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감각놀이] 누구나 - 프로젝트
놀이일시 2020. 12.15(화) ~ 2020. 12.29(화)
놀이장소 [수유너머104] 어디든 (화장실, 주방 포함) / 작품에 컨셉에 맞게 15일 셀프디스플레이
놀이장르 시, 서예, 회화, 사진 / 동영상, 입체, 설치, 퍼포먼스 / 레디메이드(ready-made) …
(선물로 받으면 흐뭇한 어떤 작업이든 / 공동작업 선호)
작품경매 모든 작품은 마지막 날 경매로 판매되고, 판매된 수익금은 공동체운영을 위해 사용됩니다.
(경매가 500원부터)
누구나-프로젝트...... 라는 이름으로 [수유너머104] 1년동안의 공부/놀이/작업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공동의 신체를 만들고, 공동성을 경험하는 공동체의 감각놀이입니다.
'놀이'는 한없이 무용해야 하며, 돈이나 명예 같은 유용함과 관련이 있는 순간 노동이 되고 맙니다.
선물 혹은 경매...... '공동으로 만든 것을 선물하는 것'이 이 놀이의 백미, 가장 잘 놀 수 있는 방법입니다.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기타 등등'…이 사라지면 '나누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감각하기...... 그 나눔이 연중 내내 실천되는 곳이 바로 [수유너머104] 입니다.
2020. 12.15(화)부터 시작하는 [수유너머104] 공동체의 감각놀이에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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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명 : 이것은 포스터가 아니다! / 놀이꾼 : 류재숙, 최유미
"이것은 포스터가 아닙니다. 이것은 친구입니다.
이것은 밥입니다. 이것은 술입니다. 이것은 우정입니다.
이것은 놀이입니다. 이것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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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작업 @수유너머104] 박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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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시숙재에 틀어 박혀 혼자만 작업하다, 수유너머104에서 연말 프로젝트가 있어서 공동작품을 하나 준비해보고 어제 저녁 작업을 끝냈습니다. 함께 작품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작품은 언제 멈추는 걸까? 참여하는 다수가 오케이 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까? 등등의 여러 물음을 갖고, 작업을 준비했습니다.2
현대미술은 겉으로 보기에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 처럼 보이죠. "그건 나도 할 수 있겠네." " 아이들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이 나오면 성공한 것이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습니다. ㅎㅎㅎ 그래서 여러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점시리즈(상공에서 먹 뿌리기), 선시리즈(선 긋기)를 준비했습니다. 각자는 자신이 원하는 먹을 골라 적당한 농도의 먹을 만들어 작업에 임하면 됩니다. (점시리즈와 선시리즈는 제 나름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접어두고 여러분 각자가 상상하시는 대로 바라보시면 된답니다.)3
10일 정도의 시간이 흘러 어제가 마지막날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작업이 진행이 되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연구실에 가서 작업들을 보았는데, 코로나라는 악재를 만나서 많은 분들이 참여하지는 못한 결과물이 있었습니다. 사실 거기서 멈춰야 했으나...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많은 분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제가 마지막에 손을 좀 댔습니다ㅠㅠ 점시리즈는 그럭저럭 완성했는데, 선시리즈는 너무 과하게 되어 고치지 않은 것이 더 나을 뻔 했네요.4
결과물을 떠나 저에게는 의미있는 시도였습니다. 함께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도 처음이었고, 다양한 생각들을 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이었습니다. 다만 코로나때문에 참여하신 분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좀이 아쉬움으로 남네요. 다음 기회를 빌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2020-1231_누구나 서예1.jpg [File Size:157.7KB/Download: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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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
