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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생각한다 – 인간적인 것 너머의 풍요의 윤리

 

한 달 전 지인이 아마존의 항공사진을 SNS에 게재했다. 지인의 자녀가 아마존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은 낱 설었을 뿐 아니라 불길한 마음마저 일게 했다. 우리는 아마존이라면 풍요로운 숲과 강 그리고 다양한 생명체들을 이미지화한다. 하지만 그 사진에는 숲은 보이지 않고 경작지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사진에서 나는 2019년 여름 아마존 밀림에서의 화재를 떠올렸다. 2019년 8월까지 발생한 화재는 4만 건이 넘었고 어떤 날은 하루 만에 5헥타르의 숲이 불태워지기도 했다. 화재의 발생의 직접적 원인은 목축업자였다. 그들이 목초지를 개발하기 위해 방화를 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거기에 기후 위기로 인한 높은 온도가 발화의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아마존 숲이 지구에서 발생하는 산소의 2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소멸하는 숲에서 기후위기를 읽어낸다. 하지만 정작 아마존 숲에서 실제로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아마존은 객관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숲이 아니다. 그 숲의 문법으로 살아가는 인디언, 물고기, 푸마들과 연결되어 있다. 아마존의 샤만인 이사카 후니 쿠인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이 숲을 사라지게 만들면 내가 가진 풍요로운 지식은 그것으로 끝이 난다.” 이사카 후니 쿠인(Isaka Huni Kuin)이 말하는 풍요로운 지식이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인간에 한정된 지식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숲에 모여 사는 수많은 부류들의 지식일 것이다. 그를 인류학자인 에두아르도 콘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이라고 했다.

콘의 책 「숲은 생각한다」는 에콰도르 아빌라 지역의 루나족들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인간 루나족의 민속지일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존에는 푸마, 멧돼지, 개, 죽은 자들, 영들이 숲의 퍼스펙티브로 살아간다. 콘은 숲의 상위 포식자인 푸마, 죽은 자들, 심지어는 과거의 학살자들이 우리 삶에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풍요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콘은 숲의 퍼스펙티브에서 풍요로움은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 뭇 생명들과 어떤 연결을 구성해내는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 너머의 생명의 논리가 우리를 관통하여 작동되듯이 인간적인 것 너머에 존재하는 다양한 부류의 생명들을 주지하는 법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윤리적 실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콘이 제기하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는 인류학’이란 약육강식의 논리를 ‘자기들의 생태학’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그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더구나 루나족을 학살하고 착취했던 자들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불과 한 것이라면 강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연명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먹고 먹히는 아마존 숲에서 약육강식을 정당화하지 않고 풍요로운 세계를 만드는 윤리학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생명은 기호과정의 산물이다.

 

아빌라 지역의 원주민들의 ‘재규어를 대처하는 법’으로부터 시작해보자. 그들은 아빌라 지역을 방문하여 사냥 캠프의 초가지붕 아래서 엎드려 누워있는 콘에게 경고했다. “ 반 듯이 누워 자! 그래야 재규어가 왔을 때 그 녀석을 마주 볼 수 있어.” (숲은 생각한다 / 11) 만일 재규어를 마주보지 못하면 먹잇감으로 여길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주볼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재규어와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어 먹잇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치 민화와도 같은 묘한 이야기는 아빌라 지역 원주민들이 들려주는 숲에서의 생존 매뉴얼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규어도 우리처럼 기호를 사용하는 존재라는 가정에서 생각해 보자. 재규어는 인간을 만나면 기호를 읽어 그가 먹잇감인지 아니면 대등한 존재인지를 파악하고 그에 맞게 대처한다고.

