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SoulFood] 마르크스와 한 잔 더!

수유너머웹진 2019.03.09 13:22 조회 수 : 10

###PhilSoulFood는 "철학자들의 음식"이란 뜻입니다


마르크스와 한 잔 더! 

- 맥주에 취하고 혁명에 춤추다


박준영(수유너머104 회원)



작년이 마르크스 200주년이었지요. 1818년 5월 5일은 그가 태어난 날입니다.

마르크스는 이제 고교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친숙합니다. 

그의 걸작인 《자본론》이 성경 다음 가는 베스트셀러이기도 하지요.



알트비어, 시와 결투

그런데 그가 굉장한 주당이었고, 맥주광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요. 마르크스의 술탐은 본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17세에 입학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굉장히 일찍인 셈입니다.

그런데 아뿔싸! 이 본 대학이라는 곳이 전통적으로 술과 파티로 날을 지새우는 대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라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던 마르크스는 술로도 아마 지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아버지 뜻대로 하고 싶지도 않은 법학을 전공했으니 오죽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게 된 건 1836년에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 후예요. 20 세 되던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다시 예나 대학으로 옮겨 1941년 23세에 박사학위(철학)를 땄습니다. 고주망태 치고는 실력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0대 초의 마르크스.  가무잡잡한 피부, 검은 눈동자, 앙 다문 입술. 고집과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 보입니다.


일단 마르크스의 본대학 시절을 생각해 보도록 해요. 당시 본대학이 있던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에는 맥주로 유명한 양대 도시가 있었는데, 하나는 뒤셀도르프였고, 다른 하나는 쾰른이었습니다. 본대학은 뒤셀도르프보다 쾰른에 더 가까이 있어요.


보통 쾰른 맥주 하면 "쾰쉬"(Kölsch)를 많이 떠올리지요. 그런데 마르크스가 본에 체류하던 1835년 경에는 그 이름이 없었어요. 쾰쉬라는 고유명은 1918년에야 생긴답니다.

쾰쉬는 보통 작은 잔(200ml)으로 원샷을 합니다. 우리가 보통 먹는 생맥주잔의 절반 정도지요. 아마 청량감을 위해서겠지요. 그래서 쾰시 전용 캐리어가 펍에 저렇게 있습니다.


그전에는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양조장들이 저마다  맥주를 생산했지요. 요즘으로 치면 크라프트 맥주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들이 이웃 체코의 필스너 맥주가 유행하자. 위기감을 느낀 후 상품을 개발하고, "쾰쉬"라는 이름으로 연합한 것입니다.


맥주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본 체류기의 크라프트 맥주 스타일은 뒤셀도르프 풍이었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쾰쉬가 등장하기 이전에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의 맥주는 온통 뒤셀도르프의 알트비어(Altbier)였기 때문이지요. 가장 전통 깊고, 유명한 알트비어는 "슈마허 알트"입니다. 알트 비어는 동갈색의 신비한 빛을 띠는 에일을 품고 있지요.


#에일(Ale) 

맥주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에일"과 "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일을 만드는 효모는 따뜻한 온도를 좋아하지요. 반면 라거는 시원한 온도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효모의 취향이 맥주의 양대 주종을 이루는 것이지요. 에일은 라거보다 더 달콤하고 바디감도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에일의 효모들은 발효탱크의 맨 위에서 따뜻하게 뒹굴면서 맛을 구성하기 때문이지요. 최근의 맥주 중에는 스타우트, IPA에서 듀벨(Duvel) 같은 벨기에 스트롱 에일까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슈마허 알트비어의 자태


 

