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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박소영입니다.

발제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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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몫』, 1부와 2부

<내용 정리>

1. 이론적 입문

I. 일반 경제의 의미

생산과 소비의 체계로서 ‘경제’는 독자적·고립적 분과학문으로 고찰되어야 할 분야가 아니다. 경제는 인간의 행위 전체, 나아가 지구상의 ‘에너지’ 운동을 조명한다는 관점으로 살펴야 한다. 경제를 근시안적 수준에서 물질의 생산과 사용에만 국한하여 독해한다면, 우리 인간은 지구 위 물질의 광범위한 세계를 알 수 없게 된다. 인간의 경제는 지구의 에너지 작용을 전유하는 데에서 발생하며 필요한 만큼을 초과하여 수용하기에, 소모되지 못한 과잉의 에너지(부)는 소용되지 않고 버려질 수밖에 없다.

부의 질료인 에너지를 실익 없이 소비해야 한다는 사실은 합리적 경제학의 관점에서는 무능력과 실패로 규정될지 모른다. 그러나 탕진이야말로 지구의 자연 경제법이다. 인간은 지구상 생명체의 ‘일부’에 불과한데도 스스로가 “생명체의 누출(낭비)이라는 일반적 운동에 의해 활성화되는 존재”라는 것을 직시하지 못한 채, 분리된 존재로 자신을 간주하고 분리 그 자체가 발생시키는 내재적 궁핍과 수요 강박에 매여 있다(33).

인류는, 고대에는 축제라는 제의를 통해, 현대에는 서비스 산업, 혹은 3차 산업의 증대를 통해 과잉의 에너지를 해소하거나 재흡수하였다(35). 그런 소모 활동으로도 다 쓸 수 없는 과잉의 에너지가 있어서, 숱한 인간과 다량의 재화가 전쟁으로 소진되는 것이다. 비약적 속도로 성장하는 산업은 많은 열량을 쓰는 하나의 운동이었다. 덕분에 과잉 에너지 대부분을 흡수하여 전쟁 억지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성장 자체가 어떤 또 다른 증대된 과잉을 야기”하여 세계 대전이 “누출”되었다(36-7).

과잉의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것은 인간적 관점의 경제 자체를 넘어서는 일반적 원칙이다. 과잉 에너지에 과잉 생산을 덧보태는 성장의 확장, 진보의 시대가 도덕의 전복을 요구하는 셈이다. 제한 경제의 시각에서 벗어나 일반 경제의 패러다임으로 우주적 에너지의 비인간적 질서를 조명해야 한다.

II. 일반 경제의 법칙들

동물적 차원에서 과잉 상태의 에너지는 개체들의 성장, 생식을 경유한 집단의 성장, 혹은 난동—황소의 소란 같은—을 촉진한다. 식물에서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과잉의 정황이 포착되지만, 식물은 “전적으로 성장과 생식 그 자체”로 현상한다(42).

에너지를 일방적으로 끝없이 생성시키는 출처로 태양이 있다. 태양은 헤프다. 지구 표면에 에너지 과다를 일으켜온 태양은 헤픈 낭비의 모본이다. 태양은 자연의 전지구적 총량을 한정하지 않는다. 한정과 한계에 관여하는 것은 생명체—태양 에너지를 축적하면서 자신의 성장에 사용한 이후, 성장 지속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축적된 에너지를 발산하거나 낭비하는—에게 가용된 지상 공간의 규모이다(44).

이 지상 공간에서, 다양한 국지적 여건들이 생명의 압력 강도에 영향을 미치며 과잉의 에너지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 소비될지 길을 내준다. 생명 자체는 성장의 한계에 이르면 끓어올라 흘러넘치는 운동을 수행한다. 그로써 폭발하고 종결되는 상태가 유예된다.

인간 중심적 손익계산의 문법은 그와 같은 정황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이익이 되도록 유용해야 한다는 공식만으로는 넘침의 현상을 올바로 취급할 수 없다. “그 에너지를 소멸시키는 것은 명백히 그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단순한 소멸은 어떻게든 일어나야 하며,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남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유쾌하게 소멸시킬 것인가이다. 유용성보다 즐거움이 관건이다(47).

