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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트르 크로포트킨, 『크로포트킨 자서전』, 김유곤 역, 우물이 있는 집, 2014, pp.8-260.

 

 

[머리말]

이 책은 1898년 9월에서 1899년 9월까지 연재된 「한 혁명가의 회상」을 수정하여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8) 크로포트킨은 “구구한 설명보다도 어떤 한 개인의 삶이 더 정확하게 그 시기를 설명하기도 한다”라며 자서전의 의의를 밝힌다. 농노제가 없어지기 전까지의 십 년, 농노제 폐지 이후 60년대의 러시아 부흥기, 러시아 민중을 통해 양심을 깨우친 젊은이들이 각성하게 되는 70년대 등으로 대표되는 30년은 이후 러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었다.(9)

 

[서문]

게오르그 브란데스는 크로포트킨이 이 책에서 저자 개인의 심리보다는 저자를 포함한 동시대인의 심리를 묘사하려 했으며, 지난 반세기 동안의 유럽 노동운동사와 당대 러시아 역사를 담아냈다고 평가한다.(23) 그에 따르면 크로포트킨은 경제적인 전제주의와 중앙집권화를 혐오하고 개인의 자유와 코뮌을 사랑하며, 모든 조직은 대중의 자발적 활동을 통해 생겨나야 함을 확신한 혁명가였다.(27-28)

 

1. 유년시대

 

1. 스타라야 코뉴센나야 거리

모스크바의 스타라야 코뉴센나야에는 표트르 대제의 등장 이후 소외된 귀족들이 자리 잡았다. 그들의 경우 구도시에서 한직이나 명예직을 유지하는 것이 비교적 성공한 축에 들 정도였는데, 크로포트킨의 아버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32) 크로포트킨은 1842년 스타라야 코뉴센나야 거리에서 태어나 15년을 살았다.(34)

(* 이 발제문에서 ‘크로포트킨’은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만을 칭함.)

 

2. 어머니의 죽음

1846년 봄, 크로포트킨의 어머니가 폐병으로 사망했다.(36-37)

 

3. 크로포트킨 가문

크로포트킨 가문은 스몰렌스크의 태공으로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집안이었으나, 봉건시대가 끝나고 로마노프가가 국가 통일에 착수했을 때 쇠락했다. 크로포트킨의 조부는 젊은 시절에 군직을 사임하고 영지로 돌아와 토지를 사들이는 일에 열중했으며,(38) 아버지는 니콜라이 1세 시대의 전형적인 사관이었다.(39) 술리마 장군의 딸인 어머니는 예술가적 소질을 지녔으며 농노와 하인들에게도 인망이 두터운 사람이었다.(40-42)

 

4. 부르만 부인–울리아나–뿔랭, 프랑스어 수업–고대역사 수업–일요일 놀이–연극에 대한 갈증

크로포트킨의 아버지의 재혼으로 크로포트킨 집안과 술리마 집안의 인연은 끊겼다.(43-44) 크로포트킨은 가정교사 뿔랭에게 예법, 문법, 회화, 역사, 지리 등을 배웠으며,(45) 형 알렉산드르와 연극 놀이를 즐겼다.(48-50)

 

5. 니콜라이 1세의 무도회–육군 유년 학교 입학

니콜라이 1세 즉위 25주년을 맞이해 모스크바 귀족들이 연 가장무도회에서, 니콜라이 황제는 페르시아 왕자 의상을 입은 크로포트킨을 옥좌로 불러올렸다.(51-52) 이 일로 크로포트킨은 근위학교 학생 후보자가 되었는데, 니콜라이 황제는 모스크바 귀족에게 좀처럼 그러한 특전을 주지 않았기에 주변인들이 기뻐했다.(53)

 

6. 구귀족의 도덕성–농노–스타라야 코뉴센나야 스타일

크로포트킨의 아버지는 세 개 주(州)에 약 1200명의 농노와 소작으로 준 넓은 토지를 소유한 부자였다.(55) 그는 도움을 청하는 자에게 관대하고, 손님들을 맞거나 성대한 무도회를 열기를 즐기면서도 검소한 일상생활을 하여 주변의 명망을 얻었다.(56-58) 반면 사순절이나 부활절 주간이면 수백 명의 방문객을 맞이할 성대한 진미를 마련하는 미르스키 공작 같은 사람도 있었다. 농노가 해방되었을 때 구시가지 스타라야 코뉴센나야 거리 대부분의 집들이 이미 망해버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59-61)

 

