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거시적 무의식이 ‘억압’과 불가결하게 결부되는 것이라면 미시적 무의식은 ‘생산’을 요체로 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는 점을 보았다. 앞으로 중요하게 다뤄질 현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무의식을 자주 ‘공장’에 비유한다. 그에게 무의식은 애초에 억압된 것도 아니고 결핍된 욕망으로 채워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무의식은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복수의 의지와 충동들을 끝없이 생산해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장이다.

이처럼 무의식을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하는 것은 현대 이전의 사상가들을 철학적 자원으로 삼아 발아한다. 가령 들뢰즈는, 통상 무의식의 발견자로 간주되는 프로이트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무의식을 사유한 최초의 사상가로 근대의 합리론자 라이프니츠를 꼽는다. 인식론이 크게 부흥했던 근대시기였던 만큼, 라이프니츠 역시 고대나 중세 철학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감각경험과 결부된 지각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데, 그의 관점은 그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 모든 지각의 배후에는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미세한 지각들이 존재한다는 ‘미세지각’ 이론으로써, 그는 의식 이하의 수준에서 지각활동을 주조하는 원천이 무엇인지 드러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그의 작업을 통상의 인식론이 아니라 무의식 연구라고 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라이프니츠는 미세지각이 어떻게 매번의 사유와 행위를 촉발시키는 추동력으로 작동하는지 밝힘으로써 프로이트가 주목했던 무의식 탐구를 선취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제가 될 무의식의 생산적 속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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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도 흥미로운 개념은 라이프니츠가 제안하는 ‘불안’이다. 로크는 우리를 추동하는 것은 불안이라는 입장에 서있다. 이는 쾌락이나 행복에의 추구와 같은 진부한 개념과는 구분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그러나 로크의 견해가 불안이 여전히 욕구의 결핍과 관련된 것으로 다뤄진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전개를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라이프니츠가 제안하는 불안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다뤄진다. 라이프니츠는 무수히 많은 미세지각들이 각각 지향하는 바가 달라서 서로 충돌하는 현상 자체를 불안 개념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불안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한 배치”(NE 166) 일 뿐이다. 불안이 ‘고통의 한 배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왜 불안(uneasiness)은 우리를 추동하는 힘이 될까?(라이프니츠)1)

아랍에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속담이 있다. 실로 완전한 평온의 상태의 반대편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무언가를 감지할 때,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을 때 불안이라는 막연한 감정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호소하는 신체와 대면한다. 이런 관점에서 불안이란 말 그대로 어떤 격정적인 동요 속에서 영혼을 잠식하기에, 서둘러 극복해야 할 어떤 것으로 사유된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불안이란 “격정적일 때뿐만 아니라 완전히 차분할 때에도 우리를 작용하게 한다.‘(NE 188)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불안이란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작용하게‘ 하는 일종의 힘과 같은 것이다. 그에게 불안이란 ”우리가 스스로 인식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또한 그것은 박차로서 우리를 작용하게하기에 충분하며 그 의지를 자극“(NE 190)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불안은 인간을 추동시키는 근본 심급으로서 욕구와 불가결하게 결부된다. 그는 단적으로 “욕구가 있는 곳에는 불안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라이프니츠의 불안에 대한 이러한 독특한 해석은 그가 ‘사유하는 정신’이라는 데카르트부터 게양된 깃발을 놓지 않으면서도, 인간 정신 전체가 곧 합리적 이성만으로 국한지어지는 데에는 반대했다는 점으로부터 비롯한다.

 

