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에서 ‘윤리’ 내지 ‘도덕’1)은 시대마다 상이한 모습으로 사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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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하는 고대적인 덕 윤리가 ‘덕(virtue)’ 자체를 규정짓는 대신 덕스러운 사람으로부터 드러나는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실천의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면, 중세의 윤리는 신의 이름으로 명명되는 ‘말씀’에 충실할 것을 권함으로써 천명된 도덕을 강조한다. 이는 그 자체가 권위적 명령으로서 당위적 성격을 갖는 오늘 날의 ‘법’과 유사한 형상을 갖는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 윤리학 고찰은 한 차례 전환을 겪는다. 칸트는 법을 중심에 두고 이를 준수하는 인간이 곧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기존의 그림을 전복시켜 인간 자신의 선의지에서 비롯하는 행위가 곧 도덕임을 선언함으로써 ‘부여된’ 도덕이 아니라 인간 의지를 통해 ‘만들어가는’ 도덕을 제안한다. 그 후에 쾌락이라는 실증적 가치를 중심으로 도덕 역시 유용성의 척도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공리주의가 등장한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다시 고대의 덕윤리로 회귀하여야 한다는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나 마이클 샌델이 대표하는 공동체주의, 선의지의 주체 대신 규정불가능한 타자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레비나스나 데리다의 타자의 윤리학 등은 또 다른 윤리의 가능성을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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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처럼 여럿으로 사유되었던 윤리에 또 하나의 방향을 제안할 수 있을텐데, 그것은 지금껏 살펴본 들뢰즈ㆍ가타리가 제안하는 욕망을 둘러싼 윤리학이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비-파시스트적 삶의 입문서”라는 푸코의 아름다운 서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짧지만 강렬한 문장들이 밀도깊게 쓰여진 이 서문은 『안티 오이디푸스』를 “윤리 책”이라고 소개한다. 푸코는 이들이 정신분석과 대결해 제안하는, 그리고 우리가 미시심리학이라고 불렀던, 분열분석의 시도를 “파시즘에 대항하는 삶의 예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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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파시즘이라는 말로부터 나치나 파솔리니를 떠올린다. 때문에 “홀로코스트가 지금도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건 나치군이나 할 수 있지’, ‘그건 2차 대전 히틀러나 할 수 있지’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던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은 나치의 폭력이 채 아물지도 않았던 1960년대에 여전히 파시즘이 유효함을 입증한다. 더불어 우리는 ‘스탠포드 감옥실험’으로 알려진 필립 짐바르도의 예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푸코가 파시즘이라는 말로 전하고자 하는 바는, 밀그램이나 짐바르도가 주장했듯 중요한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과 환경이라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들뢰즈ㆍ가타리는 대규모의 살상을 자행한 파시즘의 파괴적 양상을 우리 안에서 발견한다는 점에서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고 보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저자들은 우리 무의식에 자리하는 욕망의 생산적인 역량이 어떻게 자기파괴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왜 인간은 스스로 예속되기를 욕망하는가?”라는 저자들이 거듭 강조하는 물음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앞서 살폈듯 들뢰즈ㆍ가타리는 자기욕망의 주체가 자기억압의 주체로 변모하는 기이한 과정을 포착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분열자의 형상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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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하여 우리는 앞서 원시영토기계 내지 야만전제군주기계와는 전적으로 구분되는 문명자본주의기계 속에서 욕망의 흐름이 어떻게 사회적 생산과 분리되고 자신의 유동성을 잃어버린 채 정박당하는지 보았다. 이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신자유주의’와 결부지어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과 접합시켜보길 시도한다. 앞서 서론에서 예고했듯, 신자유주의는 각 개인을 스스로 경영하는 입장에서 스스로에게 ‘투자’하고 스스로를 ‘고용’하는 동시에 ‘소비’하는 주체로 만든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생산해내는 새로운 인간상을 사토 오시유키는 ‘자기 경영적 주체’로 명명한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ㆍ가타리의 저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제시할 수 있다. “왜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기 경영적 주체가 되기를 욕망하는가?”

 

 

우리가 마주한 것은 지옥일까, 해방일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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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말로 직장인은 스스로를 ‘노예’로 칭하고, 통장을 스쳐지나가는 ‘월급뽕’을 맞으며 고된 한 달 한 달을 견뎌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자조적인 말들이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는 것만은 아니다. 직장인의 미래는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암담하고 불안정한 것일 수도 있지만, 고속 승진과 함께 밝은 미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기업은 언제나 이 지점에 힘을 주어 말한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능력과 그 능력을 개발할 의지이다.” 때문에 직장인의 마약은 월급뽕만이 아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 모든 것이 내 노력에 달려있다는 무한한 가능성, 그것은 모든 직장인을 좌절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무한동력을 받아 노동에 전념하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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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플랫폼 노동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는 지금 시점에서 많은 노동의 양상은 ‘기업의존 패러다임’으로부터 ‘탈기업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고 있다. ‘사람구름떼(human cloud)’라고 불리는 플랫폼노동자들은 ‘일자리’가 아닌 ‘일거리’를 찾는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노동을 선택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플랫폼 노동이 가리키는 것은 노동의 불안정성만은 아니다. 더욱이 박장현(2020)이 지적하듯, 우리가 “오늘은 이런 노동을, 내일은 저런 노동을 한다. 사냥꾼, 어부, 목부, 비평가라는 직업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마음이 내키는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낮에는 물고기를 잡고, 오후에는 가축을 돌보고, 저녁에는 비평을 한다”는 맑스가 그리는 공산주의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고용의 불안정성은 역설적이게도 ‘노동 해방’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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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저 물음의 의도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노력과 의지로 스스로를 꾸준히 계발해서 보다 나은 노동조건과 환경에서 더 적은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 오히려 우리는 거꾸로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왜 우리는 스스로 자기 경영적 주체가 되기를 욕망하면 안 되는가?”

