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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1121]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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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유한 속에 내재하는 무한

: 무한 공간이 건축물에 둘러싸이며 사찰 내부로

내부 영토 내줌으로써 외부 전체를 내부로 만드는 역설
일본 사찰의 가레산스이식 정원은 일종의 미니어처일 뿐
각자 평등한 무한들임을 표명하는 ‘잉불잡란격별성’ 공간

 

2022-1125_불교를 미학하다22.jpg
교토 류안지의 가레산스이.

바로크 도시 칼스루헤.
바로크 도시 칼스루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오른쪽 삼층석탑 옆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오르면 조사당이 나오고, 거기서 왼쪽으로 난 길을 가면 응진전이 나온다. 이 전각들은 명백히 부석사 경내, 즉 내부에 속한다. 그러니 전각들로 이어지는 길 또한 내부에 속한다. 그렇다면 그 길 좌우로 있는 숲은, 전각을 둘러싼 숲 또한 절 내부라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길을 올라 이르게 되는 봉황산 중턱은 내부일까 외부일까? 그 숲에서 이어지는 봉황산 숲은 내부일까 외부일까? 절의 자취가 사라진 곳이니 내부라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봉황산 등산로라 할 그 길을 따라 이어진 절의 마당이나, 그 마당으로 이어진 건물들은 외부일까 내부일까? 운주사 ‘천불천탑’은 운주사 앞 잔디밭뿐 아니라 인근 마을의 밭 옆에, 천불산 등 인근 숲에 흩어져 있다. 이들이 있는 장소는 운주사의 내부일까 외부일까? 

산사에서는 담장과 문이 폐곡선을 이루지 않지만 산사 또한 ‘경내’라고 하기도 하는 나름의 영토를 갖는다. 내부를 갖는다. 건물은 물론 담장과 문, 석단과 마당, 길들 모두 그 내부에 속한다. 그러나 그 내부는 모든 방향에서 외부와 그대로 이어진다. 길들은 마당을 외부와 연결하고, 마당은 자신을 둘러싼 건물들마저 그 외부와 잇는다. 그렇게 산사의 건축공간은 하나로 둘러친 담에 의해 외부공간을 내부화하는 게 아니라, 있는 담조차 닫지 않고 열어둠으로써 마당 같은 내부공간마저도 외부화한다. 역으로 절바깥 모든 외부를 내부로 불러들인다. 

위상수학적 연속성에 의해 하나로 이어지는 내부와 외부, 결국 이는 주변의 길이나 숲과 바위 등 자신을 둘러싼 외부 전체를 내부와 이어진 공간으로 만든다. 내부를 외부화하는 방식으로 외부를, 한없이 이어지는 외부 전체를 내부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외부는 처음엔 주변의 길이고 나무들이라 하겠지만, 그 길과 이어진 길은 끝이 없고, 그 나무와 이어진 숲은 드넓다. 그 숲은 그걸 둘러싼 또 다른 외부와 이어진다. 무한이라 할 우주 전체로 이어진다. 내부 전체를 외부와 이어 외부화함으로써, 그에 이어진 외부 전체를 내부로 만드는 역설적 감각이 여기에 있다. 

흔히 중도란 있음과 없음을, 내부와 외부의 양변을 여읜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건 양자 사이이 모호한 중간이 아니라, 내부를 외부화함으로써 외부 전체를 내부화하는 역전의 발상을 뜻한다. 자기 내부의 영토마저 외부에 내줌으로써 외부 전체를 내부로 만드는 역설이, 무한히 작은 최소치의 내부로 무한히 큰 최대치의 내부를 얻는 역설적인 영토 감각이 거기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화엄학의 눈을 빌려, 하나의 티끌에서도 그것을 둘러싼 연기적 조건의 우주적 스케일을 볼 수도 있고, 위상수학의 눈을 빌려, 단절 없이 이어지는 내부공간의 연속체가 외부 전체로 확장됨을 볼 수도 있을 터이다. 중요한 것은 그 우주적 외부라는 무한의 공간이 건축물들에 둘러싸이며 만들어진 유한한 내부 속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유한한 공간 속에 무한한 공간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유한한 공간에 무한한 세계나 우주를 담으려는 시도들이 이것 말곤 없었다 할 순 없다. 먼저, 성이나 절 등의 건축물에 부속된 정원에 산과 물, 바위와 수목의 ‘자연’과 인간의 공간인 정자 등을 넣어 세계를 담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중국의 ‘원림(園林)’이나 일본의 정원이 그렇다. 그러나 바위와 나무, 솟은 땅과 패인 연못으로 만들어진 정원이나, 류안지(龍安寺) 등 선종 사찰의 가레산스이(枯山水)식 정원은, 자연물의 일부를 은유적으로 재현한 것이란 점에서, ‘자연’이나 ‘산수’, ‘우주’라는 무한은 사실 상징화된 사물들의 유한한 대상을 그리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유한 속의 무한은 세계가 몇 개의 상징에 의해 재현될 수 있으리라는 개념적 환영에 기대어 있다. 그것은 아무리 크게 만들어도 하나의 은유적 상(像)이기를 면할 수 없는 ‘가상의 무한’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하나의 미니어처일 뿐이다.