정신 실체로서의 모나드와 정신과 구별되는 영혼 개념

관련하여 우리의 논의는 그가 제안하는 독특한 실체개념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1’ 또 ’단위, 개‘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monas(μόνος)’로부터 ‘모나드’라는 실체 개념을 창안한다. 철학에서 실체란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본질이 되는 것을 지시하는데,2) 그것이 사유되는 방식은 여럿이었다. 가령 ‘범신론자’로 이해되는 스피노자는 단 하나의 실체와 그를 다양한 양상으로 구체화ㆍ현행화하는 양태 개념을 통해 일원론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반면 스피노자적 의미의 유일한 무한 실체와 구별되는 유한 실체 개념을 인간으로부터 발견하는 데카르트는 연장실체와 사유실체라는 상호 구별되는 두 가지의 실체 개념을 통해 이원론적 세계관을 제시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하나 또는 둘이라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모든 존재의 본질로서의 실체 개념을 세계를 구성하는 일종의 원소 차원으로 세분화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모나드라는 실체란 “자연의 진정한 원자”이자 “사물들의 요소”이다. 즉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원소들을 모두 실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로써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일원론,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등과 구별되는 그만의 고유한 세계관으로서, 수없이 많은 복수 실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실체 개념이 근대물리학이 사용하는 물질의 최소 구성단위로서의 말 그대로의 ‘원자’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나드’란 오직 정신적인 것에 국한되기에 어떤 물질적인 것도 배제한다. 그에 따르면 물질 내지 신체는 정신의 현상에 불과하다. 실재하는 것은 정신에 해당하는 것뿐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 때 라이프니츠가 사용하는 ‘정신’이라는 개념은 데카르트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가령 「6성찰」에서 밝히듯, 데카르트는 정신이 필연적으로 사유하지만 필연적으로 연장적이지는 않으며, 신체는 필연적으로 연장적이지만 필연적으로 사유하지는 않는다는 명제를 도출함으로써, ‘사유적 실체’인 영혼과 ‘연장적 실체’인 물질 모두를 실체로 인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데카르트에게 사유 실체란 연장 실체와 대립항으로 설정된다. 그와 달리, 라이프니츠의 정신 실체는 연장 실체와 대립하는 것이기보다 그 자체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라이프니츠에게 연장은 정신적 실체의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으로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정신 실체’와 ‘의식적 사고’가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이다.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한 사유 실체를 곧 정신이자 영혼으로 위치짓는다. 반면 라이프니츠에게 영혼과 정신은 구분된다. 모든 단순한 실체 또는 창조된 모나드들은 ‘영혼(soul)’이다. 한편 그러한 영혼 중 ‘이성을 가진 생명체(rational animals)’는 ‘정신(mind)’이다. 이에 따라 “오직 정신만이 모나드이고, 다른 생명의 원리들은 물론이고 동물의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다.”(AG 208)는 생각은 배격된다.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이성적인 ‘정신(mind)’은 결여되어 있을지라도, ‘영혼(soul)’을 갖기 때문이다. 이로써 라이프니츠는 ‘이성적 사유’를 기준으로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불연속성’을 세웠던 데카르트적 사유와 대결해서, 존재하는 것들 간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이는 1)영혼은 결코 인간만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며, 2)영혼의 본성상 귀결될 수 있는 속성 역시 이성적 사유로 국한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증명하는 의식적 사유보다, 더 원초적인 영혼의 활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이프니츠가 제시하는 영혼의 두 가지 내적 특성인, 지각(perception)과 욕구(appetite)이다.

‘지각’이 “외부 사물들을 표현하는 모나드의 내적 상태”(AG 208)라면, ‘욕구’는 “한 지각으로부터 다른 지각으로의 이행을 야기하는 내적 원리”(AG 215)에 해당한다. 외부 사물을 자신 안에서 영사하는 지각활동과 그 지각활동을 추동하는 욕구가 곧 정신 실체인 모나드를 구성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단적으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은 단순실체들 뿐이며, 그것은 오직 지각과 욕구로만 이뤄져있다고 말해야 한다”(AG 181)고 한다. 때문에 ‘지각’과 ‘욕구’ 개념은 모두 라이프니츠의 고유한 사유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퍼즐이 된다. 우리의 논의에서도 두 개념은 중요하게 다뤄질 것인데, 지각이 이성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광의의 인간 심리를 조망하는 열쇠가 된다면, 그 지각의 이동을 설명하는 원리로서 라이프니츠가 제안하는 욕구 개념은 ‘불안’이라는 개념과 결부되어 인간을 추동시키는 근본 원리로 해석될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지각의 판명함에 따른 영혼의 완전성의 구분

우선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구분을 따라, 지각이 이성적 정신과 구별된다는 점으로부터, 지각은 그 자체로는 명석판명함을 확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각이 곧바로 애매모호한 상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분명히 “영혼의 완전성은 그 지각의 판명성에 비례한다”(AG 211;논고 242)고 말한다. 때문에 이성적 정신이 지각의 판명한 상태를 가리킨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지각은 그 반대, 즉 불명료한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차라리 지각은 이성적 정신보다 더욱 광의의 범위를 지시한다.

"비록 우리가 일상적 어법에서는 너무 멀리 나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다만 전적으로 명백하게 감각되어지고 우리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귀속되는 것만을 영혼에게 부여하지만, 형이상학적 진리의 정확성이 필요할 때에는, 보통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멀리 미치는 영혼의 범위와 독립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AG 59;논고 106, 강조는 인용자)"

이러한 ‘무한히 멀리 미치는 영혼의 범위’로 인해, 모나드들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등급들이 존재한다. 라이프니츠는 ‘지각이 판명하고 기억에 의해 동반되는 모나드들’에서부터 ‘기절이나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수면’ 상태가 지시하는 ‘어떤 구별되는 지각도 갖지 않는 상태’까지를 상정한다.

"어떤 모나드가, 그가 수용하는 인상들과 이 인상들을 재현하는 지각들 안에 두드러진 차이가 존재하도록 하는 합목적적인 기관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 모나드의 지각은 감각, 즉 경우에 따라 후에 그것을 들을 수 있도록 그에 대한 일종의 메아리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기억을 동반하는 지각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의 모나드가 영혼이라고 불리듯이 이러한 감각을 가진 생명체를 우리들은 동물이라고 부른다. 만일 이러한 영혼이 이성을 갖기까지 고양된다면, 그것은 더욱 뛰어난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정신으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동물들은, 꿈 없는 깊은 수면 상태나 실신 상태에 있을 때 그러하듯이 그들의 지각이 의식하기에 충분히 판명하지 않게 되면, 가끔 단순한 생명체의 상태에 있으며 그들의 영혼은 단순한 모나드의 상태에 있다. (...)다시 동물의 상태에서 계속 전개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지각 또는 외부 사물들을 표현하는 모나드의 내적 상태와 자의식(consciousness) 또는 이 내적 상태에 대한 반성적 인식인 통각(apperception)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자는 결코 모든 영혼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동일한 영혼에게서라도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AG 208)"

