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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봄 심포지움] 감응의 예술론 :: 후기

탁선경 2019.06.26 16:34 조회 수 : 17

감응의 정치학 심포지움 후기

 

 

 

 

 

탁선경(수유너머104 세미나 회원)

 

 

 

20137. 그 당시 출판사에서 일러스트일을 하며 한귀퉁이에 구멍이 점점 커지던 중 페이스북에 올라온 한 강의가 눈에 들어왔다. 수유너머N. 앙리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을 정화스님의 관점에서 강의하는 수업이었다. 보자마자 바로 수강신청을 했고 그렇게 수유너머를 처음 찾게 되었다. 연희동 거대한 콘크리트 다리를 지나 한 건물의 낡은 계단을 올라가 수유너머N의 문을 처음 열었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과일과 떡 등 다과가 풍성했고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강의가 시작되자 강의실에 빽빽하게 앉은 수강생들은 나이대가 좀 있었고 모두들 지식인 같은 느낌에 약간의 딱딱함이 낯설고 조금은 위축되는, 그런 분위기였다. 꽃무늬가 있는 검은색의 조금은 몸에 붙는 스커트를 입고 갔던 것 같은데 왠지 이런옷은 안될 것 같았다. 하지만 꿋꿋하게 입고다녔다, 암튼 딱딱했지만 한번 있어보고 싶은 곳이었다.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은 참 어려웠는데, 졸면서 띄엄띄엄 알아듣기도 못알아듣기도, 다른분들의 질문과 답변 이런것들이 모두 그당시 허기진 배에 어떤 곡식을 채워넣는 느낌이어서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베르그손 강의를 마치고 이어 하이데거 수업도 신청했다. 하지만 하이데거 수업은 내겐 너무 무리였다. 함께 읽고 에세이를 쓰는 수업이었는데 결국 에세이는 마무리하지 못하고 그렇게 하이데거를 끝으로 문 뒤에 작은 점하나를 찍어놓고 수유너머는 다시 가지 않았다.

 

6년이 지나. 오래 닫아두었던 페이스북을 열고 다시 눈에 들어온 강의는 2019. 봄 심포지움 감응의 예술론

 

 

 

 

감응이란 어떤 것의 촉발에 의해 내 신체에 발생한 능력의 증감, 그것의 표현이자, 동시에 그런 효과를 잠재성의 양상으로 응결시킨 작품의 신체성을 뜻한다. 감응에는 한 순간의 강렬한 만남이 접혀들어가 있고, 이는 그 만남의 특이성을 표현한다. 이를 어떤 대상으로 응결시킬 때, 그 만남의 기념비가 선다. 그 기념비를 흔히 작품이라고 한다.

예술이란 이렇게 사건의 기념비를 세우는 작업이다. 이질적 감정의 연속체 속에서, 이제까지 없던 감정을 발명하고 그 감정 속에 새로운 세계를 접어넣는 활동이다. 역으로 예술작품과 만난다 함은 그 작품 속에 응결된 감응과 만나는 것이고 그걸 통해 작품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감응‘.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관계, 어떤 장소, 공간의 기운, 우리 고양이 하루의 뚱뚱하고 둥근 발가락, 쉴새없이 올라오는 쟈스민의 새순, 세 살된 조카의 쪼끄맣게 오므린 입술, 하물며 미세먼지 가득한 뿌연 하늘을 보면서도 감응을 받는다. 어떨땐 발을 딛고 있는 땅만 쳐다봐도 감응이 일어날때가 있다. 이렇게 감응은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에서 느끼고 영향 받을 수 있는 흔한것이지만 감각을 열어두지 않으면 그저 그것은 그냥 고양이, 저것은 그냥 풀, 저것은 그냥 회색의 시멘트. 그냥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것이 감응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강의의 취지는 좀 열어두고 느끼자는 게 아니었을까. 서로 좀 섞여 감응하자는게 아닐까. 점점 건조해지고 개인화되어 감응을 느낄 접촉 자체를 거부하는 요즘, 아니 접촉할 수 없을만큼 감정적으로 피곤한 시대에 그래도 감응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건 아닐까.