반면 산사의 내부공간에 담긴 우주는, 마당과 길로 직접 이어진 것들이 인접성 연관을 따라 이어지고 또 이어진 것이란 점에서, 그대로의 물질성을 갖는 ‘실질적 무한’이다. 그것은 유사성을 빌어 우주적 무한을 재현하려는 어떤 발상도 동반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디서 보아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 서 있든 보는 지점을 우주 전체가 모여드는 곳으로 만드는 ‘실질적 무한’이다. 애써 만들어진 인위적 상징이 아니라, 그저 경계를 제거하는 것 하나로 구현한, 있는 그대로의 무한이다. 서는 지점마다 다른 형상을 취하는 상이한 무한들이 거기에 있다. 그 많은 무한들의 연속체가 하나의 유한한 건축공간 안에 있다.

바로크 건축 또한 유한한 공간에 무한한 우주를 담으려 한다. 무한의 공간이 어찌 하나의 중심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이전 시대의 관념을 깨고, 무한의 공간을 통일하는 하나의 중심이 있을 수 있다는 발상이 출현한 덕이다. 제한된 화면 안에 대상을 재현하는 르네상스 투시법의 ‘중심점’은, 이로써 모든 평행선들이 모여드는 바로크 투시법의 ‘소실점’이 된다. ‘무한원점’이 된다. 그것은 무한의 세계가 모여드는 중심이고, 무한의 공간으로 뻗어나가는 중심이다. 궁전이라는 중심을 통해 세계를 통일하는 바로크 도시의 방사상 도로, 기하학적 질서의 세계를 왕의 눈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귀속시키는 바로크 정원은, 무한의 세계를 장악하려 했던 이러한 공간 개념과 동형적이다. 이러한 무한의 우주는 기하학적으로 질서화된 세계로 변환되지만, 그 무한의 공간은 유사성에 의해 재현된 것이라기보다는,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소실선이나 도로를 따라 펼쳐진다는 점에서, 물리적 인접성에 기대고 있다. 무한의 공간은 눈에 보이는 프레임 너머에 있는, 그것에 잘려나가 보이지 않는 외부를 통해 상상된다. 

여기서 무한의 세계를 통일하는 중심은 왕의 자리이지만, 이 왕은 종종 ‘나’라고 하는 데카르트적 주체로 표상된다. 나와 세계가 맞먹는다는 근대적 과대망상, ‘나’는 무한의 세계 전체를 파악/장악하는 주체라는 제국주의적 과대망상이, 그런 주체의 표상에 바람을 불어넣어 부풀리고 또 부풀린다. 그러나 소실점은 화가의 눈이 있는 곳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만, 바로크 도시의 중심은 오직 왕궁 하나뿐이며, 바로크 정원은 오직 왕의 눈만을 위해 바쳐진다. ‘모든 주체가 바로 왕’이라는 데카르트의 듣기 좋은 철학적 명제는, ‘왕만이 주체’라는 홉스의 냉엄한 정치적 명제를 감춘 허구인 것이다. 왕이 둘일 수 없듯이, 무한의 공간 역시 둘일 수 없다. 왕의 자리 아닌 모든 자리는 왕이 장악한 무한의 세계 안에서 별 볼 일 없는 한 점에 불과하다. ‘나’란 주체는 왕의 지배를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한없이 작은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바로크의 공간에는 무력한 유한 모두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초월적 중심이 있을 뿐이다. 산사마다, 아니 산사 안의 각 지점마다 다른 형상의 다른 우주가 깃들어 있고, 그 다른 우주들이 각자마다 표현하는 바가 다른 평등한 무한들임을 표명하는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의 우주는 이러한 공간 안에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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