우리는 이같은 모나드간의 구별을 ‘소박한(bare) 모나드, 기억하는 모나드, 반성적인 또는 이성적인 모나드’ 등 세 종류의 모나드로 요약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구분의 경계가 고정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가령 동물은 ’꿈 없는 깊은 수면 상태나 실신 상태’에 들어갈 때, ‘단순한 모나드와 명백히 구별되지 않’는다. 이성적 모나드를 갖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AG, 215). 라이프니츠는 “사람들의 행동방식의 4분의 3에 있어서 그들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행동한다”(AG 208)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가장 낮은 수준에서부터 통각이라는 탁월한 모나드까지를 모두 가지며, 동일한 사람에게도 통각이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왜 그러한가 하는 물음에 있어 라이프니츠의 대답은 흥미롭다.

그의 대답은 가장 단순한 실체는 단순한 동시에 다양성을 포괄하는데, 그 다양성 모두를 언제나 명석판명하게 지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선 “우리 자신이 단순한 실체 안에 있는 다수성을 경험한다.”(AG 215). 모든 모나드는 각각의 고유한 방식으로 우주를 표상하는 거울과 같아서,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영향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라이프니츠는 멋진 비유를 제시한다. 아주 단순한 하나의 점이 있다. 그 점 위에 무수히 많은 직선들이 그어진다. 이점을 통과하는 직선은 무수히 많은 다양한 각도를 만들어 낸다. 이를 통해 라이프니츠는 실체의 단순성이, 실체와 결부된 상이한 상태들의 다수성을 결코 저해하지 않음을 드러내고자 한다(AG 207).

 

지각들의 무한함과 미세지각

다만 영혼이 그 무한한 수의 지각들에 개별적으로 전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영혼 안에 있는 각각의 판명한 지각들은 전 우주를 포괄하는 무한한 수의 모호한 지각들을 포함’3)한다. 즉 “우리의 모호한 감각들은 지각들이 아주 무한히 다양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AG 65)라는 것이다. 바로 이 모호한 지각을 설명하기 위해 라이프니츠가 도입하는 것이 미세지각(petite/minute perceptions) 개념이다.

우선 미세지각들은 우리 안에 의식과 반성을 동반하지 않은 지각들의 무한함을 드러낸다. 다만 미세지각들은 너무 ‘미세’하고, 너무 ‘무한히 많으며’, 또한 너무 ‘다양’하기에, 그 자체로는 우리에게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매 순간 우리 안에는 의식과 반성을 동반하지 않은 지각들의 무한함이 있다고 판단하게 하는 수많은 표식들이 존재한다. 즉, 영혼 자체 안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변화의 무한성이 있다고 판단하게 하는 수많은 표식들이 존재한다. 즉, 그것이 너무 미세하거나(minute) 너무 무수히 많거나(numerous) 또는 너무 다양(unvarying)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과 판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서로 결합될 때, 적어도 모호한 방식으로나마 전체 속에서 그것들은 어떤 효과를 야기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NE 53)"

 

라이프니츠가 “통속적인 입장에서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물체들을 고려하지 않듯이 의식하지 못하는 지각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하면서(AG 208) 미세지각은 의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될 대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관련하여 라이프니츠가 즐겨드는 예는 파도의 비유4)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 감관의 지각들이 그들이 명석한 경우에조차도 필연적으로 모호한 감각을 포함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주 내에 있는 모든 물체들은 서로 조화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는 다른 모든 물체들로부터 인상을 받게 되고, 비록 우리의 감관이 그들 모두에 관계한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그들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호한 감각들은 지각들이 아주 무한히 다양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이것은 대략, 바닷가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이 듣는 혼동된 소음이 서로 부딪히는 무수히 많은 파도들의 집적에 기인한다는 것과 유사하다. 만일 서로 결합하여 하나가 되지 않는 많은 지각들 중에 다른 지각들보다 현저한 지각이 존재하지 않고, 그들이 거의 동일한 강도의 인상을 야기하거나 동일한 정도로 영혼의 주의를 끌 수 있다면, 그들은 단지 모호한 형태로만 지각될 수 있을 것이다.(AG 64-65)"

 

곧 미세지각이란, 우리가 ‘파도소리’라고 의식하는 지각의 기저를 이루는 것이자, 그 자체가 극히 미세하여 우리에게 의식되지 않는 것들을 뜻한다. 미세지각은 그렇기에 소위 무의식적인 영혼의 활동을 입증하는 개념인 셈이다.

 

의식 정도에 따른 욕구의 구분

우리는 이제 왜 라이프니츠가 지각을 “통각(apperception) 또는 의식(consciousness)과 구별되는” 것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지각은 ‘이성을 갖기까지 고양’되는 ‘정신’뿐만 아니라, ‘꿈 없는 깊은 수면 상태나 실신상태에 있을 때 그러하듯이’ ‘충분히 판명하지 않게 되’는 ‘단순한 모나드의 상태’(AG 208)까지를 아울러 ‘무한한 범위’(AG 59)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지각(perception)과 의식함(being aware)을 구분하여 “우리에게 지각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인식함이 없는 것은 가능하다”(NE 162)고 말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욕구 역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감각한(insensible) 경향성”부터 “판명한 경향성”(NE 194)까지를 아우르기 때문에, 의식의 층위에 국한되는 ‘의지(volition)’와는 구별된다.

