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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무의식을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하는 철학적 자원으로 라이프니츠를 보았다. 라이프니츠는 거시지각과 구분되는 관점에서 격정적일 때뿐만 아니라 완전히 차분한 상태에서도 언제나 우리 안에는 미시적인 지각과 욕구들이 충돌하는 가운데 의지를 자극하는 것들이 있음을 불안 개념을 통해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의식이전의 미시적인 지각과 욕구를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 그것들이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생산해내는 원천적인 지위에 있음을 입증해내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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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시적 무의식의 철학적 자원으로서 또 한 사람의 사상가에 주목하게 되는데, 그는 자아라는 유기체를 해체하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니체이다. 니체는 인간에게 주권을 갖는 진정한 지배적 심급이란 ‘신체’이자, 신체라는 장에서 자신을 전개해나가는 복수의 ‘힘의 의지들’이라고 주장한다.

흔히 니체는 삶(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나 종래의 모든 형이상학의 종언을 알렸던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기억된다. 혹은 56세라는 결코 많지 않은 나이에 절명했으며, 죽음을 앞 둔 10년간은 광기에 휩싸였던 불운한 사상가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집요한 비판과 귀족(적 인간)에 대한 열렬한 찬사, 여성에 대한 지독한 비평들을 기억한다면, 니체는 도무지 친구삼고 싶지 않은 노답의 철학자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악명높은 독설가였던 동시에 통상적인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아포리즘적인 경구들을 택했던 비전(祕傳)의 철학자였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의 사상은 단순히 표면에 드러나는 것들로 환원될 수 없는 일종의 반어 효과를 겨냥한 고도로 함축적인 것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더욱이 당시의 시대정신에 비추어 자신의 사상이 너무 일찍이 왔음을 스스로 한탄했다는 니체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는 거꾸로 그처럼 극단적인 형식을 취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전달할 길이 없었을 시대에 반하는 사상을 품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니체의 반시대적인 사상은 ‘힘’과 ‘의지’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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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져있듯, 니체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의지 개념을 계승한다. 칸트가 지시하는 계몽시대의 정점을 지나 형이상학에서 어떤 동적이며 비합리적인 특징들을 발견하였던 셸링과 헤겔에 이어, 쇼펜하우어는 그 비합리성 자체를 ‘의지’라는 말로 번안한다. 그에게 인간은 물론 세계의 핵심은 무이성적인 혼돈에 찬 의지뿐이다. 일찍이 칸트는 인간이 세계를 그 자체로 인식할 수는 없고, 다만 선험적인 형식에 따라 세계라는 현상을 표상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쇼펜하우어 역시 세계는 단순한 현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에게 세계가 칸트의 지적처럼 어떤 것인지 결코 알 수 없는 공허한 물자체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채우고 있는 실체적인 내용으로서 의지를 발견한다. 배고픈 이가 먹을 것을 찾는 것,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 쇳가루가 자석으로 끌려들어가는 것, 염분이 있는 침전물이 결정모양을 갖게 되는 것, 모든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고 혹은 밀어내는 힘을 갖는 것. 쇼펜하우어는 우리 삶의 도처에서 무수한 의지들을 발견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칸트가 제시하는 인간의 경건함 마음에서 비롯하는 선의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것이었다. 오히려 쇼펜하우에게 의지란 오직 그 자체로 자신을 보존하고 전개해나가는 데 열중하는 맹목적인 의지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역시 중시되는 것은 의식적인 사고로는 포착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의지 내지 욕망이다. 쇼펜하우에게 의지는 지성보다도 근원적이다. 이로써 그는 그 맹목적인 의지들이 바로 인간은 물론 세계 전체를 추동하는 원천이라고 사유한다.

니체는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보존과 종족 보존으로만 정향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애초에 니체가 주목하였던 것은 복수의 의지들과 욕망들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인간을 그때마다 다른 방향으로 추동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의지가 맹목적이라면 그것은 단 하나로 수렴되는 동일한 방향성을 갖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유기적으로 종합되지 않는 자신만의 방향성을 강하게 전개해나가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었다. 무엇보다 쇼펜하우어의 맹목적인 의지 개념이 안내한 결말이 허무주의였다는 점은 니체가 그곳에 안주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암시한다. 동일하게 의지에 주목하면서도 의지를 이성적으로 통제할 길 없는 것이기에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공포의 대상으로 삼았던 쇼펜하우어와 달리, 니체는 의지 자체를 인간을 ‘살아가게’하는 힘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병약한 신체 속에서도 건강을 사유하고, 삶과 괴리된 보편의 학문이 아닌 삶을 위한 즐거운 학문을 제안하며, 삶 자체의 긍정으로서 영원회귀를 주장한다면, 그 역시 더 높은 곳으로 고양되고자 하는 건강한 정신으로서의 힘에의 의지가 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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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니체가 힘의 의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글인 <권력에의 의지>는 생전에 출판되지 못한 채, 편집자의 손길이 덧입어진 채 추후에 출간되면서 그의 본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헤아리기 어렵다는 난점이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외의 저서들에서도 니체가 이성과 대립되는 의미에서 복수의 충동과 의지들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었음을 또한 발견하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니체의 힘의 의지 개념을 다룰 때에 <권력에의 의지> 외에 다른 저작들을 교차하면서 조회할 것이다. 다만 알려져 있듯, 니체는 30대 중반에 건강의 문제로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면서 그 시점을 전후로 어떤 사유의 전회를 맞는다. <반시대적 고찰>이나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바그너, 쇼펜하우어 등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을 자신의 스승으로 명시하길 주저하지 않았다면, <서광>, <즐거운 지식>으로 시작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등에 이르러 그는 이들과 단호한 단절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 단절의 시기로부터 시작해 니체가 사유한 힘과 의지의 문제를 추적해본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니체의 의지 개념*