놀이명 : 랭보의 발 (Rimbaud' feet) / 놀이꾼 : 박지담, 이혜진, 황정화
다른 삶의 가능성을 더듬고 넘나드는 시간은 서로를 감염시켜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합니다... 수유너머104의 일상은 즐거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
감염
걷기로 합니다. 앞서가던 사람이 계속 사라집니다. 걷고 걸어도 인적이 끊기는 땅.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 것을 재난이라 합니다. 외출을 자제해 주십시오. 출입 시 문단속 하시기 바랍니다. 문단속.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닫아 두는 것. 열어 두는 것. 탁. 탁. 발걸음이 들린 것 같습니다. 출구가 떠오르지 않아 위험하다 합니다. 힘을 빼야 합니다. 걷기로 합니다. 돈을 주지 않는 일요일로 갑니다. 소원을 떠올려 봅니다. 의외로 신성한 소원은 없습니다. 구경꾼이 진단서가 필요한지 묻습니다. 없이도 닫히면 열리고 열리면 닫힙니다. 외투와 가족이 필요한지도 묻습니다. 있어도 도달한 곳과 도달할 곳은 마찬가지 입니다. 멀리 가면 위법이라 합니다. 멈추지 않아야 멈출 수 있습니다. 광장에 다다릅니다. 행렬은 취객보다 요란합니다. 삼키는 것만 가르쳐 줍니다. 따라 하지 않겠습니다. 입 밖으로 나와도 놀라지 마십시오. 미덕입니다. 걷기로 합니다. 걷는 추상은 백색입니다. 정오에도 녹지 않는 것입니다. 폭설로 일부 지역이 통제되었다 합니다. 지붕도 보이지 않는다 합니다. 눈이 왔던 나라를 지워야겠습니다. 지우면 멈추고 멈추면 쌓이는 힘이 빠지는 활동입니다. 힘이 빠질수록 백지가 됩니다. 힘이 다 빠지면 죽는다 합니다. 위안이 되는 말입니다. 걷기로 합니다. 닫히면 열리고 열리면 닫히고 사망자가 쌓여 갑니다. 사망자는 대부분 실종자 명단에 있습니다. 혼돈해도 괜찮습니다. 버티지 않아야 가볍습니다. 가벼움. 가고 오고 넘나드는 것입니다. 출렁출렁 빛나는 것입니다. 빛은 적나라합니다. 손을 뻗어 봅니다. 나는 뜨겁습니까
수유너머104 [공동체의 감각놀이: 누구나-프로젝트] 놀이 소개글
효영(20.12.15)
영원한 것은 어쨌든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의 주름 장식이다
점은 단순하다. 그러나 그 점이 수많은 직선의 교차·발산지대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무수히 많은 다양한 각도가 하나의 점 속에 내속하고 공속한다. 이때 점은 매끈한 표면을 갖는 ‘단순점’이기보다 울퉁불퉁하게 굴곡진 ‘접힌점’이 된다. 우리가 끝없이 펼쳐진 세계를 상상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접힌점’으로부터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이와 유사하다. 벤야민은 일종의 접힌점으로서의 역사를 상상한다. 그에게 역사란 지고한 이념의 영역에 있지 않다. 오히려 역사는 어린아이가 꼭 붙들고 있는 엄마의 치맛자락에 잡힌 주름에 자리한다. 그에게 역사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 접힌 주름의 펼침인 동시에 펼침 가운데서도 주름잡혀 있는 것의 무한한 전개를 발견해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주름의 접힘과 펼침으로써 역사를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한편으로 그것은 진보사관으로서의 ‘전통적인’ 변증법과의 결별을 지시한다. 진보란 어떤 변화를 가늠하는 척도다. 그러나 그 척도를 물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무비판적 수용·실체화하는 순간, 진보이론은 비판적 역사 이론과 상충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벤야민의 기존의 ‘인습적 역사 인식’에 대한 진단이었다. 때문에 그는 “진보 이념을 자체 내에서 무효화해온 역사 유물론을 제시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방법론적 목표 중의 하나”(N 2,2)라고 말한다. 그는 진보 이념을 기각하기로 한다. 진보와 쇠망 각각은 역사의 주름이 펼쳐진 하나의 단면들이다. 더욱이 우리는 그 펼쳐진 단면 아래 어떤 주름이 다시 접혀 들어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만화경이 매번 다른 면들을 보여 주듯 모든 시대는 각기 상이한 의미로 자신의 단면을 펼칠 뿐이다. 때문에 진보를 서둘러 찬양할 이유가 없는 만큼 쇠망을 성급히 지탄할 이유도 없다. “‘진보’ 개념의 극복과 ‘쇠망의 시대’라는 개념의 극복은 동일한 사항의 양면일 뿐이다.”(N 2,5) 그런 연유로 벤야민은 주름의 한 단면으로서의 현상이 악평에 시달리는 것만큼, 순전한 찬양의 대상으로 다뤄지는 것을 막고자 한다. “현상들이 악평을 ‘얻거나’ 경시되는 상태로부터 구원해내야 하지만” 동시에 “‘유산으로 찬양되는’ 것으로 대변되는 파국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다른 한편 그것은 실증사관으로서의 ‘사실’로 점철된 역사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일이다. ‘사실’의 기록은 매끄럽고 연속적이며 완고하다. 