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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망했다고?_프롤로그

때로 자조적인 말은 유머를 담는다. 몇 해 전부터 자주 접하게 되는 ‘이생망’이라는 단어도 그런 축에 속한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 말은 한 편으로 비관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제3자의 입장에서 진단함으로써 웃음을 일으킨다. 이는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에 잘해보겠다는 결사적인 의지를 뜻하거나, 그러므로 이번 생을 완전히 포기해버리겠다는 성급한 좌절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저 바라보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헬조선’, ‘삼포세대’ 등 결코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는 현실 속에서, 개인의 의지가 얼마나 무기력한지 우리는 어느 때보다 잘 느끼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생망이라는 말은 지독히 무거운 현실을 농담의 소재로 삼음으로써 그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내는 효과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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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내가 이 말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그 유머의 효과는 사라진 채, 이 말이 온전히 체념의 의미로만 쓰이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을 때였다. 내 의지로 타개할 어떤 길도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낙담한다. 손 쓸 도리가 없을 때, 우리는 주저앉는다. 그러나 예상하듯 그처럼 낙담하고 주저앉은 채 삶을 꾸려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헬조선’이나 ‘삼포세대‘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개인의 의지로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노오력‘을 다시금 강조해야 할까? 사회 체계의 불합리함을 개인의 몫으로 떠안아야 하는 데 대한 분개와 그럼에도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부담 속에서 ’이생망‘이 그 유머의 효과를 잃어버리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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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이생망은 체념의 정서이기 이전에 어떤 심리적인 동요를 드러낸다. 낙관적인 미래를 그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살아가겠다는 삶의 의지가 고개를 내밀 때, 우리를 고민케하는 것은 어디까지가 나의 의지로 바뀔 수 있는 부분인가를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이런 어려움을 알았던 것일까?

후기 스토아주의자로 분류되는 에픽테토스는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것과 능력 밖에 있는 것에 대한 구별을 일찍이 교육할 것을 권한다. 흔히 스토아학파는 행복이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삶에 있다고 설파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연에 따라 살라”는 주장은 스토아주의의 윤리를 요약한다. 여기서 자연이란 나무와 강물 같은 구체적 사물이기보다는 그 모든 개물을 지배하는 필연적인 법칙을 뜻한다.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없고, 물고기는 육지에서 살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자연의 법칙 속에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픽테토스는 모든 것들의 삶의 운행을 관장하는 우주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에 순응하여 사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을 구별할 것을 요청한 것은, 이러한 개인의 능력 밖에 있는 자연의 섭리에서 개인의 불행을 단초짓지 말 것을, 오히려 자연의 법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곧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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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단지 자연의 법칙에 순전히 순응하는 인간상을 요청하는 것만은 아닌데, 그러한 자연법칙을 온전히 이해하게 됐을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속박하는 굴레가 아니라, 그로부터 도약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로 작동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은 날 수 없지만 비행기를 만들 수는 있다. 관성계에 작동하는 관성의 법칙은 인간이 날 수 없는 이유이지만, 동시에 비행기를 설계하는 원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간과한 채, 우주의 법칙을 개인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고 무조건 낙관한다면 우리는 이카로스처럼 태양에 날개가 녹아 바다로 떨어져 버릴 것이다. 반대로 결코 그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전적인 비관으로 일관했다면 지구 반대편을 반나절만에 이동하는 오늘의 기술은 없었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자연에 따르라’는 에픽테토스의 경구에서 외부적인 요인을 사유하는 하나의 가능한 관점을 차용하게 된다. 이는 ‘변덕스러운 신의 뜻에 종속되는가, 아니면 그 법칙을 파악하여 지배하는가’하는 전통적인 자연-인간간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길을 안내한다.

자연은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인간과 대립해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의 행, 불행을 결정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영역과 개인의 의지가 발현되는 영역을 분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개인을 무력화시키는 사회 구조적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즉각적으로 그것을 바꿔낼 수 있는가 여부를 판단하여 서둘러 낙관하거나 비관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회의 비가시적인 구조적 폭력과 마주할 때, 그 구조를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절박한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자연의 법칙과 사회 구조적 문제는 결코 동형적일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과 구조적 문제는 개인의 의지가 설 자리를 잠식하고 그 의지를 결과적으로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동일한 강제 내지 속박으로 다가온다.

이런 맥락에서 구조적 문제의 극복을 도모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구조가 당장 극복될 수 없더라도 그것을 영구한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동시에 그 구조적 문제 속에서도 개인의 의지가 발현될 영역을 찾아 확장시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절실할 것은, 거시적인 사회구조 안에 모호하게 남겨진 미시적인 개인의 의지의 영역을 서둘러 비관하거나 낙관하지 않는 것이고, 심리의 영역을 재조명함으로써 삶에의 의지를 그 자체 하나의 능력으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내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일도, 전적으로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뤄지는 일도 없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안다. 모든 것은 나의 의지와 내 외부의 의지의 결합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로 모든 것이 ‘내 탓’인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지거나 ‘네 탓’인 것 같은 분노에 휩싸인다.