 

 

신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로의 회귀일까

앞서 들뢰즈ㆍ가타리의 자본주의 사회체에 대한 분석은 욕망과 불가결하게 결부된 것임을 보았다. 자본이라는 단일한 흐름으로 모든 욕망이 쏠리도록 만들면서, 자본주의 사회체 자신을 유지하고 작동케하는 것은 바로 생산적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억압과 강제의 모습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생산과 소비를 장려하고 순환되는 돈의 흐름 속에 개인의 욕망을 투여시키는 방식으로 모든 욕망은 구별없이 북돋아진다. 그것이 앞서 언급했던 메슬로의 욕구계층이론에서처럼, 생리적 욕구인지, 존중 욕구인지 혹은 자아실현 욕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 욕구들이 소비와 생산, 재생산의 고리에 동참하는 자본의 순환 안으로 귀속된다면 말이다.

가령 영화 <타짜>(2006)에는 전문도박꾼이 아닌 일반인이 화투로 벌이는 ‘섯다’판에 발을 들였다가 돌아갈 차비까지 몽땅 잃은 장면이 나온다. 그 곳을 관리하는 이로 보이는 한 남성이 그에게 측은한 눈길로 약간의 돈을 차비라며 건넨다. 그러나 돈을 받은 그가 되돌아간 곳은 그의 집이 아니라 또다시 섯다판이었다. 바로 다음 장면으로 그에게 돈을 건넸던 남성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런 사정을 여러 번 보았던지 희미한 미소를 짓는 그의 표정은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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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오직 돈의 흐름만을 유일한 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 기계가 얼굴을 가졌다면 이 남성의 모습과 같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는 당장 우리 주머니에 얼만큼 많은 돈이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얼마를 가졌든, 그 돈을 모두 소비에 쏟아낼 수 있게 한다면 성공이다. 혹시 돈을 모조리 써버린다면, 영화 속 남성처럼 얼만큼의 돈을 쥐어줄지도 모른다. 그를 종잣돈 삼아 또 다시 자본의 흐름에 참여할 것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푸코는 이처럼 섬뜩한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신자유주의(néolibéralisme)’라고 일컬어지는 고도로 계산적인 사회의 시스템 분석에 참조할 만한 중요한 연구를 남긴다.

알려져있듯 푸코가 학교, 병원, 감옥, 공장 등 ‘규율장치(dispositif disciplinaires)’라고 명명한 것들에 전념했던 것은 1970년대 전반의 일이다. 이때에 푸코는 통치체제가 어떻게 사회의 구석구석에까지 규율장치들을 작동시킴으로써 신체부터 규범을 내면화한 복종적인 주체를 만들어내는지 고발한다. 가령 우리는 학교라는 말에서 구령대 중앙에 선 교사와 일렬종대로 그 아래에 줄맞춰 서있는 학생의 배치를 떠올린다. 그런데 어떤 대화에서 나는 그러한 학교의 배치가 일반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1990년대에 두 자녀를 프랑스에서 키웠던 그는 프랑스의 학교 어디에서도 구령대를 갖춘 네모진 운동장은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와 유사한 배치의 학교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육군 사관학교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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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규율 장치’로서 학교와 군대를 병렬적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을 지시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교복을 입고 교가를 부르며 교훈을 제창하는 학생은 학교가 지시하는 방향을 글로 배우거나 암기하지 않는다. 학생은 사소한 행동양식에서부터 사유의 방향까지 교육체제가 규제하는 내용을 따라 스스로를 바꾸어 나간다. 푸코는 규율 장치라는 말로써 이처럼 각 개인에게 주어진 방식을 신체 속에 습성화하고 스스로 내면화하는 주체를 양성하는 기구를 폭로한다. 이러한 성찰의 기록이 바로 『감시와 처벌』(1975)이었다.

그리고 1978년부터 1979년에 걸쳐 푸코가 콜레주드프랑스에서 진행했던 강의는 그와는 또 다른 고민을 드러낸다.

통상 신자유주의는 흔히 공공부문을 축소하고 민영화하는 방향으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애덤 스미스식의 자유 시장의 원리로 회귀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그는 신자유주의로의 대대적인 전환의 시기에 권력의 요체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하는데, 마침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으로 남은 푸코의 강의가 종료된 것은 마거릿 대처의 수상 취임(1979년 5월)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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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때는 복지국가적 체제에서 신자유주의적 체제로의 변환을 알리던 시기였다. 그리고 푸코는 이미 신자유주의가 단순히 자유시장원리로 회귀함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간파한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전략은 푸코가 규율권력이라고 통칭했던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시장 논리를 사회 전체에 관철시키기 위해 실핏줄처럼 미세하게 침투해오는 국가의 개입과 조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푸코는 자신이 규율 권력이라고 명명했던 것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규율 전략이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출현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그것은 규율 권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상이한 체제가 등장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규율 권력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임을 뜻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란 정부의 개입을 비가시적으로 확장하면서도, 표면적으로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에 따라 운영되는 ‘자유로운 시장 사회’라는 슬로건 속에 통치 전략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란 그런 점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이미 닳아빠지도록 사용한 낡은 경제 이론의 재활성화”3)가 결코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통상 신자유주의가 재귀적으로 따른다고 가정되는 모델인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푸코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에 따르면,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정부는 원칙적으로 경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자유방임을 요체로 한다. 시장은 스스로 수요와 공급간 조절을 통해 ‘자연스러운(natural)’ 가격, ‘적정한’ 가격을 스스로 부여하는 ‘진실진술의 장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신자유주의에서 시장 매커니즘은 이러한 적정 가격이 ‘자연적으로’ 형성되길 기다리지 않는다. 이제 시장의 원리는 ‘교환’에서 ‘경쟁’으로 이동한다. 정부는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경쟁’이라는 시스템을 인위적으로 가공해낸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에서 자연스러운 가격이 형성되는데 기여하는 경쟁이 자생적으로 발생하지 않음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는 시장의 자발적인 논리를 더욱 철저하게 작동시키기 위해 모순적으로 시장에 개입한다. 푸코가 강조하는바 “경쟁이란 시장에서 발견되는 ‘자연적 소여’가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요체가 되는 경쟁이라는 매커니즘은 곧 국가가 개입해서 만들어낸 사회의 통치 원리이다.

