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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니체읽기] 작가인터뷰

oracle 2020.06.26 15:41 조회 수 : 297

[니체의 눈으로 읽는 니체] 이진경선생님 작가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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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체에 관한 책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철학자라고 봐도 좋을듯한데 실은 니체에 대한 오해도 만만치 않다고 느껴집니다. ‘니체의 눈으로 읽는 니체’라는 시리즈명이 그간의 오해에 대한 해명이 될 수 있을까요?

니체는 쉽게 읽히지만 아이러니하게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철학자입니다. 가령 [도덕의 계보]는 논문(에세이) 스타일로 쓰여져 있지만, 가령 제3논문에서 철학자의 금욕주의에 대한 니체의 논지는 심지어 거꾸로 이해하는 경우가 아주 흔합니다. 니체가 금욕주의를 비판하는 것만 염두에 두고 읽어서 그런 것인데, 사실 철학자의 금욕주의는 철학자의 삶에 필요한 것이란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저 금욕주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론 난감해지는 니체의 이론적 입장 때문인데, 그래서 그의 비판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그의 서술은 반어적이어서 거꾸로 읽기 쉽습니다.

니체 철학의 가장 핵심 개념인 힘에의 의지 개념도 생각보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번에 낸 책에서는 그래서 그 개념에 대해 꽤 길게 따로 설명을 하기도 했습니다([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

'니체의 눈으로 읽는 니체'는 맥락이 좀 다릅니다. 어떤 철학자도 자기가 사는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반시대적으로 사유하고자 했던 니체였지만, 그 역시 어떤 한계 속에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의 언어와 지식 속에서 쓰고 있는 겁니다. 이게 종종 니체의 문제의식을 흐리고 잡아먹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의 책 또한 니체의 문제의식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야 '니체 사유의 요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2. 니체의 여러 저작 중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니체의 책은 많은 경우 단편들로 씌어져 있어서, 그가 정작 하려는 걸 제대로 이해하기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이 두 책은 에세이 스타일로 씌어져 있고, 그의 문제의식이 철학적 맥락에서 정리되어 있어서 그의 문제의식을 이해하기에 적합합니다. 그의 단편적 글들이 일종의 퍼즐조각이라면 이 두 책은 그걸 맞추어가며 읽게 해줄 퍼즐판인 셈이지요. 그래서 니체 자신도 자기 사상을 공부하는 입문서로 이 두 책을 권한 바 있습니다. 제가 두 책을 선택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3.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의 주제를 '필로비오스'로 요약할 수 있을 텐데요, '아모르 파티'를 '삶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니체를 적극적으로 읽으려는 시도로 느껴졌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해석에 도달하셨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철학을 뜻하는 필로소피는 소피아에 대한 사랑(필리아),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뜻입니다. 지혜란 삶의 지혜지요. 그러나 소크라테스 이후 철학은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불변의 것, 변치 않는 진리를 찾아 헤매고 다녔습니다. 니체는 이런 사태를 비판하면서 철학을 삶으로 되돌리려 합니다. 삶의 지혜를 찾는 사유와 지식으로 되돌리려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그가 철학을 하는 입장은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요약될 수 있습니다. 흔히 ‘운명애’라고 번역되는데, 이는 이런 니체의 문제의식을 드러내지 못하고, 또 흔히 쓰는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말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모르란 말을 동사적으로 해석하여 ‘삶을 사랑하라!’라고 번역하는 게 니체의 사유에 부합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셈이지요.

