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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1219]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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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빛의 미학과 어둠 속의 여래

: 덕산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활연히 깨쳤을까

빛의 사라짐이란 종말이며 세계 부정이란 게 철학자들 통념
완전히 깨닫는 것은 빛 있든 없든 거기 있는 불법 보는 것
빛 있으면 보고 빛 없으면 못 보는 것은 지혜 못 갖춘 속인

프랑스 생테티엔 성당, 캉.
프랑스 생테티엔 성당, 캉.
2022-1223_불교를 미학하다24.jpg

 

 
어둠속의 송광사.

화려한 빛과 색채의 고딕 성당과 달리, 로마네스크 성당은 무겁고 어둡다. 그러나 어둠은 로마네스크에서처럼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이용되는 경우에조차, 빛과 대립되지만 빛을 보조하는 짝이거나 빛과의 대비 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형상이었다. 계몽주의와는 반대쪽에 있었을 것처럼 보이는 중세 신학 안에서도, 빛은 언제나 신과 진리, 선과 덕성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어둠은 그것을 드러내주는 배경이거나, 그것에 의해 축출되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빛과 어둠에 대한 이원론적 대립은 무지와 몽매를 겨냥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쉽게 설득력을 얻는다. 이는 빛과 어둠에 대한 상식과 통념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불교에서도 그렇다. ‘무명’이라는 말은 흔히 몽매의 어둠과 쉽게 동일시되고, 지혜는 그 몽매를 일깨우는 빛으로 치환된다. 더없는 역설로 통념을 깨고 모든 답을 물음으로 바꾸는 선(禪)에서의 깨달음조차 무지와 무명을 걷어낸 빛, ‘광명’이라고는 아주 밝은 빛과 등치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그러고 보면 불교의 가르침 또한 계몽주의의 일종이 되고 만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이 깨달음을 얻었던 사건은 이렇게 해석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발상과 반하는 것이기에 이는 약간 상술할 이유가 있다.

알다시피, 덕산은 ‘즉심즉불(卽心卽佛)’ 하나로 불법을 가르친다는 남방의 ‘마구니’들을 정리해주겠다고 나섰다가 떡 파는 노파 하나 감당하지 못해, 노파 말대로 용담(龍潭)을 찾아간다. 그리고 밤이 깊으니 처소로 가라는 말에 덕산은 주렴을 걷고 나서다, 바깥이 칠흑같이 캄캄함을 보고 되돌아선다. 어두워 난감하다는 말에 용담은 종이에 불을 붙여 덕산에게 주는데, 덕산이 받으려는 찰나에 ‘후’하고 불어 불을 꺼버렸다. 이에 덕산은 활연히 깨치고 절을 올렸고, 다음날 자신이 자랑삼던 ‘금강경’ 주석서를 불태워버렸다. 무엇을 보았기에 덕산은 불이 꺼지는 사건 하나로 활연히 깨친 것일까?

캄캄한 어둠과 밝은 불이 등장하기에, 거기서 불 꺼진 어둠에서 무명을 보았던 거라고 한다면, 사실 이 사건은 너무 뻔한 교훈을 주는 계몽의 담화가 된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런 교훈이야 굳이 그런 일 없어도 누구나 알 법한 상식 아닌가. 따라서 그저 그것뿐이라면 ‘금강경’을 나름 통달해 ‘주 금강’(속성이 ‘주 ’씨였다)이라 자처하던 덕산이 자기 생각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크게 깨우칠 만한 어떤 계기가 되었을 것 같지 않다. 누군가의 사건적 순간에 설명을 다는 건 좀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 상투적 빛의 교훈에 그 사건을 가두는 건 안타까운 일인지라, 약간의 사족을 단다.

불빛이 사라진 순간 그가 보았던 것은 분명 어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때 깨달았던 것은 빛이 사라지면 어둠에 가려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유치한 무명의 관념이 아니라, 반대로 불빛이 꺼져 깜깜해져도 어둠 속에 있는 것은 그대로 있다는 사실 아니었을까? 빛이 있을 때는 빛으로 인해 볼 수 없던 것을 빛이 사라진 순간 비로소 보았던 것 아닐까? 그러니 그는 빛을 본 게 아니라 어둠을 본 것이다. 그가 본 어둠은 빛이 없어 보이지 않는 몽매가 아니라, 빛이 없어 비로소 눈에 들어온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 어둠은 빛과 대비되는 어둠이 아니라, 빛없는 어둠 자체였을 것이다. 빛의 배경이 되는 어둠이 아니라, 빛 없이 존재하는 어둠. 빛과의 이원적 대립을 벗어난 어둠.

