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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살아있는 미래 (그리고 죽은 자의 가늠할 수 없는 무게)

 

강우근

 

오스왈도는 지난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꺼냈다. “로레토에 사는 친구를 찾아갔어.” “그때 갑자기 살벌한 분위기의 경찰이 나타났지. 셔츠가 온통 잘린 머리털로 뒤덮여 있었어.” 놀란 오스왈도는 잠에서 깼다.

오스왈도가 겪은 해석의 딜레마는 루나족의 삶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양가성을 암시한다. 즉 사람들은 자신을 경찰관 등의 유력한 “백인”과 흡사한 힘센 포식자로 볼 수도 있지만, 또 자신을 그 탐욕스러운 “백인”의 가련한 먹잇감으로 느끼기도 한다. 오스왈도는 경찰관이었을까, 아니면 먹잇감이었을까? 그날의 일은 오스왈도가 처한 위치의 복잡성을 말해준다.

이 섬뜩한 병치는 존재하는 것과 변화하는 것을 둘러싼 오스왈도의 현재진행 중인 고군분투에 관해서 중요한 무언가를 드러낸다. 그를 그로 만드는 것은 아빌라 주변 숲에서 그가 만나는 수많은 부류의 타자들과의 관계다. 오스왈도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이 수많은 부류의 존재들과 그가 어떻게 관계하는가라는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오스왈도의 생존은 또한 이 영적인 영역이 그 배치 속에 보존하고 있는 것이자 살아있는 미래를 가능케 해주는 수많은 부류의 죽은 자들과 수많은 부류의 죽음들에도 의존한다. 즉 우리는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이 수많은 타자들에게 영속적으로 우리 자신을 증여하고 있으며 또 빚지고 있다.

연속성, 성장, 나아가 “번영”에 관한 저 숲의 영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임으로써, 살아있는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더 좋은 방법을 “우리”가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내는 또 다른 길이 우리에게 열릴 것이다.

 

언제나 이미 루나

<짐승을 인간으로, 그리고 인간을 기독교도로 만들기> 벽화는 이 지역의 선교사와 개척민 모두를 선도한 원시주의의 서사를 웅변한다. 즉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에 아마존의 선주민들은 그저 벌거벗은 “야생의 야만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기와 초기 공화국 시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길들이기”과정을 통해 이 야생의 야만인들 중 문명화되고 옷을 입고 단혼을 하고 소금을 먹고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는 루나족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이 특질들을 아마존의 거친 기질을 “길들이는” 점진적 과정의 결과로 보았다. 반면 아빌라 사람들에게 단혼과 소금 섭취와 같이 “문명화된” 속성은 루나족이 지닌 태곳적 인간성의 한 측면이다. 루나족은 언제나 이미 문명인이었다.

옛날 대홍수가 온 대지를 휩쓸었을 때 카누에 탔던 많은 루나족들은 하류로 휩쓸려 떠내려갔고 오늘날의 우아오라니족의 땅에 당도했다. 루나족들이 입은 옷을 결국 찢겨져 헤지고 소금도 바닥나고 말았다. 그들은 이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오늘날의 아우카족이 되었다. 즉 아우카라족은 루나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진보하기 이전 상태의 원초적인 야만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타락한 루나족이다. 그들 또한 한때는 소금을 먹고 옷을 입었던 평화적인 기독교 신자였다.

아빌라 루나족이 보기에 이 벽화는 어딘가로 향하는 진보를 묘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해서 진행되는 끝없는 생성 속에서도 언제나 이미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어떤 핵심적인 인물상-루나족의 자기-을 둘러싸고 계속해서 순회되며 변주되는 목적 없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끊임없는 변화하는 자기, 나아가 그의 과거 및 잠재적인 미래의 예시들과도 연속하는 자기는 자기들의 생태학 속에서 생명과 번영에 관한 중요한 무언가를 암시한다.

 

이름

우리는 루나와 같은 용어를 종족명, 즉 다른 자에게 이름 붙이는 데 사용하는 고유명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산호세 루나는 산호세 데 파야미노 출신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산호세 데 파야미노 사람들은 아빌라의 이웃들을 “아빌라 루나”라고 부른다. 타자에게 이름 붙이기는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빌라 사람들은 그들 자신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루나로 부르지 않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케추아어에서 루나는 그저 사람을 뜻한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종족명으로서, 즉 이름표로서 채택된 실질명사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나’-로서 루나, ‘우리’로서 루라는 사물들의 인과적인 존재 방식 속에서 과거로부터 영향 받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루나는 역사의 대상도 아니며 그 산물도 아니다. 루나는 이 인과적인 의미의 역사로부터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그들이 누구인지는 과거와의 어떤 친밀한 관계의 결과다.