어떤 통일된 지각의 근저에서 미세지각을 발견한 라이프니츠와 같이, 니체는 “통일(unity)‘로서 의식되기에 이른 모든 것”의 기저에 무섭게 복합화되고 있는 “의지들”(VP 341; 영270; 국307)을 발견한다. 알려져 있듯, 니체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의지 철학을 계승한다. 『반시대적 고찰』에 실린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는 특히 젊은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열광적인 독자였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동일하게 의지 개념을 자신 철학의 준거점으로 삼으면서도, ‘힘에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니체와, ‘삶의 의지’를 금욕주의적 태도로 부정하는 쇼펜하우어의 방향은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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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니체의 쇼펜하우어 철학과의 결절점은,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가 가져오는 고통 때문에 쇼펜하우어가 삶에의 의지를 전적으로 부정하게 되었다는 점, 나아가 그로인해 그가 보여주었던 ‘동정 본능, 자기 부정 본능, 자기희생 본능의 가치’에서 기인한다고 지적된다. 니체 자신역시 “나에게 중요한 것은 도덕의 가치였다.- 그것에 대해 나는 거의 홀로 나의 위대한 스승인 쇼펜하우어와 대결해야만 했는데 (...)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 즉 동정 본능, 자기 부정 본능, 자기희생 본능의 가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쇼펜하우어가 오랫동안 미화하고 신성시하고 저편 세계의 것으로 만들었던 것”(GM 불219; 국343)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와는 달리, 양자간의 결렬지점으로 의지의 ‘단일성’과 ‘복수성’이 있었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니체와 쇼펜하우어 사이의 결렬이 놓여있는 지점은 분명하다. 즉 바로 의지가 하나인지 다수인지를 아는 것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모든 나머지 것은 그로부터 도래한다. 사실상 쇼펜하우어가 의지를 부정하기에 이른 것은, 우선 그가 의지의 통일성을 생각한 까닭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의지는 본질 속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사형 집행인은 자신이 자기 희생자와 일체가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연민 속에서, 도덕 속에서, 그리고 금욕주의 속에서 의지로 하여금 자신을 부정하고 자멸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그의 모든 표현에 따르자면 바로 의지의 동일성에 대한 자각이다. 니체는 소위 쇼펜하우어적 신비화로 보이는 것을 발견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이 의지의 통일성, 동일성을 주장할 때, 필연적으로 의지를 부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NP 8; 국27-28, 강조는 인용자)

결정적으로 의지를 ‘단일성’으로 상정했다는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니체에게 그 이후의 저작들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가령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욕하는 존재”라는 가정을 세웠음에도 “그는 의지의 분석을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욕의 단순성과 직접성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GS 불151-152; 국203) 이 때 쇼펜하우어가 상정한 의지의 단순성 내지 직접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관련된 설명을 『선악의 저편』에서 찾을 수 있다.

‘직접적인 확실성’, 예를 들면 “나는 생각한다”라든가, 쇼펜하우어의 미신이었던 “나는 의지한다”와 같이 ‘직접적인 확실성(certitudes immédiates)’이 존재한다고 믿는 천진한 관찰자가 아직도 존재한다. 마치 여기에서 주체나 객체의 측면에서 왜곡됨 없이, 인식이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물자체’로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직접적 확실성’은 ‘절대적 인식(connaissance absolue)’과 ‘물자체(chose en soi)’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 안에 형용모순을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백 번이고 반복하게 될 것이다. (...) 철학자들은 마치 의지가 세상에서 가잘 잘 알려진 것처럼 의지에 대해 말하곤 한다. 쇼펜하우어 역시 의지만이 우리에게 본래 알려진 것이며, 완전히 알려진 것, 가감없이 알려진 것이라고 암시하곤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쇼펜하우어도 이 경우에 철학자들이 하곤 했던 일을 실행했을 뿐이며, 그가 대중의 선입견을 받아들여 이를 과장했다고 생각한다. 의지작용(Wollen/volonté)이란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어떤 복합적인(complexe) 것이며, 단지 말로 표현했을 때만 통일성(unité)이 있는 그 무엇처럼 보인다.(BM 불34-36; 국33-37)

