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한 걸음 앞의 시 (2)

-자코메티와 김수영

 

 

 

                                                              금은돌 / 시인, 화가

 



 

 

3. 작품, ‘를 바라보는 일

 

 

누구든지 매혹되었을 때, 그는 그가 보는 것을 사실은 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즉각적 인접성 속에서 그를 만지고, 비록 이것이 그와 절대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그를 사로잡고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매혹은 근본적으로 중성의 비인칭적 현전에, 미정의 그 누구에게, 얼굴 없는 거대한 어느 누구에게 관련되어 있다. 매혹은 시선이 맺고 있는 관계, 시선 없고 윤곽 없는 깊이와, 맹목적이기에 보게 되는 부재와 맺고 있는 그 자체로 중성의 비인칭 관계이다.[각주:1]

 

동생 디에고의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으로 만들 때, 자코메티는 포즈를 취하는 순간부터 대상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고 고백한다.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그게 누구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익숙한 것 앞에서, 망각의 강을 건넌 후에, 자코메티는 동생 디에고를 보고 있지 않았다.

 

를 바라보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에게서 에게로 찾아가는 길이다. 아상(我想)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를 탈출하는 일이고, ‘에게 도착한 이후, 다다랐던 지점에서 탈영토화 하는 일이다. 이 과정은 중성적이고 비인칭적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의 낯선 가 눈앞에 등장한다. 대상에 도착하기 전에, 원래의 대상이 지워진다. ‘는 누구인가? “누군가가 있다. 내가 홀로 있는 곳에. 홀로 있다는 사실에. 그것은 나의 시간이 아닌, 너의 시간이 아닌, 공동의 시간이 아닌, 하지만 어느 누구의 시간이 죽어 버린 시간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어느 누구는 아무도 없을 때에 여전히 현전하는 자이다.(……) 어느 누구는 얼굴 없는 그, 사람들이 제각기 그 일부를 이루는 그 누구이다.”[각주:2]는 예술가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어느 지점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비인칭적 존재이다. 타자의 시선과 공간이 제거된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이다.

 

고독하다. “어느 누구도 아닌 자가 된 나, 타자가 된 타인을 발견하러 가는 과정에서 만난 누군가는 공간 속에 침묵을 드리운다. 그리하여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나는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건넬 수 없고, 나에게 말을 건네는 자는 를 말하지 않고,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이 아니다.”[각주:3] 누구인지 모르는 과정에서 길을 잃는 자가 되어, 작가는 알 수 없는 를 찾는다. 고독한 가운데 직면하게 되는 는 타자이자 나이다. 그러므로 매혹은 고독의 시선, 끊이지 않는 끝나지 않는 시선이다. 그 시선 속에서 맹목 또한 여전히 시각이다. 더 이상 본다는 것의 가능성이 아니라 보지 않는다는 것의 불가능, 그 자체를 보이게 하면서 끝나지 않는 시각 속에-언제나 언제나-지속되는 불가능으로서의 시각이다.”[각주:4] 자코메티는 나는 디에고의 얼굴에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를 그리면서, 비인칭적 누군가를 만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를 만나게 된다.

 

문학 역시 에게서 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카프카는 자신에 대한 관찰에서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넘어 또 다른 세계, 자유의 세계로 이르는 드높은 관찰로 가는 해방의 통로[각주:5]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를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를 제거하는 일이, ‘를 찾는 출발점이 될 게다. 카프카는 로 대체할 수 있을 때,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그때라야 문학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아무 것도 아닌, 비어있는 공간에 자리하는 존재자가 된다.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에게서 로 가는 고독한 과정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어 다른 세계를 여는 사람인 게다.