비록 지각의 판명함에 따른 영혼의 무한한 범위가 지시되는 것과 같이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라이프니츠는 욕구에 있어서도 지각과 같은 일종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라이프니츠가 ‘의지(volition)’와 ‘욕구(appetition)’를 구분하는 것은 이를 드러낸다.

"나는 의지(volition)는 선을 추구하고 악은 기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effort)이나 시도(endeavor-conatus)인 동시에 이런 것에 대한 어떤 의식없이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시도(endeavor)라고 말하겠다. 이러한 정의는 행위가 따르는 의지와 힘 모두에 대한 당연한 귀결이다. 왜냐하면 어떤 시도도 그것이 막아지지 않는 한 행위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코나투스를 따르는 우리 마음속의 내적인 의지(voluntary) 작용 뿐 아니라, 외부적인 것(outer one) 역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내가 전에 언급한 신체와 영혼의 통합(union)에 기인하는 우리 신체의 자발적인 운동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의식되지 않는(not aware of) 무감각한(insensible) 지각으로부터 일어나는 또 다른 노력이 있다. 나는 이를 의지들(volitions)보다는 욕구들(appetitions)이라고 부르고자 하는데, 우리가 자발적(voluntary)이라고 기술할 때, 비록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욕구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의지라는 표현]은 오직 우리가 좋음과 나쁨에 대한 성찰(consideration)로부터 발생하는 의식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는 것만을 뜻하기 때문이다. (NE 172-173, [ ] 및 강조는 인용자)5)"

이 구절에 앞서 로크의 입장을 대변하는 극화된 인물인 Philalethes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영혼의 활동과 물체의 운동을 시작하거나 견디거나 지속하거나 종결짓거나 하는 힘, 즉 의지(volition)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라이프니츠의 입장을 대변하는 Theophilus는 그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논의를 더 본격적으로 심화시키기 위해서 위와 같은 구별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오직 “의식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는 것만을 뜻하”는 “의지(volition)”와 달리 “욕구(appetition)”는 “의식되지 않는 비감각적인 지각으로 일어나는” 또 다른 종류의 “노력”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라이프니츠는 “비록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욕구들이 있기는 하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욕구에는 적어도 “의식되지 않는 무감각한 지각으로 일어나는” 종류의 것과 “의식할 수 있는” 종류의 것 모두가 포함된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이러한 욕구에 대한 구별은 보다 명확하게 제시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무감각한 경향성들(insensible inclinations)이 있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의 존재와 대상을 알고 있는 의식하고 있는 경향성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는 알지 못한다. 즉 이는 비록 우리의 정신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신체 덕분에 알게 되는 모호한(confused) 경향성들이다. 끝으로 이성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판명한 경향성들이 있다. 우리는 이것들의 힘(strength)과 구조(constitution) 모두를 알고 있다.(NE 194)"

Jorati에 따르면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욕구들의 세 가지의 유형을 제시하고 있는데, (a)무감각하거나 무의식적인 욕구들, (b)감각적(sensible)이거나 그저 의식적인 욕구들, (c)판명하거나 이성적인 욕구들이 그것이다.(Jorati, 2017; 22-23) 이러한 구별은 라이프니츠가 지각에 대해서 제시하는 명료함에 따른 세 가지 구분-저급한 모나드, 기억하는 모나드, 이성적인 모나드-에 상응한다는 점에서 보다 일관된 설명을 제시한다.

 

근본 추동력으로서의 무감각하고 무의식적인 욕구들

그렇다면 위와 같이 적어도 세 종류의 욕구들이 존재한다고 할 때, 이들 각각의 위상은 어떻게 결정되어지는가? 이는 실제적으로 한 지각에서 다음 지각의 상태로 이행하게 하는 일종의 추동력으로 작동하는 욕구란 어떤 것인가하는 물음과도 같다. 이와 관련하여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욕구 개념을 비교적 명확하게 개진하고 있는 『신인간지성론』의 20절과 21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라이프니츠는 다양한 경향성들이 ‘충돌’내지 ‘합쳐진 결과’ 의지가 산출됨을 명시하고 있다.

"다양한 지각들과 경향성들(inclinations)은 합쳐져 완벽한 의지(volition)를 생성한다: 이것은 그것들 사이의 충돌(conflict)의 결과이다. 그들 중 몇몇은 지각할 수 없는 것들인데, 이것들은 합쳐져서 우리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우리를 추동하는 불안(disquiet)이 된다.(NE 192)"