즉 ‘나는 의지한다’는 말 속에 담긴 ‘직접적인 확실성’,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니체는 묻는다. 쇼펜하우어는 의지하는 것이 ‘나’라고, 그리고 ‘나’는 어떤 ‘왜곡됨 없이’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미신(superstition)’이라고 칭하듯, 니체는 그러한 직접성에 대한 확신을, 통일성 내지 동일성에 대한 신비화라고 간주한다. 니체가 거듭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알려진 것’이라고 가정된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은, 의지란 그처럼 객관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 뿐 아니라 모든 경험적 세계의 근저에서 ‘물자체로서의 의지’를 발견하는 쇼펜하우어는, 현상 세계의 모든 현상들은 이러한 ‘의지’의 직ㆍ간접적인 표현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신의 의지나 욕망 역시 이러한 ‘물자체로서의 의지’의 표현이다. 달리 말해 의지는 우리의 신체를 통해 자신을 객관화한다.1)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의지 행위”와 “신체 행위”는 “하나의 동일한 것”이 “전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2)진 것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로써 쇼펜하우어는 ‘나는 의지한다’고 하는 의지의 주체로서의 ‘나’에 ‘직접적인 객관’ 내지 ‘의지의 객관’을 부여한다.3)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그러한 객관성은, ‘직접적 확실성’으로 물자체를 규정하는 것만큼이나 ‘형용모순(contradictio in adjccto)’이다.4) 나아가 의지에 객관성을 부여하는 것은, 의지가 귀속되는 하나의 단일한 신체를 가정하는 것인데, ‘복합적인 것’으로서 의지를 규정하는 니체의 주장은 이와 전혀 다른 방향을 지시한다. 말하자면 쇼펜하우어가 제안하는 ‘의지의 일원론’과 대결해, 니체는 ‘의지의 복수론’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의지의 복수성

이러한 니체의 ‘의지의 복수성’에 대한 생각은 초기 저작에서부터 엿보인다.5) 가령 『아침놀』에서 “소위 ‘자아’라는 것”에 드러나지 않는 “우리가 의식할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상태들” 이하의 것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대목(A 불94; 국131-2)은 이를 암시한다. 니체는 같은 부분에서 “행위란 우리에게 나타난 그대로의 것이다.”라는 문장이 쇼펜하우어를 상기시킨다면서, 그를 뒤집어 “행위는 우리에게 나타난 그대로의 것이 결코 아니다!”(A 불95; 국133)고 말한다. 이는 단연 행위를 통상 자신의 의지의 산물로 귀결시키는 자유의지에 대한 비판이다.

관련하여 니체는 통상적인 의미의 이성을 ‘작은 이성’으로 신체를 ‘큰 이성’으로 비유한다.(Z 불45; 국52) 니체는 신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복수적인 의지들이 나를 움직이고 사고하게 만든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러한 큰 이성은 지성의 자리(두뇌)보다 더 커다란 지성인 신체적 삶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에 따라 의식이 최고목적으로 잘못 설정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니체는 자아란 ‘사고의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사고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는 자아라는 통일적인 유기체의 작동 이전에 신체와 생리학에 우선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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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여, 네가 “정신(esprit)”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일 뿐이다. 너희들은 “자아(moi)”운운하고는 그 말에 긍지를 느낀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너의 신체와 그 신체의 커다란 이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자아 운운하는 대신에 그 자아를 실행한다. 감각이 느끼고 정신이 깨닫고 있는 것들은 결코 그 안에 자신의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감각과 정신은 너를 설득하여 저들이야말로 바로 모든 것의 목적임을 믿도록 설득하려 한다. 이처럼 허황된 것이 저들이다. 감각과 정신은 한낱 도구이자 놀잇감이다. 그것들 뒤에는 자기(soi)라는 것이 버티고 있다. 이 자기 또한 감각의 눈으로 탐색하며 역시 정신의 귀로 경청하는 것이다. 자기는 언제나 경청하며 탐색한다. 그것은 비교하고, 강제하고, 정복하며 파괴한다. 이 자기가 지배하는 바, 자아를 지배하는 것도 그것이다.; 형제여, 너의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이름하여, 자기가 그것이다. 자기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있다. 너의 신체가 자기인 것이다. (Z 불46; 국53)

