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세계를 안다는 것과 세계를 가진다는 것은 그 의미에서 아주 큰 차이가 있다고 했다. 하나가 그저 구경하는 것을 통해 안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함께 유희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여행이 인간지의 외연을 확장하는 수단일수는 있지만 그보다 먼저 고향에서, 자기 도시와 지역에서 동료들과의 교제(유희)를 통해 인간지를 얻었어야만 한다고 했다. 더욱이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는 대학이 있는 해상무역항으로 9개의 서로 다른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들며 교역하는 지역이기에 인간지를 확장하는데 적합한 곳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칸트가 9개의 서로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대학에서,무역항에서 나눈 교제는 그들과 함께 나눈 유희였을까 아니면 여전히 구경한 거였을까. 그래서 그를 통해 세계에 대해 얻은 것은 안다는 것일까 가진다는 것일까.
즉 대학에서, 해상무역항에서 만난 사람은 자기 모국어의 고장에서,삶의 현장에서 보여주는 ‘자유로운 행위자인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이루어내는지 그리고 무엇을 이루어낼수 있으며 무엇을 이루어내야 하는지’라는 점에 대해 같은 모습이엇을까
칸트 200여년 전 쓰인 <유토피아>에 의하면 그곳 사람들은 지능이 모자란 사람들을 좋아한다.그들이 모자라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이 주는 유일한 선물을 받은거고 그점에서 그들에게도 아주 유익한 것이라는 거다. 어떤 사람이 너무 엄숙해서 지능이 모자란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고도 웃지않는다면 그는 남이 주는 유일한 선물인 즐거움 마저 느끼지 못하는 그래서 필요할 때 인자하게 돕지도 않을 사람으로 본다(,유토피아 p174 현대지성판)
이건 손-언어-지성으로 이어지는 인긴학과는 확실히 다른 어떤 계열이다. 칸트도 머리말에서 ‘소설이 허구이지만 인간학을 확장할수 있다 그것은 정도의 과장은 있어도 질은 인간의 자연본성과 합치한다’고 했다. <유토피아>가 인간본성과 합치하는 질을 보여준다면 그 질은, 대상이기도 하고 정초를 놓는 주체이기도 한게 인간이지만 다만 “인식”을 통해서인 것과는 아주 다른 무엇이라고 느껴진다. 칸트와 토마스모어의 차이는 어디에서 생겨났고 그 차이의 의미는 무엇일까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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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정말 흥미롭네요. 토마스 모어가 그린 이상적 공동체와 칸트가 그린 이상적 공동체는 어떻게 다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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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
-사고하는 존재자로서 내가 나의 현존 외에 또한 세계라고 불리는 나와 공동의 관계에 있는 다른 존재자들 전체의 현존을 포괄하여 “사유할지” 말지는 형이상학적 물음이다p122
-인간학에 속하는 물음은 자신을 순전히 한 사람의 세계시민으로 보고 “처신할지” 전체 세계를 자기 안에 포괄하는 자로 보고 “처신할지”이고 이것으로 이기주의와 복수주의(다수주의)가 나뉜다p122
-그래서 인간학에서 말하는 논리적 이기주의자는 타인의 지성이라는 시금석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처신”을 하는 자이고 이것과 대립되는 복수주의자의 처신은 공론장에 내놓는 것일테다.
-문제는 그 이후의 과정이 어떤건가이다. 왜냐하면 칸트도 철학적 사유는 법률가와는 달리 타인의 판단을 근거로 삼아 자기확증을 해서는 안된다고p120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론장에 내놓은 각기의 의견은 어떤 과정을 거치게되는걸까. 도대체 공론장은 어떤일이 일어나길래 타인의 판단을 근거삼지 않으면서 옳음을 검사하고 오류에 내맡겨지는 것으로부터 보호되는걸까
-칸트에게서 마음의 불명료함이란
우리 마음에 아주 소수의 위치들만에 빛이 비춰지고 있음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경탄하게한다.p131
이 뜻이 뭘지 애를 먹었는데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빛이 비춰지고있는 소수의 위치) 이상으로 광할한 불명료한 마음을 갖고 있다.p132 그런데 판단은 인위적으로 세운 원리들에 애써 의지하는 것 보다는 이 광할한 마음의 어둠(불명료한 마음) 속에 있는 판단의 규정근거들에 맡기는게 덜 불확실하다.p138 다시 말하면 칸트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광할한 마음의 불명료함을 어떤 조건에서는 인식능력으로 작동하는 광할한 인식능력의 자원으로 보는게 아닐까. 인간에 대한 신뢰? 낙관?을 느끼게 하는데 물론 이런 확장은 경험적-실천적 견지에서 그렇다(물론 bon sens 내에서).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공론장의 역할, 프로세스가 이런걸까 마음의 어둠속에 있는 판단의 규정근거들을 깨워내는 것
쪽글 내용이 지금까지 중 저에겐 가장 와닿습니다. 특히 칸트의 '쾨히니스베르크'의 특성에 대한 언급을 언급해주신 것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