 

4.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에서 '한다더라'의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은 자칫 니체에 대해 '그저 내 맘대로 살라는 것인가' 같은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이에 대해 책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내 맘대로’란 내체 무엇일까요? 니체는 ‘나’라는 게 도대체 무언가 물으며, 또한 ‘마음’이란 무엇인지도 묻습니다. 배가 고파 정신 없이 음식에 덤벼들 때, 그건 나의 의지라기보다는 내 위장의 의지에 따른 것이고, 급하게 화장실을 찾아 달려가는 것은 내 방광의 명령에 따른 것이지요. 그것은 나를 움직이지만, 나의 마음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진지하게 연구를 할 때에도 연구를 하게 하는 ‘마음’은 아주 복합적입니다. 진리나 진실에 대한 관심도 있지만, 그거 해서 얻을 명예에 대한 욕망도 있고, 직업이니 의당 해야지 하는 마음도 있고 등등. ‘나’라고 할 실체도 없고, ‘마음’이라고 할 것도 명확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내 신체와 정신에 흘러가는 수많은 힘과 의지, 욕망과 주저 등이 섞여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곁눈질을 하는 삶을 그저 남의 삶이라고만 할 수 없습니다. 분명 ‘내’가 선택했다고 믿는 삶이지요. 그래서 그런 삶이 문제라는 게 더 안 보입니다. ‘내 맘대로’의 삶도 그래요. 뭐가 내 마음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내 맘대로의 삶이 있겠어요. 중요한 건 어떤 게 ‘내 맘대로’인지 ‘남의 말대로’인지가 아닙니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어떤 게 정말 살고 싶은 삶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는 것 속에 작동하는 게 어떤 종류의 힘인지, 긍정적인 의지인지 부정적인 의지인지를 할아야 합니다.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 저렇게 살라는 답들이 아니라,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란 물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 물음 속에서 사랑할 만한 삶을 얻었다면, 그건 ‘내 맘대로’이든 ‘남의 말대로’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얻었다면 곁눈질하며 살지 않게 될 겁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의 삶이야’라고 자긍할 수 있는 삶을 얻게 됩니다.

 

5. 니체에 대한 해석 중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가 '약자들로부터 강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인데요, 지금 이 시대에 흔히 그렇다고 여겨지는 강자와 약자 개념 또한 이에 따라 재정의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권력이나 돈으로 남들을 좌우하고 못살게 구는 이들을 ‘강자’라고 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을 '약자'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니체에게 강자, 약자는 이런 게 아닙니다. 강함과 약함이란 힘의 양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힘의 질과 결부된 것입니다. 강함이란 능동적인 것입니다. 수동적인 것, 무언가 시작할 수 없는 것은 약함의 징표입니다. 그러니 강자란 무언가 시작할 수 있는 자입니다. 약자란 지배적인 가치에 복종하는 자입니다. 자본가는 돈의 증식을 위한 자본의 명령에 따라 사는 자고, 권력자란 기성의 가치를 따라 사는 자입니다. 모두 약자입니다. 가령 모차르트의 삶을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 예를 들자면, 그 영화에서 진정한 강자는 모차르트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걸 창안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하는 자, 시작하는 자입니다. 반면 살리에리는 권력에 가까이 있지만 새로운 걸 시작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저 유행하는 스타일, 지배적인 스타일에 따라 사는 자지요. 그래서 그는 모차르트를 두려워합니다.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궁정귀족들 역시 살리에리 같아서, 모차르트의 창조적인 능력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살리에리는 약간의 술수만으로도 모차르트를 궁지에 몰아넣고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정말 약자들로부터 강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우리가 아는 권력자란 강자가 아니라 약자들이 모인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자는 대부분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합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기존의 것에 머물러 있는 이들로선 이해할 수 없는 걸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가난과 고독이 창조적인 인물들에게 가까이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강자,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 시작하는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살리에리처럼 진정한 강자를 핍박하고 억압하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니체를 읽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6. 선생님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더 편안해지기 위해 니체를 함께 읽기 시작했다고 하셨는데요, 니체의 문장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제가 공동체 애기를 하면서 ‘나 좀 편해질라고’ 니체 강의를 한다고 했는데, 농반진반으로 한 얘기인데, 인상적이었나 보지요?^^ 그런데 공동체는 사실 생각해보면 여기저기 흔하게 있습니다. 저처럼 일삼아 만들고 애써 유지하려는 공동체도 있지만, 가족도, 친구들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일종의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닌 한, 공동체를 피해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이 잘 사는 방법이란, 단지 제 얘기만도 아니고  제가 속한 공동체 얘기만도 아닙니다.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 공동체에서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삶으로 인해 제가 편해질 수 있게 해주는 ‘기술’들이 있다면, 그건 다른 공동체에서 다른 이들을, 많은 이들을 편하게 해주는 기술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그렇게 남들을 편하게 해주면, 복 받습니다.^^ 누군가 옆에 있으면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자주 만나고 싶지 않나요? 그 사람에게 뭔가 나도 좋을 일 해주고 싶지 않나요? 그러면 서로 편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게 분명합니다. 모두에게 유효한 말인 셈이지요.