만약 모든 것이 내 탓인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온 세상이 한 개체의 뜻대로 전개될 만큼 각각의 개체는 전능하지 않다. 만약 모든 것이 남의 탓인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개체의 날개짓은 언제나 반대편에서 허리케인이 될 가능성을 갖는다.

우리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의지에 대한 과신과 불신의 유혹에서 잠시 거리를 둔다면 우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의 자리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번 생은 망하지 않았다고 외쳐줄 수 있는 보장된 길을 안내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의 삶을 우리가 재빨리 과신하거나 불신하지 않는 가운데, 아름다운 동시에 비루한 삶의 모습 그 자체가 긍정할 만한 삶으로 다가올 것을 우리는 희망한다.

 

 

나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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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악랄하게 잔인하거나 지고하게 천사같기만 한 인물은 세상에 없음을 잘 안다. 악인이나 선인은 극화된 인물에게나 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선과 악을 한 몸에 갖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선과 악을 분별하기를 요청받고, 그러한 분별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것이 타인을 나의 신체에 굴절시켜 내리는 사적 판단이든, 대중의 의견을 반영하는 미디어에 의한 공적 판단이든, 선과 악을 한 몸에 담지한 모호한 사태를 있는 그대로 두어서는 결코 어떤 대응도 불가능하다. 다만 그러한 판단에 익숙해지고, 이분법적 구도를 그대로 수용해버릴 때, 우리는 쉽게 선악의 구도가 본래 있었던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그렇게 선악의 이분법이 불변의 척도로 고정될 때, 우리는 많은 것들을 도덕의 문제로 치환시키게 된다.

가령 의지가 없는 사람, 의식적으로 선한 행위를 의욕하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한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조는 학생은 꾸지람을 듣고, 경로석을 양보하지 않는 청년은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그러나 조는 학생이 소녀가장이라 밤새 노동을 해야 할 처지라면, 경로석을 양보하지 않은 청년이 바짓단 속에 평생을 지녀야 할 부목을 대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더 이상 비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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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의지의 문제가 도덕의 영역으로 옮겨질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행위자가 쉽게 단죄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선은 비단 타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데, 우리는 스스로를 향한 책망이나 연민의 경험 속에서, 스스로를 어느 새 죄인 아니면 무고한 희생자로 판단해버리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그처럼 나에 의해서 쉽게 단죄될 수 있는 고정된 인물에 불과한 것일까? 나도 나를 모른다고 할 때, 우리는 어느새 나 안에는 수많은 나들이 있음을, 그리고 그들을 판단하기에 나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는 여전히 역부족임을 이미 체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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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 페르소나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가 뽑은 2020년 키워드 중 하나는 ‘멀티 페르소나’이다. 다양한 상황과 여러 sns에서 가면을 바꿔쓰듯 매순간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여 서로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다층적 자아가 소비자의 한 성향을 이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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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지성사에서 확정된 실체 내지 본질 개념을 비판하는 가운데 관계적 자아 내지 복수적 자아에 대한 고찰이 이뤄진 것은 이미 회고적인 일이다. 페소아는 120개의 이름으로 그때마다 다른 자신의 정체성을 지칭했고, 페르난데스는 그때마다 세계와 동시에 태어나는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적는 자서전을 기획했다. 그러나 페소아의 시도는 정신분열증적 글쓰기로 환원되기 일쑤였고, 페르난데스의 작업은 철학의 새로운 소재가 될지언정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대중적인 감각에 민감한 시장에까지 ‘다층적 자아’라는 개념이 확장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한편으로 이는 더 이상 확실한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형이상학의 길 대신 복수적 주체 자체를 긍정하는 심리적 고찰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는 징후로 감지된다. 적어도 우리는 이제 ‘나’라는 실체를 찾는 고독한 성찰의 시간을 가지려하기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는 복수의 나를 하나의 놀이의 소재로 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을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다루는 이해와는 전혀 상이한 방향을 예고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멀티 페르소나’라는 개념은 정교하게 설계된 나라는 모델을 표상하기도 한다. 가령 지인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폐쇄형의 페이스북에서 사용자가 가장 공적이고 사회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면, 이미지 위주의 미디어인 인스타그램에서는 보다 과감하고 사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연출한다. 전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편안한 미소로 악수를 청하는 정장의 모습이라면, 후자는 사적인 자리에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농담을 건네는 캐주얼한 모습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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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불특정 다수에게 공유하는 개방형 채널인 트위터의 경우, 사용자가 자신을 과감하게 연출하는 것은 더욱 도드라진다. 각 채널별 특징을 영화배우 마고 로비의 다양한 이미지에 매칭한 사례를 참고하면, 트위터의 이미지는 조커의 파트너, 할리 퀸으로 비유된다. 과장된 아이 메이크업과 알록달록하게 물들인 머리, 비즈가 달린 화려한 핫팬츠를 입은 할리 퀸의 캐릭터가 모든 트위터 사용자의 아바타가 될 수는 없겠지만, 깔끔하고 정돈된 자화상이 설정되는 페이스북과 이는 대단히 대조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으레 인적 관계망이 조밀하게 작동하는 폐쇄형 채널에서는 단정한 정장을,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는 개방형 채널에서는 도발적인 파티복을 고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러한 페르소나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하는 모습 자체를 긍정하는 것 이기보다, 자신이 선택적으로 강요받는 정제된 인격에서 일시적인 일탈의 계기로서 의도적으로 설계된 산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멀티 페르소나란 여전히 사회적 자아에 단단히 붙들린 채, 일시적으로 출현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자아라는 안정적인 지위를 쉽게 떠나버릴 수 없다. 사회적인 자아라는 단정한 가면을 착용해야 하는 순간에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비정상’적인 나를 출현시킨다면, ‘정상’사회에서 나는 배제돼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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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영국의 드라마 <블랙 미러>는 이러한 사회상을 극화된 형식으로 제시한다. 그 중 한 에피소드인 ‘추락’에서 한 사람의 삶은 지인들의 ‘좋아요’ 버튼이 결정한다. 평균적인 ‘좋아요’ 평점인 4.0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외면받다가 이내 일자리를 잃고, 경제력과 무관하게 집을 살 수도 없는 새로운 개념의 ‘신용불량자’가 된다. 공상과학 특유의 과장된 측면을 차치하면, 이 드라마가 그리는 전경이 우리 사회와 대단히 다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주변의 평판에 따라 삶의 향방이 결정되는 사회에서 긍정적인 평판을 받고자 노력을 멈추지 않기를 강요받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제된 인격을 기대하는 사회적 요구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계기로서 ‘멀티 페르소나’라는 개념은 일시적인 충동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순간적인 일탈의 계기이든, 인간 이해의 전회이든, 멀티 페르소나라는 복수의 인격체는 그 자체로 긍정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조문을 간 문상객이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하듯, 내 안의 수많은 페르소나들은 상황과 조건에 어울리지 않을 때 환영받지 못한다. 때문에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 어떤 페르소나가 호출되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전권은 의식을 갖는 ‘나’에게 귀속된다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실로 어떤 옷을 입을지 눈으로 살펴보고 팔을 뻗어 신체에 착용하는 것은 모두 ‘나’의 결정과 행동이듯, 어떤 페르소나로 나를 표현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나’일 것이다.

