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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0322]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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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친근한 불상과 친원한 불상 : 친원감의 미학(하)

: 가까운 게 멀어지고 먼 게 가까워지는 역설적 감응

친원감은 평온한 시선·다정한 미소가 주는 친근감과 대비
‘상 없는 여래를 봄’은 눈 맞추고 교감할 때는 발생 안 해
어긋난 시선은 주체화하는 시선이길 그치고 상대에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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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의 반개한 눈, 내리깔린 시선은 얼굴에서 방사되는 기호와 의미를 지우고 거기 실려오던 명령문을 침묵 속에 묻는다.
서산 마애불(왼쪽)과 수월관음도(오른쪽).

반개한 눈으로 시선을 내리깐 불상은 명령어를 발송하기를 그치며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침묵하는 불상은 침묵의 거리만큼 내게서 멀어진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아득히 먼 거리 저편에 있다. 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결코 나와 같다고 할 수 없는, 아득히 먼 세계에 있는 분이다.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적정의 세계, 세간의 고통을 넘어선 열반의 세계. 그는 바로 옆에 있지만 더 없이 먼 거리 저편에 있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그렇게 아득히 먼 적정의 세계에 있는 분이 바로 옆의 불상을 통해 내게 오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옆의 가까움과 아득히 멀리 있음의 이러한 공존을 통해 내가 사는 세계와 아득히 멀리 있다고 믿었던 세계가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

가까이 있는 것이 아득히 멀어지고 아주 멀리 있어 보이지 않던 것이 내게 다가오는 이 역설적 감응을, 평온한 시선과 다정한 미소가 주는 ‘친근감’과 대비해 ‘친원감(親遠感)’이라 명명하면 어떨까? 눈에 보이는 불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상 없는 여래를 본다 함은, 그것과 내가 눈을 맞추고 공명하고 교감할 때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주 보고 교감할 때, 우리는 이웃과도 같은 친근한 형상을 본다. 따뜻함과 평온함을 주는 존경스런 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내가 원하는 바를 빌며 기대고 싶은 힘을 본다. 반면 눈앞에 있지만 시선을 거두며 적정의 절대적 침묵 속으로 침잠하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친근한 이웃 대신 아무리 가까워도 아득히 멀리 있는 세계가 면전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형상을 가진 불상에서 상 없는 여래를 보고, ‘성스럽다’고들 하는 감응 속에 말려들어간다. 불상 만든 이의 강도적 표현능력과 상응하는 상 없는 깊이가 마주선 내 감각에 친원의 감응을 새긴다.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불과 석굴암 본존불은 모두 탁월한 작품이지만, 양자는 결코 동일하다 할 수 없는 감응을 담고 있다. 서산 마애불에서 느껴지는 친근감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입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정면을 향한 시선, 마주 선 나를 바라보는 눈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눈이 반개하며 시선이 내리깔리게 될 때, 평온함을 주던 다정한 그 미소조차 더는 쉽게 ‘친근하다’ 할 수 없는 낯선 미소가 될 것이다. 반면 석굴암의 본존불이나 관음상은 실로 감동적인 작품이지만, 그 불상들에서 ‘친근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흔히 ‘초월성’이나 ‘숭고미’를 탁월하게 표현한다고들 하는 불상들이 한결같이 반개한 눈을 하고 있음은 이런 이유에서일 터이다.

보는 우리를 마주 보는 얼굴이 반개한 눈의 내리깔리는 시선을 따라 명령문들을 침묵 속에 묻는다면, 그림 안의 상대를 마주하면서 아래로 내리깔리는 시선이라면 어떨까? 불화에서 두 인물이 마주 보는 장면은 그리 흔치 않지만,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에서는 이런 경우를 볼 수 있다. 카가미신사에 소장된 고려불화 걸작 ‘수월관음도’나 쇼쥬라이고지(聖衆來迎寺) 소장 ‘수월관음도’에서는 관음보살 발 아래 아주 작게 그려진 선재동자가 있고, 그를 응대하는 관음보살이 마주보고 있다.

