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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_리영희] 진실에 복무하다

oracle 2020.11.09 13:54 조회 수 : 63

격랑의 시대 ‘진실’로 돌파한 ‘뜨거운 얼음’
리영희 10주기 ‘평전’…끝까지 성찰 미루지 않은 비판적 지식인
반지성에 맞서 치열하게 살아낸 ‘사상의 은사’ 진면목 확인

[한겨레신문] 2020.10.30.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67845.html#csidx9beb60736b77399a1c215c44a999727 

2007년 제9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시상식에서 한 손에 책을 들고 수상 소감을 말하는 리영희 선생. 선생은 ‘수상소감’에서 “우리 민족에게 막혔던 하늘이 뭔가 트이고 희망의 빛이 비추려는 것 같은 시기에 우리가 와 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 냉엄한 현실 인식이 필요한 만큼, 지식인들이 안팎의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안병욱 한겨레통일문화상 심사위원장은 “다시 한번 역사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이 때, 리 선생의 철학과 생애에서 다시금 민족의 새로운 진로를 찾아야 한다고 봐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시상식이 있던 2007년 4월 남북관계는 호전되고 있었고 그해 10월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 창비 제공

(왼쪽) 리영희 10주기 평전 [진실에 복무하다] / (오른쪽) 2007년 제9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시상식에서 한 손에 책을 들고 수상소감을 말하는 리영희선생. 선생은 ‘수상소감’에서 “우리 민족에게 막혔던 하늘이 뭔가 트이고 희망의 빛이 비추려는 것 같은 시기에 우리가 와 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 냉엄한 현실 인식이 필요한 만큼, 지식인들이 안팎의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안병욱 한겨레통일문화상 심사위원장은 “다시 한번 역사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이 때, 리 선생의 철학과 생애에서 다시금 민족의 새로운 진로를 찾아야 한다고 봐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시상식이 있던 2007년 4월 남북관계는 호전되고 있었고 그해 10월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창비 제공

 

리영희 평전: 진실에 복무하다 (권태선 지음, 창비, 2만5000원)

리영희 선생의 형형한 눈빛을 볼 수 없게 된 지 10년이다. 반지성에 맞선 치열한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여든한 해를 살아낸 선생을 기리는 ‘리영희 평전’이 나왔다. 다섯차례 옥에 갇히고 대학과 언론사에서 네번이나 해직된 그의 생은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지키려는 것 자체였다. 평전의 제목이 <진실에 복무하다>(권태선 지음)인 까닭이다. 진실은 자취를 감추고 맹신만이 위세를 떨치는 오늘날,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의 가르침이 절실한 터다. 더구나 새롭게 조명된 몇몇 그의 면모는 자못 감동적이다. 통찰과 예지는 끊임없는 연구와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며, 냉정한 이성은 뜨거운 열정과 조화를 이뤄 빛난다는 것을, 그의 삶에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성찰에서 비롯한 통찰

‘① 백인들이 황인종을 추켜올리는 것은 흑인들에 대한 간접적 멸시의 표시. Korean의 두뇌에 대한 칭찬은 흑인의 지적 열등, 근면에 대해서는 나태를 대립시키는 등 흑인 고립화 적대의식 강조. ② Korean의 준백인화 의식. 백인의 흑인 적대감정 표현술책에 놀아난 Korean이 마치 백인적 지위를 확보한 것처럼 착각하고 흑인을 적대시하거나 열등시하는 데서 일어나는 인종분쟁 심각.’

리영희 선생이 1987년 9월3일 ‘백인사회, Korean, 흑인’이란 제목으로 남긴 메모다. 한반도 문제 강의를 위해 미국 버클리에 머물던 선생은, 티브이에서 코미디를 보고 이렇게 적었다. 공부 안 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A학점을 받아왔냐고 아버지가 묻자 아들은 “짝이 Korean”이라고 답한다. 선생은 이 장면에서 미국 백인과 흑인 사이에 낀 황인종의 문제를 꿰뚫어봤다. 그로부터 5년 뒤에는 미국 로스엔젤레스 흑인 폭동이 발생하고 한인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 이 메모는 이번 평전에서 처음으로 소개됐다.

리영희 선생의 통찰은, 여러 특종보도로 이어졌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미국이 군정 연장에 반대하며 대외원조를 박정희 군부에 대한 압력카드로 활용할 계획임을 밝혀낸 것도,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에서 한국인의 민간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 것을 단독보도한 것도, 폭넓은 연구와 조사를 바탕으로 한 그의 통찰이었다.