푸코는 관련하여 “이것은 경제적 통치가 아니라 사회의 통치다”4)라고 주장한다. 푸코가 포착하는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 주권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성장이야말로 국가 정치에 확고한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말인데 우리에게도 이는 다소 익숙한 서사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총 7차례에 걸쳐 진행시켰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명박 정권의 MB노믹스로 통칭되는 ‘줄푸세 타고 747로’ 성장 공약, 박근혜 정권의 초기 슬로건이었던 경제민주화를 전도시킨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등, 정치적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고자 했던 지난 한국 정부들의 기조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요체라고 푸코가 지적한 것들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제적인 것이 곧 정치적 주권을 생산한다는 푸코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단은 한국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처럼 정치적 심급이 경제적 심급에 잠식당하고, 정치적 영역이 자율성을 잃게 될 때, 침식당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경제적 성과와 무관한 삶을 사는 개개인이다. ‘경제적 성과=정치적 정당성‘이라는 등식은 ’경제적 성과=개인 삶의 정당성‘이라는 등식으로 그대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경쟁이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인 동시에 개개인의 활동까지 조절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수용될 때, 경쟁에서 도태되는 이들을 위한 자리는 고려되지 않는다.

하이에크는 관련하여 신자유주의로부터 귀결되는 문제점을 1)경쟁, 2)노동 유연성, 3) 사회정책이라고 요약한다. 항상적인 경쟁 시스템이 도입된 노동환경은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이로써 발생하는 노동의 유연성은 실업을 단순히 낮은 수익에서 더 높은 수익으로 이동중인 것으로 간주하여 문제삼지 않으며, 사회보장 내지 소득재분배 정책의 대폭 축소로 인해 병, 사고, 실업과 같은 리스크는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가령 마거릿 대처의 “사회 따위는 없다(there is n such thing as society)”라는 말은 이러한 사정을 일축하기도 한다.

분명히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 이런 정부의 전략은 빈부 격차의 확대와 사회의 양극화, 그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의 증대라는 명시적인 사회적 문제들을 생산한다. 관련하여 프레이저는 이러한 사회적 문제들의 출현은 곧 국가의 ’노골적인 억압‘5)을 불러올 것이라고 하는데, 신자유주의의 기조와 함께 외국인 노동자를 배척하는 인종주의나 자문화ㆍ자민족ㆍ자국민 중심주의를 강조하는 포퓰리즘적 정치가 득세했던 근 몇 년간의 상황은 이것이 이론적 가정만은 아닐 것임을 드러낸다.

 

자기 경영적 주체’의 탄생

노동 역시 신자유주의에서는 재규정된다. 노동자가 스스로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노동력’은 이전처럼 ‘노동시간’만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제2대 시카고학파에 속하는 테어도르 슐츠에 따르면, 인적자본을 구성하는 요소는 ‘자본’과 ‘소득’으로 구분된다. ‘자본’이 노동자가 지닌 적성이나 능력이라면, ‘소득’은 이 자본을 투여해 시장으로부터 할당받는 임금을 뜻한다. 이러한 분석에서 노동력은 기업에 일정 시간만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능력 자본’으로 다뤄진다. 이 때 노동자는 자본을 가진 자본가, 즉 자기 자신의 자본에 대한 기업가로 간주된다.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사람구름떼’라는 말로 요약되는 플랫폼 노동자들, 즉 ‘일자리’ 대신 ‘일거리’를 찾는 새로운 노동방식의 출연은 이런 관점에서 사실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신자유주의 규율 전략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노동자=능력자본’이라고 간주하는 신자유주의는 개개의 노동자에게 개인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노동조건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특정 직종에서 어느 정도의 경력이 쌓이면 많은 직장인들은 이직을 제안받고, 스스로도 하나의 가능한 커리어 플랜으로서 이직을 고려한다. 그러나 사실 이직에는 적지 않은 위험 부담이 따른다. 퇴사와 취업의 시기가 잘 맞물려지지 않았을 때, 불가피하게 보수없이 지내야 하는 기간이 발생하고, 기존의 직장을 정리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드는 심리적 비용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직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은 이 점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직을 택하는 것은, 그것이 더 높은 지위와 보수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푸코는 이러한 이직하는 직장인을 ‘이주자’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투자자’라고 설명한다. “이주는 투자이다. 이주자는 투자자이다. 그는 일정한 향상을 얻어 내기 위해 일정한 투자를 행하는 자기 자신의 기업가(entrepreneur de lui-meme)인 것이다.”6)

푸코가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라는 경제학적 개념과 연결해 시장 원리를 내면화한 주체를 사유한 것은 정확하게 이런 맥락을 지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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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인간’을 뜻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개념은 18세기에 제안된 것으로 본래 “교환하는 인간, 상대방, 교환절차 내에서의 쌍방 중 한사람”7)을 가리켰다. 그리고 푸코는 “확실히 신자유주의에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이론이 발견”되지만, 그것은 예전의 “교환의 상대방”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기업가, [그것도] 자기 자신의 기업가”이다. 신자유주의의 체제 하에서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자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자기 ‘투자’를 망설이지 않고, 그 자본을 다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소비’해서 더 큰 ‘자본’으로 되돌아오는 방법을 고민한다. 이때에 자기 자신은 철저하게 ‘경영의 대상’인 자본이자, 그 자본의 증식을 조정하는 ‘기업가’라는 이중적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시장원리를 자신의 신체 깊숙한 곳까지 지배하는 원리로 수용하여 자신의 신체를 ‘경영’하는 경제적 주체를 뜻하게 된다.

