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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은 하나다

앞서 무의식을 구성하는 욕망은 연속적인 흐름으로서 다른 욕망들과의 계속적인 ‘접속’ 내지 ‘절단’을 통해 자신을 전개해나간다는 점을 보았다. 특히 이때의 욕망은 ‘~의 욕망’이라는 말로 한 사람에게 귀속될 수 없는 ‘비인칭적’인 것으로서 욕망의 ‘비인격성’이 강조되었다. 그렇기에 욕망대상 역시 유기적인 인격체라기보다는 파편화된 ‘부분대상’과 결부된다. 만약 욕망의 비인격성을 더욱 밀고내려간다면, 어떤 규정된 욕망의 방향도 확정되지 않는 미규정성의 상태를 지시하는 ‘기관 없는 신체’로까지 우리의 사유를 확장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들뢰즈ㆍ가타리가 다루고자 하는 욕망 개념에 중요한 한 가지 특성을 더할 수 있는데, 이는 욕망이 개인적인 것이기에 사회적인 것과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점과 결부된다. 그러나 이는 사회의 욕망을 구성하는 것들은 결국 개개 욕망의 합이기에 동형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혹은 반대로 이는 사회가 보이지 않게 개인의 욕망을 통제ㆍ조종한다는 성급한 비판도 아니다. 이들이 언급하듯 ‘돈’과 ‘똥’의 유명한 유비 속에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배금주의와 정신분석의 성적욕망간의 동형성을 발견하지만, 이들에게 이러한 유사성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사회적 욕망과 개인적 욕망이 동일한 양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의 욕망이 오직 생산을 자신의 특성으로 삼는 것처럼, 사회 역시 욕망하며,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ㆍ가타리는 사회적 욕망과 개인적 욕망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생산’에 초점을 맞추어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은 하나”라고 표현하길 원한다.

가령 우리는 야만을 문명에 대립시키고, 자연을 인간의 대개념으로 사용하며, 정념을 이성에 반하는 것으로 상상한다. 인간은 그로 인해 문화를 인류의 빛나는 업적으로 삼았고, 자연정복 속에서 인간의 힘을 보았으며, 정념을 통제하는 이성적 인간에게서 완성된 인간상을 찾았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가 중요한 유산으로 삼는 문화와 도시, 종교, 학문 등은 잘 계발된 이성이 발휘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ㆍ가타리가 서있는 생산으로서의 무의식의 관점이라면 매우 다른 대답을 건넬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문화와 도시, 종교, 학문 등 사회적 생산물로 여겨지는 것 역시 모두 욕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만의 특수한 양식을 만들어 전수하고, 잘 구획된 도시를 건설하며 초월적인 존재에 형식을 갖추어 제의를 드리는 것은 모두 그에 상응하는 욕망이 선재한 결과들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매우 상식적인 설명인데,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추동받아 유ㆍ무형의 결과물을 산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직 욕망이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는 설명이 다소 낭만적으로 느껴진다면 우리가 그만큼 통제된 상태에서 무언가를 행하는 것에 익숙한 탓일 것이다.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도시를 상상하고, 문화를 보존하며 신을 믿는 것보다, 도시설계를 지시하는 상관의 명령, 문화를 유산으로 지정하는 국가의 지시, 신을 매개한다는 사제의 설교에 의해 그 모든 것들을 사유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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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ㆍ가타리가 생산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다시 활기를 불어넣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간의 불가결한 친밀성이다. 우리는 쉽게 욕망을 개인의 측면에서 사유하고 그것을 사회적 속성과 구분짓지만, 어떤 사회적 생산물도 개인의 욕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것의 동인은 언제나 생산할 줄 밖에 모르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들뢰즈ㆍ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거듭 ‘사회적 생산(la production sociale)=욕망적 생산(la production désirante)’임을 강조할 때, 그들은 사회적 생산이라는 말 속에서 ‘사회적’임에 주목하고 그것을 ‘개인적’인 욕망과 따로 떼어놓는 통념적인 사고를 문제삼는다. 가령 가타리가 사회적 구도 속에서 욕망의 사적인 측면이 갖는 가치를 문제삼는 다음과 같은 언급은 우리를 그러한 물음으로 인도한다.

 

모든 생산이 이윤법칙에 따라 초코드화되는 사회는 욕망하는 생산과 사회적 생산을 확정적으로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욕망은 사적인 측면으로 기울고, 반면에 사회적인 것은 수익성을 지닌 노동 측면에 국한되지요. 우리가 제기해야만 하는 문제는, 사회적 구도에서 욕망이 생산한 것-꿈, 사랑 행위, 구체적 유토피아-이 자동차나 주방기구와 같이 상업적으로 생산된 것과 동일한 실존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가입니다.(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윤수종 역, 푸른숲, p.34)

 

 

가타리는 사회적 생산물이라고 여겨지는 것들, 소위 교환가치를 획득한 것들과 욕망적 생산에 추동된 것들, 소위 어떤 유용성으로도 환산되지 않는 것들이 동등하게 다뤄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라는 단일한 척도로 모든 것을 환산한다. 언젠가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용화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공모, 실현가능성을 점검해보고, 개별의 프로젝트가 얼만큼의 돈으로 환산될지를 중계하는 tv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재능이나 소질을 발굴하기 위한 토너먼트식 프로그램은 최근에 더욱 가속화되는 모양새이지만, 그 프로그램은 누군가의 꿈을 자본과 직접 결부짓는 시도였기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가타리가 언급하는 “모든 생산이 이윤법칙에 따라 초코드화되는 사회”는 바로 이런 우리의 사회와 다르지 않다. 공산품과 같은 유형자산은 물론 개인의 기술이나 재능과 같은 무형자산 역시 ‘자산’이라는 명칭이 지시하듯 특정한 값으로 환산되는 사회는, 말 그대로 돈이라는 단 하나의 규칙, 즉 코드가 다른 모든 코드들을 초과해 ‘초코드화된’ 사회인 것이다.