그런데 나라는 신체에 복수의 인격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인격체들 역시 저마다 의지와 욕구를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격체라면 이들 역시 언제든 표면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 것은 동일할 것이다. 수많은 ‘페르소나’ 내지 ‘인격체’라는 말이 내가 착용할 ‘옷’과 같은 사물이 아니라 내 신체를 함께 구성하는 또 다른 나라는 ’분신’이라면, 그들도 저마다 독립적인 의지와 욕구를 가진 존재들로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다양한 페르소나로 나를 표현한다는 말을 발화하는 순간, ‘표현한다’의 주체로서 선택하는 ‘나’를 가정하게 된다. 선택하는 ‘나’가 이처럼 특권적 위치에 자리할 때, 비주체적인 입장으로 전락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분신들이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지만, ‘나’와는 결코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없는 복수의 페르소나들은 그렇게 주체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처지에 자리하게 된다.

 

의식이 겸허해져야 하는 시대

한편으로 이처럼 나의 행위와 선택을 결정짓는 ‘주체’의 자리가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현대 철학이 지난 한 세기동안 집요하게 다뤘던 주제이기도 했다.

‘주체’의 탄생지가 근대시기 유럽이라면, 단연 그 중심에서 주체는 곧 사유하는 정신이자 이성적 활동의 담지자로 간주되었다. 만약 광기에 사로잡히거나 망상에 시달린다면, 주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 이들은 이성적 사유를 하지 못하기에 어떤 올바른 선택과 행위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것들이 이성이라는 단일한 척도로 사유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주술, 야만, 광기 등 합리적 사유로 해명할 길 없는 것들은 참된 것의 반대편에서 거짓으로 명명되거나 악으로 규정되었다. 그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한 현대철학은 이처럼 이성의 이름으로 재단되었던 것들을 복원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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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미개의 이분법을 벗어나는 고찰의 기록인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1955), 광인이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시대마다 지위를 달리했는지 검토한 푸코의 『광기의 역사』(1961), 이성과 동일시되었던 정상에 의해 비정상으로 치부되었던 것들에 관한 보고인 캉낄렘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1966) 등은 모두 이러한 현대철학의 공유된 지반에서 발아한 업적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이성이라는 단일한 척도를 거부함으로써 동일화된 양식적 사고의 반대편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이질적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존재를 가시화했다. 그러나 이는 비단 철학적 사유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었는데, 단일하게 총체화될 수 없는 소위 다양성이라는 주제는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의식의 저변으로 점차 확대되어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품종 소량생산의 모델로의 자본주의의 전회는 ‘다품종’이 내포하는 다양성을 당위적 가치보다, 오히려 일상적이고 친근한 어떤 것으로 사유하게 하는 동인의 역할을 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을 함부로 야만이라고 칭하지 않으며, 이성으로 설명할 길 없는 주술이나 민속신앙을 비과학으로 통칭해 폐기해버리지도 않고, 광기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성의 반대편에 위치하는 것은 주술이나 야만, 광기뿐만이 아니다. 이성이라는 영역은 한편으로 동일한 척도와 방향으로 환원되는 진리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의지를 갖고 단단히 붙들고 있는 의식의 영역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성이라는 말에 함축된 의지적 활동이라는 암묵적 전제를 문제 삼지 않지만, 실은 이성적으로 사유하라는 명제는 의식을 단단히 붙들고 있으라는 명과도 같았던 것이다. 가령 플라톤이 그리는 영혼이라는 마부가 “분별과 수치심이 있고 참된 의견을 동무로 삼는” 선한 말과 “피가 뜨겁고 무분별과 거짓을 동무로 삼”1)는 나쁜 말을 통제하는 것으로 묘사될 때, 영혼은 의지적으로 말의 고삐를 단단히 움켜쥐는 인격으로 표상된다. 우리가 기대하는 영혼의 역할이란 그처럼 “마부의 막대기와 채찍도 개의치 않은 채 함부로 날뛰면서 앞으로 움직여 동료와 마부에게 온갖 곤란을 안겨주”는 “본성에 어긋난 쾌락”을 이성의 능력으로 잠재우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의지적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암묵적 ‘전제’란 그 자체로 당연시되기에 더 이상 물음에 부쳐질 기회를 갖지 않음을 가리킨다. 이로 인해 사유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은 비이성으로 간주되는 주술, 야만, 광기뿐만 아니라, 무의지적 활동 내지 무의식의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이라는 의지적 활동에 주목해온 역사란, 자연스레 그 배후에 있는 무의식 내지 무의지적 활동에 대한 사유를 차단해왔던 시간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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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무의지적 활동이, 마땅히 의지를 갖고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영혼이 의지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될 때, 의지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로 치환된다. 만약 나쁜 말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부의 탓이다. 그렇다면 이성의 타자로서 주술이나 야만, 광기와 마찬가지로, 무의지적 활동은 사유의 기회마저 박탈당한채 곧장 “무분별과 거짓을 동무로 삼는” 나쁜 말과 같은 것으로 치부 되어 버렸던 것은 아닐까?

무의식적 내지 무의지적 행위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할 때 우리는 대개 두 가지의 입장을 취한다. 하나는 그것을 특정한 조건 내지 환경에 결부된 불가피한 ‘정상참작’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체를 의지의 결핍으로서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무의지적 행위는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물을 수도 있다. 의식 내지 의지의 문제가 고삐를 단단히 움켜쥐듯 그토록 간편하게 해명될 수 있는 것일까?