 

그러므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를 여는 행위가 된다. 수동적인 태도로 눈꺼풀만 뜨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지로 모험을 떠나는 일이다. 모험은 끝나지 않는 여정을 포함한다. 그 과정이 치열하고 엄숙해야, ‘다른 세계가 열린다. 다시 한 번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이 가능하다. 다른 세계가 열리는 관찰은 이전에 시작했던 관찰이 아니다. 나선형의 다른 지점, 질적 축적이 쌓인, ‘드높은 관찰이다. 색다른 통로가 열린다. 바라봄 속의 또 다른 바라봄의 세계가 열리고, 그 열린 세계 속에 다시 관찰하며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자코메티의 조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조각이 가진 생명체와 영원성 때문에, 그 조각들을 절대적으로 바라본다. 관람객은 그 시선에 이끌린다. 자코메티가 캐롤린에게 매혹 당하였던 것처럼, 시선 속의 시선으로, 우리는 홀림을 당한다. ‘환원된 것이 아니라 환원을 벗어나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공간 속에서 조각들은 깊이가 아닌 깊이, 이미지라는 것의 깊이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공간의 주인이 된다. 우리가 조각들을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이 지점은 우리를 무한에 위치하게 하는 지점, 여기가 그 어느 곳과도 일치하지 않는 지점이다.”[각주:6]

 

캐롤린를 바라보고 있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자코메티는 일본 철학자 야나이하라(그의 아내 아네트와 사랑에 빠졌던 일본의 철학자이기도 하다)를 모델로 삼아, 작품을 만들었다. 자코메티는 당시 작업 과정을 이렇게 진술한다. “내가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아무도 탐험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고 우리는 함께 그 모험 속을 들어가려는 참이오.”[각주:7] 바라봄의 세계에서, 미지를 찾아 헤매는 일은 몽롱한 환상의 세계로 빠지는 것과 같다. 그 지점에 다다를 때, 시선은, 스스로, 구멍을 찾는다. 어느 차원의 어느 지점에서 만날지 모르는 낯선 영토를 찾아간다. 그 영토를 만나기 위해, 촉수를 곧추세우고, 방황한다. 그 길은 끝이 없다. ‘에게서 에게로 가는 길. ‘에게 다가갔다가 에게 돌아오는 길. 이것은 침묵의 운동이다. 벗어나려는 원심력과 에게서 에게로 돌아오는 구심력을 가진다. 이 운동은 원반던지기처럼,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반복된다. 끊임없는 운동은 그 자체로 무한성을 가진다.[각주:8]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처럼 반복되고 무한 변주된다. 끝을 알 수 없는 지점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에 창작자와 대상이 동시에, 하나의 곡을 완성한다. 더불어 협주하며 시선을 주고받으며 투쟁한다. 치열하게 주고받던 시선은 그 자체로 영원성을 획득한다.

 

미로에서 건져 올린 작품은 뒤늦게 태어난다. 묘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는 게 아니듯이, 조각은 죽음의 공간에서 생의 차원으로 건져 올려진다. 구체적인 공기가 낱낱이 발현되고, 얼굴은 내밀한 감정과 사건을 품고 오롯이 부활한다. 자연스럽게 건져 올린 흉상은 주변의 공기를 집어삼킨다. 작품은 전시장의 허공을 끌어당기고, 흉상의 시선은 관람객의 눈빛을 훔친다. 어느 장소에 놓이건, 생명을 얻은, 영원함을 얻은 조각품은 그 자체로 존재의 존재자가 된다. 조각 작품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 소멸하는 인간보다 영원하게 살아남아서,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있다.’ 마치 저 먼 미래에서 다가온 예언자처럼, 저 먼 과거에서 불려나온 이집트의 미라처럼, 해골만 남은 인도 수행자의 육신처럼, 저 스스로 존재한다.

 

지코메티의 시선은 무한에 위치하게 하게 하는 지점에 있고 그 어느 곳도 일치하지 않는 지점에 가닿는다. 그곳에서 숨 쉰다. 단순히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다. 예술가의 영혼이 담긴 숨을 저장하여, 그 숨을 동시에 뱉어낸다. 전시장에서 자코메티의 숨과 대상의 숨과 그 시간을 뛰어넘은 숨이, 관람객의 숨과 뒤섞인다.

