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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0418]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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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도래할 사건을 기다리며: 사건의 미학(하)

: 불상은 완성된 상조차 마주할 사람에 열려 있어

강렬한 주제·감응 선명함을 미덕으로 보는 것은 근대 습속
불교에선 불상·불화 계기로 다른 삶 나아가는 것 더 중시
작품성은 자신과 만나는 이에게 도래할 사건 촉발할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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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코지 소장 ‘아미타 8대보살도’(왼쪽), 돈황 172굴의 ‘관경변상도’.

법당 안에 있든 것이든, 박물관에 있는 것이든, 부처와 보살의 상이나 그림은 시선을 따로 잡아끌지 않는다. 내용을 몰라도 스쳐가는 시선마저 그냥 두지 않고 잡아채 끌어당기는 서양의 인상적인 개성화된 그림들과 아주 다르다. 불상들도 대개 그렇다. 그렇기에 ‘작품’이라기보다는 그저 종교적 기능을 하는 성상이나 도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상에 속하는 사건이 아니라, 마주 선 이에게 속한다 할 사건이 더 중요함을 잊기에 가능한 말이다. 그 사건은 이미 현행화된 사건도 아니고, 불상의 얼굴이나 신체에 새겨진 사건도 아니다.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다.

아미타불과 8명의 보살이 모두 정면을 향해 서 있는 스미소니언 프리어 미술관 소장 ‘아미타 8대보살도’도, 동일한 9명이 모두 비스듬히 빗겨서 있는 일본 조코지(淨敎寺) 소장 ‘아미타 8대보살도’도 경전에서 서술된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사건을 재현하지 않으며, 그저 그 앞에 설 누군가를 함께 서서 기다리고 있다. 부석사 괘불처럼 수많은 부처와 보살, 제자와 사천왕 등이 도열한 불화도 아무런 서사 없이 모두 그렇게 기다리며 거기 서 있다. 현행화된 사건으로서의 ‘역사’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잠재적 사건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불상이나 불화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하나의 그림에 누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식별하기 힘들 만큼 많은 인물들을 빼곡히 채워 넣는 것은 이 기다림의 강도를, 그 간절함을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 인물들은 그림 안에서 둘이 마주 보는 경우도 있고 종종 장난스레 엉뚱한 방향을 취하기도 하지만 이는 모든 인물의 시선이 하나의 초점으로 모이며 중심화되는 것을 일부러 저지하며 흩어놓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렇게 시선들이 제 각각의 각도로 흩어지며 모이기에, 산만하다 할 수 없는 경우에도 하나로 응집되지 않는다. 종종 중앙의 부처를 향하던 시선마저도 슬쩍 옆으로 이탈하게 하고 흩어놓는다. 시선이 실어나르는 기호는 명확한 명령문이 되지 않고 모호하게 흩어지는 의미들 속으로 부유한다. 그러면서도 시선들이 대체로 그림 앞의 빈자리를 향해 느슨하게 모인다. 그래야 빈자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를 향해 비처럼 수많은 인물들의 시선들이 ‘내린다’. 의상대사 말처럼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비가 공중에 가득 하니, 중생 각자의 능력껏, 자신이 원하는 대로 얻어가리라고 믿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집중이나 수렴을 강조하며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는 기호에 반하여, 발산되고 흩어지면서 동시에 느슨하게 모이는, 도래할 의미들로 열린 빈 자리를 만드는 특이한 다양체를 본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도 하나로 집중된 명료한 의미를 작품의 ‘통일성’으로 간주하고, 그 주제의 강렬함이나 감응의 선명함을 작품의 미덕으로 간주하는 근대적 습속 안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배경과 형상을 대비하며, 하나의 중심적 형상에 다른 모든 것을 종속시키는 통일성과 다른 다양체는 시선 대신 여러 사건들을 분산시키며 만들어지기도 한다. 석가모니 일생을 그린 ‘팔상도(八相圖)’나 경전의 얘기를 그림으로 묘사한 ‘변상도(變相圖)’는 묘사되는 장면을 하나의 결정적 장면으로 드라마틱하게 집중하는 대신, 정신없을 정도로 과도하게 나열하고 병치한다. 돈황 172굴의 ‘관경변상도’는 부왕을 살해하고 어머니마저 죽이려던 아사세 왕자의 극적 사건을 그렸지만, 사건들은 여러 장면으로 나열되고, 왕비인 그의 어머니에게 석가모니가 설하는 16가지 관법이 그 사건 이상으로 중요하게 그려진다. 아미타불이 모호하지만 산만함을 제어하는 어렴풋한 중심으로 조용히 들어선다. 사건을 그릴 때조차 그림은 특정 사건을 환기시키는 것 이상으로 그로부터 열리는 ‘가능한’ 사건들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극적 사건보다 그걸 계기로 다른 삶을 향해 나아가는 많은 길들이 여기서는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그림 앞에 설 사람에게 가능한 사건들을 최대한 펼쳐 보여줌으로써 어떤 삶을 살 것이냐고 묻는다.