예상하듯 돈으로 초코드화된 사회는 이윤을 생산해낼 수 있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에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은 지치지 않고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지만,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욕망적 생산은 사회적 생산에서 취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동차나 주방기구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생산과 꿈이나 사랑을 만들어내는 욕망적 생산에서 동일한 ‘생산’의 속성을 읽어내는 들뢰즈ㆍ가타리는 이로부터 물음을 던진다. 욕망이 생산한 꿈이나 사랑 행위, 구체적 유토피아, 이런 것들은 주방기구처럼 상업적으로 생산된 것과 동일한 실존 가치를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인가?

 

고장난 채로도 작동하는 욕망 기계

이로써 우리는 사회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이 하나라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조화롭게 작동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둘은 자주 차이나 갈등을 빚는다. 가령 앞서 문화나 도시, 종교 등도 욕망의 산물이라는 점을 보았듯, 사회 역시 들뢰즈ㆍ가타리에게는 욕망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단적으로 모든 사회체는 욕망에 의해서 구성된다. 그러나 사회체는 끊임없이 욕망적 생산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대립양상을 구성한다.

여기서 ‘사회체(socius)’란 들뢰즈ㆍ가타리의 고유한 개념이다. 저자들은 욕망의 흐름이 어떻게 조정, 통제되는가에 따라 다양한 사회기계들이 생성된다고 본다. 이러한 욕망의 추동에 의해 나타나는 사회적 생산과정을 저자들은 ‘사회체’라고 지칭한다. 특히 『안티 오이디푸스』 3장에서 저자들은 사회체가 어떤 제도와 규범, 관습 등에 의해 통제되는지, 즉 어떻게 ‘코드화’되는지에 따라, ‘원시 영토 기계’, ‘야만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등 세 가지의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음을 보인다. 토지기계로부터 결연과 혈연을 직조하는 원시적 통일체를 만들어내는 것도, 국가기계로부터 새 결연과 직접 혈연을 맺는 야만 구성체를 이루는 것도 돈-자본 기계로부터 모든 사회의 외부 극한으로서의 문명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것도 모두 욕망이 특정한 방식으로 흘러 모이고 접속한 결과이다.

그렇기에 들뢰즈ㆍ가타리는 사회체 역시 욕망적 생산의 결과물로 다룬다. 다만 욕망은 본래 복수적이고, 각자 정향된 바가 다르기에, 제멋대로이다. 그처럼 제멋대로인 각자의 욕망을 계속 그대로 두었다가는 어떤 사회체도 남아날 수 없다. 때문에 전-자본주의 사회체들은 자신의 유지를 위해 욕망을 어떤 식으로든 묶어두는 방법을 꾀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체의 일이다. 개개의 욕망이 곧 사회의 욕망과 ‘생산’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일성을 자주 잃고 한쪽이 한쪽을 억압하는 식으로 흐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령 들뢰즈ㆍ가타리는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 사이에는 결코 본성의 차이는 없지만, 구별이 있다고 하면서, 두 구별점을 제시한다. 하나는 욕망적 생산은 작동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고장나고, 고장난 채로 작동하지만, 사회적 욕망은 분명 고장 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기능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도 이와 관련된다. 욕망적 생산은 반생산 역시 생산의 일부로 감싸안지만 즉 어떤 파괴나 해체, 소비 등 생산에 반대되는 것들조차 생산의 역량으로 긍정하지만, 사회적 생산은 오직 그것이 재생산에 일조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반생산을 긍정한다. ‘고장’ 내지 ‘반생산’이라는 말이 특징짓는 사회적 욕망은 그런 점에서 무탈없는 기능 작동에만 관심을 갖는 기계, 그렇기에 고장나서는 안 되고 생산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기계, 즉 자기 자신의 보존과 기능유지에만 몰두하는 기계이다.

반면 생산적 욕망은 그 자체로 어떤 질서의 유지와 보존에 반하는 것들이다. 애초에 욕망은 “뒤죽박죽”(AO 139; 국208)이다. 욕망은 홈이 파져 있는 기존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법이 없고, 언제나 어디로 유동하여 흘러넘칠지 모르는 그야말로 제멋대로인 흐름들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욕망이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욕망의 이러한 뒤죽박죽의 성질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성 질서의 유지에 전념하는 사회체의 입장에서 욕망의 이질적인 흐름들은 그 자체가 위협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욕망이 “비-사회적이기 때문에” 즉, 사회적 생산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다. 오직 그것은 본체 주어진 길을 얌전히 따르는 법이 없다는 그 자체의 본성의 특징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이로써 사회체를 위협하는 욕망은 ‘본성상’ 혁명적이라는 속성을 갖게 된다.

사회체가 생산적 욕망의 흐름을 자신의 보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통제하는데 몰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더불어 초기의 사회체가 자유롭게 유동하는 욕망의 흐름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보존을 꾀했다면 이제 사회체는 욕망을 억압하는 대신 이용하는 방식으로 진화해간다. 사회의 구성원 각자가 욕망을 스스로 억압하면서 사회체의 목표에 전념하는 데에만 모든 욕망을 투여한다면 이는 그 어떤 억압보다도 효율적인 자가-억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탄압, 위계, 착취, 예속이 그 자체로 욕망되도록 하는 것이 사회로서는 사활이 걸린 중대한 일”(AO 138; 국208)이 된다. 앞서 살폈던 시쓰기나 음악을 스스로 포기하는 고3 학생의 사례에서 보았던 사회에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욕망’과 ‘받아들여 질 수 없는 욕망’을 스스로 선별하고 검열하는 것은 이처럼 진화된 사회체를 드러내는 한 단면일 것이다.