애초에 플라톤이 제시하는 마부의 비유는 두 마리의 말이 함께 주어져 있고 그들을 영혼이라는 마부가 이끌어야 하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마부 스스로는 마차를 이동시킬 수 없다. 말이라는 동력원이 움직여주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두 마리의 말은 너무도 상이한 방향을 지시한다. 말들 역시 가고자 하는 저마다의 의지를 가진 셈인데, 마부는 그들의 의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하여야만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때문에 마부의 운행은 온전히 그만의 의지일 수 없다. 라이프니츠의 지적처럼 “마부는 말에 실려가는 것이지, 신중을 기한 말고삐에 실려 가는 것이 아니”(NE, 193)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마부의 의지를 대단히 전능한 것으로 다뤄왔다. 단일한 개체의 의지만으로 온 세상이 운행되는 일이 없듯, 유기체적인 인간의 신체조차, 선한 말과 나쁜 말이라는 상이한 추동력이 근본적인 심급에 자리하고 있다. 플라톤은 거꾸로 이러한 사정을 너무 잘 알았기에 마부에게 과도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되돌아갈 길은 그처럼 전능성을 부여받은 의지란 무엇인지 되짚어보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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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자발적인 주체의 행위를 강조하는 ‘의지’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단어가 없었던 시절이 있다. 콩 심은 곳에 콩이 나고, 도토리를 심은 곳에 상수리나무가 자라듯 과거의 맹아가 필연적으로 발현되는 것이 미래라는 강한 목적론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희랍어에는 ‘의지’라는 단어가 없었다. 의지란 통상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을 동반하는데, 이 때 선택은 마땅히 복속되어야할 필연성을 전복시킴을 뜻한다. 의지란 필연성에 복속되기보다 개인의 자의적인 선택에 따라 우연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때문에 통상 자유를 함의하는 의지는 우연에 상응하는 것이자 필연에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 내지 현재와 단절된 미래, 과거로부터 전개되어온 방향을 완전히 비틀어버리는 방식으로 새롭게 출현하는 미래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시대에 의지라는 개념이 사유되지 않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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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우리 시대는 한편으로 개인의 선택에 의해 미래가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개인의 의지에 많은 것을 건다. 다른 한편으로 한 해 운수를 점치려고 점집에 찾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악운을 미리 알기만 하고 그에 적절히 대비한다면 우리는 불행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처럼 개인의 의지를 전능한 것으로 과신할 때, 우리는 쉽게 낙담하게 된다. 그처럼 노력하고 의지했는데 이뤄지지 않았다는 데에 우리는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의지한다고 할 때, 대개의 행위들은 단일한 의지로 해명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을 포함한다. 배는 고프지만 면은 먹고 싶지 않을 때, 그러나 친구가 면요리를 강하게 원할 때, 라면집에 간 것은 나의 단일한 의지일까? 좀 더 극단적으로 강도가 칼을 들이밀 때, 내 손으로 지갑을 건넨다면, 그것은 나의 의지일까? 흔히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눈꺼풀이고, 세상에 숨길 수 없는 두 가지는 재채기와 사랑이라고 말한다. 잠을 자는 것,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발적인 의지보다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 상태로 접어들어 버리는 수동적 행위에 가깝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음을 이러한 표현은 잘 보여준다.

의지의 문제와 유사하게 우리는 의식적 자각에 따르지 않는 무의식적 활동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술이나 잠에 취했을 때 혹은 각성상태에서조차 의도치 않은 말실수가 튀어나올 때, 우리는 의식이 닿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 안에 자리잡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강력한 정념에 휩싸여 스스로의 행위를 ‘알고’ 있으면서도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다. 혹은 정신보다 신체에 각인되었기에 한 번 배우면 몸이 기억하는 자전거 타기와 같은 신체적 활동과도 다른 경험이다. 잠꼬대를 하고 술주정을 부리고, 말실수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행위의 순간에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새에 일어나는 것이며, 신체에 각인된 어떤 습관화된 경로를 반복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의지가 무력화되는 지점에서 ‘내 의지’라고 통칭할 수 없는 또 다른 의지들이 발현됨으로써 내 안에 복수의 의지들이 웅성거리고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을 지시한다.

 

 

거시적 무의식과 미시적 무의식

미시적 무의식

내 안에 복수의 의지들이 웅성거리고 있음에 주의하려는 시도를 우리는 미시 심리학이라고 칭할 수 있다. 이는 하나의 단일한 충동 내지 의지가 유기적으로 단일한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상이한 방향을 지시하는 복수의 충동 내지 의지들이 모여서 한 인격체를 형성함을 전제로 한다. 가령 신체를 구성하는 심장이나 폐, 허파, 간과 같은 기관들과 뼈, 근육, 신경세포들은 저마다 작동의 기제가 상이하다. 이는 각각의 기관 내지 세포들이 ‘의식’을 갖기에 저마다 욕구하는 바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의식 수준 이전에, 저마다의 기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작동기제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개개의 기관들은 정신의 의식적인 사유가 곳곳마다 명령을 내리고 개입하는 양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운동하기 때문이다.