7. 영지관리인에게 내린 지시–니콜스코예로의 이동–군사 훈련–민주화의 기운

겨울이 되면 크로포트킨의 아버지는 니콜스코예의 영지 관리인에게 식료품을 보내올 것을 지시했다.(61) 크로포트킨은 니콜스코예로의 여행을 좋아했다.(64) 이곳에서 크로포트킨은 뿔랭이 해주는 전쟁과 혁명 이야기에 감명 받았다. 보조교사인 스미르노프나, 러시아 문학의 공화주의적 경향에도 영향을 받았다.(72-74) 이웃 지주들은 자신의 영지에 갤러리나 공원 등을 짓고 있었는데, 농부들의 강제노동에 의해 이루어진 이러한 작업들은 1861년 농노 해방 이후 중단되었다.(77-78)

 

8. 농노제도–강제 결혼–하녀 폴랴–의사 사샤–게라시모프

1853년 크로포트킨은 제1모스크바 김나지움에 다니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대학교 학생이었던 스미르노프는 크로포트킨의 공부를 도와주며 문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주었다.(80-82)

한편 당시의 농노들은 경찰이나 소방대에 의해 태형을 받거나 강제 결혼을 하는 일이 잦았다.(85) 재봉사 안드레이는 대부모가 됨으로써 강제 결혼을 피하려 했으나 징병국에 회부되기도 했다. 지주의 저택에서 일하는 농노들은 지주 마음대로 차출되었는데, 당시의 병역제도는 25년간 비참한 사병 생활에 복무해야 하는 가혹한 것이었다.(86-87) 누구도 농노에게 인간적인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89) 농노는 다른 지주에게 속한 농노와는 결혼할 수 없었으며, 대학 입학도 허락되지 않았다.(90) 그들은 집과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팔려가거나 도박 빚 대신 넘겨졌다.(91) 자유를 얻는 것은 농노들의 끊임없는 꿈이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몸값을 지주에게 지불해야만 했다.(92)

 

9. 크림전쟁–니콜라이 1세의 죽음

크림전쟁 당시 모스크바의 사교계가 거의 아무 영향을 받지 않은 것과 달리, 시골 마을에는 징집영장이 속속 날아들며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94) 1855년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자, 하인들은 ‘자유’에 관해 속삭이기 시작했으며 귀족들은 농민 반란을 일으켰던 푸가초프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95) 모두 전쟁이 끝나고 폭군 정치하의 상황이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96)

 

10. 대학생 가정교사 스미르노프의 영향–문학에 대한 관심과 첫 경험

크로포트킨의 지적 발달에 가장 자극을 준 사람은 스미르노프였다. 그는 니콜라이 1세의 검열제도 하에서 출판 금지 조치를 받은 고골리나 푸슈킨의 작품을 필사했는데, 크로포트킨도 이를 도왔다.(97) 스미르노프의 권고로 글을 쓰기 시작한 크로포트킨은 1855년부터 2년간 형 알렉산드르와 함께 소설·시 등을 실은 월간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99) 그러나 1857년 크로포트킨은 모스크바를 뒤로하고 근위학교에 다니기 위해 페테르부르크로 떠나게 되었다.(100)

 

2. 근위학교

 

1. 근위학교 입학–시험–지라르도 대령–근위학교의 질서와 규범

페테르부르크의 근위학교는 사관학교에 황실 부속 궁정학교라는 특성이 부가된 곳으로, 궁정 귀족의 자제들을 교육해 근위연대의 장교로 임관하게 했다. 우등생은 궁정근위가 되어 황족의 측근이 될 수 있었으므로 이곳의 입학은 출세를 보장하는 것이었다.(103) 교장은 젤투힌 장군이었으나, 실세는 지라르도에게 있었다. 지라르도는 5학년 근위견습사관들이 신입생을 괴롭히는 것을 묵인함으로써 규율을 유지했으며, 낡은 관행들에 저항한 크로포트킨에게 불이익을 주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 사망 이후의 사회적 변화에 학교도 영향을 받으며 교풍은 점차 바뀌어 갔고, 학교에는 점차 향학열과 새롭고 진지한 정신이 자라나게 되었다.(104-112)

 

2. 깨어나는 러시아가 근위학교에 미친 영향–근위학교 선생님들

파리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고 출판물 검열이 완화되자 러시아에서는 교육 부흥이 일었으며, 근위학교도 그 영향을 받았다. 교육부장 겸 감독관인 빈클레르는 기존의 교사들을 면직시키고 클라소프스키(러시아 문법), 베케르(독일어) 등 훌륭한 교사들을 영입했다. 러시아에서는 여러 갈래의 역사적·사회적 학문을 결합시키고, 철학과 문학을 통일시킴으로써 청소년에게 이상과 영감을 불어넣는 중대한 임무가 문학 교사의 손에 맡겨졌다.(112-117)