세계는 빛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철학자들 또한 쉽게 빠져드는 통념이다. 그 통념 안에서 빛의 사라짐이란 몰락이고 종말이며 세계의 부정이다. 빛이 달라지면 세계가 달라진다. 그러나 그렇게 나타나고 달라지는 세계란 눈에 보이는 세계, 이미 알고 있는 의미의 빛을 비추어 해석된 세계다. 지평이라고도 불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의미의 세계, 집합적으로 공유된 아상 속의 세계다. 그러니 그것은, 하이데거 같은 사람이 아무리 ‘존재의 의미’니 ‘존재의 목소리’니 말해도, 결코 ‘존재’와 같지 않다. 존재는 세계가 아니다. 그 모든 세계의 ‘근거’지만, 어떤 세계와도 동일하지 않은 어둠 속의 존재 그 자체다. 빛에 따라 세계는 달라지지만, 빛이 있든 없든, 어떤 각도에서 비추든, 존재는 저기 그대로 있다. 따라서 존재는 차라리 빛이 아니라 어둠과 함께 있다.

존재란 빛과 무관하게 거기 그대로(如如) 있는 것이다. 물론 빛이 있을 때에도 그것은 있는 그대로 오지만, 우리에겐 빛이 비추인 하나의 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여래(如來)’란 이처럼 빛과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빛은 거기 있는 것을 하나의 해석 속에서, 하나의 형상으로 보게 한다. 그래서 세계는 하나가 아니고, 형상은 셀 수 없이 많다. 존재란 그렇게 수많은 다른 형상들을 배태하고 있는 잠재성이다. 모든 형상의 원천이지만, 어떤 하나의 형상에 갇히지 않는 것, 그래서 ‘상 없는 것’이라 표현되는 어떤 것이다. “모든 상 있는 것에서 상 없는 것을 볼 때, 여래를 보리라.”

어떤 형상보다는 차라리 상 없는 어떤 것을 ‘여래’라고 하고, 모든 상 있는 것에서 ‘상 없는 것’을 보라 함은, 하나의 상, 하나의 빛에 우리가 그토록 쉽게 현혹되기 때문이다. 상 없음 또한 하나의 상일 수 있지만, 그래도 상 없는 여래라 함은 상 있는 것에 현혹되는 한 결코 볼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 것이다. 불법 또한 그러하다. 완전히 깨닫는다 함은 빛이 있든 없든 거기 있는 불법을 보는 것이다. 어둠 속에 있든 빛 속에 있든 거기 있는 것, 그것이 불법이고 그것이 ‘여래’고, 그것이 ‘존재’다. 그것을 볼 줄 모르는 이는 사실 빛이 있어도 그걸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빛이 있어도 사실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혜란 빛을 따라 상을 보는 게 아니라, 빛이 없어도 거기 있는 ‘여래’를 보는 것이다. 무명이란 빛이 없어 아무것도 보지 못함이 아니라, 빛이 있어도 거기 있는 ‘여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빛 속에서 살지만, 지혜와 멀리 떨어져 산다. 그러니 ‘무명’은 모든 상을 삼키는 어둠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무지가 아니라 오히려 지혜와 가깝다. 어떤 상도 없고 아무 규정도 없는 ‘무기(無記)’인 것이다. 어둠 속에 있으면 몽매하고, 빛 속에 있으면 지혜롭다는 생각은 바로 이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어둠의 통념으로 무명마저 오인하는 셈이다.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한, 빛이 있어도 여래를 보지 못한다. 빛이 있으면 보고 빛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지혜를 갖지 못한 ‘속인’ 아닌가.

빛이 있어도 여래를 보지 못함은, 사실 빛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빛에 비추인 형상, 빛이 비추인 것만 드러나게 마련인 상을 보느라, 상 없는 여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시점에서 보이는 것만 보느라, 여래는커녕 다른 이의 눈에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한다. 빛이 사라질 때, 내 눈에 보이던 것이 어둠 속에 묻히며 사라질 때,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에 눈을 돌리게 된다. 어둠에 의해 형상이 지워질 때, 그 형상에 가려 안 보이던 것이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불빛이 꺼질 때 덕산이 본 것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빛을 비추면 어두울 때 안 보이던 게 잘 보인다는 상투적 ‘진리’를 본 게 아니라, 빛이 없어도 거기 그대로 있을 어떤 것을 본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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