니체는 ‘정신(esprit)’이자 ‘자아(moi/Ich)’를 ‘커다란 이성(grand système de raison)’인 신체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petit instrument et petit jouet)’이라고 말한다. ‘자아를 지배하는 자’는 그것들 뒤에 버티고 있는 ‘자기(soi/ das Selbst)’라는 ‘신체(corps)’이기 때문이다. 자아를 “하나의 개념적인 종합(au concept synthétique de ‘moi’)에 불과”(VP 251;영199; 국232, BM 불36; 국38)한 것으로 여기는 니체에게 “신체의 현상은 더욱 풍요로운, 더욱 명료한, 더욱 파악하기 쉬운 현상”(VP 341; 영270; 국307)인 동시에 진정한 “통치자”(VP 342; 영271; 국308)이다. “보통 의식 자체가 총체적 감각 중추이며, 최고 법정이라고 간주되”지만, “의식은 전달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식은 교도(敎導, directing/Leitung)활동이 아니라, 교도의 한 기관(an organ of the directing agent)”(VP 360; 영284; 국323)인 셈이다. 이러한 니체의 주장은 무엇보다도, 자유의지로부터 비롯하는 인간의 도덕적 책무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일련의 죄책감등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자유의지의 오류(Erreur du libre arbitre). (...)이러저러한 상태에 있는 것이 의지나 의도나 책임있는 행위로 환원된다면, 생성에게서 죄 없음이 박탈되어버린다: 의지에 대한 학설은 근본적으로 벌을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즉 죄 있다고-여기도록-원하게 하는 목적에서 고안되었다. (...) 판결하고 처벌될 수 있기 위해-죄 지을 수 있기 위해, 인간은 ‘자유롭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개개의 행위는 원해진 것이어야만 했고, 개개의 행위의 기원은 의식 안에 있다고 생각되어야만 했다.(CI 불49-50; 국122)

 

니체는 이로써 일종의 원죄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자유의지에 대한 부정이 곧 부자유 의지로 향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니체는 “자연의 합법칙성”을 강조하는 “물리학자”가 어떻게 “어느 곳에서도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고 외치는 “현대 정신의 민주주적 본능에 충분히 영합하고 있는”지 폭로한다. 이것은 하나의 “해석”일 뿐, “텍스트”는 아니며, “세련된 무신론이 변장한 채” 출현한 것일 뿐이다. 이에 대해 니체는 “모든 ‘힘에의 의지’ 속에서 무예외성과 무조건성을” 보여주는 해석가를 기다린다. “세계는 ‘필연적’이고 ‘계산할 수 있는’ 진행과정을 밟아간다는 것”6)을 보여주는 이 해석가는 “이 세계를 법칙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법칙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으며, 모든 힘은 매 순간 마지막 결론을 이끌어”(BM 불40; 국43-44)낸다는 점을 통찰하는 자이다. 그와 반대로 의지를 과도하게 신비화하는 자유의지만큼이나, 의지 자체를 부정하고 ‘자연의 합법칙성’에 기대는 물리학자들은 ‘힘에의 의지’만이 ‘매 순간 마지막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니체에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의 모든 배후에 있는 ‘의지’이고, 이 의지의 ‘작용’이다.

나아가 의지가 근육과 신경에 작용한다는 통념과 달리, 니체는 “의지는 의지에만 작용하지 물질(예를 들어 신경)에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의지가 물질, 즉 신체에 작용하여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위한다고 간주하는 통념을 부순다. 오히려 니체에 따르면 그처럼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은 오직 미시적 ‘의지들간’의 작용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지가 근육이나 신경이 아니라, 오직 의지에만 작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말하자면 세포차원에서 ’서로간에 통치하는’ 현장을 상정하는 것이다. 물론 ‘영혼’이나 ‘생명력’으로서의 의지를 배제하기에, 어떤 의지가 다른 어떤 의지를 통치하든, 그것들은 ‘동종의 것’이다. 존재하는 유일한 힘은 ‘의지의 힘’일 뿐이다. “삶이란, 힘에의 의지이다.”(VP 184; 영148; 국176)

그들 여러 주관의 협조나 투쟁이 우리의 사고나 일반적으로 우리의 의식의 근저에 있을지도 모른다.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포들의’ 일종의 귀족정치? (...)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배자와 그 피지배자는 동종의 것이며, 모두 느끼고, 의욕하고, 사고한다고 풀이된다는 점- 또한,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운동을 인식하거나 추측하거나 하는 도처에서, 그 운동에 속하는 주체적인, 불가시적인 생명을 추론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점이다. 운동은 육안으로 보이는 하나의 상징적 기호이며, 그것은, 무엇인가가 감각되고, 의욕되고, 사고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VP 341-343; 영270-271; 국307-309)

운동이라는 ‘상징적 기호’ 아래, 니체가 ‘감각되고 의욕되며 사고되고 있는’ 의지에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어떤 대상이 선재하고 상이한 힘들이 그 대상에 투쟁하는 식으로 운동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강조이다. 대상이나 현상은 힘의 출현이지, 그 이전에 힘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힘이라는 ‘동종의 것’은 투쟁과 교체, 소유와 복종을 통해 때로 지배하는 것이 되고 지배되는 대상이 된다. 들뢰즈는 이를 두고 “니체에게서 힘의 개념은 다른 힘과 관계 맺고 있는 어떤 힘의 개념”(NP 7; 국26)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니체에게서 힘의 개념은 다른 힘과 관계 맺고 있는 어떤 힘의 개념이다. 즉 이 측면에서 힘은 의지(volonté)로 불린다. 의지(권력 의지)는 힘의 미분적 요소이다. 그로부터 의지철학이라는 새로운 입장이 생겨난다. (NP 7; 국26-27)