앞서 우리는 욕구가 감각도 되지 않고 의식도 되지 않는 (a)‘무감각하거나 무의식적인 욕구들’까지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의식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는 것만을 뜻’하는 ‘의식’과 구분하였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다시 ‘다양한 지각과 경향성들’이 합쳐져서 ‘의지’를 생성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다양한 경향성들’을 앞서 살펴본 적어도 3종류의 것-(a)‘무감각하거나 무의식적인 욕구들, (b)감각적(sensible)이거나 그저 의식적인 욕구들, (c )판명하거나 이성적인 욕구들-이라면, 우리는 의지란 복합적인 욕구들 사이의 ‘충돌의 결과’라는 라이프니츠의 언급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지각할 수 없는 것들’-위의 언급에 따르면 (a)무감각하거나 무의식적인 욕구들-을 포함하는 ‘이것들’ 즉 다양한 욕구들이 합쳐져서 ‘우리를 추동하는 불안’이 된다는 문장은, 표면적으로 전체 욕구들-(a), (b), (c)를 모두 포함하는-이 ‘합쳐진 결과’, 내지는 ‘충돌’한 결과, ‘완벽한 의지’가 되고 ‘우리를 추동하는 불안’이 된다고 이해된다.

우선 우리는 여기서 라이프니츠가 검토하고 있는 ‘불안(uneasiness)’이라는 개념에 대해 살펴보고, 왜 이러한 개념을 그가 도입하게 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20절 쾌락과 고통의 양태’에서 로크가 욕구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는 개념인 ‘불안’에 주목한다. 로크에 따르면 ‘향유함으로써 기쁨의 관념을 수반하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불안이 바로 우리가 욕구라고 부르는 것’(Locke, 2017; 70)이다. 라이프니츠가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로크는 우리를 추동하는 것으로서 쾌락이나 행복에의 추구와 같은 진부한 개념 대신 ‘불안’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 개념은 충분히 흥미롭다. 그러나 다른 한편 라이프니츠는 영어로 표현된 이 단어에 대응하는 적절한 프랑스어 번역어를 찾는데 고심하는데, 이 개념이 통상 이해되듯, 불쾌(displeasure), 짜증(irritation), 불편함(discomfort), 다시 말해 고통(suffering)을 뜻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uneasiness에 대한] 그 번역어 inquietude에 거의 마음이 기울었지만, 여전히 그 번역어가 저자가 의도했던 것을 아주 잘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 불안[uneasiness]이 만약 불쾌(displeasure), 짜증(irritation), 불편함(discomfort), 다시 말해 고통(suffering)을 뜻한다면, 이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불안은 고통 자체라기보다, 그 자체로 고통의 한 배치이거나 그를 위한 예비를 내포하는 욕망(desire)이라고 말하는 게 낫다. (...) 다시 불안으로 돌아가면, 예를 들어 지각불가능한 것은 우리를 언제나 마음졸이게(in suspense) 한다. 즉 이는 종종 무엇이 결핍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모호한 자극이다. 다른 한편, 경향(inclination)과 정념(passion)을 통해, 비록 모호한 지각의 방식으로 이것들이 작동하고, 정념이 아직은 심의중에 있는 불안과 욕구를 더욱 가중시킬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안다. 이러한 충동은 풀어지려는 수많은 작은 용수철들과 같아서, 우리의 기계(machine)를 조종한다. 우리가 길의 끝에서 왼쪽으로 돌지, 오른쪽으로 돌지 결정하는 사례에서와 같이, 앞서 언급했듯[pp.55f, 115f], 우리는 결코 무관심(indifferent)하지 않다. 이러한 비감각적인 자극으로부터 일어나는 결정은 사물과 신체 내부의 운동과 뒤섞여, 다른 방향보다 우리에게 더욱 편안한 방향을 찾도록 한다. 독일어로 시계의 균형을 뜻하는 단어인 Unruhe는 또한 불안을 뜻하기도 한다. 항상 완벽하게 편안한(ease)한 상태에 있을 수는 없는 우리의 신체에 대한 하나의 모델을 세우기 위해, 우리는 이를 차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체가 편안한 상태에 있을 때, 새로운 사물의 효과-감각기관과 내장 그리고 신체의 홈파인 곳들에 있어서의 작은 변화들-가 그 균형을 즉시 바꿔놓을 것이고, 이는 신체의 각 부분들에게 가능한 최선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한 작은 노력들을 시행하도록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원하려는 지각간 충돌이 말하자면 우리 시계의 불안인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독일어] 명칭을 더욱 선호한다.(NE 164, 166)"

 

라이프니츠는 불안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한 배치’일 뿐이며, 차라리 불안은 ‘그를 위한 예비를 내포하는 욕망(desire)’ 내지 ‘종종 무엇이 결핍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자극’이면서도 ‘우리를 언제나 마음졸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뒤이어 그는 이러한 상태를 ‘풀어지려는 수많은 작은 용수철들(springs)’에 비유한다. 즉 우리는 의식할 수 없는 수많은 욕구들을 갖고 있고, 그 욕구들은 언제든지 튕겨나가려는 듯 부풀어오르는 용수철과 같이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불안이라는 것은 어떤 일시적인 상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격정적일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완전히 차분할 때에도 우리를 작용하게 한다.‘(NE 188) 우리의 신체는 ’항상 완벽하게 편안한(ease) 상태에 있을 수는 없‘(NE 166)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욕구가 있는 곳에는 불안이 있다‘(NE 192)고 말한다.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가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역시 이로부터 주장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지 않고, 즉 충분히 발전된 욕구(fully developed desire)가 없는 경우에도 불안의 상태에 종종 처할 수 있‘(NE 192)기 때문이다.