우리는 인간만이 기호를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상징으로만 이해하는 한에는 기호는 인간만의 배타적 전유물일 수 있다. 하지만 퍼스에 의하면 기호는 상징(simbol)만은 아니다. 음향적 이미지를 닮은 기호인 아이콘(icon), 어떤 상황이 지시하는 인덱스(index)도 기호에 해당한다. 아마존의 루나족에게는 이미지를 음향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수백개나 있다고 한다. ‘타타’ (탁탁 나무를 벨 때 나는 음향)나 ‘푸오’ (나무가 쓰러지는 이미지) 같은 단어로 소통을 한다. ‘나무를 푸오하게 할거야. 조심해!’라고 말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의성어나 의태어와 같은 것으로 그들이 소통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의성어는 소리를 흉내 내는 말일 뿐 그 것을 어떤 생명체가 발신하는 기호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호로 생각한다는 것은 상대를 기호를 발신하고 또 수신하는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 주체가 어떤 기호를 발신하고 있는지에 맞추어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하고, 어떤 기호를 발신하느냐에 따라 상대의 행동이 다르게 이끌어 내지게 되는 것이다. 가령 나는 아침마다 새소리를 듣지만 그 소리가 어떤 기호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새 소리가 아름답다고 여길 뿐 그 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는다.

 

기호는 효과를 가지며, 정확히 이것이 해석체가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해석체는 “기호가 생산하는 고유한 의미 생성 효과”이다. 쓰러지는 야자나무에 대한 반응으로 촉발된 저 원숭이의 점프는 위험의 선행기호에 대한 해석체에 해당한다. 해석체는 모든 기호 과정의 특징인 구성요소를 가시화할 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과정들까지도 가시화 한다. 기호작용은 활력성과 물질성 이상의 어떤 것이지만, 모든 기호 과정은 결국 세계 속에서 ‘일을 한다“ do thing 이것이야말로 기호작용을 살아있게 만드는 중요한 부분이다. 《 숲은 생각한다 / 에두아르도 콘 / 사월의 책 / 66 ~ 67 》

 

인간은 사유하며 자기세계를 구성해 간다. 사유를 가능케 하는 건 언어, 즉 기호이다. 그 기호가 의미 생산을 작동시킨다.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 – 기호는 위험신호를 지시하게 되고 뛰는 – 행동을 유발하게 된다. 기호가 무엇을 지시하는지 읽어내고 그 지시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아빌라 원주민들은 원숭이들이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위험신호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푸오’하는 기호에 원숭이들은 그 나무에서 도망치는 행동을 예견하는 것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원숭이도 기호로부터 자기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퍼스를 따라 아빌라 원주민들이 자기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생명 자체가 기호작용과 동의어라는데 까지 이르게 된다.

데스콜라는 근대사회들의 탐욕을 자연주의의 부산물로 본다. 근대사회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공통점은 신체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내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요컨대 인간만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 데스콜라의 고찰에 의하면 어떤 사회에서나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불연속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 불연속을 영혼 있고 없음으로 이항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서구 근대사회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퍼스펙티브에 의하여 인간이 비인간을 착취하고 자신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상징적인 것만이 기호라는 생각은 상징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인간주의 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의 이항 대립적인 사고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콘은 퍼스의 기호론을 가져와 기호를 읽고 발신하는 방식으로부터 아마존 원주민들의 퍼스펙티브를 간파해 낸다.

그런 의미에서 콘은 퍼스의 기호론을 가져와 기호를 읽고 발신하는 방식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 아마존 원주민들은 근대인들이 타자라고 규정했던 숲의 푸마, 앵무새, 개 들 뿐 아니라 정령들 어쩌면 숲 전체가 기호를 발신하는 주체다. 여기서 질문이 바뀐다. 우리는 ‘숲에 대해 원주민은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만일 우리 자신의 사고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통해 생각하는 것으로 제한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항상 존재론을 통념적 인식론으로 애워싸는 것으로 끝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콘은 ’자기들의 생태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생명은 기호작용으로 자기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아마존 숲에서 자기중심성으로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푸마를 기호로서 자기세계를 구성하는 대등한 존재로 여길 때 생존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때 푸마도 인간을 기호로서 자기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파악하여 대등한 존재로서 대응한다. 숲의 존재들은 그렇게 서로를 자기들로서 구성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재규어와 동등한 계열의 포식자가 되어야 대상이 되어 먹히지 않고 살아가라는 말이다. 하지만 숲의 포식자는 언제나 피식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적 너머의 풍요의 윤리