#알트비어

이 동갈색의 에일은 장시간의 저온 숙성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다른 에일보다 과일향이 약하지요. 대신 라거와 같은 청량감을 살리게 됩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뒤셀도르프 특산물에는 이름이 없었어요. 그저 지역 맥주에 불과했지요. 그러던 1838년 뒤셀도르프에거 가장 오래된 펍의 사장인 마티아스 슈마허가 "오래된" 이란 뜻의 "alt"를 이름에 넣어 그 역사를 부각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이 알트비어처럼 어두운 색깔의 바디감이 다소 무거운 맥주를 마시며 당시의 친구들과 어울려 토론도 하고 때론 싸우기도 하며 지낸 것이지요. 본 시절에 마르크스는 아마 철학을 하지 못하는 한풀이를 술과 문학으로 달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두 개의 동아리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하나는 <시인 클럽>이고, 다른 하나는 <트리어 타브렌 클럽>(음주 클럽)입니다. <시인 클럽>은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성격을 뗬습니다. 그런데 사달이 난 것은 예상대로 음주 클럽에서였지요. 여기서 마르크스는 결투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어쨌든 이래저래 성적은 떨어지교, 주량만 늘게 된 셈이지요. 아, 한 가지 수 십 편의 시가 남아 있군요.


1835년 당시의 본대학 전경입니다.


당시의 시대상도 알트비어처럼 다소 어둡고 암울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혁명은 독일에 닿기도 전에 반혁명으로 좌절되었지요. 당시 독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 제국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던 때였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으로부터 승리를 획득한 워털루 전투(1815) 이후 베스트팔렌 지역을 수복했고, 독일 연방을 결성함으로써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러한 발전상 이면에는 반개혁, 관료주의와 사상의 억압, 노동운동의 탄압이 있었지요.

본대학 시절의 <시인 클럽>은 급진 좌파 성형을 가진 서클이었고, 내부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성토가 많이 일어났을 겁니다.

10대 후반의 마르크스가 알트비어를 들이키며 울분을 토하고 시를 휘갈겨 쓸 때 독일은 산업혁명의 후진국가이면서 정치적 수렁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베를린의 밀맥주 그리고 헤겔 좌파

그런데 사상적으로 독일은 유럽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바로 당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때문인데요. 헤겔과 쇼펜하우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 중 마르크스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철학자는 헤겔입니다. 베를린 대학(아래 그림)으로 옮긴 후 마르크스는 헤겔에 심취한 덕분에 공부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더욱 예민해지지요.


1837년 경에 이르면 헤겔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지게 되고, 이에 따라 당시 베를린 대학의 급진 헤겔주의 그룹인 <청년 헤겔> 학파의 일원이 됩니다. 이들은 헤겔의 사상을 도입하되 그것을 종교 비판과 당대의 시대 비판의 도구로 벼루어 냅니다. 그리고 당시 베를린 대학에는 아주 뛰어난 유물론 철학자 포이어바흐가 있었지요. 많은 젊은 헤겔주의자들은 이제 헤겔을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입각해서 해석하게 됩니다. 아마 베를린 시절은 본 시절보다는 덜했겠지만 여전히 이들 지식인들과 어울려 마르크스는 맥주를 마셨을 겁니다.



엥겔스가 그린 헤겔좌파들의 술자리 토론 모습입니다. 엥겔스가 캐리커처에 재능이 있었다는 건 저도 처음 알았네요. 그런데 엥겔스가 여기 마르크스는 그리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자, 지금부터 등장하는 맥주는 정말 유명합니다. 앞서 말한 쾰쉬나 알트비어보다 역사도 더 오래되었지요. 바로 "베를리너 바이세"(Berliner Weisse)입니다. 마르크스가 베를린 시절 수많은 논쟁 테이블에서 앞에 두고 마셨던 그 맥주입니다. 물론 그의 논적들도 마찬가지였겠지요.


베를리너 바이세입니다. 원액의 시큼한 맛을 중화하기 위해 과일 향신료를 섞습니다.


베를리너 바이세는 기본적으로 밀로 만든 에일, 즉 밀맥주에 해당됩니다. 이 맥주는 언제부터 제조되었는지조차 불분명할 정도로 오래되었지요. 1516년 바이에른 주에서 공표된 "맥주 순수령"이라는 문헌이 존재하는데, 여기에 "바이스비어"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래서 독일에서는 보리로 만든 "로트비어"와 밀로 만든 "바이스비어"가 맥주의 양대 전통이라고 할 수 있어요. 로트비어와는 달리 밀이 발효하면서 나는 시큼한 맛이 특징입니다.  


