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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104 바깥의 문학 1강 후기>

 

 

나는, 내 글은 어디서’ ‘오는가’?




성아라(수유너머104 세미나회원)

 




 

가끔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꽤 자주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였을 것이다. 유치원 벽 한 쪽 구석에 머리를 박고 나는 버림받았어, 나는 버림받았어하고 중얼거리던 내가 있었다. 그렇게 중얼거리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고, 그 후에도 그 생각을 증명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벌어지는 사건들이 있었다. 버림받았다는 문장을 중얼대며, 비로소 나는 내가 버림받았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말이 세포가 되어 몸속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팔다리가 다 있는데 불구자 같고 말하고 웃고 떠들며 사는데 유령 같았다. 준비 없이 맞닥뜨리게 된 몇몇의 사건들이, 수십 번의 말들이, 수백 번의 눈빛들이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개중에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싶었던 말과 눈빛들이 실제로 있기도 했다. 그 말과 눈빛들을 울분으로 되새김질한 시간이 길었다.


그러나 그런 외부 조건들보다 싫었던 것은, 조건들과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는 나였다. 매번 같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었다. 세계가 나를 해코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한 일이 아님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자주 과거로 돌아가 유치원 벽에 머리를 박고 버림받았음을 중얼거리던 아이가 되곤 했다. 그런 나를 자각할 때마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멍청하다고 느꼈다. 그때는 반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자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밖에 없는 짓들을 했다. 그래야만 나를 견딜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자력으로는 인간이 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정신과 약을 먹거나 상담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어느 순간 상담을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아지고 싶다기보다는 달라지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대부분의 상담 이론은 적응 담론으로 느껴졌고, 그 점이 늘 갈증을 남겼다. 또한 꽤나 자주 내 삶이 상담적 틀이나 도식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히 가치가 있는 삶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겪고 느낀 것 중에는 틀이나 도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썼던 것 같다. 어떤 식의 틀로도 포섭할 수 없는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경험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쉽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방식이었지만. 생각해왔던 머릿속의 나와 시를 쓰는 과정 속의 나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의도를 가지고 열심히 써도, 쓰고 나면 내 시는 내게서 멀어져 있었고 그게 좋았다.



 

절뚝대며 따라가니 익숙한 동네의 낯선 골목 발목이 시큰거려 주저앉는다 골목 바닥을 긁고 있는 절름대는 발들 손금처럼 그어지는 붉은 자국들 발들을 부른다 이름이 같은 그림자들 똑같이 쳐다보면 차곡차곡 껴안는다 절뚝대던 골목 조용해지고 어느새 무겁게 꽉 찬 내 몸

 

-마트로시카

 



하지만 언제나 시 쓰기를 통해 다른 내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시 속의 나와 시를 썼던 나 역시 과거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의 문학 1강을 들으며 예전에 썼던 시들이 자꾸만 수면 위로 떠올랐다. 위의 시를 썼을 당시에는 내가 가진 일종의 상처를, 그리고 그것을 안고 있는 n개의 나들을 판단이나 변형의 의도 없이 끌어안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강의를 들으며 어쩌면 그때의 나는 온전한 나라는 상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에게서 파생된 그림자라 할지라도 이름이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나에게서 나온 그림자들은 정말 나와 같은 존재일까. 같은 이름으로 명명하고 한꺼번에 불러들여도 되는 걸까. 사방팔방 날뛰는 나들을 어떻게든 껴안으려고 애를 쓴 것이 시를 썼을 당시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런 식의 온전함에 대한 욕구는 나를 넘어 내가 애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로까지 뻗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온전히 알고 싶다는 욕망, 그들을 존재 차원에서 이해하고 싶다는 갈망이 컸다. 그런 욕망은 가끔 이상한 방식으로 펼쳐져, 취향이나 취미 혹은 고민이나 아픔에 대해 캐묻는 방식으로 발현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문득, 이런 것들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반복적으로 도달했고, 그건 나에게 절망감과 좌절감을 안겨 주는 일이었다.