기호가 명령문이 되는 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하고 그것이 겨냥하는 바가 어떤 하나로 집중되거나 적어도 수렴할 때이다. 너무 많은 사건들을 향해 발산된 기호들은 명령문의 성격을 상실한다. 너무 많은 장면들에서 각각의 장면이 발송하는 명령문은 그 수효에 비례하여 목소리나 의미가 작아진다. 그 많은 사건들 가운데 특별히 시선을 모으는 초점이 없기에 그 장면들은 전체로서도, 각각으로도 엔간해선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너무나 많은 의미는 그나마 갖고 있던 의미를 상실하며 규정되지 않은 허공으로 흩어진다. 의문문조차 명령문을 대신하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서는 명령문조차 의문문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뚜렷하게 가시화된 사건을 통해 명령하는 기호가 한편에 있고, 모호한 사건들로 슬그머니 둘러싸고 물음을 던지며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기호가 다른 한편에 있다. 어쩌면 이러한 차이가 현행화된 사건을 완결된 형태로 가시화하려는 그림과 달리, 모호하지만 방향성을 갖는, 그러나 명확한 의미나 규정성은 갖지 않는 어떤 도래할 사건을 기다리는 그림을 그린 이유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왜냐하면 저런 불화들이 그려지던 시대에도, 하나의 명확한 장면에 하나의 주제를 담던 그림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구의 그림이나 조각은 사건을 화면 안에 담는다면, 불상이나 불화는 그 앞에 서는 사람과 더불어 사건을 만들고자 한다. 그렇기에 서구의 회화는 그것을 볼 사람들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그 사람 없이 완결된다. 화면 안에서, 현행화된 사건 안에서 완결된다. 한 인물의 초상을 그린 그림이나 자화상조차도, 홀로 서 있는 조각상조차도 그 자체로 완결된 어떤 사건성을 그 얼굴 안에 담으려 한다. 반면 불화나 불상은 완성된 상조차 그와 마주할 이들을 향해 열려 있다. 도래할 사건의 잠재적 장을 펼쳐놓고 거기 들어설 이들을 기다린다. 그래서 서구의 조각인 회화에선 침묵하는 한 인물만 등장하는 경우에도 명료한 의미를 담은 말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면, 불상은 여럿이 서 있어도 ‘말’을 아끼기에 홀로 서 있거나 너무 많은 말들이 흩어지고 발산되기에 명령문이기를 그친 말들이 대기처럼 마주선 이들을 둘러싼다. 그렇게 흩어지는 명령문들 속에서 자신에게 열린 많은 길들을 보여주며 삶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 속에서 다른 삶을 찾기를 기다린다. 그로써 도래할 사건을 함께 기다려준다.

그렇다면 그 불상들은 종교적 기능이면 충분한가? 여기에는 작품성이나 예술성이 큰 의미가 없는가? 그럴 리 없다. 작품성이나 예술성이란 어떤 감각을 척도로 삼아 작품을 평가하는 틀이 아니라 작품에 속하는 능력, 누군가의 감각과 신체를 변용시키는 능력이다. 따라서 불상의 작품성이란 불상 개체성의 탁월한 표현 같은 게 아니라 자신과 만나는 이에게 도래할 사건을 촉발하는 강도적 능력이다. 도래할 사건, 도래할 의미가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인 것이다. 작품에 응결된, 작품마다 다른 능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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