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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요구되는 '더 높은 도덕성'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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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시민운동을 했고 모든 면에서 진보적인 한 대학동창은 얼마 전 공부 잘하는 둘째딸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느 학교에 갔냐고 물어보니 쭈뼛대며 대답을 피한다. 나중에야 딸이 국내에서 가장 입학하기 어렵다는 외국어고교에 들어간 사실을 알았다. 평소 자사고ㆍ외고 폐지론자였던 친구는 딸을 외고에 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네가 외고에 보낸 게 아니라 딸이 간 거지"라고 하니, 친구는 그제야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학교에서 최상위권인 딸이 문과라서 당연히 외고를 목표로 공부하는데 자기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딸이 공부 잘해 외고에 입학한 것에 대해 특목고 폐지 정책을 지지하는 아빠는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조금 오래된 이야기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2014년 7·30 재보선 당시 격전지인 서울 동작을에 출마했었다. 당시 나 원내대표는 동작대로를 사이에 두고 강남과 분리되는 동작구의 소외감과 박탈감 해소를 위해 주거ㆍ교육ㆍ복지ㆍ안전을 강남수준으로 끌어올려 동작구를 '강남4구'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사기공약", "개인의 이기심에 편승한 개발공약"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공약이 예민한 표심을 건드렸는지, 나 후보는 당선됐다. '강남4구' 공약 때문에 표를 준 유권자들이 있었다면 한심하고 탐욕적인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남4구'에 살고 싶다는 유권자의 욕망을 단지 '탐욕'이라는 말로 재단할 수 있을까.


김욱은 [아주 낯선 상식](2015, 개마고원)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신성 광주'가 탄생하면서 '세속 광주'는 죽음을 맞았다고 쓰고 있다. 5·18 당시 파리코뮌을 능가하는 '절대공동체'를 경험하고 기억하는 광주는 그 기억 때문에 신화화됐고,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광주시민과 호남인들의 욕망은 거세됐다고 주장한다. '착한 호남 콤플렉스'가 작동하면서 호남만큼은 개혁적이어야 하고, 호남색은 지워야 한다는 희생도 강요받아 왔다는 것이다. 이후 대통령선거 등을 거치며 현실정치는 김욱의 바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지만, 그가 얘기한, '세속 광주'와 '신성 광주'의 대립은 여전히 유효하다. 광주의 욕망은 거세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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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전 법무부장관 가족에 대한 검찰수사가 일방적인 '조국 죽이기'로 진행되고 있다. '조국사태'는 21세기 자본주의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총론과 각론들이 뒤엉켜 그야말로 이념의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는데, 이 중 조국 전 장관을 향한 비난은 크게 두 가지 형태다. 첫째는 "혼자 깨끗한 척, 정의로운 척 다하더니…" 라고 요약되는 보수진영(진보-보수의 이분법은 이 글의 취지에 거슬리며, 지양돼야 하지만, 논리전개상 불가피하게 사용하게 됨을 양해 바람)의 반응이다. 두 번째는 "진보세력은 더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하며, 특히 586들은 이제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으로, 진보진영 중 조국 전 장관에 비판적인 입장을 지닌 쪽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주장을 잘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양쪽 모두에 이중적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진우는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라는 제목의 10월 6일자 경향신문 칼럼에서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노선과 맞지 않는 사람을 모두 적으로 낙인찍는 운동권 출신들을 비판하면서 "괴물과 싸우다 보면 스스로 괴물이 된다는 니체의 말처럼 이분법에 저항하던 사람들이 선악의 이원론에 갇혀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생각이 다르다고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이진우의 주장대로 당연히 이원론적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수세력의 진보비판에는 이미 그 내부에 은폐된 이분법적 사고가 존재한다. 


