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넘어서는 자, 위버멘쉬Übermensch

 

     차라투스트라, 위버멘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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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위버멘쉬에 대한 가르침에서 시작하여, 위버멘쉬의 출현 직전에 끝난다.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간절히 기다리지만,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위버멘쉬는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위대한 정오, 위버멘쉬의 시간에 차라투스트라가 떠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위버멘쉬가 나타나지 않은 채로 끝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 자신이 위버멘쉬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떠나 다른 존재가 되었고, 아무도 자신조차 그를 알아볼 수 없었던 것.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을 능가하는 무엇인가를 창조해왔다. ······ 인간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 보라, 나는 항상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자기극복에 대하여」)


사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자기극복으로서 위버멘쉬를 가르치는 한편,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로 자각함으로써 위버멘쉬-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투스트라 자신은 알지 못했을 지라도, 그의 힘에의 의지는 차라투스트라를 넘어 위버멘쉬의 출현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우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는 과정은, 차라투스트라 스스로 자기 한계를 극복하면서 위버멘쉬로 변신하는 여정이었다. 이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기다리면서 한걸음씩 위버멘쉬를 향해 가고 있었고, 자신의 인간적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는 어느 위대한 정오에 마침내 위버멘쉬로 변신한 것.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호의적인 말을 하는 것을 보라! 그가 그의 적대자인 성직자들을 부드러운 손으로 잡고서 그들과 함께 그들로 인해서 괴로워하는 모습은 어떤가! - 여기서 매 순간 인간이 초월되고, 위버멘쉬라는 개념이 가장 위대한 현실이 된다. ······ 차라투스트라라는 유형에 전형적인 모든 특성들이 위대함의 본질 ······ 차라투스트라가 차지하는 공간이 그렇게 넓고, 대립되는 것에도 이렇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모든 존재 중에 최고의 유형으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가 위버멘쉬로 변신한 것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차라투스트라가 신의 죽음이라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간에게로 내려온 처음부터였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이 시작되는 이야기의 첫 장면에서 니체가 본 것은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적대자들에게 호의를 보일 때, 니체는 그에게서 인간의 자기극복이라는 ‘위버멘쉬의 현실’을 본다. 차라투스트라 역시 대립되는 적대자에게도 이렇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을 존재 중의 최고 유형인 ‘위버멘쉬로 경험’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의 적대자를 대립이 아니라 호의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그들과 다른 높이에 있었고 인간과 다른 위계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버멘쉬 :: 인간도 자아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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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니체는 부르주아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자신의 철학작업을 시작하였다. 청년 니체에서 이행기 니체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작품은 현대성 혹은 인간적 가치와 대결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행기를 넘어 성숙기로 진입하면서, 니체의 작업은 현대적 가치에 대한 비판에서 새로운 가치유형을 제안하는 것으로 이동한다. 위버멘쉬는 성숙기 니체가 제안하는 새로운 가치유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중심이동은 1881년 ‘영원회귀’라는 니체철학의 운명적 계시로부터 시작되어, 권력의지, 차라투스트라, 위버멘쉬 같은 니체 스타일로 표현되는 독특한 개념과 새로운 가치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위버멘쉬는 니체철학의 존재론을 대표한다. 또 다른 니체적 존재로서 강자와 위버멘쉬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먼저, 강자가 ‘어떻게 살 것 인가? 건강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위버멘쉬는 그러한 물음을 개인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차원에서 제기하는 존재이다. ‘삶을 긍정하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유형은 무엇인가?’라고. 또한, 강자가 시대적 가치와 대결하여 가장 높은 곳을 향하여 도약하는 ‘반시대적 존재’라면, 위버멘쉬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여 시대를 넘어서는 ‘비시대적 존재’이다. 그래서 강자는 시대와의 ‘거리’로 정의되고, 위버멘쉬는 시대를 넘어서는 ‘생성’으로 정의된다. 