길게 돌아왔지만, 바로 이로부터 사회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은 본래 하나였으나, 전자가 후자를 억압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이 시대의 상황을 분석하고 그로부터 어떻게 다시 욕망적 생산이 그 ‘생산’적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저자들이 제안하는 분열분석의 중요한 물음이다.

 

 

치사한 소매상과 위대한 탐험가(AO 105; 국163): 신경증자와 분열증자

사회적 생산과 욕망적 생산간 갈등은 소위 현실에 복종하는 ‘신경증자’와 현실과 단절된 ‘분열자’간 비교를 통해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다. 무의식을 본성상 억압으로 규정하는 정신분석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은 모두 자신의 본원적인 성충동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신경증자라는 입장을 견지한다(프로이트는 강박 신경증은 지나친 도덕성과 일치한다고 말하기도 한다)1). 반면 무의식의 본성을 생산에서 찾는 들뢰즈ㆍ가타리는 “우리는 모두 분열자”(AO 80; 국126)라는 입장에 서있다. 달리 말하면 정신분석이 억압없는 인간 존재란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분열분석은 분열적 욕망, 즉 복수의 충동과 욕망들을 갖지 않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로써 정신분석에서는 욕망의 억압이 일종의 정상상태로 간주되지만, 분열분석에서 욕망은 억압과 무관하게 자신을 전개해가는 것이 소위 인간의 ‘정상’상태이자 일종의 자연상태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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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신경증자와 분열증자에 대한 각각의 주목은 이른바 ‘정상적 자아’와 ‘현실’의 관계와 결부된다. 들뢰즈ㆍ가타리의 구분에 따르면 신경증에서는 자아가 현실의 요구들에 복종하는 반면 정신병에서는 자아가 현실과의 단절을 개의치 않는다.(AO 국218) 이는 프로이트 역시 동의하는 구분인데, 그 역시 광기가 근본적으로 현실 상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AO 국219) 여기서 ‘현실 상실’이란 사회적으로 용인될법하지 않은 돌발적인 행위를 두고 ‘현실감각을 상실했다’고 표현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어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시간, 죽음과 더불어 “부정(négation)을 모른다”2)는 말로써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무의식은 그 어떤 법적ㆍ문화적 코드도 알지 못하기에 부정할 어떤 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신분석에서 다뤄지는 무의식 역시 그것은 사랑도 증오도, 규칙도 금지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흐름 그 자체로 사유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정신분석에서 이러한 부정을 모르는 무의식의 본질적 속성이 문제시되기에 “억지 웃음짓는 인형처럼 가정 질서의 인물을, 법률의 대표자”(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윤수종 역, 푸른숲, p.57)를 ‘초자아’라는 인격으로 내세운다면, 분열분석은 그러한 무의식의 금기와 무관한 자유로운 유동성 자체를 긍정한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들뢰즈ㆍ가타리의 분열분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분열분석에서 ‘현실’이 표상하는 지배적 가치에 대한 복종은 생산의 미덕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결코 무의식의 자연스러운 전개로 다뤄지지 않는다. 현실의 요구들에 복종할 때, 어느 새 복수의 욕망들이 지시하는 방향들은 부정되고, 그 생산적 힘들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과의 단절은 분열분석의 관점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그렇다고 분열분석이 현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프로이트가 현실과의 단절을 문제삼았던 것과 달리 들뢰즈ㆍ가타리는 현실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오히려 들뢰즈ㆍ가타리는 “욕망이 생산한다면 그것은 현실(le réel)을 생산한다”(AO 34;국60)는 주장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한다.

앞서 살폈듯, 정신분석은 성충동이라는 억압된 ‘진짜 욕망’과 그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변환되어 유비적인 양상으로 출현하는 ‘가짜 욕망’을 구분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고자 하는 소위 오이디푸스적 욕망은 ‘무의식의 왕도’라 불리는 꿈에서조차 그대로 상영되는 법이 없다. 프로이트가 그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검열(censorship) 내지 심리내적인 방어선(endopsychic defence)이라는 메타포가 자주 출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3) 무의식이 의식의 표면으로 진입을 시도할 때, 그것은 의식의 내용에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면 검열자에 의해 일차적으로 좌절을 겪는다. 그리고 여기서 검열자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 변형과 위장이라는 정교한 메타포가 동원된다. 아버지를 사랑했던 중년 여인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아들과 자신을 대신하는 낯선 여인을 주인공하는 무대에서 성적인 흥분을 동반하는 싸움의 장면 대신 춤을 추는 꿈을 꾸는 식으로 말이다. 이는 모두 억압된 것의 본 모습으로는 검열선 통과가 불가능하니 그것을 적당히 위장하고 변형해 그 경계를 통과하기 위한 전략이다.

예상하듯, 정신분석의 이런 구도에서 욕망이 마주하는 대상들은 비록 그것이 생생하게 현존하는 것들이더라도 근본 욕망을 지시하는 부차적 산물로서 그 실재성을 상실해버린다. 지팡이, 나무줄기, 우산, 열쇠, 복잡한 기계와 기구는 남성 성기를, 깡통, 종이나 나무 상자, 장롱, 난로, 방은 여성 성기를, 계산 사다리, 층계는 성행위를, 심지어 정도(the path of righteousness)인 오른쪽 길은 결혼, 매춘부와의 성교를, 사도(one that of crime)를 의미하는 왼쪽 길은 동성애, 근친상간, 성도착증을 묘사한다4)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끝없는 변형과 위장 속에서 욕망이 위치하는 층위는 점점 상징적인 것으로 이동한다.