압력은 복잡다단하게 실현되는 고로 명료하게 정의하긴 힘들지만, 그 여파로 나타나는 현상들은 기술될 수 있다. 질서정연한 경기장 좌석에 안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경기 관람을 포기하기는커녕 경기장 밖 여기저기 최적의 장소라 판단되는 곳에 난립하는 일, 물과 지표면이라는 주어진 공간 외에도, 식물이 이파리를 증대시켜 대기의 영역까지 점령함으로써 햇볕을 더 많이 흡수하는 일 등이 관찰된다. 압력의 첫 번째 효과는 확장이다.

압력으로 새로운 공간이 개시되기도 하는데, 죽음과 같은 소멸로 자리가 마련되기도 한다. “생명체 안에서의 압력의 불균등은 지속적으로 죽음에 의해 마련된 자리를 성장에 제공한다.” 이때 생겨난 공간은 새로이 창출된 것이 아니다. 전체를 보는 시각 아래 삶을 보면, 생명의 역사에 “실제로 성장은 없”으며, “원칙적으로 어떤 광적인 넘침의 효과”가 만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낭비 혹은 사치가 압력의 두 번째 효과이다.

인간은 에너지를 생물 차원에서뿐 아니라 기술적 차원에서까지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 세기 동안의 인구 증가와 산업 평화가 있은 후로 발전이 일시적 한계에 봉착하게 되자,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에 기록된 부의—그리고 인류의— 최대 난교가 일어나게 되었”다(58). 인간은 노동과 기술을 통해 한계를 넘어서 확장을 도모할 수 있되, “생명의 압력이 그 운동의 태양적 기원에 딱 맞게 모두 태워버리기를 바라는 저 에너지의 과잉을 강렬하고도 사치스럽게 소진/소모하는 일에 가장 적합한 [사치/과잉의] 존재”다(59).

낭비는 “우리를 활성화하고 심지어 우리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두려움과 외면의 대상이었다(61). 개별적 존재는 자원의 부족으로 죽을까 봐 불안해한다. 그러나 “일반적 존재가 지닌 자원은 항상 과잉의 상태에 있으며 그러한 존재에게 죽음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62).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성장의 필요성이,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누출의 필요성이 갈급한 문제로 포착된다. 일반 경제적으로 보면, 미국의 부를 인도로 이전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소진/소모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가운데 전쟁이 출현한다.

소진/소모에 대한 뚜렷한 인식 없이, 파국을 막는 해법으로 생활 수준의 향상에만 천착하는 것은 진리의 부정이며 자기기만일 뿐이다. 이제 우리의 자기의식은 소모와 생산, 과잉과 안정처럼 양립할 수 없는 양극단의 양립 가능성을 통찰하며 불가능성을 사유해야 한다(66).

2. 역사적 여건들 I: 소진/소모와 사회

I. 아즈텍인들의 희생제의와 전쟁

나병환자, 포로, (여자) 노예 등을 죽이는 멕시코 고대 사회의 희생 제의는 소진/소모 행위의 일환이며, 한편으론 자연법칙 아래 전쟁의 필연적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전사적 삶을 내면화한 결과이다.

아즈텍 사회는 “어떠한 계산도 없는 순수한 폭력이 횡행하고 과시적인 전투의 형태가 성행했던 전사들의 사회”였다(87). 이는 전쟁을 세력 발전이나 제국의 진보에 발판으로 삼는 기획 사회, 즉 군사적 사회나 군국주의와는 본질상 다르다. 부의 탕진과 의미의 궤를 같이하는 인신공희 전통은 군사 조직에 내재한 기획의 이성과 대척점에 있다. 단, 아즈텍의 인신공희는 대체 희생으로서 “소진/소모의 도덕적 원리인 내적 폭력”을 타자에게 투사하며 경감시키는 역할도 했다(88). 그 결과, 완화/전환의 효과를 창출했다. 더욱이, 그 같은 폭력의 운동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하나의 경제로 통합”되었다(89).