관련하여 우리는 라이프니츠가 다음과 같이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것’은 ‘미세한, 느껴지지 않는 지각들’ 내지 ‘미세한 충동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참조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것은, (만약 고난[suffering]이라는 개념이 의식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고난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러한 미세한, 느껴지지 않는 지각들이다. 이러한 미세한 충동들[impulse]들은 우리가 처한 작은 장애물들에 대한 우리의 지속적인 극복 안에 존재하며, 우리의 본성을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일들을 해 나간다. (...) (NE 188)"

 

이어지는 부분에서 역시 라이프니츠는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인식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또한 그것은 박차로서 우리를 작용하게 하기에 충분하며 그 의지[will]를 자극한다”(NE 190)고 말하고 있다. 즉 세 종류의 욕구들이 있을 때, 불안이라는 개념과 결부되어 우리를 직접적으로 추동시키는, 그렇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힘은, (a)무감각하거나 무의식적인 욕구들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이 모든 충동들의 궁극적인 결과는 완전한 의지(full volition)을 만들어내는 노력을 이긴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그에 덧붙여 “그러나 욕구들과 종종 ’의지‘라고 불리는 노력들(endeavours)은 비록 그들이 이기고 노력을 취한다고 하든 아니든, 덜 완전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무감각하고 무의식적인 욕구들은 이미 완전한 방향성-더 나은 최선의 상태로 나아가고자 하는-을 충족시킨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의지를 만들어내는 노력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라이프니츠는 이어서 ’그렇기 때문에 의지는 거의 욕구나 내가 욕구와 대립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회피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NE 192)고 덧붙이고 있다. 말하자면 무감각하고 무의식적인 욕구들은 비록 그것이 완전한 의지를 ‘이길’ 정도로 강력한 추동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자체는 ‘덜 완전한 것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욕구와 대립하는 것’들 간의 일종의 긴장상태인 ’불안‘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령 “배고파!”라고 우리가 말할 때, 그 ‘총괄적’ 허기는 ‘수많은 작은’ 허기들-지방에 대한 허기, 단백질에 대한 허기, 철분에 대한 허기 등-을 표현한다. 간혹 사료를 잔뜩 먹은 소가 텅 빈 사료통을 계속 핥거나 파이프를 씹어대는 행동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는 자신의 ‘총괄적 허기’를 구성하는 ‘작은 허기’인 나트륨 허기를 지각하는 것이다. 혹은 배합사료만으로 영양분을 충분히 얻지 못할 때, 소는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황토를 먹기도 한다. 흙 속에 있는 철이나 구리, 아연, 망간 등의 미량 광물질을 얻기 위해서다. 이처럼 배가 부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섭취할 무엇인가를 찾는 사례는, 총괄적인 포만감 속에 나트륨 내지 광물질에 대한 특정한 작은 허기들이 포함되어있다는 점을 떠올리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가 제시한, 자신을 내리친 몽둥이를 기억하는 개의 사례(AG 208;논고 233)를 변형한다. 무언가를 먹고 있는 개에게 몽둥이를 내리친다고 해보자. 먹이를 먹고 있는 순간의 개는 기쁨에 차있다. 그러나 곧이어 그 개는 “소리 죽인 채 다가오는, 적대적인 분위기, 몽둥이를 들어올리는 것의 미세지각들”을 갖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지각들은 기쁨에서 고통으로의 전환을 떠받”(P 115; 국158)친다. 여기서 들뢰즈는 어떤 거시적인 지각들의 균형이 먼저 무너져야만 다음의 거시지각이 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다시 선행하는 거시지각을 구성하는 미세지각들이 분쇄되고, 다음에 출현할 거시지각으로 이행됨을 뜻한다. 이로써 기쁨에서 고통으로의 이행, 포만감에서 허기로의 이행, 이것들이 곧 미세지각들을 드러내고, 그것들간의 이행인 작은 욕구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할 점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한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의 이행인 욕구는 지각 자체와 구분되지만, 그것이 미시적인 차원에 머물 때에는 둘 간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거시적인 것은 지각들을 구분하고, 또한 하나의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의 이행인 욕구들을 구분한다. 이것은 구성된 커다란 주름들, 나사(螺絲)천의 주름들의 조건이다. 그러나 미시적인 수준은 미세 지각들과 작은 성향들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는다.(P 116; 국159)"

 

