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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후반부

로라 2021.12.16 19:40 조회 수 : 70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후반부

 

장벽 무너뜨리기

 

 아나키스트 국가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기에 아나키스트 국가가 건국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사상에 대한 회의론자들이 ‘사회’를 의미하는 것은 ‘국가’내지는 ‘국민국가’이기 때문에 이들이 제기하는 비판은 정말로 존재하는 아나키스트 사회에 대한 연구는 현대 세계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해결책은 있다. 아나키스트 조직 형태가 국가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상불가능한 방식으로 겹쳐지고 교차하는 다양한 규모의 조직 형태가 있다. 이 모두의 공통점은 명령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과정은 점진적이며, 세계적 규모의 대안 조직 형태와 새로운 소통의 형식, 새롭고 덜 소외된 방식을 창조하여, 현존하는 권력의 어리석음과 부적절함을 밝히려한다. 물론 회의론자들은 이 제안에 만족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국가 사회는 ‘원시적’, ‘부족적’ 또는 ‘농민적’이라고 특징지어지는 이들이 살았던 세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고 가정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원인은 우리가 혁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익숙한 방식에 있다. 요즘 일상에서 지나치게 남발되는 혁명이라는 단어는 거의 아무 의미도 갖지 않게 되었다. 남발되는 혁명이란 단어가 ‘패러다임 전환’과 유사한 무엇을 함축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분명한 단절, 즉 그 후로 모든 것이 다르게 작동하기에 이전 범주들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사회현실의 근본적 균열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세계는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두 혁명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주장이 가능해지는 지점이다. 우리는 모더너티를 논하게 될 때  영국의 자유방임 경제와 프랑스 공화정의 조합을 떠올리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혁명이 일어난 이 후에는 우주는 무언가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기초적인 인지적 실수와 비슷한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민족,사회, 이데올로기, 닫힌계 등등의 ‘총체성’은 언제나 상상의 산물이다. 상상적 총체성은 인간 사고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도구 이며 이 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사회를 움직이는 힘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세계를 총체적 체계로 규정하는 사고 습관은 필연적으로 혁명을 지각변동적 균열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는 혁명의 연속이 되고 정치적 이상이 이 과정을 통제하게된다. 이런 종류의 단절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지가 모아져서 실제 발생하는 계기적 도약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무한히 더 복잡하다. 현실 혁명은 칼로 자른 듯 깨끗한 단절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혁명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혁명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다. 혁명을 이미 일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인식하는 방법도 있다. ‘대혁명’이나 지각변동적 단절로 생각하는 대신 ‘혁명적 행동은 무엇일까?’하고 자문해보는 것이다. 혁명적 행동은 특정 권력 또는 지배 형태를 거부하고 사회관계를 재구성하는 모든 집단행동을 말한다. 혁명적 행동의 목표가 반드시 정권 전복일 필요는 없으며 자율 공동체를 창조하려는 시도는 거의 혁명에 근접한 행위로 정의할 수 있다. 역사는 이런 행위가 반복적으로 축적되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장벽을 무너뜨리라’는 말은 우리가 한때 이 땅에 살았던 98%의 사람들과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들을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없다는 오만하고 무반성적인 가정을 무너뜨리라는 뜻이다. 그들과의 근본적인 단절을 가정하는 것은 “우리는 왜, 이토록 특별한가?”라는 거만한 자의식을 노래하는 변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회는 끊임없이 재탄생하며 우리가 서로 다른 진화적 단계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를 넘나든다. 

 

존재하지 않는 학문의 기본 원리

 

1)국가이론

 국가는 독특한 이중성을 지닌다. 제도화된 침략 내지 강탈의 형식(실제 국가를 경험하는 방식)임과 동시에 유토피아적인 기획(기록)이다.

국가는 대표적인 ‘상상적 총체성’이다.

국가는 결국 이념이며 사회질서를 파악 가능한 무엇이자 통제 모델로 상상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초래한 재앙은 유토피아주의에 오명을 쒸운 것이고 또하나는 국가와 사회 질서 나아가 사회 자체가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보는 경향이다. 올바른 국가론이라면 통치자의 이상과 통치기제를 구별하는 데서 부터 출발해야한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국가의 이념이 된 이상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실상과 정반대인 겅우가 많았다. 그 이상은 왕권이 이 우주론적 허풍들을 특정 영토내의 인구를 다스리는 진정한 관료제적 통제로 변환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진화 인류학자는 강압적 관료제가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왕국을 ‘족장사회’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은 사회 구조를 국가의 대안적 형태나 더 나아가 국가가 나아갈 미래로 보지 않고 단지 국가 출현의 이전 단계로만 간주한다. 이런 문제를 명확히 밝히는 것은 중대한 역사적 기획이 될 것이다. 