 

7. '니체의 눈으로 읽는 니체' 시리즈 3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강의라고 들었습니다. 1권이 사랑할 만한 삶에 대한 것, 2권이 '주권적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것이라면, 3권의 주제는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

2권의 주제는 필로비오스, 즉 삶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란 점에서는 주권적 개인으로 사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3권은 ‘초인’, 즉 넘어서는 자에 대한 것, 초인이 되는 방법, 초인으로 사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론적 개념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1권은 삶에 대한 문제설정이라면, 2권은 힘에의 의지란 개념을 중심 테마로 하고 있고, 3권은 영원회귀에 대한 것이 될 것이라 해도 좋을 듯합니다.

 

8. 코로나사태로 강의와 토론의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는데, 글로써 강의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이번 니체 '강의록'은 선생님께 무척 뜻깊을 것 같습니다. 책을 내신 소회를 간략히 말씀해 주세요.

니체는 읽을 때도 즐겁고 힘이 나는데, 강의할 때도 그랬어요. 무언가 좋은 삶을 사는 방법,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란 말하는 사랄에게도 큰 기쁨을 주니까요. 그런데 강의한 것을 손을 보면서 책으로 내니 더욱더 기쁩니다. 눈앞에 있는 이들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분들, 멀리 떨어져 있는 분들, 좋은 삶에 관심을 가질 많은 분들에게 그런 삶을 전하고 ‘선동’하는 기쁨이 더욱더 배가된 셈이니까요.

더불어 책으로 만들면서, 저 또한 여러번 읽었던 책인데도 니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글을 쓰면서 정리할 기회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제 스스로 모호했던 것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가는 느낌이 즐거웠는데, 그걸 다른 분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되어 더욱 기쁩니다.

 

9. 그간 많은 책을 쓰셨고, 또 여러 지면에서 니체에 대해 이야기하셨지만, 한 권 내내 전면으로 니체를 다룬 책은 처음 내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니체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도 이제야 니체에 관한 책을 내게 된 이유가 있나요?

2002년 [노마디즘]이란 책을 내면서 이젠 도제생활은 끝났다는 생각에 남들 사상 정리하는 건 이제 그만하자고 마음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 자신의 사유를, 제 나름의 철학을 하고 싶다는 욕망, 그럴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같은 게 생긴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 뒤에 쓴 책이 맑스의 [자본]에 대한 책이었어요. [자본을 넘어선 자본](그린비)이 그것입니다. 다른 사상가를 정리하는 책을 쓰지 않겠다고 해놓고 바로 다음에 누군가의 책에 대한 책을 쓴 셈이니, 스스로의 결심에 반하는 일종의 아이러니를 행한 셈이지요. 그러나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쓴 책은 수많은 [자본] 해설서 중 하나가 아니라, 어쩌면 누구보다 익숙했을 맑스, 아주 잘 알려진 [자본]이란 책을 누구보다도 낯설고 새로운 책으로 다시 쓸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덕분에 이걸 맑스의 [자본]에 대한 해석이라고 쓴 거냐며, 정통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책이 하나 나오기도 했지요. 저는 오토독스, 즉 정통적 해석에 반하는 파라독스를 쓰고자 했던 셈인데, 성공했다 싶었어요.