이를 테면 “한쪽에는 어떤 시대의 ‘결실’이 많고, ‘미래를 내포한’ ‘생동감 넘치는’ ‘적극적인’ 부분이 놓이며, 다른 한쪽에는 쓸데없고, 낡은, 쇠퇴해가는 부분”이 놓인다.”(N 1a, 3) 특정한 양식과 관습이 작동한 결과 출현한 이 선명한 분할은 역사를 완결된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그 시대의 역동적인 전개양상을 박제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역사의 박제화가 “내심으로는 연속성을 만들어내려는” 것인 동시에 “역사의 진행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계기들을 은폐시키려고 하는 것”(N 9a, 5)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처럼 “‘실제 있던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는 이 세기의 가장 강력한 마취제”(N 3, 4)로서 이 시대에 향유된다. 바로 그러한 실증주의적 역사관에 대항하고자 벤야민은 “시대를 물화된 ‘역사의 연속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역사 유물론”의 방식을 택한다. 역사란 언제나 매끈하게 연속선상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닌 만큼, 그에 대한 고찰 역시 균질한 토대에서 진행될 수 없다. 벤야민이 역사를 관통하는 균질적 이념을 제안하기보다 옷주름과 같은 울퉁불퉁한 물질에 달라붙길 요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에게 “영원한 것은 어쨌든 어떤 이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옷의 주름 장식이다.”(B 3,7)
이런 맥락에서 벤야민에게 역사 고찰이란 연속성이 파괴된 지점에 서서, 물질로부터 각각의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감각하고 재조합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역사유물론은 한편으로 “시대의 균질성을 폭파”(N 9a, 6)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과거에 있었던 것이 지금과 섬광처럼 한순간에 만나 하나의 성좌를 만드는 것”(N 2a, 3)이다. 그로써 그의 작업은 역사 속에서 파편화된 이미지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성좌를 그려내는 일이 된다.
이러한 벤야민의 ‘역사 복원’ 작업의 기저에는 어떤 시대에도 ‘쇠망의 시대’라고 폐기되어 마땅한 역사란 없다는 믿음이 자리한다. “쇠망의 시대 같은 것은 없다.” 이에 기반해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복원된 것이 멜랑콜리와 그로테스크로 점철된 17세기였다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재조명되는 것은 19세기 파리다.
1822년 이후 15년 동안 만들어진 백화점의 전신인 아케이드라는 기묘한 공간. 그를 둘러싼 19세기의 삶, 즉 “아케이드에서 벌어지는 모든 삶(따라서 19세기에 벌어지는 모든 삶)”(N 1a, 6)이 그의 소재가 된다. ‘모든 삶’이란 결코 과장이 아닌데, 벤야민이 취하는 대단히 광범위한 소재들-아케이드라는 신유행품점의 구조, 그를 지탱하는 철골이라 는 건축자재부터 박람회, 백화점, 광고, 매춘, 사진, 자동기계, 패션, 도박, 증권 거래소, 권태, 무위, 코뮌에 이르기까지-이 ‘모든’의 범위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일종의 ‘문화사적 변증법’을 시도하고자 한다.
자본주의가 신생아였을 무렵, 상품은 아케이드라는 공간 속에서 역사의 한 단면을 구성한다. 현기증이 일도록 급속한 발전을 이룬 기술과 더불어 자본주의는 “꿈을 수반한 새로운 잠”(K 1a, 9)으로서 유럽을 뒤덮는다. “감각적인 동시에 초감각적인, 거꾸로 서서 머리로부터 스스로 춤을 추기 시작하는” 상품이 도시를 유혹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잠에 빠져든다. 19세기 파리의 사람들은 어떤 꿈을 꿨을까?
이 작업은 순전한 과거의 복구라기보다 과거를 현재와 어떻게 관계 맺게 할 것인가를 묻는다. 벤야민은 “과거의 한 단편을 현재의 현실성과 관계”(N 7,7) 맺게 하고 나아가 과거가 현재에 “현실성을 불러일으키는 것”(N 2,2)을 원한다. 그처럼 현실성을 불러일으키는 과거가 현재와 충돌을 벌일 때, 과거는 어느 새 현재를 삼켜버린다.(N 7a, 3) 그런 점에서 역사란 미완결을 완결된 것으로, 완결된 것을 미완결된 것으로 바꿀 수 있다.(N 8,1) 이로써 우리는 벤야민의 역사유물론이 정향하는 지점은 과거의 구원 자체이기보다 그를 통한 현재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작업을 지탱해주는 파토스 : 쇠망의 시대 같은 것은 없다.” (벤야민, N 1,6)
“우리에게는 현재를 경멸할 권리가 없다.”
(보들레드, ‘The Salon of 1846: On the Heroism of Modern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