 

‘위버멘쉬’라는 말은 최고의 완성된 유형을 지칭하는 말로서, ‘현대’인, ‘선한’ 자, 기독교인과 여타의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 그런데 위버멘쉬라는 말은 도처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의도하는 가치와는 정반대의 가치로 순진하게 이해되고 있다. 말하자면 위버멘쉬는 더 높은 인간의 ‘이상주의적인’ 전형으로, 반은 ‘성인’이고 반은 ‘천채’로 이해되는 것이다. ······ 위버멘쉬라는 말을 두고 어떤 소같은 학자들은 나를 다윈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한다. (『이 사람을 보라』 중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니체철학에서 위버멘쉬는 긍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모여진 존재이며, 존재하는 것 가운데 최고형태를 말한다. 그러나 니체철학이 대체로 그러한 것처럼, 위버멘쉬 또한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출현했다. 당시에 위버멘쉬는 반은 성인이고 반은 천채인 ‘이상주의적 인간유형’으로 이해되었다. 심지어 위버멘쉬를 ‘한 단계 더 진화한 인간’으로 오해한 사람들은, 니체를 다윈주의자로 의심하기도 했다. 이러한 오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여서, 위버멘쉬를 완전한 인간, 초능력자, 슈퍼영웅 같은 인간유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위버멘쉬를 초인超人이나 오버맨overman, 슈퍼맨superman으로 번역할 때 생기는 이런 오해를 막기 위해서, 요즘은 대체로 독일어발음 그대로 ‘위버멘쉬’로 쓴다. 

 

오늘날 소심하기 짝이 없는 자들은 묻는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묻는 최초이자 유일한 자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극복될 수 있을까?”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위버멘쉬이다. 바로 그가 내게 유일자이다. 인간도 아니고, 이웃도 아니며, 가장 불행한 자도 아니고, 가장 슬퍼하는 자도 아니며, 가장 선한 자도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보다 지체높은 인간에 대하여」)

 

그런데 니체철학에 대한 오해가 그러하듯이. 위버멘쉬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사소한 실수거나 단지 이해부족이 아니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퍼스펙티브의 차이가 있다. 니체 당시나 오늘날이나 사람들의 관심사는 ‘어떻게 인간을 보존할 것인가?’에 있다. 그러나 니체의 물음은 언제나 ‘인간은 어떻게 극복될 것인가?’이다. 인간의 자기보존(self-preserving) 대 인간의 자기극복(self-overcoming)! 이것은 니체가 우리에게 ‘강자로 살 것인가, 약자로 살 것인가’를 묻는 것과 동일하다. 이것은 옳고 그름이나 선악, 심지어 행복과도 무관한 것이다. 오로지 퍼스펙티브의 문제이며, 내가 어떤 삶의 살고자 하는가 하는 힘에의 의지에 관한 것이다.


인간을 앞에 둔 이 퍼스펙티브의 차이야말로 이해와 오해를 넘어 모든 것의 출발일 것이다. 인간을 유지하고 강화할 목표로 보는가, 인간을 극복하고 넘어설 대상으로 보는가! 인간을 보존해야 할 목표로 보는 한, 위버멘쉬는 ‘인간’의 최고유형이거나 진화한 ‘인간’이라는 방식으로 또다른 인간유형으로 해석될 뿐이다. 반면 인간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한, 위버멘쉬는 인간도 아니고 자아도 아니다. 위버멘쉬는 인간적 유형과는 다른 유형이며, 자아와는 다른 주체이다. 

 

     위버멘쉬 :: 인간을 넘어서는 자, 나를 극복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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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LGBTQ :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그리고 성소수자 전반(Queer) 혹은 성정체성에 관해 갈등하는 사람(Questioning)

 

다수의 특권이라는 원한의 낡아빠진 허위적 구호에 대해서, 인간을 저열하게 만들며 평균화시키고 몰락으로 가져가는 의지에 대해서, 소수의 특권이라는 무섭고도 매혹적인 반대구호가 강력하게 울려퍼졌다! (『도덕의 계보』 1:16)

 

위버멘쉬는 누구인가? 위버멘쉬는 인간적 한계를 딛고 끊임없이 인간을 극복하는 존재이다. 인간을 넘어서는 곳에서 출현하는 존재이며, 나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이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극복할 수 있나?


