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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0613]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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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권력의 직선과 곡선의 능력 : 대충의 미학으로

: 대충은 과잉·모자람에도 적절히 답을 내는 능력

직선 고집하는 완전성 미학은 단일한 만큼 획일적 정답 요구
정답 없는 공백 속에도 중요한 것 찾아내는 감각적 숙련 필요
곡선 통해 직선화된 형식에 갇힌 상상력 슬그머니 해방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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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을 가시화하는 절일수록 직선성이 강하다. 일본 도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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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기하학주의가 없었다고는 해도, 동양 또한 기둥에서, 아니 건축물 전반에서 직선의 강박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은 단연 거대한 궁전들이다. 특히 자금성처럼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제국의 궁전은 기단이나 계단, 벽은 물론 처마를 비롯한 지붕의 선들마저 직선이거나 꺾인 직선, 혹은 직선에 가까운 곡선이다. 정도차가 있지만, 이는 창덕궁이나 경복궁 같은 조선의 궁전들도 다르지 않다. 종묘는 직선성이 가장 강하다. 그래도 한국의 궁전 지붕의 선들이 좀더 중국의 그것보다 곡률이 큰 것은, 과시해야 할 권력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찰 또한 직선과 사각형이 직조하는 형태들이 떠받치고 있지만, 그래도 궁전에 비해 직선의 힘은 약하고 부차적이다. 무엇보다 지붕의 완연한 곡선은 맞은편에 있는 다른 직선들마저 구부러진 면의 일부로 만든다. 물론 절이나 사원들 역시 국가권력의 후원 하에 지어지고, 많은 경우 국가권력을 가시화하는 기능 또한 갖고 있다. 그런 절일수록 규모는 커지고 직선성은 강력해진다. 쇼무천황의 칙령으로 세워진 일본의 도다이지가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정연한 직선이 뚜렷한 도다이지조차, 일종의 얼굴 역할을 하는 대불전 지붕 전면의 직선을 끊고 구부러진 비정규곡선을 세워 직선성을 완화시키고 있다. 인도네시아 사일렌드라 왕조가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 사원 보로부두르는 거대한 사변형을 기반으로 하지만, 변들을 거듭하여 꺾어서 직선성은 꺾인 선들에 의해 잠식되었다. 불국사 같은 도시의 절들은 직선의 벽을 갖게 마련이지만, 회랑 지붕의 직선은 솟을대문의 지붕들로 끊어지고 기단도 돌출부와 사선의 계단 등으로 만들어 직선들을 꺾어 직선성은 크게 완화된다.

직선주의적 강박을 떠나서 보면, 차라리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봉정암 극락전 기둥의 배흘림은 직선성을 완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걸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살짝 둥근 기둥 형태가 좋아서였을 수도 있고, 그런 식으로 원만한 느낌을 주려고 했을 수도 있다. 의도가 무엇인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유념해야 할 것은 곧바로 선 수직 기둥이나 민흘림 기둥이 있는데도 그리 만든 것은 그것이 상이한 기둥 형태 사이에서 선택한 것이란 사실, 거기다 착시교정이론을 적용하는 순간 수직성이 더 중요했을 궁전의 수많은 기둥 제작자는 그것도 모르는 바보가 된다는 사실, 그리고 아무리 착시이론을 들이대도 불룩 나온 배를 직선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필요한 것은 흘러나온 배를 지우는 직선적 기둥의 미학에서 벗어나 배흘림을 따라 기둥의 미학을 좀더 밀고 나가는 게 아닐까?

평행한 직선을 따라 기둥을 만들려 할 경우 기둥의 폭이 정해지면 길이를 제외하면 기둥의 형태는 자동으로 결정된다. 더하거나 뺄 것 없는 ‘완전성’의 관념이 유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단일성에 기반한다. 그리스적 비례이론의 신봉자들은 기둥의 길이마저 폭과 대비하여 일정한 비례를 요구하기에, 길이의 가변성도 생각보다 크지 않다. 민흘림기둥도 위아래 폭을 정하는 순간 형태는 자동으로 결정된다. 반면 배흘림은 기둥 상단과 하단 사이의 선을 직선 아닌 곡선으로 하는데, 곡률을 얼마로 하는가에 따라 가능한 곡선은 극히 다양하다. 더구나 최대한 불룩한 지점을 어디로 할지, 곡선이 구부러지는 양상을 어떻게 할지에 따라 곡선의 형태도 대단히 가변적이다. 사실 수학적으로 말해, 두 점을 잇는 곡선은 무한히 많다.

