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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 니체》 

 

2장 빛의 외투를 걸친 은둔자 - 04. 힘에의 의지 

 

          [1] 힘 개념은 불충분하다          
 

실재는 ‘충동들의 실재’ > 니체는 철학을 하나의 기호(배후의 충동ㆍ의지를 말해주는 기호)로서 간주했다. 즉 철학을 읽어낸다는 것은 배후의 충동ㆍ의지를 읽어낸다는 뜻이다. 니체는 충동을 통해 인간을 넘어 유기체의 삶, 생명이 없는 사물의 운동까지 이해할 수 있을지 타진한다. 우리의 실재가 ‘충동들의 실재Realitat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런 실재를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까지 확대할 수 있을까? (*힘에의 의지 ······> 동물_충동, 유기체_기능, 사물_운동)
 

유기체ㆍ생명체의 충동 > 니체에 따르면, 유기체의 자기조절ㆍ동화ㆍ영양섭취ㆍ배설ㆍ신진대사 등의 기능은 ‘충동의 삶Triebleben’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등생명체는 물론이고 아메바 같은 단순생명체의 경우에도 생명체의 운동을 충동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아메바가 영양분을 흡수할 때 식욕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생명체의 다양한 기능은 각각 분화된 충동들로 이해할 수 있으며(입-말하는 욕구, 항문-배설하는 욕구와 관련짓는 방식), 이 충동들이 원래는 하나의 ‘삶의 충동’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질적 세계의 충동 > 니체는 충동을 무생물의 세계,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로 검토한다. 니체는 물리학자의 ‘힘Kraft’ 개념은 세계를 ‘작용’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불충분하다고 한다. “물리학자의 ‘힘Kraft’ 개념은 내가 ‘힘에의 의지’로서 (힘MachtㆍMight=능력의 표명에 따른 요청으로, 힘의 사용이나 실행으로, 창조적 충동으로) 표현하는, 내적 세계에 배당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운동, 모든 ‘현상’, 모든 ‘법칙’을 어떤 내적 사건의 징후로서 파악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유비Analogie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동물에 있어서 충동들을 힘에의 의지로부터 이끌어내는 일은 가능하고, 유기체적 생명의 기능을 하나의 원천(*힘에의 의지)에서 끌어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리학적 ‘힘Kraft’ > 물리학적 ‘힘Kraft’은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물리학자는 ‘힘’을 물리적 현상의 원인으로 제시하지만, ‘힘’은 현상의 기술이다. 그 힘(중력)은 사과가 떨어진 현상의 기술이지, 원인의 기술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역학적 인력ㆍ척력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주체로서의 ‘힘’을 따로 상상할 수 없다. 인력이든 척력이든 이런 힘들은 현상이고 작용이며 파생물이며, 이 힘들을 품기도 하고 발산하기도 하는 어떤 것Etwas을 전제한다. 

 

          [2] 힘에의 의지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힘에의 의지 : 힘의 발생원리 > 니체는 어떤 것Etwas을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라 부른다. 힘의 발산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뤄진다. 물리학자들이 측정하는 ‘힘’은 어떤 내적 사건의 징후이다. 니체는 힘으로 표상되는 이 ‘내적 사건’을 힘의 발생원리라 부르며, ‘힘에의 의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힘들은 ‘힘에의 의지’를 나타내는 기호이자 증상이고 징후이다.
 

힘에의 의지 : 충동, 의지, 욕망, 정서 > ① (인간의 유비) 니체가 물리적 현상에까지 ‘의지’라는 말을 붙인 것은, 니체 스스로 말했듯이 ‘인간의 유비’이다. 따라서 ‘의지’ 개념을 인간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인간적 정신작용이 사물에게도 일어난다고 받아들이면 안된다. 인간의 다양한 인식ㆍ활동을 인간 내면의 사건(충동이나 의지라고 부르는 사건)의 표현으로 볼 수 있듯이, 물리적 세계의 힘들 관계에서도 힘 내부에서 일어나고 힘으로 발산되는 ‘사건’을 가리키기 위해 비유적으로 ‘의지’나 ‘충동’이란 말로 쓴 것이다. ② (내면의 사건) ‘힘에의 의지’는 힘들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 힘 바깥에서 힘들을 규율하는 독자적 실체가 아니다. 충동, 의지, 욕망, 정서 등은 모두 ‘힘에의 의지’의 다른 이름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 내면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리킨다. 무언가를 먹고 싶든, 누군가를 사랑하든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다. 