 

너는 자주 무릎을 굽혀주었지만 나는 네 발치에 고인 그림자를 보았다 네 속의 말들이 흘러내린 자국 같아서

 

(중략)

 

몰래 떼어왔던 그림자 조각들로 너를 만들어보아도 얼굴은 살얼음처럼 쉬이 깨진다 녹아내리는 기억 속 너무 자주 구부려 그대로 굳어버린 무릎으로 도망가던 네가 보인다 굽힐 무릎도 없는 나는 목을 길게 빼도 너를 찾을 수 없고 꿀꺽, 꿀꺽 남은 너의 조각을 삼킨다 울컥 울컥 내 안에 들어차는 너의 조각 너만큼 다리가 자라면 너를 찾으러 나서야지 차마 씹지도 못하고 너를 삼키는 밤,

 

-그림자퍼즐

 



상대를 존재 차원에서 알고 싶다는 표현은 내가 생각해도 모호한 말이다. 하지만 이 표현 외에 이러한 욕구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해서, 모호한 줄 알면서도 쓰고 있다. 위의 시 그림자퍼즐에서 상대를 존재 차원에서 알고 싶다는 내 욕구가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조금은 찾을 수 있을까? 상대가 내 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행위보다도 시 속 화자는 발치에 고인 그림자에 주목한다. ‘네 속의 말들이 흘러내린 자국 같아서라는 게 그 이유인데, 이는 자신에게 보이는 모습 이외의 모습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는 문장이다. , 누구나 볼 수 있는 주체가 보여주는 모습 이외에 다른 모습, 일상적으로 볼 수 없는 모습까지 보고 싶다는, 그를 통해 너라는 존재를 좀 더 심층적으로 알고 싶다는 욕구의 발현으로 읽히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림자 조각을 모아왔으며 그것들을 가지고 너의 얼굴 만들기를 시도했다는 표현에서는 자신이 애정을 가진 상대를 온전히 장악하고 싶다는, ‘얼굴로부터 넘친 얼굴까지 알고 싶다는 일종의 장악 욕구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상대를 온전히 아는 일은 불가능의 영역에 속할 것 같다. 온전히통합된혹은 하나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나라는 존재 역시, ‘라는 단어 하나로 명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나는 하나일까? 하는 의문이 간혹 들기도 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대중가요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라고 불리는 존재 속에 수많은 영혼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내 몸이 마음이나 정신의 조절 능력을 넘어설 때그래서 고장난 차처럼 퍼지거나 평소에 내지 못하던 신체적 능력을 잠깐이나마 발휘할 때-도 그렇고, 상식적 혹은 도덕적으로 말이 안 되는 충동에 휩싸여 파격적이고 때로는 미쳤다고 생각될 만한 행동을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때도 있었다. 강의 중에 들었던 내 몸 속 미시 영혼들(위장의 영혼, 세포의 영혼, DNA의 영혼 등)에 대한 이야기는 그런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는 이게 내 생각인가?’ 싶다가도, ‘그럼 이런 건 내 생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좋아하는 소설 문장 중에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어쩌면 1강에서 이야기한 영혼들의 다양체라는 존재를 표현하는 다른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가정을 가지고 나를 인식했을 때, 나는 애써 단수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고 상식적인, 언어로 간단히 정의 내려질 수 있는, 고정적이고 안정적으로 포착될 수 있는 나 외에도 나는 너무 많다. 뼈가 얼굴의 구성요소이고 얼굴을 틀 짓긴 하지만, 그것을 얼굴의 전부라고 할 수 없다는 말, 수많은 얼굴들이 있는 거지 얼굴의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되었다.


세계--존재로서만 인간이라는 존재를 포착할 수 없다는 맥락에서, 어떤 면에서는 모든 인간은 다 소수자라고 생각한다. 이때 말하는 소수는 중심의 기준에 속하지 못해기형적이고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계--존재로 살아가면서도 세계의 질서로는 설명될 수 없는 수많은 모습을 가진 게 인간이고, 때문에 단일하고 고정된 기준으로 인간을 본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삶이든 사실은 구조로 환원할 수 없는 틈과 허공을 갖고 있고 (어쩌면 그 틈 또는 허공이 삶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비정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삶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세계--존재로의 나, 세계--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 틀 밖으로 어쩔 수 없이 삐져나오는 모습을 어떤 판단 없이 그냥 인정하는 것, 그런 것이 정말로 윤리적인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생각들은 이 글 초반에 언급되었던 과거의 기억, 개인적 상처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나 스스로 내 삶이 어떤 기준에 맞지 않아 어딘가 부족하고 이상한 삶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완전히 털어낸 것은 아니지만, 내 삶이 어떤 것의 결핍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니체가 말하는 일종의 원한감정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나와 세계의 관계를 철저히 피해자 대 가해자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고, 괴로웠던 기억을 재의미화나 재맥락화 없이 그저 재현하며 또 다시 괴로워하기만 했다.