때문에 들뢰즈ㆍ가타리가 “욕망의 대상적 존재란 현실 그 자체”라고 강조할 때, 이들은 분명 그러한 억압으로서의 무의식과 그를 대체할 무언가들로 끊임없이 소급되는 욕망의 고리들을 끊고 다시금 우리의 시선을 현실로 환기한다. 그것이 곧 억압된 무의식도 결핍된 충동도 없는 현실, 오직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욕망들만이 가득한 현실이다.

무엇보다 욕망이 생산하는 현실이란 어떤 필요에 의해 추동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핍으로 정의되는 정신분석식의 욕망과 무관하다. ‘필요(besoin)’ 혹은 그의 대개념으로서 ‘결핍(manque)은 여전히 이분법적인 구도를 취한다. 욕망이 곧 대상의 있음과 없음, 그에 따른 만족과 불만족으로 쉽게 이해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들뢰즈ㆍ가타리는 “무의식적 욕망의 인정이 중요하지, 이 욕망의 만족이 중요한 게 아니”(OA 155; 국230)라고 말한다. 애초에 어떤 ’필요‘를 이유로 짝지어진 대상이란 욕망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있는 가운데, 그 욕망의 생산적 활동이 여러 필요와 대상들을 ’결과적‘으로 산출해낼 뿐인 것이다. 가령 쓰고자 하는 욕망이 어떤 사람을 소설가라고 불리게 만들었을 때, 우리는 그가 소설가가 될 필요와 그에 대한 결핍 때문에 무언가를 쓰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의 쓰고자 하는 욕망이 튼튼한 팔과 한 대의 노트북이라는 필요들을 생산했을 것이고, 노트북이 수명을 다 했을 때 결핍을 느끼며 새 노트북에 대한 필요를 느꼈을 뿐일 것이다. 저자들이 “필요들은 욕망이 생산하는 현실계 속에 있는 역-생산물들”이며 “결핍은 욕망의 역-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욕망은 그런 점에서 오직 ’생산‘만 할 뿐이고, 그 생산은 오직 구체적인 ’현실‘에 관여할 뿐인 것이다. 앞서 욕망의 만족 대신 인정이 중요하다고 할 때, 저자들은 욕망을 인정한다는 것은 “욕망적 생산을 침묵시키고 질식시키는 곳”을 떠나 “욕망적 생산을 다시 작동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정신분석이 주목하는 현실의 원칙에 따라 침묵을 강요당하는 복수의 욕망들이 그 생산기계로서의 역량을 다시 펼치는 것, 그것이 바로 욕망의 만족보다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첫걸음인 인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복수의 욕망들이 비로소 인정될 때, 즉 어떤 선별의 강요나 억압없이 그 자체로 기계로 작동하게 될 때, 이 생산적 욕망이 결부되는 지점이 곧 “현실적이고 현행적인 생산성의 차원”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정신분석과 분열분석이 주목하는 아주 상이한 두 가지의 ‘현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정신분석이 무의식을 억압된 것으로 규정하고, 그 억압의 당위성을 ‘신경증자=정상 인간’이라는 도식으로 내세울 때 현실은 문화, 법, 규칙 등으로 이해된다. 정상인으로 간주되는 신경증자는 그러한 금기된 현실의 원칙을 이해하고 그에 순응하기 위해 욕망을 적절히 억압할 줄 아는 인간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분열분석이 생산적 욕망이 생산하는 것은 오직 현실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러한 문화적 코드들과는 무관하게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는 이 생생한 현장 그 자체를 지시한다. 이때에 현실은 역설적이게도 프로이트 자신이 제안했던 것과 같이 어떤 ‘부정’도 모르는 욕망적 생산으로 가득찬 것이 된다. 욕망은 자신의 생산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가운데 충만한 현실을 만들어가는데 몰두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형으로서 들뢰즈ㆍ가타리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보편적 생산자”(AO, 14/31)라고 칭해지는 분열자이다. 그런 점에서 분열자는 ‘억압된 추억’이나 ‘실언, 재치있는 말이나 꿈’과 아무 상관이 없는 현실 그 자체에 주목하는 자이자, 삶의 역동적인 생산의 국면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는 자이다.

