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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0221]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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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둠의 대기가 불상을 둘러쌀 때: 현묘의 미학

: 번뇌 가라앉혀 현세 속 다른 세계로 잡아끌다

자신 안에 내재하는 잠재성 환기시키며 적정세계로 인도
상 없는 것이 상 있는 것을 둘러싸는 작용양상이 곧 현묘
‘그윽함’ ‘유현’과 다르게 명명될 감응들에 넓게 열려 있어

2022-0722_불교를 미학하다4.jpg
저자는 불상들의 아름다움은 대상의 형태보다는 차라리 형태로 귀속되지 않는 어떤 것에서 온다고 말한다.
사진 왼쪽은 ‘석굴암 본존상’, 오른쪽은 일본 호류지 소장 ‘목조구면관음보살상’.

 

부처의 형상을 하나의 모델에 귀속시킬 순 없지만, 불상을 대하는 이들뿐 아니라 만드는 이들이 ‘이상’으로 삼았을 것은 아마도 석굴암 본존불이나 그 옆에 있는 보살상 같은 것이었을 터이다. 혹은 당(唐)에서 전래되어 이후 일본의 목조불상에 큰 영향을 미친 호류지 소장 ‘목조구면관음보살상’도 그렇다. 이들 불상은 ‘아름답지만’ 이를 칸트 말대로 그저 무사심의 관심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쾌감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한 쾌감은 비례로 설명하든 조화로 설명하든 형상이 갖는 형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반면 이런 불상들의 아름다움은 대상의 형태보다는 차라리 형태로 귀속되지 않는 어떤 것에서 온다. ‘상 없는 것’에서 온다. 이를 일러 흔히 ‘초월적’이라고 하면서, ‘아름다움’보다는 ‘숭고’의 개념을 차라리 선택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종교적 감각을 공유한 이들에게는 ‘위대함’으로 느껴졌을 어떤 것이지만, 이는 거대함과 인접한 감정은 아니다. 압도하는 힘이 야기하는 놀라움의 감정이 아니라 적정 속으로 침잠하는 힘이 주는 고요함의 감응이다. 무한한 것에 감히 끼어들 수 없음에서 오는 무력감과 두려움을 짝으로 하는 경외의 감정이 아니라, 번뇌 없는 세계를 예시(豫示)하는 평온함의 감응이다. 무한의 거리를 넘어 초월자를 향해 상승하려는 힘의 고양감이 아니라, 들뜬 삶의 번뇌를 가라앉힘으로써 현세 속의 다른 세계로 잡아끄는 깊이감이 거기에 있다. 가 닿을 수 없는 무한한 거리 저편의 초월자와 마주선 단독자의 불안이 한편에 있다면, 우리 자신 안에 내재하는 잠재성을 환기시키며 그 적정의 세계로 인도하는 온화함이 다른 한 편에 있다.

우리가 불상을 보면서 불상 이상의 것을 볼 때 우리는 ‘여래’를 본다. 가시적이지 않은 어떤 것, 흔히 ‘초월적인 것’이라고들 하는 어떤 것을 본다. 그러나 이 ‘상 없는 여래’는 거대한 크기의 힘이 그 뒤에 있음을 암시하거나 위대한 초월자가 그 위에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어떤 ‘거대한’ 크기 대신 차라리 대상의 형상에서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작은’ 움직임으로 빠져나가는 어떤 힘들의 흐름으로 온다. 그리하여 상 있는 것에서 흘러나와 그 상을 감싸는 상 없는 어떤 힘들의 흐름이, 지각불가능하도록 작아서 작용하지만 고요한 무수한 힘들의 움직임이 그런 감응을 만든다. 거대함도 초월자도 없이, 그저 상 있는 것에서 흘러나와 그 상을 감싸고 있는, 대기와도 같은 상 없는 것의 존재가 있을 때, 우리는 불상이나 그림 같은 재현된 대상에서 재현되지 않은 어떤 것을 본다. ‘성스럽다’고들 하는 어떤 분위기를 감지한다.