하지만 결핍이 아니라면? 무엇과 비교하여 부족한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것이라면? 내가 겪었던 일들, 그 일들을 이뤘던 요소들이 따로 자성(自性)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우연한 장에서 만나 그런 일을 만든 것뿐이라면? 이런 생각은 나에게 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내 잘못이 아니구나, 이유가 있어서 세계가 나에게 해코지를 한 게 아니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나의 지인 중 하나는 그 사건이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나에게 닥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무기력해진다고 했다. 사건과 사건을 이뤘던 요소들이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아주 쉽게 말해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면, 그와 비슷한 사건을 예방할 힘도 비슷한 사건에 대처할 힘도 내게 없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내가 사건을 예방할 수 없다는 것, 비슷한 일이 나에게 우연히 또, 가해의 목적 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자신을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에 대한 나의 주권은, 사건의 원인을 분석 및 파악하며 불확실성을 타파하거나 사건 대처 방법의 불안정성을 보완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그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발휘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태도가 누군가에겐 안일한 태도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삶에 대한 강자의 태도처럼 느껴진다.


모범적이고 바람직한, 따라야 하는 원본으로서의 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내가 겪어왔던 일들이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 때는 그 일들이 없는 일이 되길 바랐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바라진 않는다. 삶으로부터 도망가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종종 생긴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있는 시공간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도망을 가본 적은 없다. 어쩌면 글을 쓰면서 나로부터 도망가는 중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로부터의 탈주를 철저하게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진 않지만, 어느 샌가 내 글은 나보다 먼 곳에 가 있기도 하고 나 아닌 것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들 모두가 다 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거짓말

계속해도 좋아

손금에 밴 비린내

흔들려야 하는 예언

예감과 예감은 부딪혀 소리를 낸다

진짜 같은 건 찾아낼 수 없도록

 

-생명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신과 불안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거짓말이라는 말이 좋다. ‘해야할 것만 같은진담, 반복해야 하는 진실된 말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뭔가를 만들어내는 거짓말이 좋다. 시를 쓰는 일은 내게 진실 말하기일 때보다 거짓말하기일 때가 더 많다. 거짓말을 통해 계속 변신해가며 나로부터 도망가고 싶다. 이때의 도망은 내가 짊어지고 있는 물리적 시공간의 무게나 책임을 던져버리는 게 아니다.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고 그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쓴다. 어쩌면 나로부터 계속 도망가고 있지만, 삶으로부터는 도망가지 못해서 시를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비린내도 좋아한다. 살과 살, 삶과 삶이 맞닿을 때 피어오를 수밖에 없는 그 끈덕진 냄새.


여담이지만, 바깥의 문학 1강을 들으며 내가 왜 들뢰즈의 철학에 끌리게 됐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차이 나는 반복이 내게는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느껴졌다. 삶에 대한 적응도, 도피도 삶을 사랑하는 좋은 방식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망각을 모르는 귀신으로, 유령으로, 원한감정 덩어리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뢰즈의 철학으로 나를 이끌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세계로부터, 나로부터 끝없이 탈주하면서도 이 삶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나는 좋다. 그런 방식으로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그림의 이름이 하나라는 것을

오래 전 오롯이 있던 하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던 하나

뛰는 맥박과 쓰라린 기쁨

아름다운 슬픔과 맞닿음의 순간을 느끼려

제 몸을 쪼갰다는 사실을

사방으로 흩어진 조각들

그렇게 삶이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중략)

 

돌아서는 당신의 손을 잡네

섞여드는 두 그림자는

영원할 얼룩 같고

출구를 찾을 수 없대도 좋겠지,

벽마다 새겨지는 우리의 발자국 소리

 

-우주미술관

 



이번 생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벽마다 새겨질 발자국과 그 소리들이, 얼룩들이 더 중요하다. 나도, 내 글도 어디에서 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지금 내가 쓰는 글, ‘글을 쓰고 있는 나가 있을 뿐이다. 그 존재는 끊임없이 무언가가 되어 가는 중일 것이다. 그 유목에 끝은 있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글을 쓰며, 또 다른 어떤 방식으로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며 인간이 되어 가고 싶다.

 

 

 

P.S

나에게 그동안 존재에 대한 사유는 존재자는 지우고 본질만 생각하는 그런 식의 사유로 여겨졌다. 근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1강을 듣고 나서 들었다. 어쩌면 내가 존재를 고정 불변하는 진리값으로 상정해놓았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생각은 존재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 어떤 면에서는 다소 비윤리적인 사유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싶었다. 존재는 규정성이 아니라는 것, ‘있음그 자체라는 페이퍼 속 문장이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존재의 무규정성,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판단을 포함한 혹은 넘어선 생성, 있음 자체, 변화 그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 윤리적인 것일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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