가령 문학 작품을 생산하거나 바둑 두기와 같은 고도의 정신적인 유희활동을 감당할 수 있게 된 오늘날의 인공지능이 유독 고전을 면치 않았던 분야가 이족보행이라는 점은 이를 예증한다. 인간은 대개 걷는 동안 어느 발을 먼저 내딛고 그 순간 무게 중심을 어떻게 이동시켜야 하는지, 평행은 어떨게 유지하여야 하는지 등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걷는다. 그러나 두 다리가 지면에서 동시에 떨어지는 뛰기와 달리 걷기는 언제나 양 다리를 앞뒤로 움직이면서 무게중심과 평행상태를 유지하여야 하는 고도로 복잡한 행위이다. 만약 외부의 장애물과 그에 따라 작동해야 하는 힘의 방향이나 세기 등을 매 순간 계산한 후에 이동해야한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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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로봇이 사람의 오감에 해당하는 센서를 갖고 훨씬 정교하게 주변에 대한 정보들을 수합한다고 하더라도, 순간적으로 몸의 기울어짐이나 힘의 크기, 관절의 굴절 각도 등을 계산해서 운동으로 변환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반면 인간이 유아기 때 최초의 보행방법을 익히고 난 후에 어려움 없이 걷기를 해낼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신체 기관들이 정신의 개입없이 스스로 작동하는 방식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신체 각 부분은 스스로 운동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기제를 발달시키기에, 매순간 외부의 상황과 맞물려 있는 조건값을 계산하면서 어떻게 운동해야 할지 판단하는 뇌의 도움없이도 스스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체를 구성하는 기관들은 각각의 고유한 메커니즘에 따라 ‘자동적’으로 운동하는 것이고, 저마다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운동하고자 하는 방향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각 기관이 추구하는 저마다의 고유한 방향으로부터 각 기관은 저마다 특정한 것을 욕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 신체의 각 부분들은 저마다 의지와 충동을 갖는 것이다. 가령 입에 단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입이 원하는 것과 몸 전체가 원하는 것이 결코 같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감기에 걸려 항생제를 먹는다면, 무너진 면역력은 회복될 수 있겠지만 당장 신체에 수용된 약을 해독해야 하는 간은 바삐 일하느라, 결코 편치 않은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간에도 입이 있다면, 자신에게 강도높은 노동을 요구하는 약이나 술의 섭취는 삼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반대의 경우, 몸 전체를 위해 운동을 하려는 의지와 이에 따르지 않는 신체 때문에 고생하는 경험을 떠올릴 수도 있다. 대개 등산의 초행길에는 호흡이 가빠지고 숨 쉬기가 어렵다. 의식적으로는 산길을 오르려는 의지가 충만하지만 아직 일상생활의 리듬대로 운동하던 심장이 갑작스럽게 산소가 부족한 가운데 더 많은 혈액을 순환시키는 일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은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든지, 의식적으로는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몸이 저절로 어떤 행위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정신과 대립되는 몸을 단일한 것으로 통칭하지만, 몸의 욕구는 이처럼 복수적인 것으로 구성된다. 그처럼 신체를 단일하게 통칭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은 그에 대한 미시적 관점을 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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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우리는 정신적 욕구 내지 충동 역시 다양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복수적인 의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가령 학교에서 동아리로 문학동아리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좋아하는 친구나 선후배의 권유 때문일 수도 있고, 생활기록부에 남기기 적합한 활동이라고 판단해서였을 수도 있고 혹은 전에 읽었던 인상적인 문학작품이 떠올라서 일수도 있으며, 시나 소설을 써보겠다는 의지의 발현일 수도 있다. 이 중 단한가지 욕구만으로 오직 동아리를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 의지의 배후에는 또 다른 의지들이 연이어 질 것이다. 보다 일상적으로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경우도 그렇다. 오늘 저녁 식사로 선택한 메뉴는 점심 식사에서 부족하게 섭취한 영양소에 대한 신체의 요구와, 함께 식사하는 친구의 추천, 식당에서 제공하는 메뉴와 프로모션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기체 속에서 복수의 의지 내지 충동을 발견하는 미시 심리학이란 단지 추상적인 철학적 제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나의 신체와 사유가 어떻게 전개되고 작동하는지를 고찰하는 매우 실제적인 물음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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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적 무의식