 

작가는 에게로 향하는, 객관적 시선과 외부의 시선을 갖기 위해, 저 멀리 다른 차원의 운동을 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다. ‘에게로 갔다가 자신의 홍채로 돌아온다. 환상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 그 과정에서 는 낯선 가 돌아올 영토를 마련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사라진다. 글쓰기에서도 나타나는 일이다. 글 쓰는 자는 끊임없이 사라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지 위에서 죽는 자이기 때문이다. 빈 텍스트 위에서 죽지 않으면, 비인칭적 죽음을 겪어나가지 않으면, 낯선 시간을 경험할 수 없다. 낯선 얼굴을 만날 수 없다. 글을 쓰는 자는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를 사라지게 하고, 끊임없이 미지의 공간을 여는 역할을 하는 자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가올 누군가에게 미지의 자리를 내어주는 사막 속의 낙타일지도.

 

 

 

4. 김수영, 말하긴 했지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즈음에서 시인 김수영을 이야기해야겠다. 김수영은 앞선 연구자들이 밝혀왔듯이, ‘자코메티적 발견을 말해왔다. 시인 김수영의 후기 시세계 변모 과정에서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 이 과정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다시 구체의 세계로 돌아오는 사유의 경로를 보인다. “연극……구상(具象)……이런 것을 미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다시 추상을 도입시킨 작품을 실험했다. 그러면서 아직도 “drama를 포기할 단계를 못한 것 같으나 되도록 자연스럽게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사유의 변곡점들은 자코메티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구상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겹쳐진다.

 

원래 연극배우이기도 했던 김수영은 그의 초기 시세계에 연극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연극성에 매료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연극성의 요체를 풍자와 구상성으로 정리하여 설명한다. 김수영은 역시 스토리다. 하나의 스토리다.”하면서 쉬페르비엘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점잖은 주제를 취급하면서도” “속취(俗臭)와 아기(雅氣)”를 담고 있다는 점을 든다.[각주:9] 스토리성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화자는 무대 위에서 연극대사를 펼치는 배우가 된다. “를 공존시키고, 갈등이 드러나고, 이질적이 것이 함께 한다. 그러나 김수영은 시적 연극성의 또 다른 근간인 구상성은 한편으로는 시에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진술들이 나타나는 것을 차단하는 방편이 되지만 시적 대상에 대한 관심을 예각화함으로써 시인의 관심이 사회적인 것에까지 확장되는 데 일정한 방해가 되기도 한다.”[각주:10]고 판단한다.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나갔던 시인은 이상을 밀고나가야 했다. “즉 실천은 윤리적인 것 이상의, 작품의 image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것이어야 했다. 이것이 현대의 순교이다. 익히 알려진 유명한 표현을 빌려오면 다음과 같다.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촌초(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다."[각주:11] 시인은 텍스트 위에서 배반하며 죽는 자이다. 시인은 배반하며 관찰한다. 시인은 지우며 바라본다. 시인은 잊으며, 새로 짓는다. 시인은 망각하며, 떠난다. 시인은 배반하며, 미지 속으로 그 자신을 던진다. 온몸을 던진다. 몸을 던지고 지우고 배반하며, 죽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그 자신 자체가 image가 된다.

 

 

[각주:12]

 

 

눈이 온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페허에 페허에 눈이 내릴까

 

There is no hope of expressing my

vision of reality. Besides, if I did,

it would be hideous something to

look away from

 

내 머리는 자코메티의 이 말을 다이아몬드같이 둘러싸고 있다 여기 hideous의 뜻은 몸서리나도록 싫다는 뜻이지만, 이것은 가령 보이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to look away from을 빼 버리고 생각해도 재미있다. 나를 비롯하여 범백의 사이비 시인들이 기뻐할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그들은 말할 것이다. 나는 말하긴 했지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으니까 나는 진짜야, 라고. 이에 대해 심판해 줄 자는 아무도 없다.[각주:13]

 