 

3. 형 사샤와의 서신 교환–형 사샤의 철학관, 정치경제관–종교–개혁–형과의 비밀 만남

형 알렉산드르는 크로포트킨과 편지를 교환하며 새로운 과학적·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하고, 읽고 연구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1860년대 초 러시아 청년들 사이에는 예술을 경멸하는 경향이 생겨났는데, 형 역시 시를 천시하고 자연과학에 몰두하게 되었다.(122-123) 크로포트킨도 자연과학(수학, 물리학, 천문학)을 주로 연구하며 형과 함께 종의 변이에 대한 논의를 몇 년간 계속했다.(126-127)

 

4. 니콜스코예의 야시장–최초의 직업–염소와의 여행–벨라야 하르체브냐

교회 축제인 ‘카잔의 성모일’에는 니콜스코예에 큰 야시장이 섰다. 크로포트킨은 경제학에 관심을 지닌 형의 권유로 이 시장의 상품 매입 및 매출을 조사했다. 이 경험은 훗날 크로포트킨이 지식인과 농민(민중) 간의 소통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크로포트킨은 농민들에게 노예근성이 사라지고 평등의 정신이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130-133)

 

5. 근위학교의 변혁–황태후의 장례식

1860년 지라르도가 면직된 후 그 자리를 대신한 브레베른 대위는 학생들의 자유를 빼앗는 엄격한 감독을 시행했고, 크로포트킨은 이에 항의했다가 2주간 영창에 감금되었다.(135-137) 그해 황태후(니콜라이 1세의 부인)가 사망하여 근위학교 학생들은 유해가 안치된 대성당에서 경계근무를 서야 했다.(137-138)

 

6. 근위학교의 물리학, 화학, 수학 수업–여가활동으로서의 이탈리아 오페라

대개 러시아의 청소년은 대학교나 사관학교에 다니는 동안 사회적·철학적 제반 문제들에 흥미를 가진다. 근위학교는 이러한 지적 발달에 부적당한 학교였음에도, 자발적인 각성에 따라 광범위한 사상이 유입되었다.(140) 4학년이 되자 크로포트킨은 흥미를 느껴온 역사 대신 자연과학, 수학, 군사학 공부에 열중해야 했다.(141) 과학 부흥의 시대에서, 크로포트킨은 자연과학적 지식 및 방법을 철저히 익히는 것이 모든 연구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42) 한편 그는 오가료프의 시 「이스칸데르에게」와 투르게네프의 소설 『전날 밤』, 그리고 이탈리아 오페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145-149)

 

7. 페테르고프 야영생활–농촌 체험–교사들에게 보내는 조언

근위학교에서는 매년 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군사학교와 더불어 군사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야영 캠프를 실시했다.(149) 이곳에서 크로포트킨은 전시에 규율보다 병사의 열정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151)

 

8. 혁명 사상의 전파–농노제 폐지, 농노해방의 결과

1857년부터 1861년까지 러시아에서는 지식인들의 힘이 두드러진 성장을 보였다.(153) 크로포트킨은 혁명적 사상이 담긴 게르첸의 잡지 『북극성』을 접한 후, 공화주의를 표방하며 입헌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동료들과 공유했다.(154-155) 러시아에서는 1848년 프랑스혁명과 이후 크림전쟁의 영향으로 농노들의 폭동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농노제도에 반대하는 알렉산드르 2세의 즉위로 농노해방이 불가피하게 되었다.(156) 결국 황제 즉위일인 1861년 2월 19일에 농노해방 선언서가 채택되었다.(159) 농민들은 2년간의 유예 기간 후 지주에게서 해방되고 토지 및 택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160) 그러나 농노들은 지주에게 토지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토지가 없는 하인들의 경우 기술이 없으면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토지 가격은 농노해방으로 인한 기대 심리로 폭등했고, 지주들은 토지 임대를 통해 거액을 벌어들였다.(162-163)

 

9. 궁정에서의 생활–궁정 내 밀정조직–알렉산드르 2세–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태공들

몇 년간 수석을 유지해온 크로포트킨은 1861년 근위학교의 상사에 임명되었다. 상사는 교내에서 장교 대우를 받을 뿐 아니라 황제의 근위가 될 수 있는 우선권을 가졌다. 근위들은 각종 행사가 열릴 때마다 궁정에 가야 했다.(165) 크로포트킨은 처음에는 농노제 폐지를 시작으로 여러 개혁을 단행하려는 알렉산드르 2세를 영웅으로 여겼으나, 궁정 생활의 내막을 알게 되며 점차 환상을 잃었다.(166) 황제는 사법조직과 군을 개혁하고 끔찍한 형벌을 폐지했으며 지방자치정부와 헌법을 인정했지만, 모든 사회운동을 황제에 대한 능욕으로 간주하여 참혹하게 진압했다. 1870년부터 1881년에 걸친 그의 폭압정치의 징후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172-173)