더욱이 대규모 기업들이 기존의 가시적인 상품을 직ㆍ간접적으로 생산했던 것과 달리 점차 플랫폼이라는 비가시적인 공간을 제공하는데 전념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1인 기업’이라고 불리는 소규모 개인사업자들에 대한 수요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가 스스로 ‘기업가’를 자처하며 자기 ‘투자’에 몰두하는 것은 스스로 시장원리를 신체 안에 그대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전개인 셈이다. 바로 이곳이 앞서 언급한 사토 오시유키의 표현을 빌면 ‘자기 경영적 주체’가 탄생하는 지점이다.

푸코는 이런 점에서 기존의 ‘규율 권력’과 구별되는 신자유주의의 규율 전략을 뤼스토의 개념을 빌려 ‘생명 정책(Vitalpolitik)’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전후 독일의 신자유주의의 창시자-‘신자유주의’라는 표현도 1938년 ‘월터 리프먼 콜로키움’에서 그가 처음 제안했다8)-로 꼽히는 뤼스토가 생명정책을 제시했을 때, 그 초점은 전통적인 사회정책처럼 임금의 상승과 노동시간의 단축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일상 환경 제반을 의식하고 개혁하자는 데에 있었다. 그렇기에 뤼스토의 맥락은 단순히 노동자를 자본의 관리 대상으로 삼자는데 있지 않다. 푸코 역시 이들이 주도했던 독일의 신자유주의가 지녔던 ‘차가운 경쟁매커니즘’에 동반되는 소위 ‘뜨거운 가치’라고 불리는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틀’에 대한 고민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러한 독일식 신자유주의의 양의성 때문에 푸코는 훗날 시카고 학파가 이끌게 될 미국의 무정부적 자유주의와 독일의 그것을 분명히 구분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뤼스토의 ‘생명 정책’은 “개인이 자기 자신, 자신의 시간, 자신의 이웃 자신의 미래, 자신이 속한 단체, 자신의 가족과 맺는 관계의 형식”에서 기업 형식을 일반화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공통적인 기조를 잘 드러낸다. 이런 연유로 이 개념을 차용해 푸코는 어떻게 신자유주의가 기업을 보편적으로 일반화된 사회 모델로 만들려고 하는지를 설명한다.

“뤼스토가 말했고 지금 여기서 표현되고 있는 ‘생명 정책’이란 과연 무엇일까? 사실 문제는 잘 알다시피 개인이 자연과 직접 접촉하는 사회의 뼈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초 단위가 바로 기업의 형식을 갖는 사회의 뼈대를 구성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이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면 사적 재산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면 개별 가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소규모 이웃 공동체의 운영이 기업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니라면 소규모 이웃 공동체란 도대체 무엇일까? 달리 말하면 문제는 ‘기업’이라는 형태를 가능한 한 확산시키고 증식시킴으로써 결국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기업’ 형태는 국내적 혹은 국제적 규모의 대기업들이라는 형태 또는 국가라는 일종의 대기업이라는 형태에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사회체 내부에 ‘기업’ 형태를 파급시키는 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관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사회의 부분은 개인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뼈대는 오직 기업으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공장, 학교, 병원은 물론 각각의 마을, 공동체, 가정, 그리고 개인들까지 모든 단위는 기업의 형태로서 사회에 관여하고 부분으로 참여한다. 명시적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설립ㆍ작동하는 기업들 뿐 아니라, 각각의 개인과 가족 등 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들 역시 스스로를 투자의 대상인 동시에 생산의 주체이자 비용을 관리하는 기업가로서 간주하는 사회, 푸코는 이러한 사회를 ‘생명 정책’의 사회라고 명명한다.

 

규율 사회(les sociétés de disciplinaires)’에서 ‘관리 사회(les sociétés de contrôle

푸코가 기존의 ‘규율 권력’과 구분되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를 ‘생명 정책’의 사회로, 그로써 구성되는 경제적 주체를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말로 명명했다면, 들뢰즈는 동일한 맥락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을 ‘규율 사회(les sociétés de discipline)’에서 ‘관리사회(les sociétés de contrôle)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규율적이지만은 않은 ‘관리’ 사회로 우리가 접어들고 있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푸코는 흔히 규율 사회와 그 사회의 주요 수단인 감금(병원과 감옥뿐 아니라 학교, 공장, 병영 등)에 대한 사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우리가 규율 사회에서 한창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지적한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관리 사회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감금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속적 관리와 즉각적 전달을 통해서 기능하는 사회입니다. (...) 교육도 점차 덜 폐쇄적인 공간이 되어가고 있고, 또 다른 폐쇄 사회인 직업 사회와 구별되리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사라지고 대신 끔찍한 평생 교육, 즉 근로자 학생이나 대학 환경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속적 관리의 형태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PP 236-237; 국194-195, 강조는 인용자)

 

 