그럼에도 우리는 복수적인 의지와 충동들이 결국에는 단일한 사유와 행위로 환원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실로 달콤한 간식에 대한 욕구와 건강에 대한 염려가 상충할 때, 우리는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행위한다는 것은 매 순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러한 판단의 과정을 거친 결과가 발현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리 유기체가 복수의 충동과 의지를 담지하고 있는 신체라고 하더라도, 결국 궁극적인 판단을 내리는 최종심급의 결정자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사실은 상이한 복수의 충동과 의지처럼 보였던 것이라도, 그것은 단일한 하나의 심급에서 발현된 것이 아닐까? 가령 달콤한 것을 먹고자 하는 충동은 쾌락을 느끼고자 하는 충동이고, 건강을 염려하는 의지 역시 고통없이 쾌락을 느끼며 살고자 하는 충동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게 쾌락원칙에서 비롯한 상이한 표현들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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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 이처럼 다양한 욕구와 충동들을 하나의 원초적인 원리로 해명할 수 있다는 이론은 프로이트에게서 제안되었다. 프로이트가 약 40년간에 걸친 정신분석 연구의 기간 중 후기에 죽음충동이라는 계기를 발견하기 이전까지 인간 심리를 근본적인 지위에서 추동한다고 간주한 것은 쾌락원칙이었다.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에 주목한 것은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는 것이 쾌락, 정확한 의미에서는 성충동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신경증과 강박증 등의 임상사례를 접하면서 환자의 여러 증상들이 성충동과 결부되어있다는 추론을 하게 된 그는 말실수나 농담 꿈과 같은 일상생활의 영역에까지 성충동이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지배적이라는 점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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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점은 프로이트가 인간 심리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심급을 성충동이라는 단일한 의지로 해명하고자 했다는 점에 있지 않다. 통상 프로이트를 가장 곤란하게 했던 비판, 융으로부터 그와 다른 길을 걷게 하고2), 프로이트 생전에는 물론3) 사후에까지4) 정신분석을 향한 중요한 비판지점으로 남은 것 중 하나는 정신분석이 모든 인간의 욕망을 성욕이라는 단일한 종착지에 안착시켜버렸다는 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프로이트는 성충동이라는 말로써 고도로 복잡한 인간 심리를 단순한 이차원적인 평면에 위치시키고자 하지 않았다. 그가 후기에 무의식을 ‘이드’라고 새롭게 명명했을 때 그는 ‘이드는 충동들로부터 나온 에너지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어떤 조직 체계도 없고 단일화된 의지도 없습니다.’5)라고 말한다. 오히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는 “어떤 단일화된 의지도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프로이트가 단일한 의지로 인간 심리를 단순화시켜버렸다고 정치한 분석없이 서둘러 비판할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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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우리는 그가 심리학 연구에 있어서 질적인 방법을 배제하고 양적 연구의 방법을 택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는 성충동을 ‘리비도’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는 리비도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 정신에 대한 분석이란 리비도라는 단일한 척도로 환원될 수 있는 에너지의 흐름에 대한 연구와 다르지 않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즉 프로이트에게 혐의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성충동으로 인간 심리를 단일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리비도 개념을 통해 질적인 인간 심리의 영역을 양적 연구로서 탐구하고자 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가 화폐라는 단일한 척도로서 상품의 가치는 물론 인간의 감정과 관계, 인간 자신의 가치마저도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환원시켰듯,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경제학을 통해 인간 심리를 ‘양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양적연구로서, 복수적인 충동과 의지들로서 구성되는 인간 심리의 질적 차원을 결과적으로 배제시키는 결과를 불러온다.

