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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에세이 입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

기후위기의 시대에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대안적 활동들을 하고는 있었다. 그런데 전 지구적인 파괴적 사태를 근대적 사유의 틀 밖에서 바라보지는 못한 것 같다. 개체 중심, 종(species) 중심, 그리고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사유가 필요하다. 두 권의 책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박성관)”과 “종과 종이 만날 때(해러웨이)”를 통해서 근대적 사유를 넘어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을 진화의 결과 도출된 하나의 범주로 여긴다. 창조론자들처럼 보편성을 담고 있는 일종의 기원의 이미지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축이 된 동물들에 대해서는, 가축화되기 이전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면 본래의 종의 모습으로 회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에는 기원을 신성시하는 창조론적 개념은 물론이고, 인간에 의해 가축이 되어버린 수동적 존재로서 동물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은 생물이 주변 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해 왔다는 당대의 주장을 반박했다. 당시 창조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진화론을 옹호하는 학자들도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했기 때문에 물리적 조건의 유사성에 따라 생물들이 분포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는 수동적인 존재라는 관점이 들어있다. 동시에 당시 학자들은 반대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생물은 능동적이고 환경은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능동성은 낯선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역량 정도를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한 걸은 더 나아가면 놀라운 주장이 등장한다.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들과 달리 인간은 물리적 조건을 개척하고 변경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능동과 수동의 이런 방식의 논의가 결국에는 인간중심주의로 귀결되어 버린다니 놀랍다.

다윈은 생물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건 진화의 과정에서 산출된 결과라고 말한다. 앞선 주장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곤충은 특정한 꽃에 매혹되어 그 꽃을 선택한다. 이 과정이 충매화라는 새로운 구조와 형태를 가진 꽃을 만들어냈고, 동시에 곤충의 구조와 형태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꽃과 곤충 중에서 무엇이 능동이고 무엇이 수동일까. 가장 능동적인 것은 가장 강하게 매혹된다는 면에서 가장 수동적이다. 능동과 수동은 동전의 양면 같다. 개체라는 구분선을 작동시키는 한 능동과 수동의 관계를 풍부하고 역동적으로 포착하기는 어렵다.

인간중심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생명중심주의는 생물을 유기적인 것, 환경을 무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꽃와 곤충의 관계에서 무엇이 유기적이고 무엇이 무기적일까. 땅은 인간이 경작하는 무기적인 환경일까? 땅은 지렁이와 같은 수많은 생명체, 그리고 무기적 존재들이 상호작용하고 있는 어떤 상태다. 여기에는 인간의 쟁기질도 하나의 활동으로 포함된다. 우리가 환경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지 생물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아니다. 생물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개비가 붙어사는 돌, 지구와 46억년을 함께 살아온 돌도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저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 왔을 리가 없다.

 

2.

인간이 동물을 가축으로 사육하게 된 것도 야생동물과 인간의 접속이 낳은 결과이다. 우리는 인간과 동물이 맺어온 과거의 다양한 다른 방식들을 잘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 이유는 동물들을 가차없이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폭력 때문에 동물의 가축화 자체를 부당한 일로 낙인찍어 버리기 때문이다. 폭주하는 자본주의는 파괴적인 공장식 축산을 계속 늘려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프랜차이즈를 비롯한 값싼 축산업 제품을 구매하면서 여기에 얽혀들어 살아가고 있다. 이 상황을 비판하면서 동물은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환경 파괴를 문제 삼으면서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여 비인간이나 무생물을 수동적인 피해자로만 규정하는 것. 이런 관점에는 이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라고 하는 인간중심주의가 깔려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동물뿐만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존재들과 함께였다.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생명체 자체가 수많은 존재들의 상호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몸 속의 수많은 박테리아, 세포들, 그리고 우리 몸을 드나드는 물, 햇빛 등의 역동적 관계가 인간이라는 생명체 그 자체인 것이다.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는 근대적 사유는 늘 개체에서 출발한다. 개체에서 출발하면 인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구성하는 수많은 존재들의 존재 이유를 이익이니 경쟁이니 하는 목적론적 프레임으로 보게 된다. 목적론에서 벗어나는 다양하고 풍부한 역동적 상호관계를 보지 못한다. 또한 개체 중심적 사유는 상대방을 대상화시킨다. 주체와 대상의 구도에서 대상화된 상대방은 그저 타자일 뿐이다. 이런 구분 선 아래에서 행해질 수 있는 최대한의 윤리는 레비나스가 말한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에서 출발하는 한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성찰은 배려나 연민, 협동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다.