들뢰즈는 우리가 규율 사회에서 한창 벗어나 관리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가령 그가 위에서 예로 드는 것은 ‘평생 교육’이다. 군대와 구분되지 않았던 훈육소로서의 학교는 이제 들뢰즈의 지적처럼 “점차 덜 폐쇄적인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아침 조례는 방송으로 대체되었고, 더 이상 학생들은 구령대와 짝하는 일렬종대의 배치 속에 놓이지 않는다. 대신 학생들이 마주하는 것은 끊임없는 학습과 훈련을 요구하는 사회와의 대면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학생들은 언제나 물을 것이다. “인생의 행복이 성적순인가요?” “공부를 못하면 안 되나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물음을 이제 천진하다고 여기게 되었는데, 더 이상 학생들은 학업성취와 사회계층간의 필연적인 연결고리를 굳이 묻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친구들은 다 가는 학원을 가지 못하고, 혼자만 뒤쳐진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부모를 질책하기 시작한다. 언젠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원을 운영하는 분으로부터 ‘워킹맘’들은 대개 죄인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일이 있다. 충분한 사교육을 제공하더라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성공적인 입시 전략을 함께 고민할 수 없는 바쁜 직장인 부모는 자녀에게 적지 않은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인이 되면 한국에서의 처절한 수험생활이 “평생 교육”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만약 운좋게 소위 ‘명문대’에 입학하고, ‘대기업’에 입사하더라도 ‘평생 교육’에의 끈질긴 요구는 끝나지 않는다. 입사와 동시에 회사의 이념과 비전을 암기하고, 직군과 무관하게 모의투자로 경영의 실전을 배우며, 영어는 책으로만 배웠던 머리가 흰 중년들도 승진심사를 위해서는 토익스피킹 성적표를 제출해야 하고, 국가의 대외관계에 따라 때마다 내수시장에 진입하는 해외 소비자의 국적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에 맞는 제 2외국어는 언제라도 새로 습득하여야 한다. 영상 매체가 각광받으면 미디어에 대한 학습이 요구되고, SNS가 광고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면 SNS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유저가 되어야 한다.

예상하듯 이처럼 지치지 않고 계속되는 ‘재교육’에의 요구는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이윤을’이라는 단일한 방향을 지시한다. 대개는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게 된다는 농담은 기업에서도 통용되는데, 업무가 아무리 세부적으로 분업화되어있더라도, 기업은 모든 성과를 비용 대비 이익으로 산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업무의 과정상 고유한 특성들은 단일한 척도로 환산되고,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고용자의 업무는 동일하게 방향지워진다. 그에 따라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학습하고 계발하면서 ‘동일한 방향’으로 보다 나아지기를 요구받는다. 들뢰즈가 “끔찍한 평생 교육”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단일한’ 방향으로 스스로를 ‘갱신’하도록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의 집요한 속성을 지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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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주목할 점은 들뢰즈가 관리 사회를 “혹은 소통 사회”라는 말로 달리 표현한다는 것이다. ‘불통이 문제’라는 관점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치는 우리에게도 익숙한데, 들뢰즈가 관리 사회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모습도 바로 이러한 ‘즉각적 소통(communication instantanée)’이다. 이는 관리사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말하게 하고, 지체없이 전달하게 하며, 동일한 말들을 확산토록 한다는 점과 결부된다. 가령 우리는 어떤 침묵과 단절보다 대화와 소통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 개선을 요구한다. “말을 하라. 네 생각을 말하라. 대화를 하라. 소외되지 말라. 이웃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에 참여하라.” 가령 2010년대 초반에 국내에서도 주목받았던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2012)는 관리사회의 소통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어떻게 성격을 도덕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는지를 잘 드러낸다. 저자는 강조하고 있지 않지만 그가 주목하는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외향성에 대한 호의적인 가치평가와 대비되는 내향성에 대한 가치절하는 곧 자본주의의 심화가 성격에도 우위를 설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들뢰즈가 ‘소통’에 대해 갖고 있는 고유한 사유를 집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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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조정자들」(1985)라는 글로 기록된 인터뷰에서 “억압의 힘은 사람들이 말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말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PP 국136)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때 들뢰즈가 떠올리는 것은 똑같은 말들, 정부에서 발표하고 미디어가 실어 나르며 광고가 되풀이하며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든 동일하게 반복되는 말들이다.

가령 장하준(2011)이 말하듯 “200년 전에 노예해방을 외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고, “100년 전에 여자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하면 감옥에 집어 넣었”으며, “50년 전에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테러리스트로 수배 당했”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도 장애인이나 성소수자의 자리, 외국인 노동자의 위치는 그토록 불안정한 것이지만,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특정한 정치적 입장으로 해석될 뿐이다. 굶어죽어 가는 ‘사람’도 있는데 ‘동물’의 권리를 내세우면 한심한 말로 여겨지고, 내국인도 먹고 살기 힘든 마당에 외국인 난민을 수용해야한다고 주장하면 어리석은 말로 회수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철없는 소리, 한심한 소리”란 그만두라는 한없는 질책과 외면 속에서 이런 주장들은 점차 목소리를 잃는다. 앞서 살폈듯, 자본주의 사회체는 ‘받아들여 질 수 없는 욕망’과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욕망’을 스스로 분간하게 만들지만, 또한 동시에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분별하고 스스로 침묵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오직 장려되는 것, “말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할 수 있는 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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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사람들을 맥빠지게 만드는 것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강요나 억압으로서의 “장애물이 아니라, 아무런 흥미없는 제안들”이다. 예상하듯 관리사회에서 끊임없이 소통을 요청받고 말하기를 강요받으면서도, 오직 할 수 있는 말이란 사회에서 용인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들 뿐일 때, 우리는 점차 말에 흥미를 잃는다. 대화는 맥이 빠진다.