밀맥주는 대체로 탁한 하얀색(어떤 경우 연노란색)입니다. 밀맥주를 지칭하는 "바이스"는 "흰색"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여러 향신료를 섞어서 색깔이 다양하게 변하는 겁니다.  이 밀맥주가 베를린에서는 "베를리너 바이세"라고 불린 것입니다. 그런데 밀맥주 자체가 그런 것처럼 이 베를리너 바이세의 기원도 매우 불분명해요.


하나의 설은 영국 맥주 저술가 로저 프로츠가 [세계의 클래식 병맥주]에서 밝힌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프로츠는 이 맥주가 시큼한 적색과 갈색의 에일을 선호했던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과 프랑스에서 온 개신교도인 위그도 교도들에게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때가 대략 17세기 후반인데 그즈음 많은 사람들이 종교박해를 피해 독일로 이주했습니다.


또 하나의 설은 베를리너 바이세가 17세기 베를린에서 제조되고 있었던 보리와 밀로 만든 어두운 색의 에일인 "할베르슈타터 브로이한"에서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시큼한 에일의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17세기 당시에 인기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19세기에 이르러 250여 곳의 양조장이 베를리너 바이세를 주문제작방식으로 제조했으니까요.

오리지널을 즐기는 소수의 독일인들은 원액 그대로의 시큼한 맛을 즐겼고, 대개는 물에 타거나 라거와 섞어서 마셨습니다. 시큼한 맛을 중화하기 위해서 라거 외에 딸기 시럽, 레몬 시럽 또는 허브 시럽을 섞어 마시기도 했지요. 이렇게 되면 원액의 흰색도 여러 색채를 띠게 됩니다. 그래서 베를리너 바이세는 빨대를 꽂아 주스처럼 마셔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맥주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이 맥주가 미국에서 더 많은 양조장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베를리너 바이세와 더불어 박사학위를 마쳤을 때가 1841년인데요([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철학 체계의 차이], 1841, 예나대학), 이때 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헤겔 좌파의 동지인 브루노 바우어(1809~1882, 마르크스와는 9년 터울이 나네요)와의 여행길에 있었던 일이지요. 이 둘은 의기투합해서 베를린에서 본까지 가기로 한 겁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마신 술에 취해 교회에 난입하여 큰소리로 고, 당나귀를 타고 거리를 활보한 것이지요. 마을 사람들이 아마 꽤나 혀를 찼을 것 같군요.


그렇다고 마르크스가 할 일 안 하는 알코홀릭은 아니었어요. 학위를 마치자 말자 그는 [라인 신문]의 편집장이 되어 수많은 정치평론을 씁니다. 1843년 라인 신문이 러시아 황제의 압력(지면에서 마르크스가 황제를 조롱했거든요)으로 폐간되기까지 정말 열심히 일 했습니다. 아마도 시큼한 베를린 바이세 맥주를 거의 매일 마셨겠지요.


라인 신문의 폐간은 마르크스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완전히 어떤 "경고"도 없이 전격적으로 폐간 명령이 떨어진 것이거든요. 하지만 이제 마르크스는 당대의 정치평론가로 자리를 확고히 잡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장 사회주의자들이 우글거리는 혁명의 본고장인 프랑스로 가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1848년 2월 프랑스혁명에 뒤이어  3월 독일 혁명이 진행될 때까지 머무르게 됩니다. 이때에도 그는 프랑스에 소재한 [독불 연보]의 공동 편집장으로 활동합니다.


엥겔스, 타인의 취향

이 당시에 마르크스는 그의 평생의 동지가 될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엥겔스는 맥주보다 와인 애호가였던 것 같습니다. 곤궁한 혁명가 마르크스에 비해 본래 사업가였던 엥겔스는 다소 고급스러운 주종을 선택한 것이겠지요. 이런 엥겔스의 영향이었는지 마르크스도 이후 와인을 즐겼다고는 하는데, 대게 엥겔스가 주는 것을 고맙게 받아먹는 정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 삼아 얘기하자면 이 둘이 마신 와인은 "샤토 마고 1848"이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이 혁명기에 바로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작성 배포합니다. 이 선언문은 마르크스를 단숨에 당대 급진 좌파의 총아로 만들었지요. 지금도 [공산당 선언]은 가장 오래된 스테디셀러로 전 세계 대부분 대학의 필독서에 속합니다.