들뢰즈는 “힘의 본질은 다른 힘들과의 관계에서 성립”(ND 24; 국38)하고, “힘에 대한 힘의 관계는 ‘의지’라고 불린다.”(ND 24; 국39)고 『들뢰즈의 니체』에서 역시 동일하게 서술한다. 한 가지 들뢰즈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기서 ‘힘에의 의지’라는 ‘니체의 원리’가 “의지가 힘을 원한다거나 지배하기를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처럼 힘에의 의지를 ‘지배욕’으로 해석하는 한, “그것은 불가피하게 기성의 가치들에 의존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오히려 힘에의 의지는 “무언가를 격렬하게 원하고 획득하는 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산출하는데 의존한다.”(ND 24; 국39)7) 때문에 우리는 니체가 뜻하는 힘에의 의지란, 기존의 모든 가치를 넘어서 “아직 승인되지 않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위한 숨은 원리”로서 “창안”과 “산출”(ND 24; 국39)에 그 중요성이 부가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생명있는 것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한 것이 되기 위하여 모든 일을 한다”(VP 465; 영367; 국412)는 것을 발견하는 니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고양’시키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러한 ‘고양하려는 의지’를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말로 전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와 부정적인 힘에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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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절에서 ‘나’라는 개체와 그 개체의 단일한 의지를 가정하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니체는 개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의지를 상정한다는 점을 보았다. 이는 단연 의식 이하의 것으로, 말이나 사유로서 표상불가능한 영역의 미시적인 힘들을 지시한다. 때문에 ‘힘을 의욕하는 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부당하다. 니체에 따르면 “생물 자체가 힘에의 의지”(VP 468-469; 영369; 국414)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러한 힘들이 상호간의 어떤 관계를 형성했을 때, 그 힘들의 표현으로서 개체가 성립하고 운동이나 대상이 출현하는 것이다. 때문에 들뢰즈는 “힘에의 의지는 차이의 요소(élément)이며, 이러한 요소로부터 어떤 하나의 복합체 내에 현존하는 힘들이나 그러한 힘들의 각각의 질이 파생되어 오는 것”(ND 24; 국39-40)이라고 말한다.

이는 힘들간의 관계에 따라 물리적인 운동이 발생한다고 보는 설명과도 유사하다. 다만 물리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힘들간의 ‘양’적인 차이인데 반해 니체는 힘의 ‘질’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가령 우리는 피스톤 안과 바깥의 온도차를 통해 운동을 발생시키는 열기관을 떠올릴 수 있다. 온도가 무조건 높다고 운동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주변과의 온도‘차’로부터 운동이 발생한다. 즉 절대적인 힘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힘 간의 어떤 ‘차이’에 의해서만 운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힘 자체보다는 이웃항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양적인 차이를 발생시키는가에 주목함이다. 니체에게도 힘 자체보다는 그것들간의 관계가 문제이다. 상이한 두 힘의 차이를 이용해 힘들의 분포상태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게 고려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니체는 힘의 양보다는 ‘질’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양(量) 이외의 아무것도 바라지 않거니와, 하지만 힘은 질(質) 속에 숨어있다.”(VP 442; 영349; 국393)

힘에의 의지는 또한 항상 운동하며, 경쾌하고 다원론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어떤 힘이 명령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어떤 힘이 복종하는 것도 힘에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힘들의 두 유형 혹은 두 개의 질에 대해서, 힘에의 의지의 양면, 두 개의 질(qualis), 즉 궁극적이고 유동적인 성질들이자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힘들의 성질들보다도 더 심원한 두 개의 성질들이 대응한다. 왜냐하면 힘에의 의지야말로 능동적인 힘들이 긍정하도록, 그들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긍정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반동적인 힘들의 본성은 우선 자신이 아닌 것에 대립하는 것이며, 다른 것을 제한하는 것이다. 반동적인 힘들에서는 부정이 최초의 것이며, 그것들은 부정하는 것에 의해서 외관상의 긍정에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능동적인 것과 반동적인 것이 힘들의 질인 것처럼, 긍정과 부정은 힘에의 의지의 질이다.(ND 24-25; 국40)