가령 사람들은 명절을 지낸 후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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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족이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식탁에 앉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교류가 많지 않아 서로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가족이라면 더욱 그렇다.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럴 때 가족이기에 서로 ‘염려’하는 마음에, 우리가 가장 먼저 묻게 되는 것은 성적, 취업, 결혼으로 압축되는 것들이다. 비록 그것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잔소리일지라도, 말하는 편에서는 진지한 마음일 텐데, 우리는 대개 청소년기에는 공부에 전념해야 하고 결혼은 이성끼리 하는 것이며, 때가 되면 안정된 직장을 얻고 결혼하고 출산을 해야 한다는 반복되는 말들을 끊임없이 들어왔고, 그 말들을 다시 되풀이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관리사회란 이처럼 ‘~해야 한다’는 삶의 당위적인 모습을 끊임없는 ‘말’들을 통해 생산하고 확산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리사회를 빠져나가는 ‘흥미’로운 말들

관련하여 몇 해 전 추석 즈음에 이런 명절 잔소리에 대처하는 법을 소개하는 익살스러운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취직은 했는지, 결혼할 계획은 있는지, 아이는 언제 낳을 건지, 살은 언제 뺄 건지 등의 질문이 쏟아질 때, 하나씩 그것을 물음에 부쳐보자는 것이다. 당숙의 “결혼은 언제 할 건가?”라는 질문에는 “결혼이란 무엇인가”, 조부모의 “외로워서 그런단다.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는 말에는 “후손이란 무엇인가” 등과 같이 답해보라는 것이다. 만약 “얘가 미쳤나”라는 반응이 나온다면, 다시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되묻는 것이다. 이런 대화가 시작된다면 흥미로운 전개를 기대할 수도 있다. 적어도 똑같이 반복되는 말들을 벗어나는 질문이 제기될 때, 가족들은 수저질을 멈추고 반복되던 대화들에서 빠져나가고 ‘벗어나는’ 것,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들뢰즈가 제안하는 관리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예를 들면 이런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기존의 주어진 것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기’ 혹은 ‘빠져나가기‘를 시도해보는 것이고, 이미 성립된 확고한 가치들을 전도시켜 보는 것이다. 그것은 취업과 결혼, 자녀 출산 등이 한국 사회에서 갖고 있는 ‘당위성’에 얽매여 “곧 하겠죠, 뭐”와 같은 어물쩡한 대답을 반복하길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거꾸로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적어도 그런 양식화된 사고가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단죄하고 있음을 눈치재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점차 ‘흥미로운’ 일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면 말이다.

우리는 통상 ‘흥미’를 ‘재미’나 ‘가벼운 관심’ 정도로 이해하지만, 들뢰즈가 ‘흥미’에 주목하는 바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가령 우리가 어떤 문제를 논의하는 토론회에 참석했다고 상상해보자. 에너지ㆍ환경ㆍ도시건설 등 각계의 전문가들이 돌아가며 발언한다. 토론자들은 ‘옳은 말들’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지만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들뢰즈는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토론 자리에서는 누구도 “네가 말하는 것은 아무 흥미가 없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건 틀렸어!”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자리에서 토론의 여지란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하는 것이 틀리는 법은 없다. 틀리는 것이 아니라, 바보 같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을 뿐이다. 수천번도 더 반복된 얘기이기 때문이다. 중요, 필요, 흥미 등의 개념들이 진리의 개념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것이다. 그 개념들이 진리의 개념을 대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말의 진리를 가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P 177; 국136-138)

 

들뢰즈는 누구도 틀리는 법은 없다고 말한다. 대신 흥미롭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흥미없음 때문에 우리는 눈과 귀를 닫고 진저리친다. 생각해보면 ‘옳은 말들’은 그런 경우가 많다. 모두 다 옳음을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해서 문제인 것을 굳이 말로 반복하는 잔소리가 그렇듯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잔소리는 분명 ‘진리(vérité)’이지만, 그것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들뢰즈는 때문에 진리보다 ‘흥미’가 훨씬 더 결정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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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귀가 솔깃한 흥미로운 말들이 흘러나올 때,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대화에 동참한다. 그 이야기로부터 촉발된 것들을 상상하고,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가벼운 흥분을 느낀다. 그럴 때 우리는 안에서 어떤 욕망이 일고 있음을, 그로부터 변화가 생성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말이 단순히 휘발되는 파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흔히 말하듯 ‘전달’을 목적으로 하고 그로써 어떤 ‘행위’를 창출하는 데 겨냥되어있는 것이라면, 말의 진리란 이러한 ‘행위와의 연결됨’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들뢰즈를 따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란 진리보다 결정적이다. 그것은 흥미가 진리를 대신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말의 진리를 가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삶의 예술