앞서 우리는 파도소리의 예에서, 수많은 물방울들에 대한 미세지각을 포함하는 전체의 소음을 ‘파도소리’라고 ‘대강’ 총체화한다는 점을 보았다. 여기서 들뢰즈는 마찬가지로, ‘미시적인 것’으로 지시되는 미세지각들과 대비시켜 총체화된 의식을 ‘거시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어떤 지각과 그것들간의 이행인 욕구가 구분되는 반면, 미시적인 수준에서는 구분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a라는 지각에서 b라는 지각으로 이행함이라는 뚜렷한 인과관계가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가령 나트륨 허기를 느껴 사료통을 핥는 소가 먹는 것은 ‘나트륨’이나 ‘철’이 아니다. 나트륨 허기라는 미세지각과 그것으로 인해 사료통을 핢는다는 지각으로 이행하는 것 간의 인과관계는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소는 사료통을 감각적 질로서 지각하지, 나트륨으로 지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일정한 소금량, 단백질량, 지방량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육식동물 역시 단백질을 먹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본 것을 먹는다. 우리는 단백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것은 ‘가장 단순한 층위에서 본능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식사할 때, 의식하지 못한 채 자신의 신체의 균형에 필요한 일정한 지방량과 소금량, 단백질량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은 지각들에 의해, 하나의 작은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이행하는 것을 뜻하는 작은 욕구들이 함께 이동한다. 나트륨 허기라는 지각에서 사료통의 지각으로의 이행하는 욕구가 있다. 바로 여기서 작은 지각들 내지 욕구들의 총체화로서, ‘의식과 무의식간의 묘한 소통’이 이뤄진다.

 

무의식의 ‘파생(dériver)’으로서의 의식의 성립

들뢰즈는 이러한 미분적인 무의식을 무한소 분석과 연결지어, ‘심리-수학적 영역’이라고 명명한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는 무슨 이유로 의식적 지각을 이루는 것은 무한히 많은 요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만약 미시적인 작은 지각들이 모여서 총체화된 결과, 의식을 이루는 것이라면, 그것을 종합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다시 미시적 지각들 이전에 의식이 선재해야 한다는 순환논증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이들을 종합하는 어떤 ‘주체’ 내지 ‘원리’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종합을 순전한 우연의 결과로 치부해야 할까?

이에 대해 들뢰즈는 라이프니츠가 유의하여 구별하고 있는 ‘총체화(totalisation)’를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에 주목한다. 라이프니츠가 의식적 지각들이 작은 지각들‘로 합성된다(composer)’고 할 때와 작은 지각들‘에서 파생된다(dériver)’고 말할 때,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분명 두 표현은 모두 수학적인 ‘적분’이라고 표시할 수 있는 통합 내지 전체화에 해당한다. 그러나 ‘합성되다’는 부분-전체의 관계를 나타내는 반면 ‘파생되다’는 미분관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이따금 총체라는 용어를 끌어들여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등질적인 부분들의 합산 외의 다른 무엇이 중요하다. 부분-전체의 관계는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전체도 부분만큼이나 감지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어떤 물레방아의 소리에 너무 익숙해서 그 소리를 포착하지 못할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하나의 웅성거림, 현기증은 의식적 지각들이 되지 않으면서도 전체이다. 사실 라이프니츠는 전혀 부족함 없이 미세지각 대 의식적 지각으로의 관계가 부분에서 전체의 관계가 아니라, 평범함에서 특별함 또는 주목할 만함으로의 관계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즉 “특별한 것은 그렇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되어야만 한다.”(P 116-117; 국160)"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바는, 규칙적인 지각의 더하기로서의 의식화가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오히려 ‘특별함 또는 주목할 만함’으로의 관계에 의해 이뤄지는 의식화이다. 가령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많은 것들을 동시에 취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두드러진 생각에만 주의를 기울인다”(AG 89;서신 230)고 말한다. 지각되지 않은 많은 미시적 지각들 중 우리는 가장 두드러진 것, 즉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특이점(singular point)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이로써 무수히 많은 미시적 지각들이 모두 평균적으로 규칙에 따라 집합하여 우리의 의식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들뢰즈는 부분으로서의 무의식들의 합산(addition)이 곧 의식이라는 공식의 부적당함을 제시하기 위해, 위 인용된 부분에서 ‘어떤 물레방아의 소리에 너무 익숙해서 그 소리를 포착하지 못할 때’를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만약 ‘무의식:의식=부분:전체’라는 공식이 성립하려면, 의식은 언제나 ‘전체’를 의식하여야 한다. 의식되지 않는 부분들의 총합이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익숙해져서 의식되지 않는 경우, 그러한 의식은 결코 ‘전체’를 뜻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물레방아의 예시로서, 들뢰즈는 ‘무의식:의식=부분:전체’라는 공식의 반례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라이프니츠 연구자인 졸리(Nicholas Jolley)도 제시한다. 졸리에 따르면, 라이프니츠가 제시하는 무의식으로부터의 의식화는 ‘주의집중(attention)’을 통해 가능하다. 가령 스미스와 존이 전기드릴 공사가 한창인 배경을 뒤로 하고 대화를 하고 있다. 그러나 대화에 집중한 스미스는 드릴 소리를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존이 그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로써 스미스는 드릴 소리를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예시는 미세지각으로서의 수많은 드릴 소리들의 ‘부분’들은, 거시적인 드릴 소리라는 ‘총체’로 곧바로 환원될 수 없음을 입증한다.