누군가에 대한 책을 쓴 것이 이처럼 독자성을 갖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해석이 쓴 사람의 사유라고 할 독자성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들뢰즈는 철학사로서, 여러 철학자에 대한 책을 썼는데, 모두 ‘들뢰즈의’ 니체, ‘들뢰즈의’ 스피노자 등등이지 단순한 니체, 스피노자 해설이 아닙니다. 제가 니체나 스피노자, 들뢰즈에 대해 책을 쓸 수 있다면, 그렇게 남다른 제 해석이 충분히 독자성을 가질 때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니체에 대한 책을 이제야 쓰게 된 것은, 이제야 니체에 대한 제 나름의 해석이 제 발로 섰다는 말이겠지요.

물론 제가 쓴 니체가 들뢰즈의 영향 속에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번 책은 단지 들뢰즈의 니체를 해설한 게 아니란 생각입니다. 그의 영향 아래, 들뢰즈가 쓰지 않았던 방식으로, 제 나름의 해석을 한 것이지요. 특히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는 니체의 눈으로 니체를 읽는 내재적 비판의 방법을 사용하여, 니체를 니체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니체을 읽을 때 느끼는 곤혹스러움을 넘어서 니체를 영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책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아, 깔때기? 맞아요, 깔때기.^^ 어쨌건 생물학이나 고고학 등에 대한 20세기 이후의 성과를 통해 다시 니체를 읽게 만들지 않았나 싶고, 그러니 나중에 저승에 가서 니체를 만나면,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갈수록 태산이지요?^^ 니체적 자긍심을 갖고 쓴 책이란 말이니, 일관되지 않나요, 호호호.

 

10. 책을 편집하며 가장 즐거웠던 점 중 하나는 문학이나 영화는 물론 건축과 과학을 넘나드는 생생한 사례였습니다. 전문 분야 이외에도 관심사가 폭넓은 편이신가요?

제가 자기소개할 때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전공이 사회학이라 사회학 말고는 다 합니다. 심지어 이젠 사회학도 합니다. 진정한 잡학이 제 전공이지요.” 지금까지 혼자 쓴 책만 대략 30권은 되는 거 같은데, 아시는 분은 아실 텐데, 정말 여러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성을 중시하는 분들이 보기엔 시원찮은 넘으로 보일 거 같은데, 저는 이번 책에서도 썼듯이 ‘아마추어’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무언가 좋아서 하는 사람, 미쳐 좋아서 하는 사람이 아마추어잖아요. 저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나 공부 같은 건 좋아하던 것마저 재미없어질 위험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관심이 가고 문제의식이 생기면 어떤 것이든 한다! 이게 제 모토인지라 관심사는 아마 엔간한 분들에겐 밀리지 않을 만큼 넓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제게 '관심사의 폭이 넓다' 함은 단지 ‘교양’이나 박학 같은 것은 아니란 생각입니다. 여러 영역으로 눈을 돌리고 공부하게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주는 흥미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선사들이라면 ‘화두’라고 했을 제 나름의 어떤 물음 때문입니다. 중요하지만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어떤 물음이, 답을 얻기 위해 여기 저기 여행하고 다니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여러 영역을 뭐하나 싶게 돌아다니지만, 제 책을 읽으신 분들은 그것들을 관통하고 있는 어떤 일관성을 보실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11. 니체는 익숙한 만큼 오해할 부분도 많아서, 실제 강의하실 때 그런 질문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요. 수강생들 중 강의를 통해 니체에 대해 달라진 인식을 확인할 수 있었던 일화가 있을까요?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고, 또 과거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지나간 일을 애써 기억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 아직도 기억에 남은 것은, 공동체든 삶이든 발생하는 일에 대해 가벼워지는 게 중요하고, 분노나 앙심 같은 반동적 감정 없이 쿨하게 사태를 보아야 한다는 것, 어떤 일에 상처받지 않는 능력, 그래야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다는 것, 안 되면 다시 또 풀면 되지 생각하는 것, 그런 점에서 아무리 심각한 문제도 좋은 삶을 위한 ‘연습문제’로 대하는 게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우리는 왜....]에 나옵니다), 그때 마침 어떤 분이 가까운 분과의 감정적 마찰 때문에 심난했던 모양입니다. 그 강의를 마친 직후에 제게 와서, 이건 마치 자기 속을 읽고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일러주는 얘기 같았다고 하시더군요. 니체에 대해 모르지 않는 분이었고,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었는데, '니체를 공부하는 것과 그걸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같지 않다'는 걸 실감했다는 말로 들리더군요.