 

루나족은 오랫동안 백인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 긴 피지배의 역사 속에서 루나족은 노예사냥의 사냥감이 되기도 백인의 사냥개가 되기도 하였다. 또 많은 이들이 백인들에 의하여 학살당하기도 하였다. 유럽인과 그 뒤를 이어 에콰도르인, 콜롬비아인과 페루 국민까지. 그들은 노골적으로 지배자의 위치를 표명하고 백인이 백인으로서 이 위치를 정당화하는 세계관을 의도적으로 주입 당해온 세계를 살았고 현재도 그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긴 역사의 과정에서 물리력으로는 도저히 해방될 수 없는 상황을 살아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저항만이 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그 긴 지배의 역사에서 필요한 건 그 상황에서 ‘어떻게 주인으로 살 수 있을까?’의 문제일지 모른다.

버틀러의 말처럼, 「권력은 피지배자들에게는 낯익은 고통의 형식이지만 만일 권력을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자 주체의 존재 조건 그 자체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때 권력이란 단순히 우리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를 강하게 해보면 권력이란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의존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숲은 생각한다 / 328 ~ 329) 그러한 사유는 권력과의 다른 관계를 만들 수 있는 틈이 열 수 있다. 요컨대 권력 의존의 조건하에 있음을 강하게 인식할 때 단순히 겨우 생존하지 않고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는 케쵸아어에서 주인 또는 주재자를 뜻한다. 동시에 백인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백인을 아무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그들이 생존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과 백인을 동일한 단어로 썼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의 루나족적 용법은 백인을 주인으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들을 표상한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 루나 사람들이 노예로서 연명하는 길로 귀결된다면 백인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 말로 살아남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조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 것은 피지배의 상황에서 지배자들을 숲의 윤리에 배치시키도록 하는 것이고 풍요로움을 숲의 경제학에 포섭되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공존을 내세울지라도 죽이기를 피할 수 없다. 이는 아마존 숲에서도 동일하다. 대상을 발견하고 그를 죽여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 포식자가 되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숲에서의 포식에는 약육강식의 논리와는 다른 윤리가 필요하다. 약육강식에는 먹이는 먹이일 뿐이다. 강자가 약자를 먹어치움으로써 살 수 있다는 논리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강한 것들이 약한 것들을 먹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만이 존재한다면 어떤 종들은 소멸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래서 ‘포식의 윤리’에는 타자와 죽이고 죽임당하는 상황에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그 때 타자를 주인으로서 인식함으로써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는 법칙을 적용한다.

 

아빌라에서 고기의 공유는 사회적 유대를 실현하는 데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공유되고 소비되는 고기는 한때 사람이기도 했다. 동물의 사람됨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항상 사냥과 전쟁을 혼동하고 공식(共食)과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혼돈하는 위험에 노출된다. 이 자기들의 생태학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을 알아차리고 또 그것들과 관계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다양한 존재들을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을 음식으로 먹을 때, 그들은 결국 대상, 즉 죽은 고기여야 한다.