물레방아와 전기 드릴의 사례가 보여주듯, 우리의 의식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의 라이프니츠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특별한 것 또는 주목할 만한 것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들뢰즈는 의식은 ‘총체화’를 수행한다기보다 ‘특이화(singularisation)’를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라이프니츠는 “특별한 것은 그렇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가령 녹색이 있다고 해보자. 녹색은 노란색과 파란색의 혼합으로 만들어진다. 물론 노란색과 파란색은 그 자체로 지각가능하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 색이 서로 혼합될 때, ‘노랑임’과 ‘파랑임’이라는 지각은 사라져야한다. 노랑과 파랑에 대한 지각이 미세지각으로 ‘분쇄화’되는 것이다. 분쇄되어 무한히 작아진 노랑과 파랑에 대한 미세지각은 어떤 비율에 따라 다시 혼합되고, ’녹색‘이라는 지각으로 의식에 드러난다. 즉 노랑과 파랑에 대한 지각이 미세지각이 되면서 ‘사라지’고, 이것들이 다시 녹색을 규정하는 ‘미분비(微分比, un rapport différentiel)’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는 ‘녹색’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의식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노란색은 다시 가령 흰색과 주황색에 대한 미세지각들을 포함하고, 그것들이 미분비 안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노랑’으로 지각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같은 방법으로 무수히 많은 갈래를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노랑임’과 ‘파랑임’이라는 규정성이 미세지각이 되는 과정에서 ‘사라진다’는 점에 유의하자. 만약 각각의 규정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서로간의 혼합을 통해 ‘녹색’이라는 새로운 규정성을 배태할 수 없다. 때문에 의식의 층위에 도달하기 위해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규정성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단연 그러한 의식화 이전에는 미규정성의 상태가 선행되어야 한다. 미세지각은 그러한 미규정성의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미규정성의 상태는 곧 ‘[특별하지] 않은 부분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미세지각에서 출발한 의식의 문제를 어떻게 ‘미분비의 문제’로 전환시키는지를 알게 된다. 들뢰즈에 따르면 “모든 의식은 문턱(Toute coscience est seuil)”(P 117; 국161)이다. 문턱이 최소한의 의식을 나타낸다면, 언제나 미세지각들은 이 가능한 최소치보다 더 작다. 아직 문턱을 넘지 않은, 그렇기에 의식화되지 않은 미세지각들은 말 그대로 무한히 작은 것이다. 그리고 이 무한히 작은 미세지각들이 어떤 특별한 관계를 맺을 때, 이 미분비의 질서 안에서 미세지각은 선별된다. 이렇게 해서 의식의 문턱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의식으로서의 지각들과 우리는 조우하게 된다.

의식 이하의 차원에 복수적인 미세지각들을 상정하는 라이프니츠의 이론을 들뢰즈는 다시 ‘평범한 미세지각들’과 ‘두드러진 미세지각들’로 구분하여 그 거시 지각의 성립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어서

 

1)이하의 글에서 라이프니츠의 저서를 인용할 때 다음과 같이 표기한다.

AG Philosophical Essays, trans. Roger Ariew and Daniel Garber, Indianapolis: Hackett, 1989.

Lo Philosophical Papers and Letters. trans. Loemker, L.E., D. Reidel, Dordrecht, 1969.

NE New Essays on Human understanding, trans. Remnant and Bennett, Cambridge, 1996.

 2) 영어로 ‘subsatance’로 번역되는 ‘실체’는 일상용어로 ‘물질’이라는 뜻 외에 ‘본질, 핵심’ 등의 의미를 갖는다. “그녀의 실체는?”이라고 물을 때, 우리는 그 인물의 고유성을 설명할 수 있는 본질적인 무언가를 문제삼는다.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실체’는 ‘본질’의 의미로 사용된다. 가령 형이상학에서 실체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이 되는 것’을 지시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규정되는 실체란 “스스로 한 기체에 대해 술어가 되지 않고, 다른 것들이 그것에 대해 술어가 되는 것”(1029a 7ff)이다. 한 주어가 다른 어떤 주어에도 귀속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실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실체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족성을 제일성질로 함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질로서의 자리를 점하게 된다. 이러한 실체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계승하는 근대시기 철학자들은 실체를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함’이라는 속성으로 사유한다. 가령 데카르는 실체를 “스스로 존재하고 자신의 존재를 위하여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참된 실재”(『철학의 원리』, 1장 51절)라고 정의하고, 스피노자 역시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곧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다른 실재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윤리학』, 1부 정의3)이라고 정의하며, 라이프니츠도 유사한 맥락에서 “여러 술어들이 하나의 동일한 주어에 귀속될 때, 그리고 이 주어 자체는 다른 어떤 주어에도 귀속되지 않을 때, 이 주어를 실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형이상학 논고』, §8)면서 실체의 자족적인 지위를 강조한다.

3)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지각의 다양성에 대한 독특한 설명은 그가 통상적인 주체-대상이라는 이항간에 성립하는 지각과정과는 전혀 다른 전개, 이른바 ‘비인과적 지각이론’을 따르기 때문이다. 물질을 오직 정신의 현상으로 간주하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지각의 외부적 대상은 상정되지 않는다. ‘모나드들의 자연적인 변화’는 오직 ‘내적인 원리로부터 일어’(AG 214)나기 때문이다. 즉 라이프니츠에게 지각은 지각대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각 주체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로 설명된다.

4) 파도의 비유는 라이프니츠의 저작에서 반복 제시된다; L 640; L 558; AG 215-216; AG 81-90

5) 불완전하고 무의식적인(imperfect, unconscious) 경향성을 ‘의지’와 대립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은 NE 189, 194에도 제시된다.(Jorati,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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