이 시를 자코메티적인 상황으로 읽어보자. ‘에게서 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도 같이 길을 잃어보자. 눈은 자코메티의 시선이자 바라봄이 될 수 있다. 시적 주체는 발화하지만, 전면에 보이지 않는다. 텍스트 위에 내리는 눈()은 눈()이 될 수 있다. 눈은 사라지는 주체, 소멸하는 화자가 될 수 있다. 눈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망각의 강을 건너는 시적 주체이어도 된다. 눈은 그대에게 가 닿으려는 온몸이여도 좋다. 이 모든 것들이 내리고 또 내린다. 이 모든 것들이 생각 뒤에, 생각 속에, 생각 위에 내린다. ‘는 사라지고 소리가 남는다.’ 사라지며 흔적이 남는다. 사라지는 흔적 위에, 다른 형태가 태어난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울음 울듯이 응아하고 내리고, 이 모든 것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내린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페허위에서 진행되는 사건이다. 페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죽음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생을 동시적으로 사유하고, 동시적으로 끌어안고, 동시적으로 껴입은 상태에서 존재는 숨을 쉰다. 그렇기에 이 비인칭적 공간은 이미 페허이고, 눈이 내리고 내려도 페허가 될 수밖에 없다. 의문문으로 끝을 맺는다. “페허에 페허에 눈이 내릴까물을 수밖에 없다. 글 쓰는 자로서 자의식이 가득한 문장 위에,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라고 묻는다. “나는 말했지만 보이지 않을 것이기에, 어느 순간 미지의 어느 지점에 도착할지 모른다. 미지의 장소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단지 물을 뿐이다. 주체의 자리를 미지의 영역으로 끝까지 몰아붙이기 위해, 질문한다. 가자. 더 가야 한다고. 무한 반복되는 운동 속에서 존재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가볍고 가벼운 발자국과 같은 눈이 내리는 사이, 그 어떤 다른 것이 되어 흩날려도 되는 사이, 침묵이 흐른다.

 

시는 하나의 수련이다. 수련은 정신이고, 정신의 순수함이며, 모든 것과 맞바꿀 수 있는 이 공허한 능력으로서의 의식이 실제적 능력이 되고, 그 조합의 무한성과 조직의 범위를 엄격한 한계 내에 가두는 순수한 지점[각주:14]이 된다. 모리스 블랑쇼가 말하듯이 시인은 공허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시인은 쓸모없는 것들에 목숨을 건다. 한 문장을 위하여 온 시간을 불태운다. 그것을 정신의 순수함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을 바꿔 말하면, 어떤 한계에 부딪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무너지는 것도 능력이다. 그리고 다시 걸으면 된다.

 

일어서는 일. 스스로 상처를 지워내는 일. 버리는 일. 그래서 터질 듯이 가득 채운 그림에서 자코메티는 숱한 선들을 지운다. 지워지고 제거되는 허공을 만들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비운다. 지우고 지우며, ()가 된다.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백지 위에 담으려고 한다. 몇 개의 선들이 가볍게 중첩되면서, 저절로 충만해진다. 결핍을 드러내면서 살아있다. (캐롤린의 그림처럼),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 죽음을 중첩한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각자의 존재 의미를, 현존에 있지 않는 다른 자리로, 슬쩍 위치이동 시킨다. 그 선은 탈물질화된 존재들이다. 자코메티의 선들이 사라지며, 리얼리티를 벗어난다. 지워질수록 영원성을 얻는다.

 

시인 김수영의 시작노트에서 사실주의적 문체를 터득했을 때 비로소 비사실에로 해방된다.”[각주:15]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바라보고 바라보면서, 또 다른 드높은 관찰로 가는 해방의 출구를 연 셈이다. 그 시선에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멀어지며 바라보기 때문에, 관람객이 일부러 거리를 두고 열 발짝 뒤로 물러서지 않아도 된다. 영원성을 획득한 것 같으면서도, 가볍게 사라져버리는 눈송이처럼, 자코메티의 대상들은 탈물화된, 비인칭적 공간에 위치한다. 작품의 시선은 투명하다. 사라져버릴 것만 같지만, 뒤돌아서자마자 나타나는 환영처럼, 어디선가 출현한다. “웃음이 난다. 이 웃음의 느낌, 이것이 양심일 것이다. 나는 또 자코메티에게로 돌아와 버렸다.”[각주:16]