니체에게 힘은, 긍정을 최초로 하는 ‘능동적(active)인 힘’과 부정을 최초 힘으로 하는 ‘반동적(reactive)인 힘’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힘들의 구분에 따라 힘에의 의지 역시 능동적인 힘을 긍정하도록 하는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와 자신이 아닌 것에 대립하는 것이자 다른 것을 제한하는 반동적인 힘에 의해 발현되는 ‘부정적인 힘에의 의지’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이 반동적인 힘 내지 그에 의한 부정적인 힘에의 의지만을 살피고, 그것으로 유기체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반동적인 힘만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힘들의 근본적인 우월성’을 보지 못한다. 들뢰즈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니체에게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될 반동성의 개념의 출발점은 바로 기계적이고 공리적인 타협들, 열등하고 지배받는 힘들의 모든 권력을 표현하는 조정들(regulations)이다. 그런데 우리는 힘들의 그 반동적인 면에 대한 현대 사유의 지나친 관심을 확인해야 한다. 사람들은 반동적 힘들로부터 유기체를 이해할 때 충분히 이해한 것으로 항상 생각한다. 반동적 힘들의 본성과 그것들의 전율이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 삶의 이론 속에서 메커니즘과 목적은 서로 대립하지만, 그것들은 반동적 힘들 그 자체에만 해당하는 두 가지 해석이다. 적어도 우리가 힘들로부터 유기체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가 반동적 힘들을 그것들을 지배하며 자신은 반동적이지 않은 힘과 관련시킬 때만 매커니즘이나 목적이 아니라 힘들로서 다시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그 힘들로서 파악할 수 있다. ‘적응이 우선 그 힘들의 영향력에 종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자발적이고 공격적이며 정복하고 빼앗고 변화시키는 힘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들을 제공하는 힘들의 근본적인 우월성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유기체의 가장 고귀한 기능들의 될 때 권위를 부인한다.’(NP 46; 국89)

여기서 들뢰즈가 지적하고 있는 ‘반동적인 면에 대한 현대 사유의 지나친 관심’은 앞서 살폈던 ‘자연의 합법칙성’만을 문제삼는 태도와 유사하다. 이들은 ‘연장’으로서의 신체가 작동하는 ‘필연적’이고 ‘무예외적’인 법칙에 몰두해 그로써 유기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때 이들이 전제하는 삶의 이론 속에서의 목적이 ‘자기 보존’이라면 그를 위해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생장과 발달’(VP 460; 영362-363; 국407)일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자기 보존’이라는 것 역시 이미 “복잡한 유기물의 관점에서 본, 하나의 해석”(VP 436-437; 영345; 국388)에 불과하다. 가령 통상적으로 굶주림을 최초의 움직임으로 간주하지만, 이는 일종의 손실의 회복일 뿐이다. 더욱이 원형질의 입장에서 영양분의 섭취는 자기 보존이 아니라 분열로 나아간다. 분열이 “힘이 자신의 것으로 삼은 소유물을 더는 좌우할 수 없을 만큼 강하지 못할 때 나타”(VP 437; 영345; 국389)나는 것인 만큼, 그 자체는 지배하는 충동과는 정반대를 가리키게 된다.

더욱이 니체의 입장에서 “유(類)가 진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세계에 관한 가장 불합리한 주장”(VP 463; 영365; 국410)이다. “가장 풍부하고 복잡한 형태는 오히려 쉽사리 파멸”하기에 “희귀하게 달성될” 뿐이지만, 끝끝내 변이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가장 저급한 형태”는 독자적인 풍요성을 갖(VP 461; 영363; 국408)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윈적인 관점과는 정반대로, ‘보다 강한 것, 혈통이 보다 좋은 것’에서 ‘진화’가 아닌 ‘도태’를 보는 것이다.

그는 이로써 생물학이 설정하는 생물의 목적 내지 그 메커니즘으로는 해명될 수 없는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를 부각시키고자 한다. 이는 단연 생명의 자기보존본능에 충실한 반동적인 힘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때문에 때로 그것은 생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는 오히려 “삶의 가치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자들이 최상위를 차지하며 잔존한다는 것을 목격”(VP 462; 영364; 국409)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그러한 능동적인 힘 내지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에 주목하는 것은 생명의 본질은 ‘고양’에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바로 모든 생명있는 것에서 가장 명료하게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한 것이 되기 위하여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이다.”(VP 465; 영367; 국412)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때로는 생존의 위협을 감수하고서라도 능동적으로 힘을 행사하려는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를 존재의 본질로 삼는다. 바로 여기서 다른 의지들을 자신에게 복속시키려는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로서의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가 제시된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의 생물체가 탄생하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신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힘들의 ‘자의적인’ 산물로서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체는 환원될 수 없는 다수의 힘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다수적 현상이다. 따라서 그것의 다수적 현상의 통일, ‘지배의 통일’이다. 하나의 신체 속에서 우월하거나 지배하는 힘들은 소위 능동적(actives)이고, 열등하거나 지배받는 힘들은 소위 반동적(reactives)이다. 분명히 힘과 힘의 관계를 표현하는 원초적인 질들은 능동적이거나 반동적이다. 왜냐하면,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힘들은 각각이 동시에 그것의 양적 차이 그 자체에 상응하는 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양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그것들의 양에 따라 힘들-능동적 힘들과 반동적 힘들-의 차이를 서열(hiérarchie)라고 부를 것이다.(NP 45; 국87-88)

 

