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자는 왜 논쟁하지 않고 이야기 하는가?

 

 

담 연(수유너머104 장자세미나 튜터)

 

 

 

 

 

확실성의 신, 젊은 비트겐슈타인

석사 20대 후반은 온통 비트겐슈타인 생각뿐이었다. 당시 지도교수님은 비트겐슈타인 영독본을 교재로 매주 토요일 아침 강독을 하셨다. 세미나는 학부 마지막 학기부터 박사과정을 그만 둘 때까지 6년 정도 이어졌다. 이 때문인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는 마치 성경처럼 정신을 지배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논고> 7)’는 그의 경구에 억눌려 나는 확실성 없는 인간사에 침묵하기로 했다. 말을 잃은 시간 속에서 30대가 된 어느 날 문득 너무도 어눌해져버린 내 말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불변하는 세계, 진리의 언어

장자의 어법을 말하면서 왜 비트겐슈타인을 꺼내는가. 내 안에서 이들 사유는 닿아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세계와 언어는 고정된 것이고 일대일 대응관계를 이룬다고 본다. 여기서 그는 세계의 진실은 고정불변하는 것이며 언어는 이같은 진리를 거울처럼 반영한다고 말한다.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이 세계에도 영원불변하는 진리가 있고 언어는 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변해가는 사랑에 슬퍼하고 믿었던 친구를 잃어가며 나도 이 땅에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영원히 변치않는 진리가 있기를 바랬다. 그 희망을 채워준 이가 비트겐슈타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그림처럼 반영한다고 본 명제의 진리값 분석을 통해서 참/거짓을 구별하고, ‘말할 수 있는 것말할 수 없는 것을 가른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정확히 말하게 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침묵시켰다. 그에 따르면 수 천 년 간의 철학사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말해 온 오류의 역사. 그는 명제분석을 통해 언어와 세계가 일대일 대응관계를 이루지 못하는 학문 영역, 즉 윤리학, 미학, 신학 등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 온 오류들로 간주하고 학문의 장에서 추방해 버린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침묵시킨 자리에는 과학적 명제들만 떠들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는 이로써 자신의 철학적 임무가 끝났다고 믿고 대학을 떠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할까?

나는 <논고>를 읽으면서 <도덕경>을 떠올렸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침묵시켰다. 그러나 이것들은 보여질 뿐이지만 더 중요한 삶의 의미를 드러낸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정말 말할 수 없는 걸까? 삶의 소중한 의미를 드러낸다면 정작 말해야 하는 것은 이것들이 아닐까? 어떻게 이것을 말할 수 있는가? 답을 찾기 어려웠다. <논고>의 입장을 버린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잔소리, 중얼거림 등으로 생각을 끌적인다. 엄밀한 논리적 체계의 성을 완성했던 전기의 글은 사라지고 없었다.

 

세계는 변한다

그의 세계관은 불변에서 변화로 흘러갔다. 세계와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언어도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쓸모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지고 폐기된다. 그러니 고정된 진리를 찾겠다는 열망을 버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말하라. 이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다.

 

변하는 세계를 드러내는 언어가 있는가?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변화를 담는 언어가 어떻게 가능할까? 노자 <도덕경> 1장이 맴돌았다. ‘도를 말할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말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세계의 시작을 말하고 유는 만물을 통칭한다. 그러므로 항상 무로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보려하고 유로는 만물을 본다. 이 두 가지는 세상에 함께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함께 있다는 이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모든 오묘한 것들의 문이다(<도덕경> 1).’ 도대체 무슨 소린가?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연구실을 오가며 오전마다 108배를 하고 <도덕경>을 외웠지만 뜻을 몰랐다. 새로 들어간 대학원에서 도가철학을 접하고서야 비트겐슈타인이 이해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희망이 만든 고정된 진리의 성을 스스로 깨고 나온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아상의 탈피다. 고정된 세계와 그것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고정된 언어가 있다는 그의 관점은 변하는 세계 안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의 확실한 지반이 있기를 바라는 확실성에의 열망이 만든 신기루였다. 이러한 열망은 불확실성의 세계를 살아야 하는 인간의 두려움 때문에 생긴다.

 

 

 

있는 그대로 보라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불변하는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대로 꾸며냈다. 그 희망의 결과 탄생한 철학적 개념이 일대일 진리함수 이론이고 그림 이론이다. 하지만 후기에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본다. 불완전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불안이 고정 불변하는 진리를 만들었음을 깨닫고 세계의 진실은 변화임을 통찰한 것이다. 가치 판단에서 사실 판단으로의 전환이었다.

 

 

변화하는 세계의 원리, ()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노자와 통하는 지점이 여기다. 이들은 세계가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여기서 노자는 비트겐슈타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묻고 유무라는 대립적 측면이 상생하는 형태로 변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이 원리를 도라고 부른다. 장자는 노자의 사유를 이어받아 음양 상반의 두 측면으로 구성된 일기(一氣)의 변화로 세계를 설명하고, 이 원리를 도라고 부른다.

 

 

놀이하는 인간, 도구로서의 언어

그렇다면 변하는 세계를 언어는 어떻게 드러내는가?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언어 놀이(language game)를 한다고 말한다. 쓸모에 맞게 언어를 만들고 또 버리는 놀이 말이다. 노자는 변해가는 세계를 드러낼 고정된 명제()는 없다고 보고 은유를 통한 시적 언어로 <도덕경>을 쓴다. 장자도 은유적 이야기(寓言)로 세계 변화를 노래한다. 개념화된 명제()와 지식()은 시비를 따지며 논쟁하는 다툼의 도구(名也者相軋也. 知也者爭之器也)지만 이야기는 세계를 다양한 은유로 노래한다. 이야기는 시비를 논하지 않기에 다툼이 없다. 다만 다양한 삶의 의미를 다양한 은유들로 노래할 뿐이다. 이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장자가 공유하는 세계에 대한 통찰이고 언어관이다. 영원히 고정된 옮음이나 그름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을 반영하는 고정된 언어도 없다. 세계는 계속 변하고 언어는 그 변화를 다양한 은유들로 노래하는 인간의 놀이 도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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