 

 

걷는 사람

 

 

 

5. 실패, 먼저 와 기다린다

 

 

 

나의 진정한 비밀은 나의 생명밖에는 없다. 그리고 내가 참말로 꾀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다. 이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을 치러도 좋다. 그대의 박해를 감수하는 것도 물론 이 때문이다.”[각주:17]

 

 

시인 김수영은 나는 번역에 지나치게 열중해 있다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시작노트 6에 시인 김수영은 비밀을 두 개나 고백한 셈이다. 하나는 번역의 문제, 또 다른 하나는 생명의 문제이다. 그리고 생명이라는 단어를 자코메티의 시선의 깨달음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사라져도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시선이라는 깨달음말이다. 김수영이 말한 생명이라 함은 영원하게 살아남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한다. 자코메티가 이 깨달음 이후에, 자신의 그림에서 선을 지우듯이, 선을 지운 자리에 침묵을 드리우듯이, 영원한 공기가 흉상을 감싸고 돌 듯이, 영원성을 얻듯이, 김수영 또한 이 과정을 진행한다. 그의 비밀, 나의 진정한 비밀나의 생명영원을 얻고자 함이고, “참말로 꾀하고 있는 것은낡은 형식일지라도, 연극적인 방식이나 구상성을 탈피하더라도, 시 안에 침묵을 모시는 일이다. 김수영 역시 지우개를 든다. 단어를 지우고, 다소 분명했던 시적 주체의 자리를 지우고, 거리를 두며 멀어진다. 멀어지는 일. 망각의 강을 건너는 일. 그리고 돌아오는 일.

 

김수영 시인이 외국어와 한국어 사이의 경계에 서 있었던 점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번역은 한 언어와 다른 언어 사이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의 운동을 하는 작업이다. 모국어에서 멀어지며 외국어로 다가간다. 미지의 단어로 낯설어진 모국어의 세계로 돌아온다. 어떤 단어는 번역 불가능하여,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미지의 또 다른 단어를, 맥락에 따라, 다른 자리에 놓아야 할 경우가 발생한다. 이렇게 번역은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경험하며, 사유의 자리에 타자의 단어들을 쌓는다. 언어로 언어를 배반하며, 이국의 감수성으로 자국의 감수성을 뒤집는다. 비슷한 범주의 단어를 두고 동질성을 찾으려고 하면할수록 멀어지는 경험을 하는, 이질적 덧칠 작업과 같다.[각주:18]

 

이 과정에서 언어의 운동을 체득한 김수영은, 천천히, 후기 시세계[각주:19]의 변화 지점으로 이동한다. ‘침묵의 운동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자코메티적 발견이라고 돌려 말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침묵의 발견일 것이다. 김수영이 일본어로 시작노트를 쓰는 일 역시, 자코메티처럼 시선의 멀어짐 연습이다. ‘로부터 출발하여 에게로 가는 일이다. 번역은 이 운동의 또 다른 실천이다. 언어의 타자성을 체험하는 온몸의 왕복 운동이다. 이 운동은 끊임없는 실패를 전제로 한다. 제거하고 정리하며, 침묵의 공간에 들어설 때, 시인은 무너진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지 않은 작가는 예술가가 아니다. 현실적인 게 얼마나 빈약하고 허약한 울타리인지, 그것이 얼마나 착각과 교란을 담보하고 있는지, 눈으로 체험해야 한다. 찰떡같이 믿었던 지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 보는 일, 이미지가 사라지는 경험을 해 보는 일. 그 가운데 사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일. 이 과정을 체험하는 예술가는 선물을 받는다. 실패는 즐거운작업이 된다. 이질성과 동일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도, 역설의 과정을 즐길 수 있을 만큼, 견딜 수 있는 작업이 된다.