이러한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의 질적인 구분은, 우리가 어떤 의지를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해명한다. 니체가 제안하는 힘에의 의지란 어떤 개체에 복속되는 단일성이 아니기에, 애초에 의지를 갖는 ‘나’라는 주체는 가정되지 않는다. 대신 무수히 많은 복수적인 힘에의 의지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의지들이 작동하는 방식과 힘의 분포에 따라서 질적인 차이가 발생한다. 바로 이때 우리가 어떤 의지를 갖는다는 것은 곧, 그 의지를 만들어내는 힘들에 복종한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그 의지 안에는 또 다른 복수적인 의지들이 있고, 그 의지들 중에 힘들의 분포에서 ‘통치자’의 자리를 차지한 우월한 의지에 우리는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통찰은 우선적으로 “의식이 겸허해야 할 필요성”(VP 453; 영357; 국402)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소위 ‘자아’라고 칭해지는 것 대신 복수적인 힘에의 의지들 가운데 출현하는 전혀 다른 양상의 ‘통치자’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개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힘에의 의지들의 복합체가 곧 개체이다. 우리는 이와 실로 구분될 수 없고, 때문에 쉽게 알아차릴 수도 없다. 니체는 그래서 “모든 행위나 의식에 있어서의 가장 일반적이고 낮은 본능은 실제로 우리가 그 명령에 따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명령 그 자체이기 때문에, 바로 이 이유로 어디까지나 가장 인식하기 어렵고 가장 감추어진 본능이다”(VP 452; 영356; 국401)라고 말한다. 본성상 능동적 힘들은 의식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힘들은 유기체의 의식이하의 수준에서 벌어지고 있는 끊임없는 저항과 복종 속에서 확립과정을 통해 우리를 형성한다.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인 힘들의 활동은 신체를 모든 반동적인 것보다 우월한 어떤 것 그리고 특히 의식이라고 불리는 자아의 반동적인 것들보다 우월한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 신체의 능동적인 힘들은 바로 신체를 하나의 자신(soi)으로 만들고, 자신을 우월하고 경이로운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자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다 강력한 존재, 알려지지 않은 현자. 그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바로 너의 신체이다.’(NP 47; 국90)

 

의식적 자아의 노예성 

그렇다면 니체가 신화이자 허구라고 비판하는 의식적 자아란 어떻게 형성되는가? 니체는 의식적 자아란 ‘고차원의 육체’ 즉, 무의식적인 수준에 존재하는 복수적 힘들에 ‘봉사하는 도구’(VP 453; 영358; 국402)라고 정의한다. 이 때 자아는 ‘유용성’이라는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이다.

 

의식이란-‘인상‘의 병렬이나 의식화로서, 완전히 외면적으로 발단을 계속한다- 최초에는 개인의 생물학적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지만, 그러나, 스스로를 심화하고, 내면화하고, 저 중심에 끊임없이 근접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가 풀이하는 것과 같은 우리의 지각이란, 그것이 의식되는 일이, 우리에 대해서도, 또한 우리보다 앞선 전체 유기적 과정에 대해서도 유용하고 본질적이었던 모든 지각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지각 일반은 아니다(가령 감전의 지각 따위는 아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정선된 지각에 대해서만 감관을 갖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보존을 위하여, 우리가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지각이다. 의식은, 의식이 유용한 한에서만 현존한다.(VP 346-347; 영274-275; 국312)

 

이에 따라, 들뢰즈는 니체의 의식을 “외부세계로부터 영향을 받는 자아(moi)”(NP 44; 국86)로 규정한다. 외면적으로 발달을 계속한 결과, ‘유용한 한에서만 현존’하는 것이 곧 의식적 자아인 셈이다. 같은 의미에서 니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의식하는 것의 척도는, 의식화의 조잡한 유용성에 전면적으로 의존하고 있다.”(VP 331; 영474; 국299)거나 “자기보존의 유용성이 동기로서 인식 기관의 발달의 배후에 있다.”(VP 336; 영267; 국303)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아가 니체는 이러한 의식은 “우리의 자기보존을 만족시키도록 발달”하는 만큼, “그 종의 힘에의 생장의 분량에 의존”(VP 336; 영266; 국303)한다고 말하다. “생존조건의 한 귀결로서 존재하는 우리의 지성”(VP 345; 영273; 국310) 내지 의식적 자아는 이런 점에서 말하자면 “주인의식이 아니라, 노예의 의식이다.”(NP 45; 국88) 자기보존을 위해 힘에의 의지가 외부세계로부터 영향받는 기관을 형성하고, 그렇게 형성된 자아는 의지에 복속된다.8) 의식적 자아의 주된 역할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가해질 수 있는 위협요소들로부터 신체를 방어하는 데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식적 자아의 의지작용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연유로 의식적 자아는 부정적인 의지, 즉 우월한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에 종속되거나 병합되는 방식으로만 현존한다. 이를 통해 들뢰즈는 의식적 자아는 그 자체가 노예성을 내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신체에 봉사하는 작은 이성에 불과한 의식적 자아는 신체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신체는 의식에 잡혀있는 한에서 충동들로부터 분리된다. 여기서 신체는 전도되기 시작한다. 즉 신체가 발달시킨 가장 취약한 기관이 말하자면 그 취약성으로 인해 신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현미경으로 다시 들여다보기를, 그 안에는 오직 복수적인 힘에의 의지들이 있을 뿐임을 니체는 전하고자 한다. “우리의 신체는 많은 영혼의 집합체일 뿐이다.”(BM 불37; 국39)

 

**이어서

*

이하의 글에서 니체의 저서를 인용할 때 다음과 같이 표기한다.