상술한 완화/전환에서 감지할 수 있는바, “희생제의는 노예적 사용이 속되게 만들어 타락시킨 것을 다시 성스러운 세계로 돌려놓는다.”(90) 한 인간 주체가 자신의 소용에 따라 사물화된 대상—다른 동물이나 식물, 혹은 소유물이 된 노예—을 소진해버림으로써, 이제껏 자기 자신에게 정립되어 오던 주체성의 강권(強權)을 해체하고, 주체와 객체의 단절 상태를 끊어내는 것이다. 그간 분리의 일로를 걷던 관계는 “희생시키는 자가 희생제물과 함께하게 되는 내재적 참여” 관계로 회복된다(91). 사물을 인간 중심적 사용가치에 붙박거나 환원하는 경향, 인간마저 사물로 전락하게 되는 사회적 삶의 면면, 피조물로서의 원초적 내재성을 잃어가는 정황, 미래의 결과물—혹은 성과—만을 초점화하는 가운데 현재 순간의 ‘진리’를 못 보는 합리성의 인위는 세계의 질서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자연의 빈곤을 야기한다. 사물화된 동식물을 내재적 세계의 질서로 되돌려 놓고 자연의 빈곤을 떨쳐내어 신성한 질서를 수복하는 행위는 성스러운 소통의 과정이며, 궁극적으론, 인간을 내적 자유의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92-4).

“내재적 세계는 실제적 세계에 대립되는데, 그것은 마치 무절제가 절제에, 광기가 이성에, 도취의 정신이 명석한 의식에 대립되는 것과도 같다.”(95) 절제-이성-명석판명은 자기동일적으로 고립된 주체의 답보를 드러낼 뿐이다. 움직이는 밤에 비유될만한 이 주체의 세계는 “이성의 잠 속에서 괴물들을 낳는다.” “‘실제적’ 질서에 전혀 종속되지 않고 오직 현재에만 관계하는 자유로운 ‘주체’에 대한 어떤 완화된 관념을 낳는 것은 광기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96).

아직 오지 않은 알 수 없는 미래를 염려하여 지금 무엇이든 남기고자 아등바등하면서 우리는 오늘을 불안에 저당 잡혀버린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가정에 기대는 대신, “‘지금 그러한 것’[현재]”에 충분히 몰입한다면, 남기고 예비하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무용하면서도 즐거운 소진/소모가 가능해진다(96). “강렬하게 소진/소모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고 모든 것이 열려 있으며 모든 것이 무한하다.”(97) 희생제의와 같은 소진/소모의 의식은 공동 작업 체계 구성원들의 내재성을 재발견하게 하고, 폭력을 맞닥뜨림으로써 폭력을 제한하고 공동체를 보호하기까지 했다(97-8).

희생제의의 과정에서, 희생시키는 자와 “폭력적인 소진/소모가 예정된 저주받은 몫”으로서의 희생제물 사이 위상은 역전된다(99). 희생제물은 축제를 즐기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잃고 실제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존재가 되지만, 희생시키는 자는 제의 이후에도 남는 자로서 무거운 미래를 계속 짊어지게 된다(100). 실제로 제물이었던 사람들이 제의를 자발적으로 즐겼고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엄격함의 부재가 제의 그 자체의 의미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경계들을 넘어서는 어떤 과잉만이 유일하게 가치가 있는 것이었고 그러한 과잉의 소진/소모야말로 신들에게 합당한 것으로 여겨졌다.”(101)

II. 경쟁적 증여: 포틀래치

인신공희는 헤픈 낭비의 극단적 한 예이다. 고대 멕시코에서 낭비는 일반 경제 내면화 능력을 과시하는 기회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주권자는 빈번하고도 막대한 증여 활동으로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고, 자기에게 기대된 바를 충족하고자 했다.

서구식 근대 상업의 이윤 추구 법칙으로는 아즈텍 상인의 활동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아즈텍 상인들은 물건 판매보다 ‘증여에 의한 교환’을 중시했다. “증여의 실천 안에서 교환의 대상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었기에, 속의 세계가 지닌 일상적 관성이나 생명의 부재로 환원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행한 증여는 영광의 증거였다. “사람들은 증여함으로써 자신의 부와 자신의 운 (자신의 능력)을 표현했다.”(107)

인류사 최초의 물물교환은 어쩌면 획득보다 ‘소멸과 낭비’의 목적에 근본을 두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멕시코 상인들은 정기적 증여라는 역설적 교환 체계의 실행자들이었다. 이들의 교환 체계는 북서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에서도 발견된다.

