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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0613]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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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배흘림기둥과 엔타시스 양식 사이에서 : ‘착시교정’ 이론의 착각

: 배흘림기둥까지 직선화하려는 해석은 강박증

기둥 중간 홀쭉하게 보이는 착시현상 교정 위한 것으로 설명
기둥은 직선이어야 정상이라는 가정을 전제한 맹신의 산물
정상형태 아니라고 말하기 앞서 수직이 당연한 건지 물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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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기둥.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기둥.
그리스 파르테논신전 기둥

 

배흘림이란 알다시피 기둥의 배가 밖으로 불룩 흘러나오게 만드는 기법이다. 표준화된 설명에서 이는 그리스 신전 기둥의 ‘엔타시스 양식’과 곧바로 연결된다. 이런 식의 설명은 자신의 문화가 ‘위대한 그리스’와 무언가 공유하고 있길 소망했던 일본의 건축가 이토 추타(伊藤忠太)가 ‘호류지(法隆寺) 건축론’에서 처음 제안했다. 이는 1919년 교토학파 철학자 와츠지 테츠로(和辻哲朗)의 여행기 ‘고사순례’에서 다시 등장하여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리고 어느새 한국인의 상식이 되었다. 서구의 위대한 기원을 통해 자신을 근거 짓고자 했던 오리엔탈리즘적 희망과 유사성이면 어떤 경계도 쉽게 뛰어넘는 과감한 추측이 섞여 만들어냈던 기적이었다.

기둥의 배가 불룩 흘러나오게 만든 것은 그냥 보면 배 부분이 안으로 홀쭉하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즉 기둥을 직선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배를 나오게 했다는 것이다. 착시를 교정하는 건지 만드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알렉산드리아의 헤론’ 같은 인물의 말도 인용하는 데다, 오목 패인 망막 구조까지 고려한 과학적 주장인 듯 보이니, 믿지 않기도 어려웠을 터이다.

그러나 그 과학적 설명을 아무리 마음속에 새기고 보아도, 배흘림기둥은 직선으로 보이지 않는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도, 봉정사 극락전이나 수덕사 대웅전 등 배흘림으로 유명한 사찰 기둥들의 흘러나온 배는 ‘과학’을 비웃듯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리스 신전의 독립된 기둥과 달리 옆에 벽이 채워져 있으면 착시교정효과는 없다고 한다. 허나 기둥에 달라붙은 벽이 광학적 현상을 무력화하는 이유는 알기 어렵다. 게다가 벽 없이 독립된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에서도 부풀어 밀려 나온 배는 보지 않기 어렵다.

이는 지금도 표준적 설명인 듯하지만, 19세기 말부터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의견들이 제기된 바 있다. 거기에도 눈을 믿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을 꼼꼼하게 실측했던 프란시스 펜로즈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동물의 사지를 곡선으로 그리는 관행으로 그 곡선을 설명한다. 긴장된 근육의 부푼 모습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다. 2007년 발표된 한 논문의 저자들은, 볼록인 곡선, 오목인 곡선, 정확한 직선을 섞어 반복해 보여주고 어떻게 보이는지를 실험했으나, 착시교정이론을 증명하는데 실패했다고 쓰고 있다.

착시교정이라 하든 근육 형태의 재현이라 하든 모두, 기둥은 수직의 직선이어야 정상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정상 형태가 아닌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물어야 하는 것은 기둥이 왜 수직의 직선이어야 하는 것인지 아닐까? 사실 직선 아닌 수많은 기둥들이 있다. 그리스주의 환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분들을 위해선 파르테논 신전 옆 에렉테이온 신전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직선은커녕 파르테논 신전 기둥은 배흘림을 넘어 여인상들로 기둥을 세웠다. 그 기둥을 다듬어 배흘림을 주든, 아니면 기둥 상단과 하단의 폭에 차이를 줘 민흘림을 하든, 곧게 뻗은 평행성 수직으로 세우든, 지붕을 받치는 기둥 역할을 하는 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둥이란 오직 평행을 이루는 직선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기하학적 보편성이나 수직기둥의 자명성 같은 것은 없다. 반대로 그것이 자명하다는 편견이 그것들에게 척도의 자리를 넘겨줌으로써 그런 ‘보편성’의 환영이 생겨난 것이다. 조건이나 환경, 형태적 맥락이나 상징적 기능 등과 무관한 보편적 형태의 초월성, 평행한 직선이 그리는 기둥의 초월적 자명성, 그것은 자신들이 아는 단 하나의 기하학을 모든 형태의 이상적 모델이라고 믿었던 기하학주의적 맹신의 산물이다. 이는 초월성 미학의 또 하나의 기둥이다.

