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론은 수많은 개념들의 잔치입니다. 리얼리즘, 이데올로기론, 기호학,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디지털 미디어론 등등. 이러한 현란한 개념들은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도 아니고, 아카데미의 전당을 지키기 위해서 대중들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함도 아닙니다. 아마도 영화이론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기보다 혼란스러운 느낌을 받는다면, 아마도 영화에 대한 성찰을 상이한 이론과 접속시키고자 애쓴 실험의 흔적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실험정신에 경의를 표하면서, 그들이 남기고간 실험의 결과물을 명료한 언어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영화이론의 개념들 01] 




현실의 모호성을 담아내는 영화의 리얼리즘

-앙드레 바쟁의 리얼리즘

 


수유너머N 연구원 조지훈





 영화이론은 영화비평을 위한 이론도 아니고 영화제작을 위한 이론은 더더욱 아니다. 도움을 줄 수 있긴 해도 태생적으로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이론은 영화의 미래를 위해 존재한다. 지금까지의 영화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앞으로 있을 흐름을 진단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만약 영화이론이 20세기 중반에 아카데미에 편입한 특정한 학문적 편재를 지칭하는 것만이 아니라면, 영화이론은 한 마디로 영화에 대한 사유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유의 출발점에 앙드레 바쟁을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비록 아카데믹한 영화이론 교수는 아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영화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전망한 시네필이었기 때문이다.



   


바쟁이 영화를 한 큐에 꿰뚫어버리는 마법과도 같은 개념을 제시하거나 이론을 전개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유명하고 논쟁적인 개념은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 리얼리즘이라는 말 자체는 아무것도 의미하는 바가 없는 텅 빈 개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리얼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의미가 뒤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바쟁 역시 이런 지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리얼리즘을 바로 정의하기보다 기존에 회화가 추구했던 리얼리즘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예술상의 리얼리즘 논쟁은 이러한 오해로부터 나온다. 즉 미학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혼동, 이 세계의 구체적이면서도 또한 본질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욕구에 다름 아닌 진정한 리얼리즘과 형체의 착각으로 만족하는 눈속임의 사이비 리얼리즘과의 혼동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16p

 


이처럼 바쟁은 회화에서 전개되었던 리얼리즘이 유사성의 역사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회화에서 리얼리즘은 이 세계의 구체적이면서도 또한 본질적인 의미를 표현하려하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형체의 착각으로 만족하는 눈속임에 가깝다는 것이다. 바쟁이 보기에 이러한 사이비 리얼리즘이 아닌 진정한 리얼리즘은 사진의 출현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사진은 현실을 인간의 눈이 아닌 렌즈를 통해서 광학적이고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기록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능수능란 화가라도 해도 사진만큼 현실을 담아내기는 어렵다. 반면에 사진은 현실을 모사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포착한다. 바쟁은 이러한 사진의 객관성이 영화를 통해서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는 리얼리즘을 인간의 주관성을 넘어서서 현실을 드러낼 수 있는 사진의 객관적인 힘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사진의 존재론을 바탕을 둔 바쟁의 리얼리즘은 이후에 수많은 비판을 받는다. 비판의 핵심은 사진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보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다. 비판가들은 사진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포착하고 구성하고 심지어는 왜곡까지 한다고 말한다. 바쟁의 생각처럼 현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쟁이 회화의 리얼리즘을 비판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쟁에게 현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낸다는 말은 현실을 유사하게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다. 단지 우리의 눈을 착각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바쟁에게 현실을 드러낸다는 것은 현실의 단면을 포착할 때 우리 눈이 지각하지 못했거나 그냥 지나쳤던 지극히 작은 세부지점까지 담아내는 것을 뜻한다. 사진이 객관적으로 리얼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인간의 주관성을 넘어선 세부요소까지 기록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즉 바쟁에게 리얼함이란 우리가 의도하고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출현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실을 얼마나 그럴 듯하게 모사하느냐가 아니라 현실의 모호성을 얼마나 풍요롭게 담아낼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쟁이 높게 평가하는 리얼리즘 경향의 영화는 현란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여 의미를 전달하려는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장면에서 수많은 의미를 끌어낼 수 있도록 화면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영화들이다. 간단히 말해서 짧은 장면들로 이어진 숨이 가뿐 영화들보다 하나의 장면을 길게 잡아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에 빠지게 하는 영화인 것이다. 바쟁은 이러한 리얼리즘 영화의 대표적인 예로 오손 웰즈의 <시민케인>의 한 장면을 들면서 설명한다.

 




<시민케인>의 한 장면인 실패한 자살씬을 보면, 한 화면 속에 자살을 시도한 인물, 그 인물이 먹었음직한 독약이 담겨 있던 약병, 그리고 이를 발견하고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들이 다 들어가 있다. 몽타주를 했다면 각기 하나의 장면으로 분리되었을 수도 있는 요소들이 한 화면에 집결해서 공간적인 깊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이전엔 몽타주에 의존했던 극적 효과들이 여기에선 모두 한번 결정적으로 선택된 화면구성 내에서 산출되고 있다. 이러한 연출방법 즉, 화면에 공간적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몽타주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몽타주를 하나의 화면에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적 깊이는, 그 결과, 연출에 대한 관객의 보다 능동적인 심적 태도를, 또 그리고 적극적인 관여에까지 이끌어낸다... 여기서는 관객은 적어도 최소한의 자기 자신에 의한 선택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영상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어느 정도 관객의 주의와 의지에 달려 있다.” 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104p

 


바쟁의 말처럼 영화에 공간적 깊이가 도입된 결과, 관객은 보다 능동적인 심적 태도를 이끌어내게 된다. 관객은 몽타주에 의해서 유도되는 의미를 파악해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 표현된 공간적 깊이 속에서 자신의 주의와 의지에 따라 영상의 의미가 도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관객은 모호성이 가득한 장면과 마주하면서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바쟁에 따르면 몽타주 기법이 장면 간의 명확한 연결로 의미의 모호성을 지워버린다면, 공간적 깊이는 영상의 구조 속에 적어도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의미의 모호성을 다시금 도입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바쟁에게 리얼리즘 영화, 다시 말해 현실을 드러내는 영화는 다름 아니라 현실의 모호성을 충분히 담아내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의 의도를 전달하고자 애쓰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스스로 의미생산을 할 수 있도록 현실의 공간을 담아내는 풍요로운 영화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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