[공산당 선언] 첫번째 원고의 마르크스 손글씨 . 이 첫번째 수고(manuscript)는 1847년에 작성되었습니다.


전 세계 노동자들의 해방이 눈 앞에 보이는 사건들이 프랑스에 이어 독일에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1789 프랑스혁명 이후 전 유럽은 다시 혁명의 물결에 출렁거리게 된 것이지요. 마르크스는 이때 참으로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혁명이 실패한 것이 확실해지자 마르크스는 런던에 망명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그는 이미 A급 요주의 인물로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요.



##<청년 마르크스>(2018, 라울 펙 감독)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청년기 마르크스의 이야기입니다. 엥겔스와의 만남을 전후한 청년 마르크스의 이야기, 반드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토튼햄의 망아지들

런던에서도 맥주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당의 창립자인 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이자 마르크스의 동지였던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자서전에 그 내용이 나오지요. 이른바 "토튼햄 거리 주점 깨기" 이야기지요.


1900년대 초의 토튼햄 거리 풍경입니다. 양쪽으로 주점들이 보이시나요?


때는 1849~50년 경, 마르크스와 에드거 바우어(앞서 이미 마르크스와 한 에피소드를 함께 한 브루노 바우어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세 명이 런던 중심지인 토튼햄 거리에 모였습니다. 마르크스가 당시 32세, 바우어는 1820년 생으로 30세, 리프크네히트는 1826년 생으로 24세쯤 되었을 겁니다. 이 때는 리프크네히트가 스위스에서의 혁명 실패 후 수배를 피해 런던으로 도피한 바로 직후였고, 알다시피 마르크스와 바우어도 1848년 프랑스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런던으로 도피한 상태였지요.


세 명의 패잔병이랄까. 셋이 모이면 참 암울한 분위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논쟁 도중에 다혈질인 바우어가 마르크스에게 주먹을 날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하는군요. 요즘 말로 치면 술집 진상들? 새파란 혁명가들이니 이해하기로 하지요.  


토튼햄 거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펍입니다.


그날따라 필이 받았는지 세 사람은 모든 펍(Pub)에 들러서 맥주를 기울이기로 했지요.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정치토론이 열띠게 이어졌습니다. 얼마 후에 술집은 그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와 주먹질로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들은 열을 식히려고 밖으로 나와서 포석이 깔린 도로를 걸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바우어가 작은 돌멩이를 가로등(당시에는 가스등)에 던지기 시작했지요. 뒤따르던 마르크스와 리프크네히트도 돌을 던졌습니다.


너 다섯 개의 가로등이 박살이 나고, 그 깨지는 소리에 경찰들이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들은 지금으로 치면 정치범들이고 수배가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잡히면 그날로 철창에 본국 송환이었을 겁니다. 송환되는 순간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었지요. 셋은 필사적으로 토튼햄 거리의 끝까지 냅다 뛰었습니다. 마침내 경찰들이 추격을 포기했고, 셋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요.  


과연 마르크스가 목숨을 걸어놓고 마셨던 당시의 맥주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영국 맥주의 대명사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페일 에일(Pale Ale)이 아니었을까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에일 맥주인 "바스 페일 에일"


페일 에일은 알코올 도수가 4~6%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시는 라거 맥주와 거의 같습니다. 하지만 가벼운 라거와는 달리 바디감이 더 묵직하고, 꽃향과 더불어 끝 맛이 살짝 씁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 맥주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가 됩니다. 바스 페일 에일의 경우 1860년에 일본에 최초로 수출되지요. 바스 에일 이전에는 주로 "다크 포터"나 "브라운 비어"였다고 합니다.


영국 페일 에일 양조는 17세기경에 시작되었습니다. 앞서 마르크스가 본이나 베를린 체류 때에 마셨던 알트비어나 베를리너 바이세보다 역사가 깊지는 않지요. 양조 중심지는 버턴어폰트렌트입니다. 1777년에 이곳에 설립된 "바스" 양조장에서 나온 버턴페일 에일은 색깔이 어둡고 맛은 달콤했습니다. 이 맥주는 이후 18세기에 러시아와 발트 3국에 수출되었지요.