들뢰즈ㆍ가타리가 현실의 코드들에 순응한 채 욕망을 억압하는 신경증자를 ‘치사한 소매상’으로, 욕망의 생산적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고 그로 나아가는 분열자를 ‘위대한 탐험가’로 재치있는 비유를 드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앞서 프로이트의 무의식 규정이 어떻게 ‘리비도’라는 단일한 척도에 의해 인간심리를 계산가능한 것으로 전도시키는가를 보았다. 관련하여 프로이트가 언제나 인간 욕망이 어떻게 ‘투자’되었을 때 가장 효율적인가에 몰두해왔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들뢰즈ㆍ가타리의 ‘소상인’이라는 비유가 근거없는 비난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령 꿈 해석에서 꿈의 자원을 조달하는 낮의 사고를 ‘기업가’에, 그 심리적 비용을 부담하는 소원을 ‘자본가’에 비유한다든가, 무의식의 억압된 표상이 의식적 표상으로 진입하는 것을 독일 의학 박사의 명의를 빌리는 방식으로 법망을 피해서만 진료를 할 수 있는 미국 치과의사에 비유하는 구절들5)은 그가 인간 심리구조의 작동기제를 일종의 돈의 순환과 같은 것으로 상상하고 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반면 인간 심리는 그처럼 단일하게 환산될 수 있는 등가적인 것들로 결코 구성된 것이 아님을 분열자는 잘 알고 있다. 분열자는 신체 안에 있는 분열적인 욕망에 따라 이동하고 흘러가는 욕망적 생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분열자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려는 아이‘의’ 욕망이라는 인격에 귀속되는 욕망을 알지 못한다. 그 자체가 복수의 충동들이기에, 그는 자신을 단일한 인격에 귀속시킬 줄 모르고 ‘부정’을 모르는 것이다. 만약 분열자가 현실과 단절된 자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분석이 규정하는 법과 규칙 내지 온갖 금기들로 작동하는 ‘현실’이라는 의미에서 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분열자’란 말로부터, 우리가 통상 ‘인격의 분열’을 떠올린다는 점이다. 이는 병리적 증상으로서의 ‘분열증’과 과정으로서의 ‘분열자’를 혼동하는 것인데, 이는 쉽게 들뢰즈ㆍ가타리의 분열분석이 광증 예찬으로 오인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정작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그런 ‘분열적’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복수적인 것들이 배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즉 무의식은 그 자체로 복수의 충동과 의지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단일한 하나의 동일성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진단하에, 우리의 무의식은 그 자체 분열적이라고 그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임상적 실체’로서의 분열자와 생산적 욕망의 흐름의 유동성을 가시화하는 ‘과정’으로서의 분열자의 구분은 사소한 용어의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는 전자를 ‘분열증자’로, 후자를 ‘분열자’로 구분하여 부를 것인데, 전자가 현행적(actuel)인 층위에서 드러나는 정신병으로서의 분열증자라면, 후자는 잠재적(potentiel)인 층위에서 고찰되는 분열적인 욕망과 현행적(actuel)인 층위에서 드러나는 것이기에 분명히 다른 사태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자유로운 욕망의 흐름인 과정으로서의 분열자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분열증적 과정이란, 우리를 욕망적 생산으로부터 떼어 놓는 벽이나 극한을 뛰어넘고, 욕망의 흐름들을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 이른바 정상적 자아를 녹여 버리는 끊임없는 파괴의 임무를 자신의 정립적 임무와 겸비하지 않는 분열분석은 없다. (...) 분열분석의 임무란, 자아들과 그 전제들을 끈기 있게 해체하는 것, 자아들이 가두고 억압하는 전-인격적 독자성들을 해방하는 것, 자아들이 방출하고 수용하고 또 차단할 수 있을 흐름들을 흐르게 하는 것, 동일성의 조건들에 미치지 못하는 분열들과 절단들을 언제나 더 멀리 더 섬세하게 확립하는 것, 각자를 다시 절단해서 타인들과 묶어 집단을 만드는 욕망 기계들을 조립하는 것이다.(AO 435; 국597-8)

 

곧 분열증적 과정이란, 무의식의 본성상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흐름’이 그 자체로 막힘없이 지나가기에, 충동과 미시적 힘들이 갖는 미규정적 다양성이 그 자체 긍정되는 상태를 뜻한다. 즉 과정으로서의 분열자 개념은 그 자체가 ‘차이들의 유희’를 나타낸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콜브룩은 “욕망을 어떻게 사유하는가는 차이를 어떻게 사유하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5)고 말한다.

들뢰즈는 ‘임상적 실체’로서의 분열증6)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분열증, 즉 분열자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타리 역시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고는 “우리는 항상 분열적 과정과 분열적 과정이 정확히 멈추거나 공전하고 있는 정신병원의 분열증 환자를 구별해왔”다고 답한다.7) 그가 임상적 실체로서 분열증 환자를 ‘분열적 과정이 멈추거나 공전하고 있는’ 상태라고 서술하고 있음에 유의해야한다. 이들이 병리적 증상으로서의 분열증과 거리를 두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미쳐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이미 하나의 ‘증상’으로서 ‘목적없이 빙빙돌고 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분열증적 과정을 공전하거나 멈춤의 상태로 ‘고착’시켜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과정’으로서의 분열자란, 그러한 고착됨없이, 자유로운 흐름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는다. 그로써 그 자체를 하나의 긍정적인 효과로 생산해낸다. 이어 가타리가 자신이 “혁명가가 목적없이 빙빙 돌고 있는 미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혁명가가 분열적 과정의 양태에 따라 자신의 기획을 진전시켜야 한다고 말한 거지요“라고 덧붙이는 대목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이들이 ‘임상적 실체’라고 하는 분열증과 거리를 두고자 하면서도, 그를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것은,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분열자가 내보이는 자유로운 유동성을 자신의 동력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욕망기계들을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모든 방향에서 또 모든 방면에서 무한히 연결할 수 있는 그것들의 능력(pouvoir)”(AO 469; 국638)이라고 들뢰즈가 단언하듯, 욕망기계로서 분열자는 무엇보다 그것의 무한한 ‘능력’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러한 자유로운 유동성이 사고의 편에서건, 행동의 편에서건, 현행적인 ‘증상’으로 드러났을 때, 흐름은 유동성을 잃어버리고 ‘광증’의 상태에 고착되고 만다.8) 달리 말하면, 이들이 구분하고자 하는 두 개념의 변별점은 그것이 ‘흐름’인가 ‘고착 내지 정지’인가라고 할 수 있다. ‘흐름(flux)’이라는 개념은 들뢰즈의 무의식 이론은 물론 그의 사유 전체를 지배하는 중요한 위치에 서있다.9)