 

12. 요즘 벌어지는 이슈를 보면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니체의 철학이 고귀한 자가 되는 것을 넘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더 나은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요? 불평등이 줄어들고 모두가 먹고 사는데 편해진 사회? 아니면 하나로 대동단결하여 분쟁이 사라진 사회? 모두 좋은 사회일 겁니다. 그러나 불평등이 사라진 사회란 불가능한 것이며, 그렇기에 유의미한 관념입니다. 불가능하기에 계속 그리 다가가려 하며 현재를 넘어서게 하는 관념이니까요. 대동단결된 사회, 이는 어떤 이견도 없는 사회인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회입니다. 실제론 그럴 수 없기에 이견을 억압하고 제거하거나 추방해버리는 사회일 겁니다. 불화나 이견이 없는 사회 같은 건 있을 수 없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연인 간에도 얼마나 많이 갈등에 시달립니까? 그게 정상이지요. 좋은 가족, 좋은 연애관계는 그런 불화가 이견이 편하고 가볍게 드러나고 해결책을 찾는 게 쉬워지는 관계일 겁니다.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편하고 가볍게 이견이나 차이, 불화가 드러나고, 그래서 쉽고 가벼운 마음으로 해결책을 찾는 사회지요.

혐오나 차별이 문제인 것은 어떤 차이에 서로 공존할 수 없고 서로 감당할 수 없는 끔직한 무게를 부여한다는 점입니다. 니체라면 ‘중력의 영’이라고 부를, 모두는 난쟁이로 만드는 끔직한 무게 말입니다. 그래서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사회는 인간들이 모두 잘아집니다. 작아지고 옹졸해지며 수용능력 없이 약자들, 작은 차이도 견디지 못해 쳐내고 욕하고 비난하는 자들로 넘쳐나게 됩니다. 책에도 반복해서 썼지만, 강하다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이질성의 폭이 크다는 말입니다. 혐오나 차별은 작은 차이도 수용할 수 없는 약함의 징표입니다. 아주 작은 이견도 수용할 수 없어 처벌하고 축출하려는 독재국가가 가장 약한 국가이듯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이 많은 이들은 약한 인간입니다. 고귀함이란 고상함이 아닙니다. 강함이고 수용능력이 큼을 뜻합니다. 남들이 추하다고 하는 것에서마저 아름다움을 보면서 자신의 취향 안에 수용하는 능력 같은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크면 같이 사는 분들, 이웃한 이들이 편해집니다. 부자인데도 쫓기듯 돈에 매달려 사는 사람도 았지만, 가난해도 자기보다 더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수용하며 함께 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과 사는 사회가 더 좋은지는 말할 것도 없지요.

 

13.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신 것 같은데, 니체에게 공동체란 본질적으로 약자들이 무리 짓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생각할 지점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니체는 평범한 이들과의 거리, 남다른 능력이나 특이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래서 남들과 무리짓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약자들이 모여 강자를 들볶는 걸 아주 싫어했지요. 공동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그런 생각은 19세기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생각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를 가둔 시대의 한계 같은 것입니다.