 

3. 시베리아

 

1. 연대 선택–아프락신 드로브 화재와 그 영향–임관식–시베리아로

크로포트킨은 근위연대가 아닌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러려면 부자지간의 연을 끊고 의식주를 자비로 해결해야 했기에, 1862년에 아무르의 카자크 기병연대에 지원해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활동 분야를 찾기로 했다.(179-181) 그 시기 페테르부르크의 아프락신 드보르에는 19세기 러시아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대화재가 발생했다. 구보수파의 카트코프는 이것이 폴란드와 러시아 혁명당원의 소행이라 주장했고, 당국은 농노 해방의 모호한 성격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의 방화를 의심했다. 이 사건으로 알렉산드르 2세는 보수파의 압력에 굴복했으며,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상류사회의 여론은 개혁파나 급진파뿐만 아니라 온건파에게까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개혁은 비상식적인 일로 치부되었고, 사회 분위기는 반동적인 정신으로 가득 찼다. 모든 것이 퇴보하고 있다고 느낀 크로포트킨은 미련 없이 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182-190)

 

2. 이르쿠츠크–쿠켈 장군–개혁–의지

크로포트킨은 5년간 시베리아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하며 농민들의 풍속과 관습을 관찰했다.(191) 시베리아 행정당국은 러시아 본국의 어떠한 지방보다 진보적이고 우수했는데, 동시베리아 총독이었던 무라비요프 백작이 진보적 사상을 가지고 등용한 젊은 관리들 중에는 바쿠닌도 포함되어 있었다.(192) 당시 정부는 지방정부의 행정, 경찰 조직, 재판소, 감옥, 추방제도, 지방자치 등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크로포트킨은 감옥과 추방제도의 개혁위원회와 지방자치계획 준비위원회의 사무관으로 일했다.(193)

 

3. 폴란드의 봉기–폴란드와 러시아의 죽음의 기록–시베리아에서의 영향–개혁의 끝

1863년 폴란드가 러시아의 지배에 반대하며 봉기하자, 많은 러시아인은 동정과 호응을 보냈다. 러시아의 급진주의자들은 폴란드의 민족주의적 혁명 정부가 농노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에 협조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분개했는데, 러시아 정부는 이를 기회 삼아 폴란드의 지주와 투쟁하는 농민의 보호자를 자처했다.(195-197) 폴란드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크로포트킨은 이와 관련하여 혁명은 짓밟히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정의의 행동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혁명은 반드시 실패한다고 주장했다.(199) 폴란드의 반란은 러시아의 개혁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개혁을 입에 담는 자는 즉시 ‘러시아의 반역자’로 낙인 찍혔다.(200)

 

4. 아무르 지역으로의 이동–아무르 강 탐험–첫 번째 부송 경험–태풍–페테르부르크 출장

아무르 강의 북쪽 강변과 남쪽 표트르 대제 만에 이르는 지역은 무라비요프 백작이 중앙정부와 서유럽 외교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에 병합한 곳이었다. 그는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자 아무르 강가와 남쪽 지류인 우수리 강가에 이민 부락을 형성했으며, 이곳에 석방된 죄수들과 육군 교도소의 병사들을 이주시켰다. 이주민들은 농경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이들을 위해 치타에서는 화물선으로 식료품을 수송해주어야 했다. 크로포트킨은 이 화물선단의 사령관인 말로프스키 소령의 부관으로 임명되어 항해를 시작했다.(204-207)

 

5. 이르쿠츠크로의 귀환–만주 여행–흥안령–우윤 홀돈지의 화산

크로포트킨은 이르쿠츠크에서 동시베리아 총감부의 무관으로 임명되었다. “모두 관례대로 처리하고 더 이상 개혁을 언급하지 말 것”이 페테르부르크의 슬로건이었기에, 특별히 할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 기회에 크로포트킨은 만주지방 지리학 탐사를 시작했다. 그는 교역상인을 가장하여, 중부 아무르 지방과 교류하기 위해 길을 찾고 있던 카자크인들을 지휘했다. 이 일로 그는 교역을 위한 직통로뿐만 아니라 국경선으로서의 흥안령, 만주에 자생하는 식물군, 우윤 홀던지 지방의 제3의 화산 등 흥미로운 것들을 접할 수 있었다.(217-224)

 