2018년 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정의구현' '인권' 내걸고 뒤로는 성폭력>(2018년 2월 27일자 사설), <정의, 인권 외치든 그들, 권력이 되자 여성에 性갑질>(2018년 3월 9일자 기사). '미투 운동'이 절정에 달하고 소위 진보인사로 불리는 사람들이 차례로 고발대 위에 섰을 때, 조선일보는 신바람이 났다. 제목을 뜯어보면 진보인사들이 그전에는 정의와 인권을 외쳐왔다는 뜻이 숨어있고, 그게 문구에서 '성폭력'이나 '성갑질'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보수는 진보를 공격할 때 진보의 가치를 활용하는데, 그게 사실은 진보적 가치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일부 진보인사가 파렴치한 일을 저질렀다고 정의와 인권이라는 진보적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보수가 진보를 '위선적이다'라고 비난할 때, '위선'은 '선'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다. 즉 보수의 구호에는 진보가 추구하는 '선'이 숨겨져 있고 그 자신도 모르게 선악 이분법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보수가 겉으로 내세우는 구도는 보수-진보의 프레임이다. 한국의 자칭 보수는 그 어떤 보수적 가치도 추구하지 않으면서(100% 그렇다고 얘기하지는 않겠다) '보수'라는 용어가 주는 가치들을 공짜로 향유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한국의 보수는 (스스로 진보를 선으로 인정한) '선-악' 이분법이 숨겨진 '보수-진보'의 이분법을 차용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의 '조국 비판'은 어떤가. 대체로 조국 전 장관 가족의 행위가 정의롭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진보정치인에게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내용이지만, 이 중 흥미로운 건 그 논리 속에 기득권과 정의(도덕성) 둘 중 하나만을 취해야 한다는 주장을 은근히 밀어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골적'이 아닌 '은근히'라고 쓴 것은 실제로 이들이 글에서 그 문구를 앞세워 강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강준만은 11월 11일자 <'진보의 틀'을 바꿔야 한다>는 제목의 한겨레 칼럼에서 불평등 담론이 '1대 99'에서 '20대 80'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민주화 투쟁가들을 얘기하면서 그는 "민생은 소홀히한 채 기득권과 정의를 동시에 독점하려는 이런 정치적 자질은 이젠 정말 곤란하다"고 했다. 정치인에 한정한 듯하지만, 기득권이 어찌 정치분야에만 있으랴. 강준만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넘어 우리사회 가장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는 지식기득권자가 아닌가. 


장정일은 <모순, 과도기, 도약>이라는 제목의 9월 4일자 한국일보 칼럼에서 브누아 페터스의 자크 데리다 전기에 관해 얘기하면서 엉뚱하게도 한국의 바람난 남자들은 서양 유부남과는 다르게 결혼은 결혼대로 유지하고, 새 여자와는 재미만 본다는 비유를 한다. 영화계의 H감독 얘기인 것 같지만 끝부분에 그는 "이 칼럼의 끄트머리에 '조국사태'를 찍어 바르는 것은 좀 뭣하지만, 조국사태와 H감독의 사례에 꼭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아직은 과도기야!"라는 비겁한 말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소설가다운 글솜씨다. 


둘 다 '은근슬쩍'의 대가들이다. '기득권'은 매우 모호하면서도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말인데, 기득권을 무엇으로 해석하든지 간에 진보가 기득권과 정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는 그 자체로 양자택일식 이분법이자, 진보를 선으로, 보수를 악으로 규정하는, 스스로 도덕적 우월감을 유지해온 진보세력의 오랜 이원론적 사고에 기초해 있다. 정리하자면 한국의 진보는 머릿속엔 '선-악'의 이분법에서, 외형적으로는 '보수-진보'의 이분법적 틀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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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 이원론은 멀리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서양 형이상학에서 이원론이 굳어진 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이어지면서 완성된 관념론 철학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로고스(logos)적 질서'를 기본 토대로 하고 있다. 로고스적 질서는 남자와 여자, 선과 악, 해와 달,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 등의 이항대립과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경계를 설정한 뒤 그 둘에 대해 좋고 나쁨의 가치를 대입해왔다. 