위버멘쉬Übermensch는 넘어섬을 뜻하는 ‘Über’와 인간을 뜻하는 ‘mensch’가 합쳐진 말인데, 인간을 넘어섬, 인간의 한계를 극복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위버멘쉬는 ‘인간의 자기극복’으로 정의되는 존재이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위버멘쉬는 자기극복이라는 개념을 인물로 극화한Dramatise ‘자기극복의 인격화’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버멘쉬를 어떤 존재로 취급할 때조차, ‘위버-멘쉬하기’ 혹은 ‘위버멘쉬-되기’로 읽어야 한다. 이처럼 위버멘쉬는 ‘목표로 주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과정으로 구성되는 실천’이다. 이것이 위버멘쉬의 가장 중요한 맥락이다. 위버멘쉬는 외부에 존재하는 이상적 모델이 아니라, 자기극복을 통한 변신의 테마이다.


자기극복은 몰락과 생성이 교차하고 반복하는 복합적인 과정이다. 하지만 먼저, 지금의 나로서는 몰락해야 한다. 그래서 위버멘쉬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존재이며, 몰락을 향해 나아가는 역설의 존재이다. 위버멘쉬는 자기정체성의 강화로 일어나는 질적 변화가 아니며, 지금의 자기정체로부터 어떤 것도 승계하지 않는다. 정체성을 확립하는 게 아니라 정체성을 변형하는 것, ‘새로운 나’를 위해서는 ‘지금의 나’를 버리는 것, 그렇게 우리는 나를 넘어선다! 


어떻게 우리는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나? 위버멘쉬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위버멘쉬는 내 안에서 출현하는 것이지만, 나에 의해 출현되는 것은 아니다. 위버멘쉬의 출현에 관한 이러한 이중적 규정은 자기극복의 핵심적인 구조이다. 한편으로, 자기극복은 ‘외부의 변화’가 아니라 ‘나의 변신’을 뜻하는 어떤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위버멘쉬는 내 안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자기극복은 ‘나의 강화’가 아니라 ‘다른 것의 생성’에 의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위버멘쉬는 나에 의해 출현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다른 나! 내재하는 외부로서의 위버멘쉬!
 

그래서 우리는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되어야 하고, 다른 것이 되는 과정에서 위버멘쉬는 출현한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단일한 자아나 통일된 주체가 아니라 정서, 감정, 사고 같은 다양한 의지와 힘들의 복합체이다. 즉 하나의 생명으로서 우리의 신체가 거대한 잠재성을 가진 ‘힘들의 복합체’라면, 우리의 자아는 그때그때 지배적인 ‘힘들의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중심’일 뿐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다른 나’는 주체로 표현되는 지금의 나와 다른 성질을 가진 어떤 주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내 속에는 내가 모르는 내가 너무도 많다. 현재 자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배적인 힘 외에도 다양한 힘들이 잠재적인 형태로 무수히 존재한다. 그렇게 우리의 신체는 잠재성의 총체이다. 그렇다면 위버멘쉬는 우리의 잠재성 가운데 ‘지금의 나’로 있으려는 반동적이고 부정적인 힘들을 극복하고 ‘다른 나’를 향한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힘들이며, 넘어섬을 향해 끊임없이 추동하는 힘의 의지작용이다. 넘어섬을 향한 힘에의 의지로서 위버멘쉬!


우리 안의 위버멘쉬를 어떻게 깨울 것인가? 어떻게 위버멘쉬-되기를 할 것인가? 그것은 지금 시대의 인간 혹은 현재의 나와는 다르게 감각하고 다르게 사유하며, 다르게 가치평가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버멘쉬는 ‘새로운 감각방식, 새로운 사유방식, 새로운 가치평가’에 의해 정의된다. 이렇게 다르게 감각하고 사유하며 다른 가치를 생성하는 동안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그것은 나를 구성하는 동일성의 가치를 해체하는 타자가 되는 것이며, 시대의 다수적 가치와 대결하는 소수자가 되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집단적이고 코뮨적 방식으로 인간적 가치, 시대의 가치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위버멘쉬는 결국 변신과 탈주의 테마로 정식화된다. 생성을 향한 존재의 변신과 비시대를 향한 시대로부터의 탈주! 시대의 내부에서 시대성을 돌파할 다양하고 새로운 유형의 위버멘쉬의 출현을 기다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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