 

2)국가 아닌 정치체를 다루는 이론

  국가라 여겼던 정치체의 다수가 국가가 아니라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내용을 다룬 이론적인 문헌이 아직 없다.

우리가 국가주의의 틀을 벗어나 사고하기는 참으로 힘들다. 

반세계화 활동가들이 가장 꾸준하게 요구해온 사안이 국경이라는 제약 철폐이다. 이러한 요구는 종종 세계시민권 개념과 결부되어 표출되곤 한다. 이것은 일종의 세계국가를 요구한다는 의미 아닌가? 

그 다음 문제는 국가의 틀 밖에서 시민권을 이론화하는 과제로 넘어간다. 

근대 서구 시민권과 정치적 자유 개념은 고대 아테네와 중세 영국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고대 아테네나 중세 영국이 국가였는지에 관해 합의된 결론은 없다. 

영토적 국민국가가 최종 승리를 거둔 이유 중 하나는 서구 엘리트 집단이 세계화 초기 단계에서 중국을 본보기로 삼으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현존하는 유일한 국가였던 중국은 ‘균질한 인구’라는 그들의 이상에 실제로 들어맞는 듯 보였다.

국가가 아닌 정치체를 다루는 이론의 부재는 진정한 위기가 되고있다.

 

3)또 다른 자본주의 이론

 자본주의를 ‘자연화’하려는 야욕은 계속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또 다른 자본주의 이론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임금노동 계약은 정말로 노예 임대 계약이었다. 여기서 출발한 자본주의 모달은 어떠한가? 고대 노예제는 자본주의의 오래된 형태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현대 자본주의는 노예제의 새로운 형태일 뿐이다. 우리가 직접 스스로를 임대하는.

4)’권력과 무지’ 또는 ‘권력과 어리석음’

 폭려, 특히 권력이 한 쪽에 일방적으로 쏠린 구조적 폭력은 무지를 생산한다.

복잡한 사회작용들을 무시하고 사회체계를 단순화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규칙을 만들어 누구든 그것을 위반하면 폭력을 가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그래서 폭력은 어리석은 자들의 좋은 의지가 된다. 그래서 폭력은 지성적으로 대응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어리석음의 한 형태이며, 이것이 바로 국가의 기초이다.

5)자발적 연합의 생태학

어떤 종류의 자발적인 연합이 존재하는가? 이 연합들은 어떤 환경에서 증가하는가? ‘법인’이라는 개념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6)정치적 행복에 관한 이론

7)위계

위계의 구조가 어떻게 고유의 논리에 따라 필연적으로 자신의 반대 이미지 또는 ‘부정’을 만드어내는냐에 대한 이론.

8)고통과 쾌락: 욕망의 사유화에 관하여 

 낡은 유형의 혁명가는 결국 스스로 더 많은 고통을 생산할 뿐이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집단적이고 축제적인 소비를 비난하다가 곧 고도로 개인적이고 사적이며 은밀하기까지한 소비 형태를 선포하고 나선다. 욕망의 사유화 과정인 것이다.

9)소외에 관한 하나 또는 여러 이론

아나키스트의 최종 목표는 소외에 관해 묻는 것이다. 소외되지 않은 경험이 가능한 범위란 무엇인가?

원시주의자인 존 저잔의 말을 따르자면 유일하게 소외되지 않은 인간은 인간이라기보다 일종의 완벽한 유인원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은 소규모 유토피아 사회학, 소외 형식의 유형학에 대응하는 유형학, 소외된 행동 형식과 소외되지않은 행동 형식 등등을 고찰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력명의 지지 세력은 늘 가장 덜 소외된 사람들과 가장 많이 억압받은 사람들의 암묵적 동맹을 포함한다. 이에 동의한다면 이런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은 더욱더 시급한 과제다. 

 

‘혁명 이후’의 시나리오

 

 1. 세계화와 북반구-남반구 불평등의 종식

 세계화를 바라보는 아나키스트의 입장은 국민국가의 소멸이 곧 국경선 철폐를 의미하고 이것이 진정한 세계화라는 것이다. 

2002년에 WEF 측 대표와의 라디오 토론에서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빈곤 문제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구상했다. 