우리는 앞서 단일한 인격 안에는 복수의 의지와 충동들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심리학을 미시 심리학이라고 칭했다. 그와 결부지어, 우리는 프로이트의 리비도 경제학으로서의 정신 분석학을 거시 심리학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거시적 무의식은 인간 정신에 대한 탐구 역시 형이상학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실증적 학문인 자연과학의 층위에서 다룰 수 있음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6)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러한 자연과학의 연구로서 거시적 무의식은 인간 심리를 단순화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만약 프로이트를 따라 거시 심리학의 관점을 취한다면, 우리가 갖는 다양한 욕구와 의지들은 저마다의 가치를 갖는 것이기 보다 단일한 가치로 환원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열흘을 굶은 이가 느끼는 식사에 대한 욕구와 건강하게 하루 세끼를 먹고 있는 이가 느끼는 식사에 대한 욕구는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우리가 한 잔의 커피값을 아껴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는 것이 값지다고 말하는 것은 각 개인이 느끼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결코 단일한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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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프로이트의 제안이 우리를 난감하게 하는 것은, 리비도라는 심리의 근본적인 추동력이 결코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어떤 것으로 사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알려져 있듯, 프로이트는 초기 연구에서 증상적인 행위들뿐만 아니라, 꿈이나 말실수와 같은 일상생활에서 무의식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데 주목했다. 가령 한 독서 토론 모임에는 유독 <벤 허>라는 소설명을 기억해내지 못한 여대생이 있었다. 프로이트의 추론에 따르면 그녀는 정숙한 여성상을 교육받았을 것이고, 그 작품명이 독일어로 ‘창녀’를 뜻하는‘허(Hure)’를 연상시키기에 그녀는 그것을 결코 발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은 오전 파트타임 가정부에 지원한 한 여성이 자신의 신원증명서를 보관하겠다는 고용주에게 “오전, 아니 오후의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필요하니 돌려주세요.”라고 말실수를 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프로이트에 보기에 그녀가 보다 좋은 오전의 일자리가 있는지 더 찾아보려는 의중이 말실수로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사례의 나열은 말실수가 드러내는 무의식에 놓여진 것들이란 가감없이 표면으로 상승할 수 없는 은밀한 욕구 내지 의지라는 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가 제안하는 리비도 경제학으로서의 거시적 무의식은 의식이라는 상층부에 드러나지 않는 심연의 어떤 것인 동시에 인간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에너지가 자리하는 곳으로서 무의식에 주목하지만, 무의식 자체를 지하 깊숙이 묶여 있는 것, 내 안의 또 다른 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통제나 제어가 불가능한 것 등 전적으로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표상한다. 통상 우리가 무의식을 ‘검다’고 표상하고, 다시 ‘검다’라는 말에서 ‘억압’을 떠올리는 것 또한 이러한 프로이트가 창안한 정신분석의 관점이 스며든 결과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정신분석과 같이 무의식을 성충동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있는 그대로 의식의 표면으로 상승할 수는 없는, 억압되어야 할 무엇으로 간주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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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우리가 미시적 무의식을 수용한다면, 무의식은 더 이상 억압되어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어떤 것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구와 의지가 무수히 많이 한 인격체 안에 내재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단일하게 통칭하기보다 그 자체를 수용하는 관점에 우리가 자리한다면, 우리에게 무의식은 억압의 대상이라기보다 모든 사유와 행위를 산출해내는 근본적인 생산장치로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접해왔던 프로이트의 거시적 무의식과 다른 차원에서 미시적 무의식이 제안하는 바는 바로 이러한 무의식의 ‘생산성’이다. 무의식은 은연중에 드러나는 내심의 욕망, 그렇지만 감출 수 밖에 없었던 어두운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모든 행위와 사유의 동력이 되는 생산장치라면, 무의식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탐구해볼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시적 무의식의 탐구가 우리가 의지의 문제와 결부해서 좌초를 겪는 현실적 문제들에서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점들을 드러내는 하나의 조망점이 되어준다면, 우리는 가능한 하나의 삶을, 그렇지만 전에는 결코 사유할 수 없었던 삶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어서 