이 관계는 그뿐만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부재를 포함한다. 그것은 부재하는 죽은 자와의 관계다. 루나는 대벌레로 알려진 아마존의 위장벌레, 즉 자신이 아닌 모든 존재들 덕분에 나뭇가지와 분간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점차 보이지 않게 된 벌레와 닮아 있다. 여전히 비가시적으로 남아 있는 대벌레들의 잠재적인 미래의 계보는 이러한 타자들에 의해(이 구성적인 부재 덕분에_ 숨겨지고 또 그 타자들에 사로잡힌 채로 계속 이어진다.

 

주인

오스왈도가 성공한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포식자가 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그는 또한 “백인”이어야 한다. 즉 백인이 사냥꾼이라면-루나족을 먹잇감으로 삼았던 백인의 역사를 고려하면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고무 붐이 일었던 시기에 백인은 개를 앞세워 루나족의 선조를 사냥하고 노예로 부렸다-오스왈도 또한 그 자신을 하나의 ‘나’로서 볼 때 이 입장에 있어야만 한다. 그것 외의의 선택지는 대상이 되는 것뿐이다. 루나는 언제나 이미 루나이고 푸마이자 또한 “백인”이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백인이라기보다 언제나 이미 주인 즉 아무여야 한다. 아무란 스페인어로 “주재자”, “주인”, “우두머리”를 뜻하며, 그와 동시에 전통적으로 대농장의 소유주와 정부 관료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어 왔다.

아빌라에서는 지금도 아무-케추아어로는 아무-는 백인, “진정한” 주재와, 주인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는 또한 외부의 더 넓은 시야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또 다른 ‘나’의 퍼스펙티브를 표시한다. 그리고 “루나”와 “푸마”처럼 그것은 “대명사의 불완전한 대리자”로 기능한다. 즉 아무는 대명사로 기능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것과 연결된 식민지적 지배의 역사와 연합하는 모든 술어보를 일깨운다.

나의 주장은 아무가 이 “투사된 나”에 대해 중요한 어떤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연속성 속의 자기-“무한한 가능성”을 갖는 “우리”-를 지시한다. 이 연속성은 단지 선조들에게로 소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서도 투사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어떻게 “나”가 ‘나 아닌 것’-살아 있는 루나이면서 루나가 아닌 백인들, 영들, 죽은 자들-과 구성적으로 관계하는지를 포착한다.

 

미래에 있음

루나족의 자기는 언제나 이미 루나이며 푸마이고, 특히 언제나 이미 주재자, 즉 아무다. 이 자기는 그저 현재에만 위치한 것도 아니고 누적된 과거들의 단순한 산물도 아닌 영적인 영역에 항상 적어도 한 발을 걸치고 있다. 여기에는 형식의 기호적 논리가 있다. 기호는 살아있으며 모든 자기들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기호적이다. 즉 자기는 그에 앞서는 저 기호들과 연속성 속에 있으면서도 또한 참신한 기호(“해석체”라는 용어로 불릴 수 있다. 1장 참조)를 산출하는 처소다.

따라서 모든 기호작용은 미래를 창출한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기호적 자기로 있는 것은 퍼스가 “미래에 있음”이라고 부른 것을 포함한다. 즉 자기들의 영역에서는 활기 없는 세계에서와는 반대로, 현재에 영향을 주는 것은 과거만이 아니다. 미래 또한 재-현전됨으로써 현재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의 핵심이다. 미래 그리고 미래가 현재로 들어오는 방식은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주는 인과관계의 역동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추측”으로서 기호는 가능한 미래를 재-현전하며, 이러한 매개를 통해 현재가 품을 수 있는 미래를 현재에 들여온다. 현재에 대한 미래의 영향력은 고유한 방식의 실재성을 갖는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기가 세계 속에서 독특한 존재인 이유이다.

 

사후

주재자들의 영역은 미래 가능성의 영역이며 이 속에서 하나의 ‘나’, 하나의 자기로 존재한다는 것은 수많은 부류의 죽은 자들, 그들의 수많은 부류의 신체들, 그리고 그 많은 죽음들이 지닌 각각의 역사에 의해 형상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로사가 정말로 주재자로서, 또 어쩌면 성자로서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단지 이 타자들의 직접적인 효과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연속성은 오로지 그들과의 부정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연속성은 저 모든 타자들의 감지 가능한 현존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 타자들의 구성적인 부재에 의한 결과이다.