지금의 시대에 다른 존재들을 대상화하고 이용하는 인간의 권력은 압도적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득권층의 권력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현실에서 명백한 피해자들을 한없는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지금의 권력관계를 뒤엎는 이상적인 혁명만을 외치는 것은 인간중심주의라는 근대적 사유를 넘어서지 못하는 관점일 것이다. 착취당하는 동물을 다시 야생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에도 야생의 자연과 인간 문화라는 구분선이 작동하듯이 말이다.

많은 존재들이 착취당하는 지금의 상황 때문에, 우리는 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 언제나 존재하는 권력의 비대칭성을 부정하게 되는 것 같다. 나 또한 평등한 공동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환상은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라는 현실을 부정하며 근본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되기 쉽다. 거대한 이상향, 혁명의 주장은 지금 여기서 조금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구체적인 삶의 윤리를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의 죽음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 다른 존재의 죽음이 없으면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우리에게는 지금 이런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식량이 되어주는 존재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실험실에서 죽어가는 동물들과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개체중심,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윤리적 질문일 것이다.

 

3.

진화론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린 마굴리스는 진화란 경미한 변이의 점진적 축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물들 간에 벌어지는 섭취, 소화불량, 감염, 약탈 등 우발적인 사건들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관계가 전혀 다른 관계로 바뀌는 사건이 자연계에서는 그리 드문 현상만은 아니라고 한다. 생물들이 자신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사태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죽는 것에 대한 다른 사유를 제공해 줄 수 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더 풍요로운 윤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성찰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인간 종들보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이나 무생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 이런 함께 살아가기는 협동과는 다르다. 그리고 단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아마존의 원주민들은 비인간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며 오랜 동안 공동의 세계를 구성해왔다. 이 공동의 세계 또한 아름답고 조화로운 모습만은 아니다. 우리가 아마존 원주민처럼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그리고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더 다양한 관계맺기가 가능할 것이다.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들이 비인간 존재들을 일방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생각 아래에서 대안을 내놓는다. 비인간 존재들을 희생자의 위치에 놓고 연민에 머무르며 마치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가능한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죽이지 않고 먹을 방법은 없다. 평화나 평등을 가장할 수도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비인간 존재들도 인간을 변화시켜 왔고 지금도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인간을 죽일 수도 있다. 인간중심주의의 사유에 길들여진 우리는 비인간 존재들을 능동적인 위치에 놓을 때조차도 그들이 인간과 유사하게 인식하거나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 옛날 인간의 삶에는 동물들이 늘 함께였다. 농경생활도 마찬가지다. 해러웨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나기 전에는 파트너가 존재할 리 없다. 모든 종은 살아있든 죽었든 관계없이 주체와 대상을 형성하는 만남의 춤을 춘 결과 생기는 존재다. 인간은 동물을 도구로 이용해 가축으로 만들 수 있고, 동물은 인간을 도구로 이용할 수 없는가?’

자연과 문화라는 구분 아래에서 개는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구도 아래에서 인간과 개는 오랜 기간 동안 비대칭적인 권력 아래에서 변화무쌍한 관계들을 맺어온 복수종이다. 서로 이용하고 일하고 사랑하고 노는 관계, 때로는 상대를 죽이기도 하는 관계로 살아온 존재들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늘 복수로 존재하는 복수종이며, 이러한 복수종의 삶은 비대칭적인 권력 아래에서 서로 이용하면서 돌보고 기르는 관계이다. 그래서 동시에 진실이면서 조화 불가능한 그런 종류의 아픔이 있는 관계이다. 서로 묻고 응답하면서 동시에 함께 구성되는 자들이다. 물론 응답할 수 있는 능력, 책임질 수 있는 능력 또한 대칭적일 수 없다.

해러웨이는 ‘그대, 죽이지 말지어다.’를 인간중심주의, 인간예외주의의 명령이라고 말한다. 대신 ‘그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지어다.’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인다는 행위를 외면하여 자본주의의 폭력을 옹호해 버리거나, 죽이기를 무구하게 만들어 냉소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최종의 해결책이나 혁명이 존재할 수 없는 이 시기에 해러웨이는 복수종의 정치를 말한다. 그것은 불평등한 관계, 서로의 음식이 되어주고 서로 생계를 기대는 관계에서 더 나은 모습으로 죽이기를 마주하는 것에 대한 성찰이다. 지금의 시대에 함께 살아가기의 윤리는 여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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