니체는 생명력을 긍정하라고 설파하는데, 약자든 강자든 생명력의 증가를 위해 공동체를 구성합니다. 자기에게 없는 능력을 친구에게서 찾는 겁니다. 그것은 니체적 관점에서 보면 자연적인 것이고 ‘좋은 일’입니다. 니체 자신도 그랬어요. 그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을 그렇게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구술하는 걸 받아 적어준 페터 가스트 덕분이었어요. 자신의 건강, 자신의 힘이 부족한 부분을 친구와 함께, 즉 일종의 공동체를 구성해서 해결해 간 겁니다. 나중에는 결국 갈라서게 되지만, 친구인 파울 레가 루 살로메와 셋이서 함께 공부하고 사유하는 공동체를 구성하자고 했을 때, 얼른 달려가서 함께 합니다. 다만 니체가 살로메에게 청혼하면서 위협적인 경쟁자가 되자 파울 레가 살로메를 설득해서 니체를 ‘따’ 시키고 도망칩니다. 공동체를 깬 것은 파울 레였던 겁니다.

이는 니체조차도 좀더 강해지기 위해 공동체를 구성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 시대의 통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몸이 그걸 벗어나는 걸 실행한 거지요. 그렇기에 공동체에 대한 니체의 말은 냉정하게 읽어야 합니다. 더구나 개인의 신체조차 거대한 박테리아의 공동체라는 걸 아는 지금이라면, 공동체와 개인을 대립시키는 생각이 얼마나 나이브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강자들, 특이한 자들을 수적 다수의 힘으로 제압하고 평범성이 지배하게 하는 무리의 도덕이 있으며 공동체가 그런 게 될 수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니체 자신이 행했듯, 특이성을 가동시키는 공동체도 가능합니다. 문제는 니체 식으로 말해 ‘어떤 공동체인가?’입니다. 강자들의 공동체인가, 약자들의 공동체인가 말입니다.

지식 공동체를 만들고 그 속에서 공부하고 쓰고 했던 저로선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물음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왜 끊임....]의 마지막에 「니체주의자에게 공동체는 불가능한가?」라는 제목의 글을 부록으로 덧붙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14. '거리의 파토스'를 설명하시면서 남들과 다른 나만의 감각을 긍정하고 그 생각을 멀리 밀고 나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연대'와 '고립'의 경계를 구분하는 선생님만의 기술이 있을까요?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전후 일본의 사상가 타니가와 간은 “연대를 구하되 고립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했고, 이는 일본의 학생운동인 전공투의 모토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저로서도 아주 매력적인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거리의 파토스란 개념은 특이성의 긍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남들과 다른 어떤 감각이나 생각을 긍정하는 것, 그것을 다른 이의 특이성과 결합하여 새로운 특이성을 구성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삼각형에 수많은 점들이 있지만, 삼각형의 특이성을 표현하는 점은 세 개뿐입니다. 나머지는 보통점이지요. 그래서 저는 작년에 출간한 책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어요. ‘언제나 특이점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라.’ 그런데 특이점은 다른 특이점과 모여 특이성을 구성합니다. 모든 특이성이 좋은 것은 아니지요. ‘좋음/나쁨’이라는 니체-스피노자적 윤리학의 개념이 작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구성에 참여하는 특이성이 ‘어떤 특이성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좋은 특이성을 형성하는 특이점이 되도록 존재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아무리 좋은 특이성이라고 거기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다른 특이성을 창안하는 것, 새로 시작하는 힘을 가동시켜야 하지요. 그래서 하나 더 추가해야 합니다. ‘어떤 특이성에도 머물지 말라.’ 특이점의 존재론이라고 저는 말하는데, 그 존재론의 윤리학적 명제들인 셈이지요.

 

15. 니체의 문장 중 가장 와닿았던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에서 하나씩 골라 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선악의 저편]에서 인상적인 것은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그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이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 본다.”는 문장입니다. 우리는 괴물과 싸우다 비슷한 괴물이 되는 경우가 많지요. 싸움의 이유가 아무리 정당해도 이렇게 되면 싸우지 않은 것만 못한 게 됩니다.