들뢰즈ㆍ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진리’의 이름으로 ‘흥미’를 억제하는 것, ‘권위’의 이름으로 ‘충동’을 부정하는 것, ‘오이디푸스’의 이름으로 ‘욕망’을 억압하는 것들과의 대결이다. 다시 푸코의 서문으로 돌아온다면, 이는 곧 스스로의 욕망을 단죄하고 억압해 자기파괴적 양상으로 치닫는 우리 내부의 ‘파시즘’을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살폈듯 파시즘이란 무솔리니나 히틀러와 같이 대규모 인명살상으로 참혹성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가시적인 이념의 문제로 그 폭력의 양상이 포착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펴본 ‘미시적 무의식’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우리의 복수적 욕망과 충동을 ‘단일한’ 방향으로 복종시키고 부정하고 억압하는 양상으로 내부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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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안티 오이디푸스』가 대면하는 세 부류의 적으로 “정치적 금욕주의자”, “욕망의 서툰 기술자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우리의 머리와 우리의 일상 행동 속에 있는 파시즘”을 꼽는다. 앞서 들뢰즈ㆍ가타리가 “욕망적 생산=사회적 생산”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데서 보았듯, ‘정치적 금욕주의자’의 양상과 ‘우리 안의 파시즘’의 양상은 결코 분리된 상이한 층위의 문제가 아니다. 전체, 즉 국가나 민족, 조직을 위한 대의가 정당성을 획득하고 ‘옳다’고 신봉될 때, 억압되는 것은 다름아닌 개개인 안에 내재하는 복수의 욕망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내재하는 욕망들에 우리가 옳음과 옳지 않음의 딱지를 붙일 때, 억압되는 것은 옳지 않기에 존재조차 드러낼 수 없는 욕구와 충동들이다. 때문에 그것이 국가의 관료, 조직의 지도자에 의한 것이든, 자자자신에 의한 것이든 차이는 없다. 욕망의 복수성은 동일한 방식으로 부정당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푸코가 ‘욕망의 서툰 기술자들’이라고 칭하는 무의식의 ‘전문가’인 정신분석가들은 사회적 생산의 문제와 욕망적 생산의 문제를 멀리 떨어트려 놓는데 전념하면서 두 문제를 서로 상이한 것으로 안내한다. 우리의 욕망, 그것은 사회나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성충동에서 비롯하는 인간 본성의 문제이자 부모와의 관계에서 비롯하는 가족의 문제라는 식으로 말이다.

가령 가타리는 이를 “자신 내부의 경찰”이라고 표현한다.

조직의 관료주의라든가 아내와 자식에 대한 활동가의 억압적 태도, 또한 피로, 노이로제, 망상에 대한 활동가의 무지-좌절한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인간을 조롱하든지 끝난 존재라고 생각하여 적극적인 위험분자는 아니더라도 조직에 무용하다고 간주하는 일이 언제나 일어나고 있습니다-등과 같은 문제에 대해 새로운 접근법이 생길 때만 실질적인 파열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를 정치적 관심사의 핵심이라고는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어떠한 조직활동의 임무나 부르주아 권력, 경영자, 경찰 등에 대항하는 자세와 동등한 정도로 중요하게 다룰 때, 실질적인 파열이 일어날 것입니다. 투쟁은 우리 자신의 대열 속에서 우리 자신 내부의 경찰을 상대로 하여 전개되어야 합니다.(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윤수종 역, 푸른숲, 50쪽)

 

대의를 고민하는 활동가가 아내와 자식에게 억압적 태도를 취하는 것, 대의를 위해 열정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에 피로해하거나 좌절하거나 망상에 빠져 있는 자를 무용하다고 간주하는 것, 그것은 옳음을 사유하는 우리가 자신의 욕망에 억압적 태도를 취하는 것, 옳음을 위해 전념해야 할 때에 방해가 되는 상이한 욕망들을 무용하다고 간주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누구나 파시즘의 주체일 수 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파시즘의 주체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스스로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한’ 혁명적 투사라고 믿는다면 말이다. 푸코는 이런 맥락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혁명적 투사라고 믿는 바로 그때(특히 그때), 어떻게 해야 파시스트가 아닐 수 있을까?”를 묻는다.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와 개인의 문제를 분리시켜, 어느 것이 더 시급한 것인지 경중을 가늠하고 위계를 설정하여 그에 전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혹은 애초에 그런 판단의 기준이 되는 옳음을 점검하고 그것을 새로 확립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옳음이든 그것이 신봉되고, 모든 것이 그것‘만을’ 향할 때 우리 안의 파시즘은 이미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푸코의 지적처럼 “권력에 홀딱 반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앞서 살폈듯, 권력 역시 욕망의 한 배치이기에 우리가 홀딱 빠진 권력이란 스스로 만들어낸 권력, 욕망의 특수한 양상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만을 옳음으로 인정하면서 모든 욕망을 그 단일한 지점에 정박시킬 때, 그것은 점점 우리를 결박하기 시작한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그런 정박된 삶, 스스로를 옥죄이는 파시즘적 삶과 결별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의 문제인 흐름으로서의 욕망, 생산기계로서의 욕망, 단일한 욕망에 정박된 신경증자로부터 벗어나 상이한 접속과 절단을 감행하면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현실’을 생산하는 주체로서의 분열자의 형상은 그런 지점에서 출현한다.

무엇보다 들뢰즈ㆍ가타리에게 생산으로서의 무의식 내지 욕망이란 다른 어떤 것이기보다 일종의 산출 역량이자 힘이다. 욕망이 역량이자 힘일 수 있는 것은 그로부터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자 촉발받음으로써 새로운 사유와 행위들이 생산되고 창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존의 습속과 가치, 전달된 말들의 반복이 결코 아니다. 주어진 길을 따르는 법이 결코 없는 욕망기계란 항상 이질적인 항들과의 접속과 절단을 도모하는 가운데 다른 어떤 것과도 같을 수 없는 것, 그렇기에 언제나 처음일 것, 고유한 것, 그렇기에 언제나 새로운 것의 ‘생산’에 몰두한다. 욕망기계의 생산이 언제나 새로움의 ‘창조’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욕망의 창안하는 힘이야말로 들뢰즈ㆍ가타리가 우리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그러나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고유한 측면으로서 조명을 드리우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창안하는 힘이 가장 전면화되는 것은 바로 예술에서이다. 예술이란 기존의 어떤 것과도 다른 고유함을 새로이 창조하는 것, 그로써 새로운 감각과 사유, 방향을 제안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푸코가 ‘파시즘에 대항하는 삶의 예술’이라고 칭했던 것은 욕망의 단일한 방향성이 특권화되면서 권력을 형성하는 우리 안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기술(art)’을 지칭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욕망의 창안하는 힘으로서의 ‘예술(art)’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관련하여 우리는 니체가 “학문을 예술의 관점에서, 예술을 삶의 관점에서” 사유하길 권했다는 점을 떠올릴 수도 있다. 니체는 학문으로 인정받은 기존의 사유를 계승하고 주석을 덧붙이는데 몰두하는 “근면한 노동자”로서의 학자가 아니라, 새로운 사유를 창안하기에 ‘입법자’로서의 학자를 기대한다. 그는 관습과 전통에 충실한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의 창조로서의 예술처럼 학문을 하길 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니체는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것은 오직 삶과 결부된 문제여야 한다고 믿는다. 삶의 관점에서 새로운 가치를 평가하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체에게 새로운 가치 창조로서 학문이 예술의 관점에서 사유되어야 하듯, 가치 창조로서의 예술은 오직 삶의 관점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가치창조와 그 가치를 삶으로부터 판단해야 한다는 니체의 믿음을 우리는 들뢰즈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한다. 들뢰즈에게 역시 욕망이 갖는 가치 창조, 그리고 그것의 가치 판단은 오직 삶에 따를 뿐이다.

