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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론의 개념들] 자기반영성의 정치학

수유너머웹진 2014.09.03 16:24 조회 수 : 21

자기반영성의 정치학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문지용





1. 들어가며


본 에세이에서는 영화의 자기반영성 개념을 현대 영화이론의 정치화된 경향과 결부시켜 간략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우선 장 루이 보드리의 장치 이론을 중심으로 주류 영화의 메커니즘에 도전하는 영화이론들과 그러한 이론들이 어떠한 영화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본 이후, 그 대안의 중요한 요소로 평가되는 자기반영성 개념에 관하여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유사하면서도 대조적인 세 텍스트, 장 뤽 고다르의 <경멸> 및 <만사형통>과 프랑소와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을 분석함으로써 자기반영성이 실제 텍스트에 있어서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그 정치성은 어떠한지 알아보는 것으로서 에세이를 매듭짓고자 한다.






2. 영화이론의 정치화와 대안적 영화


현대 영화이론은 1968년의 정치적 격변을 전후한 시대적 상황,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의 호명 작업을 조명하는 알튀세주의의 등장, 영화학의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하여야 하는 내부적 요구 등과 마주하면서 급속하게 정치화되었다. 프랑스의 <까이에 뒤 시네마>와 <시네티크>, 영국의 <스크린>과 <프레임워크>를 비롯하여 마르크스주의와 좌파에 경도된 영화잡지들이 확산되었다. 이들은 영화의 특성과 기능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을 - ‘제도로서의 영화가 갖는 이데올로기적 역할은 무엇인가? 감독은 어떤 스타일과 내러티브 구조를 채택해야 하는가? 영화는 어떻게 사회적 투쟁에 기여할 수 있는가?’- 제기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작업이 장 루이 보드리가 <기본적 영화 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와 <장치> 등에서 고안한 장치 이론이다. 장치 이론은 영화관과 영사 장비의 물질적·기술적 조건, 르네상스 회화에서부터 시작된 단일 시점 단안 원근법, 내러티브 편집 관습, 초월적 주체의 구성 등을 통하여 현대의 주류 영화가 존재의 실제 조건을 상상적인 방식으로 재현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을 주체로 호명, 결과적으로 부르주아/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장 루이 코몰리와 장 나르보니, 콜린 맥케이브, 스티븐 히스와 같은 영화이론가들 역시 “알튀세의 이념을 라캉의 주체 구성이론과 결합하여 영화가 주체들을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적으로 만드는 방식들을 강조했다.” 맥케이브는 영화의 리얼리즘을 4가지로 구분하고 이 가운데 특히 주류 영화의 고전적 리얼리즘은 객관적 담론을 가장하고 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리얼리티를 재현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스티븐 히스는 단절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주류 영화의 영화적 재현 구조가 관객에게 일관성과 완전성의 환상을 가져다준다고 보았다. 코몰리와 나르보니는 <영화/이데올로기/비평>에서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충실하고, 특히 이러한 충실성 자체에 맹목적인 채 어떠한 간극도 변질도 없이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영화들의 범주”를 공격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영화가 대안이어야 하는지의 문제에 있어서, 보드리는 주류 영화의 환영주의 및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대항하여 영화의 작업 과정과 생산의 물질적 기반을 드러내는 저항적 영화의 미학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미학은 ‘인식효과를 불러일으키고’, ‘메커니즘의 폭로를 통해, 즉 영화의 작업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거울상의 고요와 자기 고유의 정체성에 대한 보장을 동시에 무너뜨린다.’ 맥케이브의 혁명적 리얼리즘 영화와 스티븐 히스의 거리두기 개념 또한 유사한 목적으로 혁명적이고 대항적인 영화의 형식을 지향하였고, 코몰리와 나르보니 역시 기의에서의 정치적 행위가 기표 층에서 재현 체계의 비판적 해체와 연결되는 영화(b범주), 기의가 명시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더라도 비판적 형식적 작업이 기의에 작용하는 영화(c범주)를 높이 평가하였다. 위와 같은 대안 영화들의 미학과 형식에 있어서의 핵심은 영화라는 매체·작업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로서, 이는 영화의 자기반영성 개념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할 것이다. 