 

죽은 자의 가늠할 수 없는 무게

혼은 그냥 죽지 않는다. 혼은 살아있는 자(및 그와 결부된 죽음들)가 창출하는 가상적인 미래의 영역에서 존속할 수 있다. ‘나’가 ‘나’인 것은 형식 안에 있기 때문이다—즉 자신의 그 어떤 특정한 예시화도 초과하는 일반적인 존재 양식을 나누어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호는 지금 여기에 없는 어떤 것과의 관계를 포함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이콘을 닮음의 관점에서 생각하지만, 아이콘성은 실상 들키지 않는 것(예를 들어 우리가 첫눈에 대벌레와 나뭇가지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의 산물이다.

생명은 본질적으로 기호적이기 때문에 부재와 관련된 연합을 맺는다. 아마존의 개념을 사용하면 계보-내-유기체, 즉 ‘나’-의-연속성-내-유기체인 무엇은 그렇지 않은 것의 산물이다. 그것은 살아남지 못한 많은 부재의 계보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며, 그 계보들은 주변세계와 맞는 형식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선별된다. 어떤 의미에서 살아있는 자들은 나뭇가지와 혼동되는 대벌레와 같이 들키지 않은 것들이다. 즉 살아있는 자들은 자신이 아닌 것과의 관계 덕분에 형식 안에서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며 시간의 외부에서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초점은 지금 여기에 없는 것으로 옮겨진다. 그것은 바로 죽은 자의 가늠할 수 없는 “무게”다(나는 이 모순어법이 주장의 반직관적인 성질의 어떤 것을 포착한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너’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화라는 재귀적인 ‘나’와 자연이라는 비인격적인 ‘그것’ 사이에는 간과된 입장이 있다. 그것은 ‘너’라는 2인칭, 혹은 또 다른 주체로 다뤄지는 타자이다. ‘너’의 관점은 ‘나’의 관점의 잠재적 메아리다”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게 ‘너’는 초자연적인 영역—자연으로 환원되지 않을 뿐 아니라 문화로도 환원되지 않는 영역이라고 덧붙여두겠다—에 대하여 중요한 어떤 것을 시사한다. 형식의 위계적인 논리에 따르면, ‘너’라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적인 영역 “위에” 위치한 영역이다.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뒤이어 “초자연은 주체로서의 타자의 형식이다”라고 말한다. 나라면 이렇게 말하겠다. 초자연은 낯설면서도 친숙한 더 높은 수준의 또 다른 자기로 인해 존재할 수 있게 된 어떤 자가 불리는 장소다. 이를테면 그곳은 경찰관이 오스왈도를 불러들인 영역이다. 초자연적 장소는 또한 모든 자기들이 자신을 주인—아무—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래서 아빌라에서 아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 그것이 나르시사의 경우처럼 자기를 언급하는 것이든 인간적 혹은 비인간적 타자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든, 아무는 또 다른 주체로서 대해지는 이 또 다른 ‘나’—비록 그 음성이 희미하다 해도 그것은 미래에 있는 ‘나’의 “잠재적 메아리”다—를 정확하게 불러낸다.

 

살아있는 미래

세계는 인간적이든 그렇지 않든 자기들-내가 감히 혼이라고 부르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세계는 지금 이곳에 혹은 과거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있는 존재-잠재적인 살아있는 미래-속에도 있다. 비록 이 영역이 숲과 관계하는 인간들의 문화들과 역사들에서 창발하고 그것들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 해도, 이는 숲으로도 문화들과 역사들로도 환원될 수 없는 영역이다.

살아있는 자기들이 미래를 창출한다. 살아있는 인간적인 자기들은 훨씬 더 많은 미래를 창출한다. 주재자들의 영역은 인간적인 것 너머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인간적인 삶의 방식의 창발적인 산물이다. 그것은 사냥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듯이 무수히 많은 종들과의 상호관계, 즉 함께함의 산물이다. 주재자들의 영역은 모든 자들에게 홀려서 일반적이고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미래를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의 거처다. 어쩌면 그것은 미래의 미래다.

숲과 숲의 수많은 과거를 품은 미래의 영역에서 전개되는 이 광활하면서도 연약한 관계맺음의 영역은 너무나 많은 관계들이 죽임당하지 않는 한 가능성의 세계가 된다. 해러웨이가 지적하듯이 죽이는 것은 관계를 죽이는 것과 같지 않다. 루나족은 죽이기 때문에-이렇게 해서 이 거대한 자기들의 생태학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숲 그리고 세계에 주술을 거는 일종의 활기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저 미래를 가능하게 만드는 죽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있는 미래를 사고하는 것, 이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이 이것을 습득할 수 있는 길은 이 생각하는 숲에 모여 사는 수많은 부류의 실재하는 타자들-동물들, 죽은자들, 영들-에 세심하게 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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