[도덕의 계보]에서 인상적인 것은 “약속할 수 있는 자가 되라”는 문장입니다. ‘주권적 개인이 되라’는 말이기도 하지요. 자기자신을 지배하는 자, 자신 안의 자유의지들을 하나의 의지로, ‘주권’으로 바꾸낼 줄 아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은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연구하여 얻은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도덕이나 풍습이 사용하는 잔혹한 기억의 기술이나 반동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사제의 기술들조차 약속할 수 있는 자, 주권적 개인이 되는데 사용할 수 있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도덕의 계보]에서 금욕주의나 도덕에 대한 비판이 부정적인 것을 겨냥할 때조차 부정적이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16. 책을 읽으며 무턱대고 니체를 읽는 것보단 어떤 안내자를 만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에서 니체 사유의 비약과 단절에 대해 설명해 주셨듯이, 선생님도 니체를 공부하며 여러 사유의 단계를 밟아 나가셨을 듯한데요, 처음 니체를 공부하게 된 계기와 그때의 인상, 그리고 지금의 니체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좋은 안내자, 중요하지요. 좋은 친구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전에 [노마디즘] 서문에 명구로 인용했던 말인데, “가장 좋은 친구란 스승이 될 수 있는 친구고, 가장 좋은 스승이란 친구가 될 수 있는 스승”입니다. 이탁오라는 양명학자의 말입니다. 남들과 같아지는 것은 평범해지는 길이지만,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은 세상을 떠나는 일입니다. 남들과 제대로 달라지는 길은 남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과 다른 감각과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때입니다. 책을 읽고 해석하는 것도 그래요. 혼자만 하는 생각, 남들에게 ‘이거 좋지 않아?’라며 알려주고 설득할 수 없는 생각은 대개 가치 있는 생각이 아닙니다.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려도 이해하게 하고 싶은 생각, 남다름을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제대로 남과 다른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선 함께 읽는 게 꼭 필요합니다. 동료와 함께 읽고 다른 해석자, 이런저런 안내자와 함께 읽는 것 말입니다. 그 안내자는 책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세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땅굴을 파고 어둠 속에 갇히기 쉽습니다. 혼자만의 독서는 그렇기에 아주 위험합니다. 특이성도, 거리의 파토스도 남들과 부딪치고 대결하며 얻어지는 것이지, 그저 혼자만의 길을 가는 것으론 얻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한때 혁명을 꿈구며 지하운동을 하던 레닌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란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사회주의가 망했어요. 덕분에 허무의 심연을 보았습니다. 그 심연 속에서 평생을 밀고가도 해결하기 쉽지 않을 물음을 얻었고, 그 덕분에 여러 가지 공부를 하며 책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 심연 속에서, 어떻게 이 어둠을 벗어날 수 있을까, 어디서 출구를 찾아야 할까를 고심하면서 많은 걸 다시 공부하고 다시 읽었습니다. 니체도 그때 다시, 비로소 제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운 좋게도 그때 들뢰즈라는 훌륭한 안내자를 만났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그러나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 싶은 것을 찾아 읽는 방법을 얻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때 니체를 충분히 이해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번 다시 읽고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가령 니체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힘에의 의지’ 개념에 대해서는, 니체를 처음 읽으면서부터 시작해 읽을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다르게 이해했던 것 같고, 많은 경우 뭔가 미진함이 사라지지 않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령 [철학과 굴뚝청소부]나 [철학의 모험]에 썼던 걸 고쳐쓰기도 했지요. 이번에 이 책을 내면서 그 개념에서 미진하다 싶은 게 깔끔하게 사라지고 이제야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영원회귀는 아직도 모호한 게 사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3권을 쓰면서 영원회귀에 대한 모호함이 비로소 사라져주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17. 선생님께도 멈춰 있지 않고 조금씩 발전하는 생각들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저는 워낙 관심을 갖고 있는 게 많고 공부하고 싶은 게 많아서, 멈춰 있기 힘듭니다. 더구나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는 모두 멈춰 있지 말라고 가르치고, 덕분에 저도 끝없는 유목의 과정으로 삶을 다루고, 유목민이 되어 사유하는 길을 가게 되었고, [노마디즘]이란 제목의 책도 냈지요.