3. 영화의 자기반영성


영화에 있어서의 반영성의 일반적인 정의는, 영화가 자신의 제작 과정이나 작가성, 텍스트의 과정, 상호텍스트적 영향력이나 그 수용 등을 전경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전경화를 통하여 관객이 영화 매체에 주목하도록 만들어서 예술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투명한 매체이며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이라는 가정을 전복시킨다. 사실상 “모든 예술이 환영주의와 자기반영성 사이의 영원한 긴장 관계를 통해 발달해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영화에 고유한 개념도 아니며, 영화이론의 정치화 시대에 새로이 도입된 개념도 아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자기반영성은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나아가 “자기반영성에 어떤 정치적 가치가 자동적으로 따라붙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술지상주의 미학에 의거할 수도 있고, 유물론에 바탕을 둘 수도 있다. 가벼움의 표시일 수도 있고, 정치적 동기를 지닌 진지함의 표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알튀세뿐만 아니라 브레히트에게도 영향을 받은 1968년 이후의 영화이론은 자기반영성을 정치적 의무라고 간주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경향은 ‘리얼리즘’을 ‘부르주아’와 연결시키고, ‘반영적’인 것을 ‘혁명적’인 것과 동일시하였다. 이에 의하면 주류 영화가 제작의 기호를 지우는 것이 문제가 되었기에 자기반영적인 텍스트가 제작을 전경화시키는 것이 그 해결책인 것이다.따라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영화의 자기반영성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이는 대체로 제작 과정, 텍스트의 과정의 전경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타의 자기반영적 요소의 경우, 급진적 정치학과의 결합이 수월하지 않거나 그다지 필연적이지 않다. 이를테면 현대의 쿠엔틴 타란티노의 텍스트들은 잡식성의 상호텍스트성을 과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는 의문인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제작 과정, 생산 과정이 노출되는 영화에 있어서도 그 정치적 지향은 다양할 수 있는데, 장 뤽 고다르(<경멸>, <만사형통>)와 프랑소와 트뤼포(<아메리카의 밤>)의 텍스트 비교는 그러한 측면에서 유익할 수 있다.



4. 개별 텍스트 분석 : <경멸>, <만사형통>, <아메리카의 밤>을 중심으로


(1) 장 뤽 고다르의 <경멸> (Contempt, 1963)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을 각색한 <경멸>은 영화이론의 정치화가 진행되기 이전(1963년)의 작품으로서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영화 문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이후의 장치 이론이나 <스크린> 이론이 요구하는 바를 어느 정도 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석의 가치가 있다.


<경멸>의 첫 숏은 제작자 프로코슈의 여비서가 시나리오 작가 폴을 기다리며 촬영소를 거니는 모습과 그녀를 수평 트래킹으로 쫓는 카메라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영화 속 영화 <오디세이>의 촬영 현장이 아니라 <경멸> 자체의 현장 풍경이다. 고다르는 이 장면을 트랙과 수직되는 위치에서 촬영하여 화면에 굉장한 깊이를 부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딥 포커스/롱 테이크 숏은 여비서를 따르던 카메라가 이동을 멈추고 정확히 관객 쪽으로 패닝하여 고정되면서 끝난다. 말하자면 이때 영화 속 카메라와 그것을 또 찍는 카메라(관객의 눈)은 서로 마주보게 되는 것이다. 박찬욱, 『박찬욱의 오마주』, 마음산책, 2005, p161