상 있는 것의 상을 지우는, 상 없는 것이 상 있는 것을 둘러싸는 이러한 작용양상을 ‘현묘(玄妙)’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현(玄)’이란 대상의 명료함을 지우는 어둠이고, 형상을 지움으로써 생겨나는 검은 깊이다. 그렇게 깊이로 가득 찬 분위기로 대상을 둘러싸는 대기다. 대기 속에 있으나, 대기 저편으로 아련히 멀어지게 하는 검은 하늘이다. 그렇게 멀어지지만 내가 있는 ‘지금 여기’와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차라리 그 ‘지금 여기’를 끌고 가는 멀어짐이다. ‘묘(妙)’란 대상의 뚜렷한 경계가 사라져 상이 있는 건지 아닌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저기 있는 대상인지 그걸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모호함이다. 또한 그것은 상 있는 것에서 감지되는 이 ‘상 없음’이 나의 감각에 속하는 느낌인지, 아니면 나와 마주선 대상에 속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뒤섞임이다. 현묘란 이처럼 깊이의 어둠과 뒤섞는 모호함이 맞물림으로써 대상의 경계가 지워지며 상 없는 것이 대상 밖으로 배어나오는 사태고, 그 상 없는 것으로 인해 대상과 나의 경계가 사라지며 나와 대상이 섞여 들어가는 사태다. 또한 그것은 보고 듣고 만지던 감각 사이의 경계가 사라져 눈으로 고요함을 듣고, 귀로 검은 어둠을 보는 사건, 혹은 눈을 통과한 대상이 몸의 촉감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사건이다. 스며듦과 배어나옴을 통해 대상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섞이며 없는 듯 있는 묘유(妙有)의 작용이고, 대상과 나의 경계가 있는 그대로 사라지는 묘공(妙空)의 작용이다.

이러한 현묘의 작용을 통해 하강하는 힘들이 만들어낸 적정(寂靜)의 깊이가 대기 속으로 번져나온다. 그처럼 대기 중에 퍼져가기에 무거움으로 떨어지지 않는, 어둡고 모호한 매혹의 힘을 ‘깊이감’이라 한다면, 대상의 경계를 지우며 대기 속으로 모호하게 스며들어 만들어지는 이 적정의 분위기를 ‘그윽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윽함이란 그렇게 대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깊이감이다. 상승의 고양감을 대신하는 침참의 깊이감이 상 없는 것을 향해, ‘여래’를 향해 우리의 감각을 이끄는 매혹의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숭고의 미감을 대신하는 그윽함의 감각 유현의 미감이 거기 있는 것이다.

숭고의 미학에 대비하여 이를 ‘그윽함의 미학’, 혹은 ‘유현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숭고는 나를 왜소하게 만드는 거대한 크기를, 혹은 고결한 패배의 비극을 고양감이라는 감정적 효과로 귀착시킨다. 결과를 뜻하기도 하는 이 효과는 작품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된다. 이러한 목적과 그것이 구현되어 얻는 효과의 자리에 숭고를 대신하여 ‘그윽함’이나 ‘유현’이란 개념을 바꿔놓으면 충분할까? 숭고와 짝이 되는 위대함이나 초월성은 사라지고, 그윽함이나 깊이감 같은 현세적 범주만 남을 때, 탁월한 불상이나 불화 속의 부처는 어쩌면 초라해지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게 되지 않을까? 그윽하고 깊은 유현도 좋지만, 그래도 위대한 성자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자 하는 존경과 숭배의 마음을 지워버리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될 때, 위대함을 명시해줄 형상의 거대함에 쉽게 기대게 된다. 상 없는 것의 위대함을 상의 거대함으로 치환하게 된다. 거기에는 알아보기 힘든 상 없는 ‘여래’ 대신 누구도 모를 수 없는 확고한 거대함이 있을 뿐이다. 불교 사원이나 불상에서 이런 시도를 보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좀더 근본적인 것은 현묘의 작용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를 ‘그윽함’이나 ‘유현’이란 말로 개념화할 수 있느냐는 질문일 것이다. 어둠의 대기, 침참의 깊이, 경계를 지우는 신묘한 작용의 결과를 하나의 개념으로 명명하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현묘의 작용은 사실 ‘그윽함’이나 ‘유현’과는 다르게 명명될 많은 감응에 넓게 열려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숭고의 미학을 단지 그 결과의 차이를 대비하며 ‘그윽함의 미학’이나 ‘유현의 미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차라리 초월적 가치가 있기에 쉽게 명시될 수 있는 효과나 목적을 명시하는 미학 대신, 어둠의 깊이 속에서 경계를 지움으로써 수많은 이질적 감응들을 낳는 작용의 개념이 하나의 귀착점이 없기에 다양한 결과들로 열린 미학을 명명하기에 더 적절한 이름이 될 것이다. ‘현묘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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