적 스타일의 미학이다.

하지만 선승들은 미학적 스타일에서마저 대단한 오해 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선이란 산속 고요한 곳에서 숨어 살며 탈속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선승들이 명리를 피하고자 했고 세간의 욕망과 거리를 두려 했으며, 이를 탈속이나 출세간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탈속은 속세의 일상적 삶에서 탐진의 마음에 끄달리지 않음이란 의미에서 속세 안에서의 탈속이고, 출세간은 소란스런 세간 속에서의 삶 하나하나에서 고요하고 평온하게 사는 것이란 점에서 세간 안에서의 출세간이다. 소란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 따로 부처를 구하려는 마음처럼, 소란 없는 삶을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번뇌의 이유다.

공이나 무 같은 개념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미적 요소들을 찾아내고, 그것으로 탈속의 적정함을 재현하는 스타일을 다구나 다실, 다례 등으로 양식화하여 유파의 전통을 따라 엄격히 학습하고 전승하는 것은 불이의 철학도 아니고 선의 미학도 아니다. 반대로 삶을 가두는 양식화된 모든 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흐르도록 만드는 파격, 그것이 선의 스타일이고 선의 미학이다.

이점에서 보면, 선의 스타일을 누구보다 미학적으로 탁월하게 사용한 것은 백남준이다. 하지만 이는 텔레비전 앞에 불상을 놓고 ‘TV 붓다’라고 써놓는 식의 작품 때문이 아니라, 머리를 먹물에 담가 글씨를 쓰고, 바이올린을 천천히 들어 박살내며 악기에 대한 틀에 박힌 통념을 부수며, 활을 버리고 수숫대로 첼로를 연주하게 했던 파격적 퍼포먼스 때문이다. 백남준의 막역한 친구이자 강력한 지지자였던 아티스트 바우어마이스터의 전언에 따르면, 그가 독일에 왔을 때 가져온 것은 물음과 질문만으로 가득 찬 책 한 권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벽암록’이었을 것이다. 선사들이 파격을 통해 어디서나 도를 보게 했던 방법을 그는 어디서나 예술을 보게 하는 방법으로 바꾸어 사용했던 것이다.

무의 표상은 불이의 공도 아니고 불이의 미학도 아니다. 그건 단지 텅 비고 고요한 상으로서의 무를 불이의 도로, 공과 적정으로 오인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상 없음’을 통해 재현될 수 없고, ‘텅 비어 있음’으로 표상될 수 없다. 그렇게 재현되는 ‘상 없음’은 단지 하나의 상일 뿐이다. 공을 무로 오도하는 하나의 상일 뿐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반야심경’의 문구는, 색 없는 공이 아니라 색이 있는 그대로 공을 보고, 공이란 색과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색과 함께 있음을 설한다. 색 없이 텅 빈 적적함이란 색을 등진 공, 색 없는 무의 상에 불이의 도를 가둔다. 세간을 떠나는 순간, 차도, 선도 불이의 불도가 아니라 탈속의 텅 빈 이미지 속에 묻히고 만다. 별개의 공, 단멸의 공에 대해 공 개념의 제안자들이 그토록 경계했던 것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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