베리만의 <페르소나>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촬영 스태프들의 작업 현장이 노출되는 숏과도 유사한 이러한 수법은 주류 영화의 환영주의에 대한 일종의 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첫 숏 이후 영화는 끊임없이 영화와 영화 생산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혹은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영화 속의 거만하고 천박한 영화 제작자 프로코슈는 단순히 영화 산업 경영자들의 거만함을 상기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영화 산업의 자본주의적 구조를 체화하고 있다. 괴벨스의 격언을 패러디한 그의 대사, “나는 문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수표책을 꺼내지.”는 예술에 대한 무지와 경멸과 더불어 경제적 억압을 파시즘과 결부시켜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그는 <경멸>의 실제 제작자이자 당대 영화계의 거물이었던 카를로 폰티와 조셉 레빈에 대한 고다르 자신의 영화적 저항이기도 하다. 제레미 프로코슈라는 이름부터 ‘조셉’의 첫 글자와 ‘폰티’의 첫 글자가 이니셜이 되게끔 정하여져 있다. 영화 외부의 제작 현실과 내부의 캐릭터가 교묘하게 상응하는 지점에서 고다르는 이미 영화의 자기반영성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취하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 폴은 자신의 재능을 상품처럼 팔아야 하는 현대 예술가의 처지를, 실제 인물이 연기하는 프리츠 랑은 자본에의 종속에 저항하는 영화의 존엄성과 위신을 나타낸다. 랑의 캐릭터 묘사는 고다르가 영화계의 자본주의적 속성에 대하여 아직은 형식의 전면적 파괴로 응답하고 있다기보다는 구시대의 낭만적 예술가상으로 맞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경제적 하부 구조에 대한 분석이 이후 고다르의 텍스트들에 비하여 다소 피상적임을 입증하는 예이다.


<경멸>은 “예술은 스스로 구축원리를 드러내보여야 한다는 브레히트의 원칙을 실천한다. 이 영화는 영화 작업의 단계, 즉 시나리오 쓰기, 장소 헌팅, 캐스팅, 리허설, 러시 시사회 등의 모든 것을 기록한다.” 또한 영화 텍스트의 구축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경멸> 그 자체도 관객이 목격하는 바로 그 과정들을 거쳐 나온 결과물”임을 드러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화 제작 과정의 전경화가 현대 자본주의와 물질 숭배에 대한 비판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경멸>의 본질은 급진적 정치학이라기보다는 낭만적 예술론에 가깝다. 유럽 파시즘에 관한 몇몇 주목할 만한 언급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전체적으로 ‘욕망/미국/자본’에 대한 ‘사랑/유럽/교양’의 ‘경멸’ 구도로 보이기 때문이다.



(2) 장 뤽 고다르의 <만사형통> (All’s Well, 1972)



      



1969년부터 고다르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자인 장 피에르 고랭과 함께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형성하여 활동하는데, 이 시기의 고다르는 “서구 사회의 주변부 인물들을 중요한 탐구 대상으로 삼고, 단일한 주인공보다는 다수의 주인공이 복수의 목소리로 말하는 양식을 택하며, 특히 반 부르주아적이고 반 보수적인 좌파적 경향을 작품의 방향으로 설정한다.” 3년간의 작업 이후 상업영화로 돌아온 고다르와 고랭은 <만사형통>에서 이브 몽탕과 제인 폰다라는 스타를 기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만사형통>은 여전히 지가 베르토프 그룹의 연장선 위에 있다. 이 영화에서 기법은 정치적인 메시지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종속물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가 정치적 메시지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1968년 5월’, ‘1972년 5월’, ‘프랑스’라는 활자 화면이 차례로 지나가고 영화의 각 장면의 큐 사인이 ‘딱따기’로 길게 이어지면서 ‘만사형통 1-1-1er’ 등의 화면이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영화 촬영 현장을 보여주는 일련의 이미지들에 이어서 화면 밖 화자 남녀 두 명이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제반 사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영화 제작에 관해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중략) 이것은 연출, 시나리오, 배우, 미술, 전기 기사, 의상, 기계감독, 스튜디오 대여, 특수효과, 음악, 보험 등에 지불되는 수표를 발행하는 장면을 연속적으로 오래 동안 보여주며 제시되는데, 수표에 서명하는 소리와 서명된 수표를 수표책에서 뜯어내는 소리로 제작비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안보옥, 「장 뤽 고다르의 <만사형통> :갈등과 모순의 영화」, 『프랑스문화예술연구 제36집』, 2011, p534