 

3장 악순환인 신 - 05. 영원히 돌아오고 영원히 태어나다 

 

          [1] 신의 죽음 – 디오니소스 vs 십자가에 매달린 자          
 

‘십자가에 매달린 신’의 역설 > 니체는 ‘십자가에 매달린 신’에 역설적 신비가 있으며, 이는 신의 죽음이 갖는 다른 가능성이라고 한다. ‘신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기독교 감정의 최고형태이지만, 역설적으로 심판의 죽음이고 죄의 소멸을 의미한다. ‘신의 죽음’과 더불어 우리는 도덕적 속박의 저편ㆍ선악의 저편으로 갈수 있지 않은가. ‘신의 죽음’은 ‘영원회귀’와 연결되는데, 두 개념 모두 ‘세계의 무구함’에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즉 신의 죽음과 영원회귀는 모두 세계를 심판할 심판자와 법정이 사라졌다는 것, 세계는 아무런 목적을 갖지 않는 무구한 것이라는 복음을 전한다. 
 

디오니소스 vs 십자가에 매달린 자 :: 2가지 신의 죽음 > ‘십자가에 매달린 자’는 인류 전체를 죄의식에 빠뜨린 전율과 공포의 사건인 반면, ‘디오니소스’의 죽음은 삶과 세계의 무구함을 긍정하는 사건이다. 디오니소스에게서 삶 자체가-삶의 영원한 풍요로움과 회귀가 고통ㆍ파괴ㆍ절멸을 향한 의지의 조건이 된다. 십자가에 매달린 자에서는 고통이-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린 자가 삶에 대한 단죄형식으로 간주된다. 
 

디오니소스 vs 십자가에 매달린 자 :: 고통과 죽음에 대한 퍼스펙티브 > 디오니소스와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결정적 차이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퍼스펙티브에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자의 고통과 죽음은 죄의식을 심어주고, 그의 부활은 죄에 대한 심판을 수반한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의 고통과 죽음은 세계와 삶의 무구함을 긍정하는 단련ㆍ파괴이고, 그의 부활은 무구한 세계와 삶에 대한 영원한 약속이다. “비극적 인간(디오니소스적 인간)은 가장 쓴 고통도 긍정하는데, 그는 충분히 강하고 충만하며 신격화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은 가장 행복한 운명도 부정하는데, 그는 삶 때문에 고통받을 만큼 약하다. 십자가에 매달린 신은 삶에 대한 저주이며, 그의 죽음은 삶으로부터 구원받으리라는 표시이다. 반면 토막으로 잘린 디오니소스는 삶에 대한 약속이며, 영원히 다시 태어나고 파괴로부터 되돌아온다. 

 

          [2]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 문제설정 > ①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동일한 것이 영원히 되돌아온다고? 과거에 존재했던 그대로, 현재가 존재하는 그대로? 그렇다. 우리는 이 삶과 세계를 ‘존재하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삶과 세계의 영원한 돌아옴, 영원한 ‘다시 한번’을 의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영원한 악순한-영원회귀를 의욕하는가?  ② (악령의 ‘영원회귀’) 󰡔즐거운 지식󰡕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무수히 반복해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ㆍ모든 쾌락ㆍ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 가능성 전체의 돌아옴 > ① (가능성들 전체) 지금의 나에게 현재화된 정체성만이 아니라, 현재화되지 않은 모든 가능성들을 하나도 누락하지 않은 채로, ‘동일한 것’이 나에게 밀어닥치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진 현재의 정체성이란 나에게 돌아온 무한한 가능성들 중 일부만이 특정한 방식으로 실현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에서 ‘동일한 것’은 ‘가능성들 전체’이다. ② (차이생성의 원리)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동일한 텍스트에 매번 다른 해석, 다른 주석을 다는 셈이다. 모든 가능성을 긍정한다는 뜻으로서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는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낳는다. 영원회귀란 현재적 동일성, 현재적 정체성을 깨뜨리는 차이생성의 원리이다. 

 

          [3] 내가 나에게 도래한다          
 

영원회귀의 의지 :: 다른 실존에 대한 시도 > 영원회귀=악순환은 ‘나’를 탈선시킬 것이다. “악순환의 기호 아래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인간적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실존의 본성 자체이다.” 클로소프스키. 영원회귀를 의지한다는 것은 현재의 내가 꿈꾸는 미래(현재의 반영일 뿐)가 아니라,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다른 실존ㆍ다른 타자성)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회귀에는 주체의 자기극복이라는 의미에서 주체의 죽음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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