여기서 들뢰즈는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부터 흥미로운 개념을 빌려온다. 레비스트로스는 한정된 재료를 활용해야 하는 신화적 사고를 일종의 지적인 ‘손재주꾼(bricoleur)’에 빗대어 설명한 적이 있다. 연장이나 재료를 중시하는 엔지니어와 달리, ‘손재주꾼’은 ‘손쉽게 갖고 있는 것’으로 승부를 본다는 것이다. 그가 갖고 있는 도구와 재료는 항상 얼마 안 되고, 그나마 잡다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본래 모습을 재생시키는가 하면 완전히 새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10) 말하자면 무의식의 흐름들이란 각자 저마다의 방향을 갖고 제멋대로 유동하는 ‘잡다한 것’들이다. 그러나 손재주꾼처럼, 무의식은 이로부터 ‘완전히 새 것’을 만들어낸다. 도구를 닥치는 대로 써서 만든다는 저 브리콜라쥬(bricolage)의 기법처럼, 무의식의 왕성한 생산력은 분열증적 흐름들을 무한한 배치로 조합해낸다. 이를 들뢰즈ㆍ가타리는 ‘기계’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의 작동으로서의 “생산하기와 생산물을 구별할 여지는 없다.”(AO 14; 국31). 오직 그러한 왕성한 생산력으로서의 활동이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과정으로서의 분열자는 무의식의 생산적인 흐름 그 자체를 가리키게 된다.

 

 

아찔한 쾌락과 내재적인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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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는 지금껏 강조되었던 ‘생산’, ‘흐름’, ‘분열’ 등 욕망에 부여된 고유한 속성들이 왜 그 자체로 중요성을 갖는지 ‘쾌락’과의 비교를 통해 다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은 쾌락을 향하기에 인과관계를 맺을 것이라거나 두 개념은 결국 동어반복적이기에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쾌락을 권력과 결부짓는다면, 쾌락은 그 자체로 고유한 측면을 드러낸다. 푸코의 지적처럼 권력은 억압이 아닌 쾌락을 자원으로 작동하는 것이기에 쾌락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의 문제는 권력의 대항담론을 고민하는 문제와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푸코의 이러한 연구가 발표된 시점에 자신이 사유하는 욕망 개념이 어떻게 쾌락과 구분되는지 언급했던 짧은 편지는 그가 가타리와의 공동 작업에서 욕망 개념에 담고자 했던 의미가 곧 ‘내재성’이라는 그의 사유 전체를 지배하는 핵심 개념과 맞닿아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우리는 또한 그로써 왜 저자들이 쉽게 광증예찬으로 오인될 수도 있는 분열자라는 자극적인 인간상을 굳이 이상적인 모델로 선택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 우리는 저자들이 “무의식적 욕망의 인정이 중요하지, 이 욕망의 만족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부분을 보았다. 들뢰즈가 언급하는 푸코의 쾌락 개념과 자신의 욕망 개념의 구분지점 역시 이 ‘만족’의 문제와 결부된다.

들뢰즈는 1977년 작성한 푸코에게 보내는 편지11)에서 자신과 푸코간 차이점을 ‘욕망(désire)’과 ‘쾌락(plaisir)’의 구분으로 제시한다. 이 직전 해에 푸코는 『성의 역사』 1권에 해당하는 ‘앎에의 의지’를 출간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푸코의 시도가, 권력을 더 이상 “부정적인 범주들(광기, 범죄와 같은 ’감금‘의 대상)에 근거하지 않고, 소위 긍정적인 범주(섹슈얼리티)에 근거”한다는 점을 들어 “『감시와 처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RF 113)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들뢰즈는 푸코와 자신간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푸코가 “나는 ’욕망‘이라는 단어를 참을 수가 없다”고 한 데 대한 동일한 응답으로, 들뢰즈가 “나 역시 ‘쾌락’이라는 단어를 참기가 힘들”다는 말로 집약한 것이다. 들뢰즈는 “이것은 단순히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데, 푸코가 “권력의 대항권력으로서의 쾌락”을 탐구했던 것과 달리, 들뢰즈는 “권력에 대한 욕망의 우선성”(RF 115)을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욕망적 생산=사회적 생산”이라는 등식 속에서 어떻게 개인적이라고 칭해지는 욕망이 ‘생산’이라는 본성을 계기로 ‘시회적 생산’과 하나로 칭해질 수 밖에 없는지를 보았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들뢰즈ㆍ가타리는 사회체 역시 욕망의 특정한 흐름이 구성해낸 산출물이라는 입장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회체에서 어떤 지배적인 권한을 획득하고 ‘권력’이라고 불리우는 것 역시 이들의 입장에서는 욕망의 특정한 흐름의 한 양상으로 설명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권력에 대한 대항권력으로서의 쾌락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하는 푸코의 물음은 들뢰즈에게 욕망에 앞선 문제로 사유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저항이라는 현상들의 위상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는 오직 “욕망이 사회적 장을 배치‘하는 것이고, “이 배치들에 의해 생산되는 동시에 그것들을 파괴하고 또 메꾸는 것이 권력의 장치들”(RF 118)이기 때문이다. 즉 들뢰즈의 입장에서 ‘권력’이란 부차적ㆍ파생적인 것이며, 일차적인 것은 그들을 생산하는 ‘욕망’이다.