포틀래치에서 목격되는 과잉의 소비는 버리는 것이 곧 갖는 것이라는 역설을 담고 있다. 증여는 “증여를 행하는 주체의 초월을 가능하게 하지만, 주체가 그러한 초월을 전유하게 되는 것은 주어진 대상의 교환 안에서이다. 주체는 그렇게 부를 초월하는 미덕을 또다른 부로, 앞으로 그에게 귀속될 권력으로 추구한다. 부에 대한 경멸로 인해 그는 오히려 부유해지는 것이며,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이러한 관대함이다.”(115)

그러나 혼자 소모하고 혼자 더 큰 권력을 얻을 순 없다. 그래서 포틀래치는 경쟁자를 의식하며 누가 더 헤프게 낭비하는가를 견주거나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증여의 수혜자나 목격자로 입회하게 한다. 이때 소비는 주권자인 나보다 “타자가 그러한 부의 소진/소모를 통해서 변화되는 한에서” 의의를 지닌다(116). 포틀래치의 미덕은 자기중심적 구심력을 떨치고 타자를 유념하는 원심 운동을 지향하며, 종국엔, 우주의 무한한 운동에 자신을 결합하려 한다는 데 있다.

포틀래치는 “우리의 근본적인 양가성”을 알려주는 현상이다(119). 포틀래치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사회가 가용하는 추가분의 자원은 어느 때가 되면 전유가 어렵지만, 탕진만큼은 전유의 대상이 된다. 둘째, 탕진은 탕진하는 자의 특권이며, 그 또한 하나의 재화로 간주될 수 있고, 서열을 결정한다. 셋째, 서열은 전유될 수 있다. 그리고 획득한 자원을 탕진함으로써 결정되는 서열은 궁극적으로 이득의 원천이 된다(120).

인간은 자원을 유용하며 낭비를 거부하는 동시에 낭비를 활용하는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비이성의 존재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해선 안 될 것이다. 서열은 대상을 사물화하면서도 사물화를 지양하려는 뒤틀린 의지의 효과로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어떤 신기루 속에” 있다(122). 포틀래치는 놀이와 같은 무용한 사용, 열정의 내재성 등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식 역시 “최종의 문제는 소진/소모의 최종적 문제”가 된다. 대상을 사물화하는 인식을 와해하지 않고서 “그 인식의 궁극적 대상에 접근할 수 없다.”(123) 파괴되지 않으면서 인식할 수 있는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포틀래치는 “생산적 소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제도를 보완하는 형식”이기도 했다. 포틀래치의 증여는 원칙적으로, 사치품—무용한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부를 빈곤으로 환원하는 단세포적 행위가 아니라 “생명 전체가 넘침/과잉의 진리로 귀환”하는 것을 상징하는 행위이다(127). 포틀래치를 놓고 생각해보건대, 현재 우리의 사회는 부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고 있어 보인다.

 

<나의 의문점>

일반 경제라는 명명 아래, 협소한 인간사의 관점을 넘어 거시적 수준의 생태계적 시각으로 경제 개념을 조형하고자 한 바타유의 시도에 경의를 표한다. 다만, 1부와 2부만을 읽고 난 이 시점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바는 아래와 같다.

첫째, 거시 자연사적 일반 경제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획이었음에도, 대부분의 논의는 인류학적 발견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인류학의 태생적 한계에 대한 자기 검열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셋째, 비합리-비이성-모순이 우리 인간의 본령 중 하나라는 점에는 적극 동의한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의문과도 연결되는 것인데) 바타유의 글 면면에 흐르는 신비주의적 감수성은 상술한 주제 의식을 형식적으로도 드러나게 하려는 전략적 조처였을까?

넷째, (역시 앞선 의문의 연장선상에서) 전체를 보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인신공희와 포틀래치에서 미시적으로 횡행한 가스라이팅을 자연법 총체화의 원리에 따라 외면해도 되는 것일까?

다섯째, 자연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의 일반 경제를 설파하기 위해, 인류의 과거를 톺아본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과, ‘본래 그러했다’, ‘원래 그랬던 것이다’라는 류로 말한다면 이는 본질주의의 한 판본 아닐까? 과거를 들여다보거나 계보를 따져 묻되, 본질주의적 접근의 촌스러움을 전혀 입지 않은 글이 이후에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여섯째,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작 100여 쪽만 읽고 이렇게 말해도 될지 조심스럽지만, 서유럽-백인-지식인-메일-쇼비니스트의 기미로 미소한 찐득거림을 남기는 듯하는 건 나의 프로 불편러 기질 탓으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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