 

1) 플라톤, 『파이드로스』, 조대호 옮김, 문예출판사, 2011, 253c-254e

2) “억압의 원인에 관해서 프로이트는 성적인 외상을 들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사회적응에의 문제라든지 삶의 비극적인 환경이 자아내는 중압감이라든지 체면 따위 등이 그것이다.” “내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프로이트의 태도인 것처럼 생각된다. 한 인간이 어떤 예술 작품 속에서 나타내는 영성에 관해서 언급을 할 때마다 그는 그 속에서 ‘억압된 성욕’을 (...) 끌어들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Jung, 1995; 273, 276

3) 가령 프로이트에 대한 평전을 쓴 피터 게이는 프로이트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1920년대, 그를 향해 제기된 수많은 비판의 목소리를 전한다. 가령 ‘1924년 5월 『내적인 정신의 힘』 저자 브라이언 브라운(Brian Brown) 박사는 (...) 프로이트의 무의식 해석을 “타락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브라운 박사는 “나아가 프로이트는 모든 것을 성으로 풀어냈다”는 말로 반격했다. 프로이트가 성에 강박되어 있다는 오랜 비난은 지울 수 없는 낙인 같았다.’ Gay, 2011; 183

4) 가령 들뢰즈는 정신분석이 모든 증상을 성욕의 억압으로 환원시킨다는 점, 나아가 모든 증상의 원인은 엄마에 대한 성욕과 아빠에 대한 적대감으로 해석한다는 점에 대해 『천의 고원』 2장에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제기한다. ‘프로이트가 유일한 모터로 삼은,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부동의 모터로서의 오이디푸스적 장치. 오이디푸스에 대항하는 장치(누이와의 근친상간, 분열적-근친상간, “하층민”과의 정사, 항문애, 동성애?). 이 모든 것들에서 프로이트는 단지 오이디푸스의 대체물, 퇴행, 파생물만을 본다. 실로 프로이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Deleuze, 2001; 78~79

5) Freud, 「서른한번째 강의: 심리적 인격의 해부」,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 임홍빈ㆍ홍혜경 역, 열린책들, 2016, p. 101

6) 심리학 연구가 형이상학적 논의에 머물지 않고, 자연과학의 층위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령 17세기의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는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사이에 ‘과학적인 방법scientific method’을 통한 ‘심리학’의 독립적인 영역의 성립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 ‘정신측정psychometie’의 방향을 세운 볼프의 학문적 깃발은 19세기 ‘정신물리학’의 창시자가 된 페히너로 계승된다. 페히너는 인간의 정신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으며,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정신물리학을 주장함으로써 심리학이 다른 자연과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했다. 정신물리학으로써 심리학이 다른 자연과학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을 보인 페히너는, 의사이자 정신분석가로 하나의 과학을 설립하기를 열망했던 프로이트에게 다시 그 자체로 중요한 인물이 된다. 언제나 홀로 무의식의 영역을 개척해왔음을 술회하는 프로이트가 「나의 이력서」(1924)에서 이례적으로 꼽는 이도 페히너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나는 언제나 페히너의 사상에 귀를 기울였고 중요한 점들에서 이 사상가를 따랐다’(프로이트, 「나의 이력서」, 263)고 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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