인디언 페일 에일, 통상 IPA라고 부릅니다. 최근 우리나라도 IPA 붐이 일고 있지요. 마트 가면 이렇게 많습니다.


바스 양조장은 이후 기술을 개발해서 "인디언 페일 에일"이라는 상품도 개발하게 됩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동인도 회사에 납품하기 위해 만든 이 에일은 인도로 가는 동안 상하지 않도록 "홉"을 듬뿍 넣은 것이지요. 홉의 양이 많아짐에 따라 부케(bouquet, 향)도 강해지고, 그 맛도 더 쌉쌀하고 달콤해집니다.  


#홉

홉은 맥주의 맛을 내는 핵심 원료입니다. 주로 덩굴식물인 "후물루스루풀루스"(말도 안 되게 길고 어려운 명칭이네요)의 열매를 말려서 사용합니다. 이 홉에는 "알파산"과 "베타산"이라는 물질이 함유되어 있는데요, 맥주 원액이 끓기 시작하면 알파산의 쓴맛이, 한창 끓고 나서는 풍미가, 마지막 몇 분 간은 부케가 생깁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에서 가열을 멈추느냐에 따라 홉의 특성이 갈리고, 맥주의 맛도 달라지지요. 특히 홉의 알파산은 방부제 효과도 있습니다. 인디어 페일 에일에 홉이 많이 들어간 것은 이 때문이지요.



나에게 필스너를!

마르크스의 영국 망명 기간은 계속 이어져서 브뤼셀에 2년 정도 갔던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런던에 머물렀습니다. 1883년 서재에서 책을 손에 쥔 채로 세상을 뜨기까지 마르크스는 일 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저술에 매달렸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그의 주옥같은 책들을 지금 볼 수 있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의 건강은 극도록 나빠졌습니다.


(위) [자본론] 초판 표지, (아래) "뮤지움 타베른" 최근 모습입니다.


[자본론]을 집필하던 시기에 마르크스는 주로 "대영도서관"(지금은 대영박물관 내 도서관)을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서관 바로 앞에 유명한 펍이 있지요. "뮤지움 타베른"(Museum Tavern)이 그곳입니다. 지금도 있어요! 마르크스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지고, 요약하고 발췌하고, 또 글을 쓰고 난 뒤 피로한 두뇌를 쉬기 위해 거의 매일 여기 들렀다고 합니다. 이곳은 런던에서는 꽤 유명합니다. 마르크스뿐 아니라 조지 오웰, 코난 도일, 프리스틀리 등도 여기서 맥주를 마시면서 쉬기도 하고 글도 쓰고 했다는군요.


그런데 이때쯤이면 양조기술도 발전하여 지금 우리가 마시는 것과 같은 반투명의 황금색 맥주가 탄생하게 됩니다. 바로 "필스너"지요. 마르크스도 망명시절 이 필스너 맥주를 마셨지만 건강이 악화된 후 못 마신 것으로 보입니다.


최초의 필스너 맥주인 체코의 "필스너 우르켈"입니다. 1842년 첫 맥주가 나왔고 지금도 생산됩니다.


이 필스너 맥주가 왜 양조기술 발전의 결과냐 하면, 효모의 발효 원리를 알고서 제조된 맥주이기 때문입니다. 양조업자들은 효모가 맥주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작용원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요. 그런데 독일의 생리학자 테오도어 슈반이라는 사람이 발효과정의 비밀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슈반의 원리를 응용해서 체코(당시는 보헤미아) 양조업자들은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아마 마침내 황금빛의 새로운 에일을 얻게 되었을 때 이들은 황홀감에 젖지 않았을까요? 이 황홀감은 곧장 독일로 전수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황금빛 맥주는 보헤미아와 인접한 독일 작센 주로 전파됩니다. 그래서 나온 맥주가 "라데베르거 필스너"이지요. 이를 다른 말로 "저먼 필스너"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맥주는 스파이시한 향과 달콤한 향이 번갈아가며 풍미를 돋우고, 약한 쓴맛의 마우스필을 가집니다.




