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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0101]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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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월적 신성서 기원한 ‘성(聖)’ 불교예술개념 적절한가

: 초월자로서의 신과 내재적 사유의 스승


초월자 신성함 표현하는 기독교적 사유에 붓다 끼워 맞춰
불교미학에서 초월성 대비되는 내재성 사유로 재검토 필요
예술·미학은 철학보다 서구적 사유 구도에서 탈피 더 난해

한때 ‘비례’야말로 형태들의 미적 가치를 정의하는 보편적 정의라는 관념에 기대어 석굴암 같은 동양의 작품의 미적 가치를 증명하려던 시도들이 있었다.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비트루비우스 인체도.
한때 ‘비례’야말로 형태들의 미적 가치를 정의하는 보편적 정의라는 관념에 기대어 석굴암 같은 동양의 작품의 미적 가치를 증명하려던 시도들이 있었다.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비트루비우스 인체도.
 
2022-0701_불교를 미학하다1.jpg
석굴암 주실 입면도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인지, 인간의 감각들이 갖는 유사성에 대한 순진한 직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예술작품들의 미적 가치 내지 의미에 대한 분석은 대개 유사한 개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서를 관통하는 공통성을 찾는 경우도 많다. 한때 ‘비례’야말로 형태들의 미적 가치를 정의하는 보편적 정의라는 관념에 기대어 석굴암 같은 동양의 작품의 미적 가치를 증명하려던 시도들은 미나 감각의 보편성에 대한 이런 믿음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례의 미학에 기대어 서양인 자신이 고딕성당에 ‘야만적이고 거칢’을 뜻하는 이름을 붙였음을 안다면, 그 개념은 서양의 작품들조차 관통하는 보편성과는 거리가 멂을 알기 어렵지 않다.

이는 비례나 양식 같은 이른바 ‘형식’에 속하는 문제만도 아니다. 예컨대 불교 미술에 대한 책을 보면서 매우 빈번하게 접하게 되는 ‘사실성’과 ‘초월성’, 혹은 ‘감각성’과 ‘초월성’이라는 대(對)개념이 그렇다. 가령 당(唐)시대 불상들처럼 신체나 옷을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적으로 표현한 것에 높은 미적 가치를 부여하는 문장들을 보기도 하고, 사실적 재현을 넘어선 초월적 영성의 표현에 감탄하는 글들을 보기도 한다. 물론 사실성 내지 감각성과 초월성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탁월한 작품에서 양자는 결합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렇게 사용되는 초월성의 개념이 서양에서 기독교의 신성 개념에서 기원한 것이란 점이 망각된 채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초월성과 연결된 신성은 기독교의 신성처럼 사람들이 사는 세계로부터 분리된 다른 세계, 피안의 세계를 암시하는 어떤 것이 된다.

이러한 ‘초월성’ 개념은 어느새 ‘숭고’라는 익숙한 미학적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제 붓다와 보살은 더 이상 비인격적인 상징이 아니라 자애로우면서도 숭고한 존재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당의 미술에는 인간적인 아름다움과 초인간적인 위엄이 결합되어 있고, 그 초월성이 암시되어 있다.”(제켈, ‘불교미술’ 103) 역으로 이는 초월성이란 말로 소급되며 초월자의 신성함을 표현하는 기독교적 신 개념에 붓다를 끼워 맞추게 한다. 이를 두고 ‘성과 속’이라는 유명한 종교학 개념을 빌어 다시 지역을 떠난 종교적 보편성으로 정당화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신이 있다. 문제는 그 신이 어떤 신인가, 성스러움은 어떤 성스러움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왜 어디서나 신을 만드는 것일까?

이른바 ‘원시적인’ 형태의 신화나 ‘기원적인’ 시기의 종교에 살펴보면, 신이란 뜻대로 안되는 세계를 사는 인간이, 그래서 걸핏하면 고통이나 불행, 재난을 면치 못하는 인간이, 할 수만 있다면 그 힘을 빌고 싶다고 믿는 어떤 대상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의 인간화된 신들조차 바다, 하늘, 땅, 쇠 같은 자연적 대상이 신격화된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각자가 처한 조건에 따라 위계화되거나 보편화된다. 특히 국가권력이 탄생하면, 왕 같은 국가인들은 남들을 지배하는 자신들의 힘을 신의 힘을 빌어 초월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인간이란 직립한 동물이기에 위계는 위/아래의 수직성을 갖게 되고,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신이 최고의 신이 된다.