제 나름의 사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름대로 익어서 긍정적이고 자립적인 형태의 책으로 나오게 된 것은 아마 [코뮨주의](그린비)와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휴머니스트)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때 그 책들을 사로잡은 문제의식은 ‘존재론’이었어요. 지금 보면 존재자의 존재론이라고 해야 할 사유인데, 하나의 존재자를 우주적 공동체로서 포착하려는 그런 사유였어요.

그런데 몇 년전에 김시종 선생의 시를 만나게 되면서, 그러한 존재론은 여전히 빛의 존재론이었고, 세계성 안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후 어둠의 존재론, 세계성 바깥의 존재론으로 방향으로 바꾸게 되었고, 존재의 존재론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지요.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도서출판b)과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문학동네)이 그 첫 번째 결실인 셈이지요. 아마도 당분간은 이 주제에 대한 사유를 계속 밀고가게 될 것 같습니다.

 

18. 니체 이외에 이렇게 강의를 통해 다뤄보고 싶은 철학자가 있나요?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이기도 하고 남들이 제게 기대하는 철학자인 사람이 들뢰즈인데요, 들뢰즈에 대해서는 이미 [천의 고원]이란 책의 강의록을 낸 적이 있지요. [노마디즘]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들뢰즈는 정말 읽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든 철학자예요. 들뢰즈에 대한 해설서라는 걸 보다가 황당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어요. 어이없는 애기를 책으로 출판한 용기에 놀라기도 하구요.

그래서 들뢰즈에 대해서는 자의반타의반 강의를 여전히 자주 하게 되는데, 어떤 철학자에 대해 다시 강의록을 책으로 내게 된다면 들뢰즈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지만 정말 읽기 힘든 책이 [차이와 반복]인데, 이 책이라면 책을 내는 게 의미가 있겠다 싶은 생각이에요.

 

19.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니체에 대한 책을 동시에 두 권이나 내고, 세 번째 권도 나올 거라고 예고하는 건, 요즘처럼 책을 읽지 않고 읽어도 쉽고 가벼운 걸 읽으려는 시대에 미련한 짓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가벼움의 미덕을 잘 알고 있고 또 가벼운 감각으로 읽을 수 있게 썼다고 생각하면서도, 분량이 가벼움과 거리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구요. 그러나 가벼워도 뭔가 하려면 충분히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니체도 쓰고 또 쓰고 했겠지요.

니체의 많은 책이 있지만, 세 권을 골라 쓰겠다고 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철학을 필로비오스, 즉 삶에 대한 사랑을 위한 도구로 만들려는 니체의 문제의식을 갖고 삶 속으로 침투하는 길을 찾는 게 첫째 권의 목표라면, 니체처럼 사유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개념인 힘에의 의지 개념을 통해 이런저런 사태를 보고 평가하면서 반동적이고 부정적인 삶을 넘어서는 길을 찾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 둘째 권의 목표였어요. 세 번째 책은 영원회귀 개념을 통해 니체의 사유를 존재 자체를 향해 최대치로 밀고 나가보고, 자기를 반복하여 넘어서는 자로서의 초인에 대해, 그 초인의 삶이 바로 여기 현실의 삶임을 보여주는 것이 될 거 같습니다.

니체 생각대로, 책을 읽는 것, 사유를 하는 것은 삶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내는 책는 충분히 니체적인 책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읽는 분들이 그렇게 읽어주고 사용해줄 때 완성되는 것일 겁니다. 제가 반은 했으니, 여러분이 나머지 반을 해서, 노래와 춤이 흘러나오는 삶, 나뿐 아니라 남들도 즐겁고 평온하게 해주는 삶이 퍼져가게 되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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