 

 

감응이란 이행하는 감성, 어떤 특정한 감정적 명명상태로 확정지을 수 없는 신체적 감각의 유동을 가리킨다.

...

감응의 흐름이 일으키는 감각과 신체의 변이를 스피노자는 변용(affectio, affection)이라 불렀다. 유동하는 감응에 의해 우리의 신체와 감각은 늘 영향 받으며, 거꾸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신체적 존재자는 언제나 변용을 겪는다. 그러므로 모든 개별적 대상은 항상-변용되는-실존으로서만 존재하는 셈이다.

감응의 예술론. 감응과 이데올로기. 사건을 사유하는 감각의 기계되기. 최진석

 

시간이 지나 다시 찾은 수유너머는 시멘트 다리아래 수유너머N에서 수유너머104로 이름도 바뀌었고 길건너 시원한 언덕에 자리해 있었다. 6년전의 묵직함은 덜어지고 시원함이 감돌았는데 시간이 흘렀구나..이곳도 새로운 바람이 지나가는구나 싶었다.

 

그사이 나는 일러스트를 그만두었고 운좋게도 상수동 탁작가라는 이름의 공간을 열었으나 소통의 불협화음과 점점 더 커지는 구멍을 감당하지 못하고 공간을 접었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의 경험은 꽤 임팩트 있는 흔적으로 남았고 이것은 내게 큰 변화를 주었다. 이때부터 막연한 정서와 감성적인 것이 아닌 어떤 경험으로 인한 감정, 그것이 지나가고 난 뒤의 생각을 큐브를 소재로 표현하게 되었다. 이전엔 물고기와 깃털이 소재가 된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상수동 탁작가 이후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공간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공간에 들어서면 그 공간을 보다 예민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관심 가져본적 없던 자영업자가 보이기 시작했고, 젠트리피케이션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로인해 비어가는 공간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사라지는 것들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연결이 시작되었다.

공간을 닫기 바로 직전 끝자락에 인연이 된 시낭독 모임. 이들과의 연결은 이후 어떤 솟아난 것(Entsprungenes)’ 바로 그것이었고 끊어져가던 무언가가 다시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벤야민에게 예술작품은 창조된 것이 아니다. ‘어떤 솟아난 것(Entsprungenes)’ 즉 역사와 시대정신과 지각과 감각의 카오스로부터, 그것들에 미적인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는 작가의 특정한 방식으로부터 산출된 일종의 구성물이다. 그는 예술작품의 본질로서, 작품 속에서 진동하는 (아름다운)생명으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das Ausdrucklose)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는데, 이것이 예술작품의 진리내용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가상에 멈춤을 명하고, 움직임을 사로잡고, 조화에 참견하는 식으로 거짓되고 혼란스러우며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총체성을 공격한다. 이러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비로소 작품을 완성하며, 작품을 파편으로 분쇄하여 진실한 세계의 단편으로, 상징의 토르소로 만든다.”(괴테의 친화력, 155)고 벤야민은 말한다.

...

사물과 교감한다는 것, 무엇인가를 경험한다는 것, 모방하고 연습함으로써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아우라가 붕괴된 시대에 경험 불가능한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감각 속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

...