영화 도입부부터 고다르는 관객들에게 영화의 경제적 기반 및 제도적 하부 구조를 상기시킴으로써, 유물론적 측면에서의 자기반영성을 실행하는 것이다. 아울러 고다르는 극단적인 구조의 공장 세트, 공장의 파업 장면과 마지막 슈퍼마켓 장면에서 냉정한 관찰을 가능케 하는 수평 트래킹 숏, 단절성과 분절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내러티브 기법과 사운드트랙 등의 영화적 장치를 이용하여 관객의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만사형통>은 또한 반모사적 영화이기도 하다. 루카치 식의 비판적 리얼리즘 대신에, 이 영화는 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을 제공한다. 지속되는 모습 그대로의 삶의 한 단편을 제공하는 대신, 이 영화는 사건들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을 제시한다. 볼거리가 현란하지 않은 이 영화는 무비판적 소비를 배격한다. 기하학적 형태로 배치된 화려한 원색들은 바로 정면에 위치시킨 카메라 각도 및 추상적인 화면 잡기와 더불어 시각적인 공간을 평면화시킨다. 자연주의적 영화의 일부러 꾸며 댄 무질서 상태 대신에 <만사형통>은 추상적으로 이미지를‘쌓아올린다.’ (중략) 같은 방식의 도식화는 특정 이미지와 소리의 계산된 반복을 통해 시간적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자연주의적 ‘삶의 한 조각’ 대신에, 우리들은 사회적 실존에 대한 비판적 분절을 제공받는다. 로버트 스탬, 오세필·구종상 옮김, 『자기반영의 영화와 문학』, 한나래, 1998, p306


위와 같은 측면에서 <만사형통>은 전통적인 주류 할리우드 영화와 대항 영화를 구분하는 피터 울렌의 7가지 도식, 즉 내러티브의 타동성 대 내러티브의 자동성, 투명성 대 전경화, 동일화 대 소격효과, 단일한 디제시스 대 다중적 디제시스, 폐쇄 대 틈, 즐거움 대 불쾌, 픽션 대 실재에 가장 효과적으로 부합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만사형통>에서는 영화의 자기반영성과 혁명적 정치학이 효율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순적인 제목과 끝부분의 노골적으로 낙천적인 노래로 표상되는 평온한 외관의 환영주의를 가차 없이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고다르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영화를 통한 정치적 혁명의 시도에 한계를 느끼고 비디오 매체에 대한 탐구에 새롭게 몰두하게 된다.



(3) 프랑소와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 (Day For Night, 1973)


프랑소와 트뤼포는 누벨바그를 함께 주도했던 고다르에 비해 사회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비판 받았던 감독이다. 트뤼포 역시 영화 형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벌였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면밀한 통찰을 이어갔지만, <아메리카의 밤>이 고다르의 <경멸>과 <만사형통>, 혹은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성스러운 창녀를 경계하라>와 반대의 지점에 위치한 텍스트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의 밤>은 영화의 자기반영성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그 본질에 대한 질문을 야기하고 있다.


  

         


<아메리카의 밤>의 도입부는 거리 촬영 장면을 실제인 양 보여주다가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전체 현장의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로써 트뤼포는 영화와 현실의 상호 침투성을 탐구하겠다는 의지를 처음부터 표명한다. 영화는 시나리오 쓰기부터 미술 장식, 배경, 조명의 설정을 거쳐 편집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생산 과정과 그에 수반되는 각종 트릭을 관객에게 보여주며, 심지어 플롯에 있어서도 캐릭터들은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곤 한다. 그리고 광범위한 자기인용이 두드러지는데,


‘거친 소년기’를 겪었다는 등장인물 알퐁스는 <400번의 구타>의 앙투안이 성장하여 배우가 된 모습임에 틀림없다. 거의 식별 불가능한 정지 프레임에 의해 축복되는 알렉상드르와 크리스티앙 사이의 남자들끼리의 우정은 <줄 앤 짐>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페랑이 차를 타고 스튜디오 광장을 도는 모습은 <줄 앤 짐>의 카트린이 짐의 아파트 바깥에서 차를 모는 모습과 비슷하다. 자신의 작품이 영국에서 실패했다고 말하는 페랑의 지적은 불과 수년 전 영국에서 찍었던 <화씨 451>의 흥행 및 비평적 실패를 언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로버트 스탬, 오세필·구종상 옮김, 『자기반영의 영화와 문학』, 한나래, 1998, p166