무엇보다 들뢰즈가 주목하는 푸코의 쾌락 개념은 그것이 어떤 조직 내지 기관을 통해 배출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만족과 무관한 것일 수 없다. 즉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느끼는 “신체에 하나의 조직을 부과하는 것”(RF 120)과 다르지 않은 것이자, “배출-쾌락(plaisir-décharge)”(D 119; 국179)이라는 단어가 드러내듯, ‘배출’하고 ‘만족’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쾌락은 만족을 끝없는 이행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쾌락의 과정을 “자신을 되찾기”(D 119; 국179)라고 규정하는데, 여기서 ‘자신을 되찾’는다는 것은, 이행의 중단으로서, 한 사람의 ‘인격’으로서 고정되어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아찔한 쾌락들, 또는 가장 인위적인 쾌락들조차” 다시 본래 상태를 복원시켜, 긴장의 완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행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들뢰즈ㆍ가타리가 강조하는 ‘기관 없는 신체’와 정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반대로 들뢰즈는 만족과 무관하게 그 자체의 인정이 중시되는 ‘욕망의 긍정성’을 강조한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여하지 않으며, 스스로 채우고 있으며, 자신의 내재성을 건축하는”(MP 193; 국300)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재성’이란 말에 주목하자. ‘내재성(immannence)’은 ‘초월성(transcendance)’의 대개념이다. 초월성은 모든 항들의 바깥에 위치한 ‘초월적’인 것을 상정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내부를 지배하는 단일한 원리 내지 근거를 찾는다.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고 관장하는 인격화된 신일 수도 있고, 자연만물을 지배하는 물리학의 법칙일 수도 있으며 모든 것들을 바로 그것이게 하는 본성으로서의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데아일 수도 있다. 반면 내재성은 그러한 초월적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모든 항들 내부의 ‘관계성’에 의해 모든 것은 결정될 뿐이기 때문이다. 알려져있듯, 현대 철학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도 이러한 초월적 사유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그에 대한 대안적 사유로서 내재성에 대한 주목이었다. 그러나 들뢰즈의 내재성의 사유에 대한 전념은 동시대의 철학자들이 보여주는 비판적 성찰 그 이상의 것이다.

철학이 실증학문으로서의 과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자부심을 느끼고, 사변적인 철학을 대신하는 유물론을 부흥시키던 시대에 역행이라도 하듯, 들뢰즈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형이상학자임에, 그리고 그것은 다른아닌 존재론을 요체로 하는 것임을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그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글로 알려진 「내재성:생명...」은 이러한 그의 신념을 잘 드러낸다.

들뢰즈에게도 내재성이란 어떤 것도 모든 사물보다 우월한 단위로 다른 것에 관계하지 않고, 어떤 것을 종합하는 주체도 없는 가운데, 오직 상호 관계하는 존재의 평면이 있을 뿐이라는 측면에서 사유된다. 그러나 그는 그 존재의 평면에서 각각의 인격으로 표상되는 개별적인 생명이 발딛고 있는 땅 이상의 것을 본다. 그것은 “이런저런 개별성의 생명이 소멸”하고 태어나기를 거듭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존재 전체를 아우르는 평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존재 전체를 배태해내는 초월적 신이나 원리란 가정되지 않기에, 내재성의 장은 그 안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개별 존재들이기도 하다. 개별존재는 개별자인 동시에 존재 전체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인 개별 존재인 동시에 존재 전체인 내재성의 장 속에서, 들뢰즈는 ‘순수 내재성’으로서 ‘생명’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로써 그는 내재성의 사유 속에서 인격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인칭적 개체를 강조하는 동시에, 개별 개체인 동시에 전체와 구분될 수 없는 구분불가능성을 중요하게 다룬다.

우리는 생산적 욕망이 “자신의 내재성을 건축”한다는 그의 표현을 이러한 사정을 미루어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저자들이 생산적 욕망을 언급할 때 “생산하기와 생산물을 구별할 여지는 없다.”면서 생산물과 생산행위간의 구분불가능성을 언급하는 부분을 보았다. 저자들은 이에 덧붙여서 “적어도 생산된 대상은 자신의 여기를 새로운 생산하기로 가져”(AO, 14; 국31)간다고 말한다.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듯이, 생산주체와 생산물은 분명히 구분된다는 것이 우리의 통념이지만, 들뢰즈ㆍ가타리는 애초에 생산‘주체’라고 칭할 것이 없음을 선언했다. 복수의 욕망과 충동들은 그 자체로 단일한 인격에 귀속되지 않는 ‘비인칭적’인 흐름들이기 때문에 ‘주어’로 환원되지 않는 ‘동사’일 뿐이다. 이를 따라 저자들은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생산되었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층위를 상상한다. 욕망들은 자신이 정향된 방향을 따라 흘러가고 그 길목에서 다른 것들과 그때마다 접속하고 절단하기를 반복할 뿐이다. 마치 한 권의 책이 수많은 다른 책으로 손을 뻗도록 유혹하듯이, 그리고 그 흐름을 정신없이 따라가다보면 어디가 촉발지점이었고,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 안내했는지 알 수 없게 되듯이 말이다. 이러한 욕망의 흐름에서는 생산된 욕망과 생산하는 욕망의 구분점은 사라진다.

들뢰즈가 ‘내재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중요한 속성은 이러한 복수적인 욕망의 흐름들 간의 내재적인 관계성이다. 무엇이 무엇과 접속하고 절단되는가에 따라 자신의 속성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생산하기의 역동적인 행위를 이들은 그치지 않는다. 이 흐름에는 어떤 도달할 목적지도 정박될 임무도 복종할 주체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와 달리 들뢰즈가 쾌락에 “참을 수 없음”을 호소했다면, 그가 쾌락에서 만족이라는 목적지와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에 종속됨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산소를 들이마시는 코와 폐, 음식을 통과시키고 섭취하는 식도와 장, 노폐물을 배출하는 방광과 항문은 오직 자신의 ‘기관임’으로서만 쾌락을 얻을 수 있다. 기도(氣道)로는 음식섭취의 쾌락을 취할 수 없고, 입으로는 배출의 쾌락을 얻을 수 없다.