‘수월관음도’에서 관음보살은 선재동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구도지만, 그 시선은 선재동자에게 맞추어지지 않는다. 두 인물의 시선은 아래위로 크게 어긋난다. 얼굴 또한 서로 정확히 마주 보는 얼굴이 아니다. 앞 얼굴과 옆얼굴 사이의 각도로 얼굴을 반쯤 돌린 것은 그 화면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그 얼굴을 보여주려 함이다. 그렇다고 우리를 마주보는 시선도 아니다. 반개하여 아래로 깔리는 시선이다. 그래서일 텐데, 이 그림에서 관음보살은 선재동자에게 답하는 친근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 보는 우리로부터 친원한 거리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석굴암 본존불처럼 적정에 들어간 시선과 달리 약간 열리는 시야를 갖는 눈이다. 신체도 그렇다. 적정에 들어간 부처의 결가부좌가 아니라 반쯤 풀어진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결가부좌를 한 채 시선을 내리고 선정에 든 불상이 적정의 침묵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면, 이 관음보살은 반가부좌를 한 채 적정의 세계에서 나와 조용히 시선을 들며 선재동자가 있고 우리가 있는 세상으로 시선을 살며시 돌려주고 있다. 자신을 찾아온 이들을 향하고 있지만, 선재동자에게도, 우리에게도 시선을 맞추지 않음으로써, 의미화된 기호를 발송하거나 친근한 교감을 나누는 대신 친원한 대기 속에 ‘다른 세계’에 대한 감응을 풀어놓는 것이다.


관음보살은 자신을 찾아온 이에게 응답하고자 반개한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리며 조용히 시선을 내지만, 그 시선이 선재동자와 맞게 된다면, 관음보살은 선재동자와 공명하며 그를 ‘주체화’하는 전형적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반개한 눈이 살짝 들리면서 배어나오는 느린 시선, 선재동자를 향했지만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아 어긋난 시선, 이는 주체화하는 시선이길 그치면서 상대에게 응답하는 시선이다. 물론 ‘살그머니’라고는 해도 눈이 열리면서 시선은 의미를 실어나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긋난 시선은 그 의미화하는 기호들도, 서로 부르고 답하며 주체화하는 말도 시선 사이의 공간 속에 흩어놓는다. 그렇게 새어나와 떠도는 기호들은 그 어긋난 간극을 통해 내게 열린 공간으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흘러나오는 기호들은 이가 딱 들어맞는 기호들과 달리 느슨하게 풀리며 다른 기호들과 다른 이음매로 연결될 것이다. 이음매만큼 많은 의미들, 다르지만 아주 흩어지지는 않는 의미들로 묶이며 그림 앞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반개한 불상에서도 실은 이처럼 기호들이 엇갈리며 교착되는 이러한 양상이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불상의 반개한 눈, 내리깔린 시선은 얼굴에서 방사되는 기호와 의미를 지우고 거기 실려오던 명령문을 침묵 속에 묻는다. 그러나 얼굴뿐 아니라 신체 또한 표정을 갖기에, 신체에서 방사되는 기호나 의미는 그대로 남아 있다. 가부좌하고 앉은 신체, 조용히 선 신체, 이런저런 의미를 담고 코드화된 수인들, 그리고 그 수인과 대응되는 부처와 보살들의 명호들, 그리고 그에 얽힌 불경의 이야기들이 있고, 이승이든 저승이든 힘든 삶과 좋은 삶을 대비하며 간접화법으로 명령문을 발송하는 그림들이 그 뒤에 있다. 이는 모두 명령문이 실린 기호나 주체화를 요구하는 파동을 발송한다. 하지만 이 모두를 모아들이며 마주 선 이에게 실어나르는 것이 바로 시선이기에, 그 시선이 침묵 속으로 하강할 때, 손과 신체, 불상과 그림들로 표현된 기호들은 시선에서 이탈하여 그 침묵의 대기 속을 부유하게 된다.

그것은 분명 마주 선 내 주위로 밀려나오며 내 인근에서 떠돌 것이다. 불상 저편의 ‘여래’와 내가 만나는 방식에 따라, 혹은 여래 없는 불상과 만나는 방식에 따라 그렇게 떠도는 기호와 의미들은 내 마음에 달라붙거나 미끄러질 것이다. 그렇게 달라붙는 것들의 힘만큼 나는 현행의 삶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달라붙는 양상에 따라 다른 의미, 다른 기호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친원의 감응이 산출한 미규정의 어둠 속을 떠도는 규정된 기호들은 그 미규정의 힘을 따라 부유하며 수많은 다른 규정가능성들로 흘러갈 것이다. 그 친원감의 강도에 따라 ‘나’ 안에 새로운 ‘영혼’들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스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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