로버트 스탬은 <아메리카의 밤>에 대하여 ‘탐닉적인 아류 비판’이며, ‘구조적인 비판이 결여’되어 있어서 결과적으로 ‘한 말의 신비화를 위한 한 되의 탈신비화라는 할리우드 공식을 그대로 써먹는다고’ 비판한다. 이 영화에서 자본주의 체제나 영화 산업의 구조에 대한 비판이 희미하다는 것은 <경멸>에서의 프로코슈와는 달리 영화 속 영화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겸손하고 온화한 제작자 베르트랑의 캐릭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 자본의 개입은 언급되기는 하지만, 의심이나 분개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아메리카의 밤>(그리고 트뤼포의 여러 전작들)의 자기반영성에서 강조되는 핵심은 영화라는 예술적 매체에 대한 개인적이고 낭만적인 애정이다. 애드리언 마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메리카의 밤>은 영화 제작이 얽힌 많은 환상을 부드럽게 폭로하면서도 영화의 마력에 대한 경외감도 유지한다. 트뤼포 특유의 활기찬 몽타주 장면은 자기 작업에 얽힌 세속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중을 표현하고 있다. (중략) <아메리카의 밤>이 무의미하다거나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바로 이 수준에서 트뤼포가 이루는 독특한 성취를 간과하는 것이다.”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은 앞에서 언급한 고다르의 두 텍스트에 비하여 반동적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다. 그렇다면 <아메리카의 밤>은 영화의 자기반영성이 선험적으로 정치적 균형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정치적인 것으로 독해될 수도 없다는 예를 입증하는 반동적 텍스트인가? 아니면 장 루이 코몰리와 나르보니의 c범주, 즉 “기의가 명시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지만, 어떤 방식으로는 그렇게 ‘되는’영화의 범주”인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지중해>, <페르소나> 같은 영화들과 동일선상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가?

 


(4) 검토


제인 퓨어는 <사랑은 비를 타고>와 같은 뮤지컬이 보여주는 ‘보수적인 반영성’에 대하여 이야기한 바 있다. 이 영화는 제도로서의 영화를 전경화시키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어떤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욕망도 없이 환영주의 미학 내에서 스펙터클과 기교를 강조한다. <아메리카의 밤>은 스펙터클이나 기교와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자본주의적 생산 혹은 소비 구조에 대한 비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영화 생산 과정의 전경화는 기의의 차원에 보다 가깝고, 기표의 차원에서는 주류 영화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코몰리와 나르보니의 분류법에 의하면, 지탄 받아 마땅한 a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1968년을 전후로 등장한 알튀세주의 영화이론들이 필연적으로 역풍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도 유의하여야 한다. 장치 이론과 <스크린> 이론, 그들이 제시하는 자기반영적 대안 영화의 개념에 대하여 제시되는 반론과 재반박들을 논증하는 것은 본 에세이에서는 지면상 불가능하다. 다만 <아메리카의 밤>에 대한 저항적 혹은 일탈적 독해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여서는 안 된다는 점, 지적이고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고다르의 <경멸>과 <만사형통>에 비하면 쾌락적이고 다소 퇴행적인 텍스트이지만 영화가 선사하는 쾌락이나 작가의 매체에 대한 열정에 지나치게 청교도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가볍게 지적할 수 있다.



5. 결론


보드리의 장치 이론을 비롯한 많은 현대 영화이론이 주류 영화의 환영주의와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비판하였다. 위 이론들은 ‘리얼리즘’과 대조되는 ‘자기반영성’을 대안적 영화의 중요한 요소로 포함시켰는데, 영화의 자기반영성은 기본적으로 매체 자체에 관객이 주목하도록 하는 형식이다. 자기반영성 중에서도 영화 자신의 생산 과정에 대한 전경화가 중시된다. 장 뤽 고다르의 <경멸>은 이러한 반영성과 정치 이론의 만남의 시금석이 되었고, <만사형통>에서 자기반영성의 정치학은 급진성·혁명성에서 가장 완결된 형태를 보여준다. 반면 프랑소와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은 생산 과정의 전경화에는 충실하되 정치와는 결별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호텍스트성과 영화적 인용의 범람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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