A Aurore, trans. Julien Hervier, Gallimard, 1970.

박찬국 역, <아침놀>, 니체 전집 10권, 책세상, 2004.

Z Ainsi Parlait Zarathoustra, trans. Maurice de Gandillac, Gallimard, 1971.

정동호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전집 13권, 책세상, 2000.

BM Par delà le bien et le mal, trans. Cornelius Heim, Isabelle Hildenbrand, Jean Gratien, Gallimard, 1971.

김정현 역, <선악의 저편ㆍ도덕의 계보>, 니체 전집 14권, 책세상, 2002.

GM Généalogie de la morale, trans. Cornelius Heim, Isabelle Hildenbrand, Jean Gratien, Gallimard, 1971.

GS Le Gai savoir, trans. Pierre Klossowski, Gallimard, 1982.

안성찬 외 역, <즐거운 학문>, 니체 전집 12권, 책세상, 2005.

CI Le Crépuscule des idoles, trans. Éric Blondel, Hatier, 2001.

백승영 역,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1888~1889)>, 니체 전집 15권, 책세상, 2002.

VP La Volonté de puissance, trans. Geneviève Bianquis, Gallimard, 1995.

강수남 역, <권력에의 의지>, 청하, 1992.

 

1)“여기서 신체는 우리에게 직접적인 객관, 즉 주관이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는 표상인 것이다. (...) 지성은 그 출발점이 되는 다른 어떤 것이 없으면 결코 적용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다른 것은 단지 감성적 감각, 즉 신체 변화에 대한 직접적인 의식이고, 그 의식 덕분에 신체는 직접적인 객관인 것이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홍성광 역, 을유문화사, 2015, 1권, 67쪽

2)위의 책, 2권, 186-187쪽

3)“신체의 행위는 객관화된, 즉 직관 속에 나타난 의지 행위와 다름없다. (...) 나는 1권과 근거율에 관한 논문에서 일부러 일면적으로 취한 입장(표상의 입장)에 따라 신체를 직접적인 객관이라 불렀지만, 여기서는 다른 점을 고려해 의지의 객관성이라 부르겠다.”, 위의 책, 2권, 187쪽

4)“그[쇼펜하우어]는 그만이 외경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무아’의 도덕적 가치를, 가장 정신적인 활동의 ‘객관적인’ 표정의 조건이기도 하다고 인위적으로 굳게 믿었던 것이다.”, VP 259; 영206; 국238

5)백승영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 개념에 대한 니체의 최초의 언급은 1876/77년 시기의 유고에 들어있다.”(『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313쪽) 백승영은 그러한 초기사유와의 전환점을 1881년으로 보고, 그 이후 『아침놀』에서부터 니체는 “힘에의 의지 개념을 자기 보존본능과 차별화“(같은 책, 327쪽)하면서, ”물리적 힘의 내부 세계의 규정“(같은 책, 329쪽)을 시도한다고 설명한다. 물론 이 시도는 ”『아침놀』에서는 완성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명있는 것들을 한 가지 원칙으로 해명하려는 자연과학의 노력, 싸움이라는 개념, 힘들의 역동성 등은 1885년 힘에의 의지 개념을 통한 ‘힘에 대한 승리’를 준비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같은 책 329-330쪽)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6)니체가 제시하는 ‘힘에의 의지’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측정되고’ ‘감지되’는 것으로서 분명한 목표를 지닌다. 가령 니체가 “‘이상적 충동’의 의미를 삶으로 측정할 필요가 있다.”(VP 410; 영323; 국367)거나 “각각의 요소의 권력의 척도에 따라서 여러 힘의 새로운 배치가 달성되는 것이다.”(VP 427; 영337; 국380), “우리는 계산할 수 있기 위해서 ‘단위’를 필요로 한다.”(VP 428; 영339; 국381)고 말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듯, 그는 ‘계산’ ‘측정’, ‘척도’, ‘단위’등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측정을 통해 ‘힘에의 의지’가 세계를 보는 ‘관점’을 형성하고, 그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가치평가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덕적 가치평가는 하나의 해석이며 하나의 해석방법이다. (...) 모든 가치평가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특정의 원근법이라는 통찰. 즉, 그것은 개인, 집단, 종족, 국가, 교회, 신앙, 문화의 보존이다.”(VP 184, 186; 영148-149; 국176-177)

7)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도 “이 의지는 결코 ‘역량을 의욕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DR 15; 국40)고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여 주의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8)이러한 니체의 해석은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의식’과 일치한다. “외부현실이 갖는 중요성이 증가할수록 외부 세계를 지향하는 감각기관과 그 기관에 관련된 ‘의식’의 중요성 또한 증가한다.”, 「정신적 기능의 두 가지 원칙」,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1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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