다른 모든 신들을 제압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모든 신을 제거하고 그들의 힘 모두를 흡수하여 전능한 하나의 신이 될 때 유일신이 탄생한다. 유일신은 전능함을 불변의 본성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세상을 떠나 그 바깥으로 간다. 세상 속에 있으면, 세상의 일부이길 면할 수 없고, 세상의 다른 힘들과 상대해야 하며, 그렇게 되면 절대자임을 명시해도 실질적으로는 다른 것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상대적인 존재자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신의 초월성은 이러한 세상을 떠나,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특별한 자리를 표시한다. 역으로 어떤 것이 본성이 조건이나 관계와 무관하게, 즉 조건을 초월하여 존재할 때, 그 본성은 ‘초월적인 것’이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무엇이든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불변 원리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초월성의 구도 위에 있다. “초월성은 유럽에 고유한 질병이다(들뢰즈/가타리).”반면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라고 종종 요약되는 연기법처럼 조건과 무관한 본성, 초월적 본성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 이것이 내재성의 사유고 내재성의 구도다.

어디나 신이 있지만, 어디나 같은 신이 있는 건 아니다. 모든 변화를 ‘넘어서 있는’ 피안의 초월자와 달리 불교에서 신이란 인드라, 브라만, 아수라 할 것 없이 모두 여섯 세계 중 하나에 사는 ‘중생’ 아닌가? 역으로 깨달은 자로서의 붓다란 어느 세계에서든 삶의 고통을 ‘넘어서는’ 방법을 가르치는 스승 아닌가? 성스러움이란 신이 아니라 깨달은 자로서의 붓다, 깨달을 능력을 가진 자로서의 보살, 소급하면 결국 보살로서의 중생 자신에 속하는 것 아닌가? 기독교에서의 신성이 대속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채 인간의 육신 속에 숨어 있는 ‘죄’와 반대편에 있다면, 불교에서의 신성은 ‘본래부처’라고 명명되는 중생 각자의 잠재성과 같은 편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 초월적 신성에서 기원한 ‘성(聖)’이나 초월성의 개념을 불교철학이나 예술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오히려 불교 경전의 개념만큼이나 불교예술의 미학에 대해서도 ‘초월성’과 대비되는 ‘내재성’의 사유를 통해 재검토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서구의 미학을 단지 기독교적 사유로 환원할 순 없다. 그러나 초월성의 형이상학은 철학만이 아니라 서구의 모든 지식을 방향 짓고 있었음을 안다면, 역으로 플라톤의 그리스 또한 대결해야 할 상대라고 해야 한다.

예술이나 미학은 교리 안에 명시된 미학적 개념 없이 감각만으로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교리나 개념들이 명시적으로 대조되고 비교될 수 있는 철학보다 서구적 사유의 구도에서 벗어나기가 훨씬 어려운 것 같다.

여기서 내가 하려는 것은 서구 미학과 대결하며 불교 예술의 특이성을 구성하는 미학적 개념을 찾는 것이지만, 불교예술작품을 뒤져 모든 불교예술에 공통된 미학적 보편성을 말하는 것은 견강부회가 될 것이고, 불교에만 속하는 고유한 미학을 찾으려는 것은 그것을 벗어나는 수많은 작품들 앞에서 공허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초월성과 대비되는 내재성의 구도 속에서, 그런 사유와 감각에 속하는 것을 이런저런 작품 속에서 발견하는 작업이다. 거대함으로 압도하려는 국가적 감각이 주도할 때조차 그것만으로 일축할 수 없는 내재성의 감각을 따라가려 한다. 오히려 초월성의 미학과 대결하기 위해 그런 여백에서 발견되는 내재성의 감각을 증폭시켜 미학적 개념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초월성의 미학에 속하는 것과 내재성의 미학에 속한다고 보이는 것의 차이를 최대한 확장하여 대비하는 서술 또한 이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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