날카로운 통찰은 철저한 성찰을 통해 벼려졌다. 익히 알려진 강고한 성품에도 그는 자신의 한계와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다음은 이번 책에서 처음 공개된 자필 편지 중 한 부분이다. “방금 다섯번째로 다시 읽고 펜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짧은 글을 일주일 사이에 다섯번 읽은 까닭은 첫째 내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에 관한 사실(들)을 명확하게 적시했기 때문입니다. 그중 하나가 ‘성별 분리로 인해 보살핌 노동에서 면제된 남성 특권이 아니었다면’의 지적에 관한 자각입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리영희 선생은 2005년 마비된 손을 힘겹게 움직여 이 글을 적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당분간 리영희 같은 독창적이고 진정성 넘치는 탈식민주의 지식인은 탄생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남성 특권’이 그의 ‘위대함’의 중요 조건이었음을 지적한 데 대한 답신이었다.

평전은 그가 청년기부터 인간해방의 일환으로 여성해방을 지지해왔지만, 실제 삶에서는 남성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서전 <역정>에서 “나는 지금도 결혼까지의 처녀성을 귀히 여긴다”며 여성의 혼전순결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1950년대 말 첫 방미 때 유대인들의 삶을 목격하며 성별분리를 지지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아내에 대한 인식도 ‘조력자’ 수준에 머물렀던 그가 말년에는 ‘남성 특권’을 인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겸허한 자각과 성찰은 예리한 통찰로 이어지는 길이었던 것이다.

 

냉정과 열정의 어우러짐

리영희 선생은 얼음 같은 냉정함의 소유자였다. 선생의 부친은 그가 어릴 적부터 성미를 알아봤다고 한다. 강제된 창씨개명에 아버지는 아들의 일본이름을 ‘평강호강’(히라에 히데야스)이라 지었다. 평은 본관인 강원 평창에서, 강은 자리잡고 살아온 강면에서 따왔다. “이름 호강(豪康)은 아들의 성미가 급하고 심사가 잘고 좁아서, 크고 너그럽고 호탕하고 담대하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은 것”이라고 아버지는 설명했다 한다.

<조선일보> 후배 신홍범에 따르면, 뉴스를 취급하는 리영희 외신부장의 자세는 “매우 준엄하고 치밀하고 섬세하였다.” “리 부장 앞에서 내가 뽑은 기사를 가지고 가 설명할 땐, 대학시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여러 수사관 앞에서 집중 신문을 당하던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리 부장이 그만큼 철저하게 따져 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혹독한 훈련과정이 있었기에 국제뉴스를 보는 관점과 기사를 선별하는 기준 등을 제대로 익힐 수 있었다.” 외신부로 발령난 신홍범에게 내린 첫 지시는 아침 11시까지 들어온 모든 외신 뉴스를 본 뒤 주요 기사를 10꼭지 정도 뽑고 그렇게 뽑은 이유를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리영희 선생은 <조선일보> 시절을 지내며 더욱 용의주도하고 냉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무기가 ‘논리’였던 것도 그래서다. “당시 조선일보 외신부에는 리 부장과 뜻을 같이하면서 베트남전쟁을 다루어나갈 기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신홍범) 외신부 중견기자는 말할 것도 없이 갓 수습을 뗀 김대중(조선일보 전 주필)조차 리영희를 뒤에서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외신면 편집기자였던 허문도(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공보비서관)도 그의 베트남 기사를 두고 자주 충돌했다. 이런 내부 반대를 넘기 위해 리영희는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됐다. 자신의 주장을 직접 펼치기보다 버트런드 러셀이나 장 폴 사르트르 등 해외 인사들의 발언을 적극 활용하면서 동시에 베트남전을 지지하는 시드니 훅 등의 글도 함께 싣는 방식을 택했다. 이른바 ‘의도된 객관성’(백승욱)이다.

학자이자 기자인 리영희는 냉정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와 교유한 많은 이들은 훨씬 인간적이고 자유로웠던 그의 모습도 증언한다. 술자리에서는 “우리 인생의 이런 아름다운 순간순간을 축하하며”라고 잔을 들어올리던 리영희는, 가혹한 고문에 물러서지 않으면서도 주삿바늘을 두려워하고 약한 이들 앞일수록 정장을 갖춰 예의를 차리고자 했던 따뜻한 면모를 보였다. 신홍범이 그를 ‘뜨거운 얼음’이라고 규정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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