 

작품을 읽고/보고 난 뒤에 감도는 침묵은 모험의 결과물이다. 침묵을 위해서라면, 희생을 감수해도 된다는 것은 창작자가 미지의 순환 속에서, 죽음과 두려움을 가로지르겠다는 것이다. 침묵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중첩하고, 생과 사의 경계에서 녹슨 칼날을 느리게 움직이는 운동성이기 때문이다. 천근만근 무거운 칼을 휘두르며, 공기를 느리게 정지시키는 일. 침묵을 끌고 다니는 예술 앞에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일, 호흡을 가다듬는 일이다. 그 가운데에 관람객을 두고, 우리가 끊임없이 성찰하게 하는 일. 독자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 이것이 성실한 시가 될 것이다.

 

자코메티와 김수영, 다른 길을 걸으며, 비슷한 지점에 도착한다. 동생 디에고를 만든 흉상이든, 아내 아네트를 만든 조각이든, 캐롤린이든, 자코메티는 결국 에게로 돌아온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보이는 거리감은 자코메티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과의 거리감일지도 모른다. 이 거리감이,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고, 침묵을 드리우고, 대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낯섦을 만든다. 스스로 비어있게 한다.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사물을 지워가는 동안, 침묵이 먼저 와 기다린다. 눈이 내리는 동안, 동일성이 끊어지는 눈이 내리고, 비연속적으로, 흩날리는 동안, 김수영은 고독을 앞당긴다. “침묵의 한 걸음 앞의 시가 되는 것이다. 미지의 공간으로 손님을 초대하는 일. 그것이 예술작품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자코메티와 김수영, 용기 있는 선택을 한 자들이다. 용기 있는 시선은 다른 방식으로 걷게 한다. 덜어내고, 버리며, 가볍게. 걷는다. 그 걸음 속에 절망을 담고, 시를 쓰며,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실패한다. 세상의 기준으로 사랑받고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희생을 치르더라도, 걷는다. 계속 걸어야 한다. 다음 작품을 위한 몸부림 정도의 절망일지라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시인 김수영이 완전한 희생의 한걸음 앞의 희생[각주:20] 을 말하듯이, 완성된 작품을 위한 한 걸음 앞의 절망이 필요하다. 맘 놓고 실패하는 이들이 있기에, 지금 여기 우리가, 딸각 소리를 듣는다.

 

나에게 조각은 하나의 아름다운 물체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보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인간이 생각을 하는 그 무엇이 나를 매료시키고 내 마음을 사로잡게 하는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내가 하는 이 일이 조금이나마 성공한다면, 내 조각 작품은, 내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각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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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돌 : 발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2008년 『애지』에 평론을, 2013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다. 연구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를 비롯하여 평론집 『한 칸의 시선』이 있다. 2008년 교통사고 당시 살아있는 것은 바라보는 일이다라는 문장이 스치고 지나가다. 그 이후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하여, 다섯 번의 개인전(<눈에 대한 낭만적 독해>)과 네 번의 단체전을 갖다. 2017년 여름 리좀 국제예술인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여, 프랑스 화가 Sylvie Deparis을 주제로 전시를 열다. 1인 잡지 MOOK 발행인이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기형도의 비가 2)라는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수유너머 104"에서 공부하고 있다.

 

https://youtu.be/jgWo5wqXFYc

 

 

    1. 유튜브로 해당 글을 음성 파일로 만들어 올려 놓았습니다. 화면으로 글을 읽기 힘든 분들, 음성으로 들으셔도 좋습니다. 1인 잡지 무크 <돌>을 펴냈던 지난 작업을 이어, 유튜브에서 1인 잡지를 이어 나갈 계획입니다. 