그러고 보면, 직선의 평행기둥도 만들고 배 나온 기둥도 만들고 조각상 기둥도 만들었던 그리스인들은,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그리스주의자들보다 훨씬 자유롭고 다양한 건축형태에 열려 있었던 셈이다. 원만한 곡선을 부여한 기둥을 ‘착시교정효과’란 설명으로 직선화하려는 해석은 완고한 기하학주의의 강박증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착시교정이론은 단지 기둥에 그치지 않는다. 파르테논 신전 기둥들의 간격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도, 지붕 끝이 약간 올라갔다는 사실도 이런 식으로 착시교정이론에 두들겨 맞춘다. 그 설명에 따라 지붕의 처마부분을 올리는 동양 건축물의 ‘귀솟음’이나 기둥들이 위쪽에서 살짝 안으로 기울게 만드는 ‘안쏠림’도 시각교정을 위한 것이라 해석하는 분들도 있다. 직선의 강박은 선망의 시선을 따라 전염되는 일종의 전염병 같다.

혹시 착시를 교정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런 교정효과가 모든 시점에서 동일하게 작용할 리 없다. 즉 교정 가능한 시점은 하나뿐이니, 사람들이 수직수평을 ‘제대로’ 보게 하려면, 로마의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에서 벽과 연속인 듯 보이게 그린 안드레아스 포조의 천장화를 위해서 했듯이, ‘시각교정’을 위해 적당한 자리를 따로 표시해 두고 거기 가서 보라고 해야 한다(이를 위해 그 자리에 박아넣은 커다란 황동의 징은 사람들 발에 닳아 푹 패였다). 그 자리가 아니면 보는 시점에 따라 ‘교정’을 위해 차이를 둔 기둥의 각도나 간격, 들어 올린 지붕의 형상은 달리 보일 것이며, 교정을 위해 상정된 오직 하나의 점에서나 ‘제대로’ 보일 것이다. 그 점에서 벗어나는 순간 당연히 교정효과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차라리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은 보는 지점마다 달라지는 시각상의 다양함을 즐기라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다른 표시를 하나 해 두었다. 벽의 기둥과 그림의 기둥이 확실하게 꺾어져 보이는 걸 확인하도록. 덕분에 이 자리에 박아 넣은 징 역시 발길에 닳아 푹 패였다.

모든 형상을 기하학적 형식에 맞추어야 한다는 이상주의와 모든 선을 최소 거리를 잇는 직선으로 펴려는 직선주의, 그리고 수직선과 수평선이 직교하는 직각주의가 합쳐져 구성되는 기하학주의는 이른바 르네상스 이래 건축이나 조각, 미술 등 모든 형상을 지배하는 초월적 형식이다. ‘착시교정이론’은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이 형식에 두들겨 맞추려는 강박증의 산물이다. 조금이라도 무얼 더하거나 빼면 불완전해지는 어떤 상태를 ‘완전성’이라고 규정하는 알베르티의 주장은 이런 강박적 기하학주의의 전형적 태도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단지 기하학적 형태의 선호만 아니라, 어떤 것도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강박증적 ‘최소주의’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설명할 때 필요한 최소의 것만 선택해야 한다는 ‘오컴의 면도날’은 이런 최소주의적 이상주의가 르네상스적 이상주의만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먼 후일의 공리주의를 예비하는 듯한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기하학주의에 최소주의적 엄격성을 부여한 또 하나의 기원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단순성에 대한 이러한 애호는 기독교의 금욕주의와 무관하지 않은 어떤 감각일 것이다. 불필요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간주되는 것을 배제하려는 ‘면도날’이라는 말은, 최단거리를 잇는 직선적 엄격주의와 그에 함축된 절단과 배제의 권력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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