그 많은 곡선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지붕의 형태나 건물의 크기와 비례, 그리고 기둥을 통해 산출하려는 효과에 따라 정해진다. 어떤 것이 적절할 것인지는 분명 결정할 수 있지만, 조건과 무관한 정답은 따로 없으며, 단 하나의 답만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가감할 수 없는 완전한 형태도 없다. 가능한 여러 형태 중 하나를 표현하려는 바에 맞추어 적당히 고르면 된다. 가령 늘씬함을 강조하려면 작은 곡률로 뻗어올라는 기둥이, 탱글대며 리듬믹하게 튕기는 느낌을 강조하려면 좀더 큰 곡률의 기둥이 적절한 것이다. 두 개의 곡선을 부드럽게 연결하여 배가 그리 나오지 않은 품위 있는 기둥을 만들 수도 있고, 항아리처럼 볼록한 배로 다정하고 장난스런 느낌의 기둥도 만들 수 있다. 심지어 앙증맞고 귀여운 느낌의 기둥마저 가능할 것이다.

완전성의 미학은 단일한 만큼 획일적인 정답을 가정한다. 반면 배흘림기둥은 하나의 표현을 위해서도 단일한 답이 아니라 적절한 여러 답들을 갖는다. 표현적 적절성만 갖는다면, 약간 더 튀어나오거나 약간 덜 튀어나온 것 모두 가능하다. 따라서 가능한 여러 답 중 하나를 ‘대충’ 선택하면 된다. 대충 선택하기에, 선택할 때마다 약간씩 다른 기둥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 중 어느 것이 더 적절한지는 이론적 근거보다는 감각적 판단에 속한다. 각각의 기둥을 다르게 만드는 이러한 차이는 단일한 정답의 형태의 기둥과 달리 쉽게 싫증나지 않는 미묘한 다양성을 형성한다.

여기서 ‘대충’이라는 말은 약점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지정해주지 않으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반면, 인간은 ‘대충’ 지정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즉 ‘대충'이란 조건과 맥락, ‘목적'에 따라 필요한 어떤 것을 적절하게 알아서 채워 넣는 능력이다. ‘대충’의 능력은 하나라도 정확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기계적 엄격성과 반대로, 정확하지 않거나 필요한 것이 빠져도 적절하게 채워 넣어 작동시키는 유연한 엄밀성을 요구한다. ‘대충’의 능력이란 필요한 것이 모자라거나 주어진 게 과잉인 경우에도 적절하게 답을 내는 능력이다. 모자라거나 남아도는 불완전한 조건에서도 적절하게 필요한 것을 찾는 능력이다. 이는 정답을 뜻하는 정확성이 아니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아도 대충 중요한 것을 고려하여 답을 찾을 줄 아는 적절성과 상응한다.

그러나 ‘대충’은 조건에 따른 유연성(flexiblity)이지 주관적인 자의성(arbirariness)은 아니다. 정해진 ‘이상적’ 형태와 다른 것을 배제하는 선험적 엄격성이 아니라, 두 점 사이에 그어질 수 있는 무수히 많은 곡선 가운데, 표현하려는 바에 부합하는 것을 조건에 맞추어 골라내는 경험적 엄밀성이다. 그렇기에 선결정된 정답을 알면 대개는 할 수 있는 표준화된 숙련이 아니라, 적절성을 묻는 물음으로 정답 없는 공백 속에서 가장 적절한 것을 찾아내는 감각적 숙련을 요구한다. 대충의 능력은 기하학적 형태에 갇힌 뻔한 형태에서 벗어나 뜻밖의 선을 만들어내는 긍정적 창안의 탈영토화 능력이고, 최소주의적 강박 옆에 납득가능한 이탈의 지대를 최대화하여 부가하는 재영토화 능력이다. 따라서 대충의 미학은 형식의 코드를 벗어나 미감의 영토를 만드는 구부러진 선을 통해 직선화된 형식에 갇힌 상상력을 슬그머니 해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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