이제 마르크스의 "칼스바트 일화"를 마지막으로 이야기하면서 저도 이제 맥주 한 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870년 경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초판본의 독일어 수정판과 프랑스어 번역판을 준비하는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엥겔스는 특단의 조치를 친구에게 가하기로 했지요. 그래서 있는 돈을 긁어서 40 파운드를 만든 다음(당시 노동자 일 년 임금이 10-20 파운드였습니다) 마르크스에게 쥐어주며 칼스바트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칼스바트는 독일 온천 휴양지예요. 당시에는 체코였지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뭉기적 대다가 1874년에야 마르크스는 칼스바트로 떠날 결심을 합니다. 무엇보다 막내딸인 엘리노어의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지요. 이 여행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었어요. 일급 요주의 인물인 마르크스가 독일로 다시 왔다는 것이 경찰의 귀에 들어가면 그날로 당장 체포되거나 추방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지요.


다행히 마르크스 일행은 무사히 칼스바트에 도착해서 휴양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숙소는 온천에서 100m 정도 떨어진 언덕 위의 <하우스 게르마니아>였습니다(지금은 "Olympic Palace")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칼스바트에 있는 마르크스 동상


이때의 마르크스가 어떻게 휴양지에서 지내는지는 엥겔스에게 보낸 아래의 편지 속에 드러납니다.


우리 둘[마르크스와 딸]은 규칙에 따라 엄격히 생활한다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매일 7잔을 마셔야 하는 훌륭한 온천수원으로 가지. 앞 잔과 뒤 잔 사이에 항상 15분의 간격을 두고, 그 사이에 오르락내리락하며 경보로 걷지. 마지막 잔을 마시고 1시간 동안 산책을 하면, 마침내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네.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는 차가워진 온천수를 한잔하고.


그리고 그는 거의 나지막하게 한탄하는 투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매일 물만 마시는 반면에, 막내딸은 매일 1잔의 필스너 맥주를 마시는 통에 매번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네.


이 대철학자이자 혁명가, 20세기의 역사와 지도를 만들었던 위대한 사상가가 필스너 맥주 한 잔에 갈급해하는 모습이 머리에 그려저서 풉 하고 웃음이 나옵니다. 상당히 귀여운 할아버지 같아 보이지 않나요.

자, 마르크스 할아버지 이제 마음껏 한 잔 하러 가시죠.

저랑요. ㅎㅎ




<참고 문헌>

Wilhelm Liebknech, [Karl Marx: Biographical Memoirs], Journeyman Press, London, 1975.

죠수아 M. 번스타인 지음, 정지호 옮김, [맥주의 모든 것], 푸른숲, 2015

프랜시스 윌 지음, 정영목 옮김, [마르크스 평전], 푸른숲, 2001

위키피디아 마르크스 항목

한국역사연구회, <맑스-런던에 있는 그의 유적을 찾아>

Marx on the piss; a London pub crawl with Karl Marx in the late 1850s - Wilhelm Liebknecht

레디앙, <칼스바트의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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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미시적 무의식] #3 작은이성을 지배하는 큰 이성으로서의 신체, 그리고 힘의 의지들 [1] file 효영 2020.02.11 92
121 [미시적 무의식] #2 불안은 어떻게 우리를 추동하는 힘이 될까? file 효영 2020.02.02 142
120 [미시적 무의식] #1 이번 생은 망했다고? [1] file 효영 2020.01.31 208
119 [니체와 춤을] 거미의 비행 수유너머웹진 2019.09.30 182
118 [니체와 춤을] 배우의 철학, 정신의 비행사 수유너머웹진 2019.09.30 68
117 [니체와 춤을] 『즐거운 학문』"정신의 농민혁명"에 대한 고찰 수유너머웹진 2019.05.2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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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장자로 보는 삶] 덕의 향기로서의 사랑 수유너머웹진 2019.04.2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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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장자로 보는 삶] 통로로 존재하는 몸 수유너머웹진 2019.03.2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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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니체와 춤을] 한국 힙합음악과 비극적 영웅의 테마 수유너머웹진 2019.03.0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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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강의후기] <수유너머104 겨울강좌>[ 어팩트affect 입문] 3강 베르그송: 지속의 시간을 흐르는 (무)의식의 힘 후기 수유너머웹진 2019.02.0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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