 

-국제적 부채의 즉시 탕감 (개인 부채는 다른 문제이다)

-1년 이상 된 기술과 관련한 모든 특허권과 기타 지적 재산권의 즉시 말소

-전 세계를 여행하고 거주할 자유를 가로막는 모든 규제의 철폐

 

이 세 가지가 해결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아나키스트 프로그램은 이 문제들 대부분을 5, 6년 안에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2. 일에 반대하는 투쟁

  아나키스트 조직의 핵심 주제는 더 나은 근로 조건이나 임금인상 요구가 아니라 지배관계로서의 일 자체를 완전히 철폐하려는 투쟁이다. 그래서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구호는 “임금노동제에 반대한다”이다. 100년전 ‘워블리스’와 다른 아나키스트 조직들은 하루 “8시간/주5일 “ 근로 조건을 쟁취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시 100년 만에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은 주당 40시간에서 주당 35시간으로의 근로시간 감축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미국에서 ‘워블리스’가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주당 16시간 (주 4일, 하루 4시간)근로하는 다음 단계의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근본적인 불평등을 없애면 사라질 직업들이 아주 많다. 

쾌적하고 생태학적으로 지속가능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말 필요한 일들을 밝혀내고 그에 따라 시간을 재분배한다면 ‘워블리스’가 내건 공약이 전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이 입증될지 모른다. 굴욕과 가학, 피학이 뒤섞인 게임을 없앤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을 즐기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단 한명도 자기가 원하는 이상으로 일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런 질문 즉, ‘더럽고 힘든 일은 누가 하는냐?’ (소는 누가 키우노? 같은 질문)는 아나키스트나 유토피아주의자들이 늘 들었던 질문이다. 크로포트킨은 이미 오래 전에 이 질문의 오류를 지적해다. 유쾌하지 않은 임무가 있다면 공평하게 분담하면 된다. 그렇다면 ‘더럽고 힘든 일이 있을 이유가 없다. 

*David Graeber의 저작 “Bull shit jobs” 참조


3.민주주의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다!”

직접행동의 가장 훌륭한 전통에 따라 시애틀의 시위대는 단지 권력의 특정 형식에 맞선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의 매커니즘을 드러내고 그것을 말 그대로 당장 멈추려 하였다. 

다양성은 탈중심화된 조직의 기능이고, 이런 조직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운동의 이데올로기였다. 

새로운 운동의 핵심 용어는 “과정” 즉, 의사결정과정을 뜻한다.

모든 바람직한 합의 과정은 타인의 관점 전체를 나와 똑같은 관점으로 바꾸려 해서는 안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억압은 실제로는 없다. 합의 과정의 목적은 한 집단의 공동 행동 방침을 결정하는 것이다. 표결로 결정하기보다는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야한다.

합의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두가지 수준의 반대가 있을 수 있다. ‘한 쪽으로 비켜서기’ 또는 ‘거부’인데 거부의 경우는 오로지 어떤 제안이 집단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나 근거에 위배된다고 느낄 때에만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이다.

여기서 핵심은 보통 직접 민주주의라는 단어로 떠올리는 것과는 몹시 다른 형식의 직접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북아메리카에서 합의 과정은 무엇보다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이 운동은 1960년대 신좌파 일부의 자기과시적이고 불쾌한 마초적 리더십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 도중에 생겨났다. 거의 모든 인간 공동체는 집단 결정을 내려야할 때 ‘합의 과정’이라는 절차를 조금씩 변형해 사용했다.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저절로 출현한 일은 거의 없었음에도 왜, 반드시 다수결 민주주의여야하는 이유를 어느 누구도 자문해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일이다. 

본래 군사제도였던 다수결의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로 여겨지는 유일한 제도가 된 것인 서구 역사 기록의 유별난 편향 때문이다.

“합의에 의한 의사 결정은 강제력을 독점하는 국가가 없기 때문에 소수가 다수의 결정에 동의하도록 강요할 수 없는 사회의 전형적인 의사 결정 방식이다. 표결이란 곧 지는 것처럼 보일 사람을 뽑는 공개 경인인 까닭이다. 

표결은 굴욕과 분노, 증오, 마침내는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가장 큰 의사 결정 수단이다.

반대로 합의를 구하는 과정은 겉으로는 까다롭고 복잡해보이나 실재로는 자신의 견해가 전적으로 무시된다고 느끼고 떠나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하여 치러야할 기난긴 과정이다.