이런 근대의 로고스적 질서와 흐름에 정식으로 반기를 든 철학자가 바로 니체다. 니체는 선악 이원론에 포집된 본능과 이성의 대립에 대해 그 기원을 소크라테스에 두고 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본능과 이성에 대해 "이는 먼저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에게서 나타나 그리스도교보다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분열시킨 오래된 도덕적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플라톤은 전력을 기울여 이성과 본능은 자연히 하나의 목적을, 선을, 신을 향하는 것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플라톤 이래의 모든 신학자와 철학자는 같은 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은 정신(본질)과 육체(현상)를 분리하고 전자를 후자의 절대 우위에 둔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전통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이 같은 플라톤주의가 '신의 죽음' 이후에도 면면히 살아오면서 현대성에도 그 '흉한 얼굴'을 드리우고 있다고 일갈했다. 니체는 그와 같은 선악 이원론을 '독단적 철학'이라고 불렀으며, 아시아의 베단타이론과 유럽의 플라톤주의를 그 대표적 사상으로 분류했다. 니체는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거부했다. 

 

"진리가 가상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선입견일 뿐이다."
"어떤 사람에게 정당한 것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정당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만인을 위해 하나의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보다 높은 인간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
"스스로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모든 사람에게 이를 적용하는 온갖 비이기주의적인 도덕은 취향에 죄를 범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 이는 태만의 죄를 범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며 오히려 박애의 가면을 쓰고 더 많이 유혹하는 것이다" [선악의 저편] 중에서
    

 

니체가 도전했던 이원론적 사고체계는 그의 사후 100년이 지난 21세기에도, '탈근대'의 포스트모던의 시대에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지 않은가. 니체는 이에 대해 어떤 해법을 제시할까. 그가 주장하는 것은 관점주의(Perspektivismus)적 태도다. 니체는 "저 훌륭하고 존중할 만한 사물의 가치를 만드는 것이 바로 겉보기에 대립되는 저 나쁜 사물과 위험할 정도로 유사하고, 또 연관되어 있으며, 단단히 연계되어 있고, 어쩌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일 수 있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라고 했다. 또 "관점적 평가와 가상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한, 삶이란 것은 전혀 존립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플라톤 철학에 반대해 니체는 각자 자기의 눈에 맞게 도출된 의견과 해석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에겐 '오류'마저도 긍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니체의 도전은 로고스적 질서를 낡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 틀을 파괴하려는 서양현대철학의 큰 물줄기를 만들어냈다. 니체의 생각을 받아들인 뒤 선과 악을 가르는, 그 차이를 만드는 '경계'를 해체하려는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그 맥락을 잇고 있다.  


'교육의 본질'을 숙고하는 아빠의 교육관과 딸의 진로는 모순적이지 않으며, 약자에 대한 배려와 평등에 대한 천착은 윤택한 삶의 공간을 원하는 욕구와 배치되지 않으며, 광주 시민은 저항과 정의에 대한 역사 인식과 더불어 세속적 삶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 모든 것들이 한 데 엉클어져 일어난 '조국사태'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무엇을 비판하며, 무엇을 지지하고 옹호해야 할까. 욕망과 정의는 동일한 인격체 안에 모순 없이 공존하고 있으며, 그 공존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분법은 위선을 낳는다. 경계를 부수고, '선긋기'를 지양하며, 나아가 보수-진보의 공고한 프레임을 허무는 일은 그 토대에서 자연스러운 과정이 될 것이다. 그 일,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그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은 학자도, 정치인도, 철학적 노동자도 아닌 바로 '우리' 철학자들이다. 


"필연적으로 내일과 모레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철학자는 언제나 그 자신이 사는 오늘과 모순된 상태에 있어왔고 그렇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나는 더욱 생각하게 됐다." [선악의 저편] 6장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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