 

 

삶을 믿는다는 것_에필로그

아주 사소해보이는 관점의 차이가 어떤 이의 삶 전체를 좌우할 때가 있다. 젊고 멋진 남성과 나이들고 아름답지 않은 여성이 결혼을 결심할 때, 우리는 “나이든 여성이 돈이 많을 것”이라는 수근거림을 듣는다. 누군가 그들은 정말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타박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어느새 우리는 그와 같은 일방적인 해석의 관점을 자신에게도 투영한다. 대단히 부유하거나 높은 관직에 있을 때, 우리는 연인이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부나 명예가 아닌가하는 불안과 의심에 빠진다. 혹은 빛나게 아름다운 육체가 자신에게 머물 때, 연인이 욕망하는 것은 그 찰나의 몸이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두려워한다.

이와 유사한 듯 보이는 또 다른 경우가 있다. 21살에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이어 행정고시와 외무고시에 연달아 합격하면서 최연소 고시 3관왕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공부의 신으로 언론에 소개되었던 모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그 비법을 묻는 질문에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났던 탓에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그의 말에서 외모에 대한 결핍 대신 그마저도 유머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여유를 느낀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찾는 대신,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그 방향에 모든 욕망을 투여한 결과 오늘의 그가 있다는 점을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가 사랑이라는 특별한 관계성마저 결핍의 산물로 여기는 관점이라면, 후자는 결핍을 농담의 소재로 삼을 만큼 가볍게 여기고 넘어서는 관점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전자가 타인의 삶은 물론 자기 자신의 삶마저 판단과 해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으로부터 과거가 판단되도록 물러서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주 삶을 판단하고 해석하려는 유혹에 이끌리지만, 그러한 판단으로부터 우리가 겪게 되는 것은 행복한 만족감과 기쁨만큼이나 자주 우리를 찾아올 좌절과 슬픔이다. 우리는 삶에 대한 해석과 판단 속에서 자주 미래를 비관하거나 낙관하면서 기쁨과 동시에 슬픔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삶‘을’ 판단하는 관점에서 삶‘으로부터’ 모든 것이 판단되도록 물러설 때, 우리는 그러한 격정적인 감정으로부터도 물러설 수 있게 된다. 판단과 해석이 없다면, 미래에 대한 기대나 희망도 없지만, 불안이나 비관도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런 맥락에서 삶에 대한 ‘판단과 해석’에 기반하는 ‘낙관’의 태도를 경계한다. 대신 그는 삶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삶 자체에 대한 ‘긍정’을 강조한다.

결정되지 않은 미래의 전망을 수량화하고 계산하여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비관과 짝하는 ‘낙관’이라면, 수량화되지 않는 무한한 잠재성을 포착하고 그 자체를 다시 시작할 이유로 삼는 것은 부정과 짝하는 ‘긍정’이다. 전자가 합리적 근거에 바탕한 실용적 태도를 반영한다면, 후자는 근거마저 와해시키는 가운데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는 신념의 태도를 반영한다. 전자가 수치화된 가능성으로 삶을 판단하려는 태도라면, 후자는 수량화될 수 없는 잠재성에 따라 펼쳐질 삶에게 판단하도록 내맡기는 태도에 가깝다.

삶을 판단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언제든 그 가능성에 따라 미래를 포기하고 주저앉아버릴 수 있지만, 삶에게 판단을 맡길 때 우리는 결코 어떤 가능성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잠재성에 따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들뢰즈가 해석에 따라 성급히 삶을 비관하거나 막연하게 낙관하는 대신 그 자체를 믿음으로서 긍정할 것을 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삶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파스칼의 주사위 놀이는 종교적 믿음을 권하는 것이기 이전에 하나의 삶의 태도를 제안한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보다 풍성한 삶을 위해서 신을 믿기를 선택할 뿐이다.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 잠재성의 층위를 향해 던지는 주사위 놀이에 실패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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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1)스피노자 혹은 니체를 따른다면 선과 악을 구분짓는 ‘도덕(morals)’과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는 ‘윤리(ethics)’는 혼용될 수 없는 대단히 상이한 영역을 지시한다. 그러나 철학사를 집어보는 맥락에서는 두 영역이 구분되지 않았음을 전제로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2)박장현, “4차 산업혁명, 플랫폼 노동, 그리고?”, 제10회 제2차 맑스코뮤날레 포럼 자료집, 2020, 19쪽 이하 참조.

3)푸코, 『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 189쪽

4)푸코, 『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 219쪽

5)사토 오시유키, 『신자유의와 권력』, 김상운 역, 후마니타스, 2014, 44쪽 재인용

6)푸코, <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 327쪽

7)푸코, 『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 319쪽

8)푸코, <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 193쪽

9)푸코, <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 225-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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