다수결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인들이 동시에 발생할 때 생긴다고 말할 수 있다.

(1) 집단의 결정에 모두가 동등한 발언권을 가져야한다는 생각

(2)집단의 결정을 집행할 림을 갖춘 강압장치

대부분의 인간 역사에서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추는 일은 지극히 드물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경쟁적인 사회였던 고대 그리스에서 결정을 하는 사람들은 시민 병사였고 그 주력부대에 따라 도시국가의 통치 형태가 결정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군사적 배경을 가진 불안정하고 소란스러운 통치 형태였다. 이 때 민주주의는 직접 민주주의를 뜻했다. 

민주주주의가 대의의 원리를 포함하는 용어로 탈바꿈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

엘리트 지배계층은 의미없는 전투와 대전으로 가득한 연출된 경연에서 ‘공중’과 의논해야하는 것으로 촉소되고 마는 민주주의 제도로 만들어 계속 대신 결정할 권리를 재설정하는 함정을 만든다. 

새로운 전 지구적인 운동이 민주주의의 의미를 재창조하는 데서 출발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나키스트가 촉발한 이 새로운 운동에서 가장 고무적인 것은 지나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리즘과는 다른 새로운 형식의 인터내셔널리즘을 제안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합의 과정 뿐만 아니라 대중의 비폭력 직접운동들인데 민족지학의 겨로가물과 기법은 여기서 매우 유용한 도움이 될 수 있다. 인류학자는 식민주의 역사에서 연유한 망설임을 극복하고 자신들이 숨기는 것이 죄 많은 비밀일 뿐 아니라 인류 공동의 유산이기도 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 David Graeber의 저작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 (The Democrasy project)참조

 

 

내가 배신할 수 밖에 없는 인류학

 

 인류학은 아나키즘과 큰 친연성을 보이는 학문이며 인류학자는 실제 존재하는 ‘국가 없는 사회’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유일한 학자 집단이다. 그런데 왜? 인류학자들은 지금껏 이런 일을 하지 않았는가?

 아나키즘이 본질적으로 “실천의 윤리”라고 할 때 인류학적 실천이라고 떠 올리면 인류학자가 반성적이 될 수 많은 불쾌한 역사적 사건들이 함께 떠오른다. 인류학이라는 분과 학문은 정복과 식민지화와 대량학살이라는 끔찍한 계략들로 인해 가능해진 학문이다. 지리학, 식물학, 수학,언어학, 로봇공학 등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류학자의 연구에는 희생자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이 포함되기 떄문에 다른 학문에서는 경험하지 못할 고뇌의 상황에 처한다. 그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아시다시피,그건 모두 스스로의 타자성을 식민지인들에게 투사하는 거죠”라는 몇 마디로 인류학을 일축하며 인류학을 실천하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하다.

또한 인류학은 스스로의 잠재력을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인류학이 정치적인 것,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욕망, 상상력, 자아, 주권 등등)을 놓고 세계적 단위의 담론으로 인류 전체의 일반화가 가능한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실행하기를 주저하는 망설임이 내재된 학문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류학자들은 누구인가? 

인류학이라는 분야 전체를 관통하는 유일하고도 근본적인 정치 태도는 광의의 ‘민중주의”이다. 

그렇다면 인류학에서 이 민중주의는 실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보통사람’들이 강제된 권력 형애나 세계화의 힘에 훌륭히 저항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인류학자는 민중을 기만하거나 와해시키거나 균질화하거나 조종하는 듯 보이는 무엇이 실은 민중을 그렇게 만들지 않음을 증명해보인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글로벌 자본주의 논리를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 당황스럽게 한다. 

정치적 차원에서 인류학자들이 조심해야하는 것은 인류학이 글로벌 ‘정체성 기계’의 또 다른톱니바퀴가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정체성이란 것은 대개 진행 중인 억압과 불평등의 산물이다. (Ex. ‘흑인’ ) 실제로 제도적 인종주의가 사라지고 진정 자유롭게 자신을 정의하게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할 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것을 찾아 낼 것인가?

‘상상계의 억압과 해방’이라는 책의 제목이 암시하는 의미처럼 모든 사람이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자신이 속하고 싶은 공동체와 취하고 싶은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하는 세계에 살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런 일은 거의 모든 것을 바꿔야하기에 상상도 못할 만큼 실현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이런 정체성들이 이미 자유롭게 창조된 것처럼 쓰는 것은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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