무의식적 기억이건, 어쨌든 그러한 경우에는, 사색해 보려고 애쓰면서, 감각을 그것과 같은 법칙 같은 사상을 가진 형상으로 번역하도록, 곧 자기 속에서 솟는 감각을, 어둑한 곳으로부터 나오게 하여, 그것을 어떤 정신적 등가물로 전환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나에게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는 그 방법은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프루스트. 되찾은 시간 11, 266)

감응의 예술론. 발터 벤야민과 어떤 문학적 감응의 신체들. 권용선

 

그렇게 나는 벤야민이 말하는 어떤 솟아난 것을 경험했고 그 다음해에 이들과 함께 전시를 열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그 자리에 오래 머문 개성있는 공간들이 실종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전시명으로 이리까페에서 모두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공간과 그림, 그리고 이곳을 드나드는 아티스트와 함께하는 과정이 하나의 작업물로 완성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개성있는 공간이 사라져가고 문화가 실종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본연의 것들을 다시 건드리고 싶었다.

4주간의 전시의 과정 속에서 함께 감응을 느끼는 시간이 되고 싶었고 그 과정을 함께 한 분들이 글을 쓰고 노래를 해주길 바랬다. 내가 그곳에서 어떤 감응을 받아 소진되고 말라가던 에너지들이 충만해지는 계기가 되었듯이 그들에게도 어떤 감응이 전해졌을 것이라고 믿는다. 감응은 한쪽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양방향 소통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수성을 지니고 살아가기도, 지켜나가기도 힘든 사회다. 말랑말랑 했던 감수성은 밭이 메마르면 어느덧 사막처럼 건조하게 흩어져 버리고 만다. 그것들을 다시 끌어내기엔 꽤 오랜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질적인 관계들과 섞이면 섞일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고 명료하게 답을 찾으려하면 할수록 모호하게 흐려지는 것이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속하고 있는 채워진 듯 빈 공간을 닮은 모습. 그리고 다른이가 아닌 자신의 부조리함.

어떤 상황, 윤리, 관습,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끊임없는 왜. . 왜에 대한 물음들은 밖으로 향했다가 다시 안으로 향함을 반복하면서, 그렇게 예기치못한 만남들 속에서 다양한 감응을 경험하게 된다.

 

시적인 것, 음악적인 것, 회화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분명하지 않은 것, 모호한 것, 경계의 것, 설명할 수 없는 것들.

결국 시적인 것.

 

기억하기 위해 상상해야하고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상상해야 하는 언어가 곧 시다.

...

시적인 것이란 삶과 예술 전반에서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법의 효력, 문화적 관습, 제도의 권한, 언어의 문법, 주체의 권력이 과연 자명한 것인가를 되묻는 물음을 통해 법의 효력과 주체의 권력을 중지시키고 무력화하면서 출현하는 타자와 소수자의 목소리, 미시적이고 흐릿한 존재들의 현존이다. 시적인 것은 자명한 법과 윤리, 관습과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다른 삶과 다른 존재의 현존과 그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

만약, 문학이, 그리고 시가 증언에만 멈춘다면, 사태의 ()가능한 사실적 재현에만 멈춰야 한다면, 끔찍한 홀로코스트의 사태를 증언하는 언어만을 절대화한다면, 시의 언어는 사태의 현장에 부재했다는 사실에서 연원하는 부채감과 죄의식 탓에 침묵해야 하거나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무력함, 그 무의 언어가 되어야 하거나 역사가에 의해 수집된 수많은 사료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시적인 것과 감응의 정치. 송승환

 

 

시인이 말했다. 시적인 것. 그것은 너머의 것이라고. 늘 너머에 있을 것.

철학자는 내게 없는 언어로 무지한 나를 깨우고, 시인은 무의식에 그의 언어를 던져 나를 유영하게 한다.

끊임없이 선명하게 각을 세우는 것들을 지워나가는 세계를 표현하고 싶다. 눈앞의 반짝거림 보다는 그 너머의 것들을 표현하고 싶다. 어쩌면 6년전의 수유너머는 공포의 하이데거를 끝으로 돌아설 때 내게 작은 돌멩이 하나를 쥐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감응의 정치학으로 다시 찾은 수유너머104와의 만남은 또 어떤 감응이 시작될지 어떤 솟아오름이 있을지 조심스레 접속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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