    2. <그림이 있는 글>은 그림과 시,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을 연결하여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가끔은 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을 올리기도 하고, 에세이류의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3. 2018년 가을호 『시와 사람』, <예술산책> 발표

 




 

  1.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옮김,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년. 33~34쪽. [본문으로]
  2. 같은 책, 30쪽. [본문으로]
  3. 같은 책, 25쪽. [본문으로]
  4. 『도록』 179쪽. [본문으로]
  5. 같은 책, 93쪽. [본문으로]
  6. 같은 책, 56쪽. [본문으로]
  7. 『도록』 251쪽. [본문으로]
  8. 「내가 조각가인 이유, 앙드레 파리노드와의 대화」, 『도록』 403쪽. 앙드레 파리노드 : 예술가가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자코메티 : 어떤 면으로는, 사는 것 대신에, 자신의 시간을 머리 하나를 모방하기 위해 매일 밤 의자 위에서 같은 사람을 5년 동안 고정시켜 놓고, 계속해서 실패하며 머리를 모방하려고 하고, 또 계속해서 그것을 이어나가는 것은 비정상이죠. 정확히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행동이지 않나요? 이 일은 온전히 이것을 용인해 줄 특정한 사회 안에서 사는 것을 요구해요. 사회 전체에게 쓸모없는 행위에요. 이것은 온전히 개인의 만족이에요. 극도로 자기중심적이고 그래서 창피한 거예요, 모든 예술작품은 전적으로 무(無)를 위해 태어났어요. 소비된 시간들, 그 모든 천재, 그 모든 작업은 결국엔 모두 본질적으로 무(無)를 위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현재에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경험하는 즉각적인 느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조각은 모험, 그 위대한 모험은 같은 얼굴에 낯선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것은 세상의 모든 여행보다 위대해요. [본문으로]
  9. 『김수영전집2』, 「새로움의 모색-쉬페르비엘과 비어레크」, 민음사, 2018년 2월 3판 1쇄, 320~329쪽. 앞으로 김수영 산문 인용은 『전집2』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10. 조강석, 「김수영의 시의식 변모과정 연구-’시적 연극성‘과 ’자코메티적 전환을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 제28호, 372쪽. [본문으로]
  11. 『전집2』, 「시인의 정신은 미지(未知)-나의 시의 정신과 방법」, 347쪽. [본문으로]
  12. 이 시를 썼을 때, 김수영은 세로쓰기 방식으로 시를 배열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본문으로]
  13. 『전집2』, 551쪽 [본문으로]
  14.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옮김,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년, 114쪽. [본문으로]
  15. 『전집2』, 552쪽. [본문으로]
  16. 『전집2』, 552쪽. [본문으로]
  17. 『전집2』, 553쪽. [본문으로]
  18. 『전집2』, 「시작 노트 6」, 554쪽.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상이 일본적 서정을 일본어로 쓰고 조선적 서정을 조선어로 썼다는 것이다. 그는 그 반대로 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더욱 철저한 역설을 이행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라고 말한 부분 역시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19. 「시작 노트 6」을 쓸 무렵, 김수영 시 작품 목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후기 시세계의 변화 지점을 알 수 있는 목록들이다. 「풀의 영상」, 「전화이야기」, 「꽃잎 1,2,3」, 「먼지」,「원효대사」,「풀」 등이다. “자코메티적 발견”이 후기 시 변모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연구한 연구 논문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본문으로]
  20. 『전집2』, 「시작 노트 6」, 554~555쪽. 김수영은 ‘자코메티적 발견’을 수행하고나서 만세를 부른다. 이런 문장을 슬 수 있는 그 용기과 결단이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놀랍다. “「눈」이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는 <폐허에 눈이 내린다>의 여덟 글자로 충분하다. 그것이, 쓰고 있는 중에 자코메티적 변모를 이루어 6행으로 되었다. 만세! 만세! 나는 언어에 밀착했다. 언어와 나 사이에는 한 치의 틈서리도 없다.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로 충분히 <페허에 눈이 내린다>의 숙망(宿望)을 달(達)했다. 낡은 형(型)의 시다. 그러나 낡은 것이라도 좋다. 혼용되어도 좋다는 용기를 얻었다. 완전한 희생. 아니 완전한 희생의 한걸음 앞의 희생. 독자여 우쭐거려서 미안하다. 그러나 내가 의외로 ‘낡은 것’만은 확실하다.‘ [본문으로]
  21. 『도록』, 39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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