《 숲은 생각한다 / 사월의 책 / 207 》

 

헤러웨이의 말처럼 ‘죽이는 것과 관계를 죽이는 것’은 같지 않다. 이 삶을 위해 저 삶을 죽이는 것이지 그 생물종이 죽어 마땅하거나 죽어도 마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요컨대 숲에서는 죽어도 되는 것을 만들지 않는다. 숲에서 먹고 먹히는 관계는 공존의 관계이다. 오히려 먹고 먹히는 존재로 살기 때문에 숲에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아마존 숲 소멸과 윤리의 구성

 

아마존 숲에서 발생한 화재와 숲 소멸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아마존 우림을 목초지로 바꾸는 과정은 목축업자에 의한 숲의 불법 점유로부터 시작한다. 그 의도적인 불법 점유와 벌목과정을 거쳐 원주민을 내쫓는다. 이후 불을 지르고 목초를 심어 개간한 후 가축을 들여오게 된다. 불은 숲과 함께 여러 식물들 아르마딜로, 거북이, 원숭이들도 소멸시키고 있다.

브라질 지리통계 연구소(IBGE)에 따르면, 아마조나스주의 가장 큰 소 목장 두 곳에서 51만 마리의 소가 길러지고 있다고 한다. 그 소들은 인근에 세워진 육류 가공공장으로 보내진다. 소의 목축은 아마존 지역에서 이뤄지는 삼림벌채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사육되는 2억마리의 소 중 약 40%가 아마존에서 사육되고 있다. 아마존 지역의 목축산업은 자본력을 가진 소유주에 의하여 유지되고 정치적 영향력을 통하여 불법과 합법을 넘나들며 아마존 숲을 불태우고 축산과 가공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선거자금을 제공하여 정치권을 뒷배로 만드는 카르텔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생산 가공한 소고기의 상당수는 중국, 일본, 미국 등으로 팔려나간다. 아마존 인근의 소비되는 소고기는 일부에 불과하다. 그 소들은 삼림 벌채에 자본을 공급하는 외국인들의 몫으로 분배되고 맥도날드나 버거킹의 패티로 때로는 소고기로 소비된다. 유럽과 미국의 기업들은 불법 점유와 축산산업을 위하여 돈을 대고 그 결과 얻어진 육류를 수입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생산된 소고기와 패티를 소비한다.

아마존 숲의 화재는 우리들에게 ‘기후 위기 시대에 어떻게 윤리를 구성할 것인가?’를 묻는다. 아마존을 불태운 것은 축산업자와 그와 연계된 자본과 정치세력만이 아니다. 숲을 대상화하여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도 꼬인 실타래처럼 그 산업과 자본에 내밀하게 얽혀있다. 숲을 산소공급처 쯤으로 취급하는 우리들의 퍼스펙티브와도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가 기후위기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은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지구 전체가 복잡한 상호관계로 발전함으로써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게 촘촘하게 세계화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존 상류 아빌라 지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새로운 부류의 ‘우리’가 될 수 있는 가의 문제였다. 숲의 퍼스펙티브로 풍요로운 삶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것들 뿐 아니라 현재는 부재하는 것들과도 주인으로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미래의 부재하는 자이고 숲의 주재자의 영역에서 살아갈 자이기도 하다. 숲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미래의 자기가 지금의 일상을 되돌아보면서 거기에 희망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기를 요구한다. 이 연속성과 가능성의 영묘한 영역은 종을 횡단하는 일군의 관계들의 창발적인 산물이며 윤리 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미래를 가능하게 만드는 수많은 죽은 자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의 삶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미래의 자기로서 윤리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종과 그 외종을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관점에서 아마존을 불태우는 소멸의 논리가 성립한다. 그리고 그 ‘인간종’에는 자본과 산업에 유용하지 않은 종들은 배제된다. 그러한 이항대립적 논리가 아마존을 불태우고 우리 삶 전체를 불태우고 있다. 아마존 숲에는 종을 횡단하는 자기들의 ‘포식의 윤리’가 살아 숨 쉰다. 아마존을 불태우는 건 유용한 숲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숲의 종을 횡단하는 자기들의 ‘포식의 윤리’를 유용성의 논리로 소멸시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윤리는 유용성을 떠날 수 있는 관점을 갖는 것이다. 루나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부재하게 된 자, 부재하게 될 자들의 퍼스펙티브가 풍요의 윤리를 구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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