더욱이 쾌락이 한 인격의 감정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들뢰즈가 거듭 주장하는 비인칭적이고 비인격적인 욕망의 흐름들과 동일하게 다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들뢰즈는 차라리 욕망은 “감정(sentiment)이 아니고 감응(affect)”이라는 입장에 서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인격 내지 주체”에 종속된 것이기에 쾌락과 맞닿아있는 것이라면, 감응은 “인격을 넘어서는 욕망의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인격을 넘어서는 비인칭적인 욕망의 흐름을 그는 “내재성을 스스로 구축하는 욕망”이라는 말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1)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p.306

2)프로이트, 「무의식에 관하여」(1915) 5절, 『쾌락원칙을 넘어서』, 열린책들, 2018, p.##

3)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p.186; 288; 324; 383; 548; 552; 567; 599; 601; 639

4)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p.419-425

5)프로이트, 『꿈의 해석』,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p.649-652

6)클레어 콜브룩, 앞의 책, 213쪽

7)크레펠린(E. Kraepellin)의 구분에 따라 프로이트는 주로 ‘조발성 치매‘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블로일러는 이 질병의 근본적인 증상인 분열을 상기시키고자 정신분열증이라는 용어[그리스어 schizō(쪼개다, 가르다)와 phrĕn(정신)의 합성어]를 도입한다(1911). 분열Spaltung의 결과는 심리생활의 서로 다른 영역(사고, 감정,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사고의 흐름을 지배하는 연상장애를 나타낸다. 이 때 병적인 과정의 직접적 표현인 <1차> 증상과, 발병과정에 대한 <병든 정신의 반응>에 해당하는 <2차> 증상이 구분된다. 연상의 해체로 정의되는 1차과정과 달리 2차과정은 관념들이 감정의 복합체 아래 집결되는 방식을 지칭한다. 가령 ’야망 속에 사는 정신 분열증 환자는 자기의 욕망만을 꿈꾸기 때문에, 그것의 실현에 방해가 되는 것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관념 복합체가 형성될 뿐 아니라 강화된다. 그러한 복합체에서 다른 관념으로 가는 연상의 길은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적절한 연상은 효력을 상실한다. 감정으로 점철된 관념 복합체는 계속해서 더 분리되어, 점점 더 독립에 이르게 된다.(심리 기능의 분열)’, Bleuler E., Dementia praecox oder Grupe der Schizophrenien, Leipzig und Wien, 1911, (장 라플랑슈, 『정신분석사전』, 419쪽 재인용)

8)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윤수종 역, 푸른숲, 42쪽

9)들뢰즈는 1989년 이후 니체의 상태가 바로 이런 ‘고착’적인 상태를 지칭하게 되었다는 점을 그 이전의 건강상태와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건강으로부터 병으로, 병으로부터 건강으로의 이동 자체가 그것이 비록 이념의 수준에서의 이동일지라도 하나의 탁월한 건강이며 그러한 이동 그리고 그러한 이동에서의 경쾌함이야말로 ‘위대한 건강’의 징표다.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마지막까지(즉 1888년까지), “나는 절대로 병자가 아니며 실은 극히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근거다. 우리는 마지막에 나쁜 결과로 끝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일은 피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착란에 이른 니체는, 정확히 말해서 이러한 이동성과 이동의 기법을 상실한 니체는 자신의 건강에 의거해서 병으로부터 건강을 보는 관점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ND 9-10; 국17-18)

10)‘정착적 분배’의 대(對)개념인 ‘유목적 분배’(DR 356; 국583), ‘끈적이는 리비도’의 대개념인 ‘막힘없이 흐르는 리비도’(AO 77; 국123) ‘홈패인 공간’의 대개념인 ‘매끄러운 공간’, ‘코드화, 초코드화’와 ‘영토화’의 대개념인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등 들뢰즈 사유가 정향하는 궁극적인 방향지는 언제나 흐름을 지시한다.

11)레비 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안정남 역, 한길사. 1996, 69-71쪽

12)Deleuze, “Désir et Plaisir”, Magazine Littraire, N°325, 1994, p.59-65(이 글은 다시 들뢰즈의 짧은 논문 모음집인 Deux régimes de fous, p.112-122에 실린다). 이 텍스트를 소개하면서 서문에서 프랑수아 에발드(François Ewald)는 이 편지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여기 소개하는 텍스트는 단지 미발표라는 점 외에도 친밀하고 비밀스럽고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A에서 H까지 분류되어있는 이 메모들을 내게 주면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었다. 1977년의 일이다. 당시는 푸코가 󰡔성의 역사󰡕의 서론 격이던 󰡔앎에의 의지󰡕를 출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앎에의 의지󰡕는 성 해방투쟁이 사유되고 있는 범주들의 작용을 다시 문제 삼고 있었다. 그 책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고, 당시 이미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쾌락의 활용󰡕과 󰡔자기에의 배려󰡕의 문제틀로 변전하려고 애쓰고 있던 푸코의 위기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자신의 친구가 고통받고 있다고 느꼈던 들뢰즈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한 이유이다: 여기서 그는 푸코와 자신이 일치하는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정리하고 있다. 이것은 비판이 아니고 논쟁은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는 단절되었던 대화를 재개하고자 하는, 깊은 우정에서 발현된 하나의 초대라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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