6. 숭가리 강 항해–지린–중국인 친구들–서부 사얀 산맥 연구–올레크민스코–비팀 학술탐험–시베리아가 준 교훈

크로포트킨은 숭가리 강을 따라 만주의 심장부로 거슬러 올라가 지린까지 갔다. 몽고와 만주를 탐험하기를 원하는 청년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코르사코프 장군이 지린성의 총감에게 친선 메시지를 보낸다는 명목 하에 기선을 올려 보내기로 결정했고, 여기에 크로포트킨도 포함된 것이었다.(224-225) 시베리아의 자주적인 생활과 진보적 움직임을 경계하는 페테르부르크의 영향으로, 시베리아에서 개혁을 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은 그 대신 탐험에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행정기구는 절대 민중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없으며, 민중의 건설적인 노동이 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도자와 민중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중요한 일을 하는 데는 명령과 규율에 따라 행동하는 것보다 상호이해를 원칙으로 삼아 행동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여겼다. 그때까지 자신이 견지해온 신념을 모두 버리고, 아나키스트로서의 행보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228-231)

 

7. 바이칼 환상도로에서의 폴란드 유형수들의 폭동–진압, 퇴역

1863년 폭동을 일으킨 폴란드인들은 지적이고 진보적인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동시베리아로 유배되어 노역에 동원되거나 기아에 시달렸는데, 공공연하게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폴란드 유형수들의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포탈로프 장교가 사망하자, 러시아 장교들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폴란드인들까지 잔혹하게 폭행했으며 육군 당국은 반란을 일으킨 폴란드인 다섯 명을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가 시베리아에 유배된 갈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863년 혁명전쟁에 뛰어드는 기폭제가 되었고, 반란 이후 시베리아에 유배된 폴란드인들의 생활은 상당히 개선되었다.(233-236) 이 폭동을 계기로 크로포트킨은 군대에 몸담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 군대를 떠나 러시아로 돌아가기로 했다.(237)

 

4. 페테르부르크, 첫 번째 유럽 여행

 

1. 대학교 입학–북아시아 지역의 지도 수정

대학에 입학한 크로포트킨은 수학적 훈련이 모든 연구와 사고의 기초라고 여겨 수학과에 들어간 후, 5년간 공부와 과학적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수학뿐만 아니라 지리학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지난 시베리아 여행을 통해 지도상에 그려진 북부아시아 산맥이 대부분 틀렸다는 점을 확신한 그는 아시아 산맥들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의 목표는 북부아시아 산맥과 고원에 관한 방대한 분량의 책을 내는 것이었으나, 1873년 곧 체포될 것을 예감하고 지도와 논문만을 작성할 수 있었다. 지도제작자 페테르만이 크로포트킨의 연구를 수용한 이래, 거의 모든 지도에는 크로포트킨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이제 아시아 지도는 대륙의 외형적 특징뿐 아니라 기후와 동식물의 분포와 역사까지도 설명하게 되었다. 크로포트킨은 이 사례를 들어, 새로운 과학 개념은 기존의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전해야 함을 주장한다.(241-244)

 

2. 러시아 지리학회–당시의 러시아 여행가들–평원 탐험–핀란드 지질 연구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지리학회 저술분과의 간사로도 일했는데, 투르케스탄이나 파미르 고원의 탐사에 관심이 많았다.(244) 그 무렵 러시아인들은 러시아령 북극해의 항해나 어업, 무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었다.(247) 이에 지리학회는 북극 탐험 계획과 관련한 위원회를 구성하고, 크로포트킨에게 노르웨이의 범선을 타고 탐험대를 인솔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재무성이 탐험에 필요한 금전적 지원을 거절하면서 북극해 탐사는 취소되었다. 그 대신 크로포트킨은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실시하는 빙하 시대의 퇴적물 조사 작업에 투입되었다. 그는 점차 러시아 각 지역의 지리적 차이와 그것이 낳은 경제생활의 형태에 주목하게 되었다.(248-250)

 

3. 삶의 목표–지리학협회의 사무관직 제의에 대한 거절

인간은 정치적·사회적으로 익숙한 억압에 구속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에게는 핀란드를 여행하는 동안 이 문제를 숙고할 여유가 있었다.(251) 그는 과학과 지리학이 주는 즐거움을 경험하는 한편, 자신이 그러한 고상한 정서의 세계에서 생활하기 위해 소비하는 모든 것은 땀 흘려 농사지으면서도 궁핍에 시달려야 하는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크로포트킨은 지식이라는 거대한 힘이 민중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된다면 과학과 생산 및 발명 등의 사회적 창조 행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리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농민과 유리된 채 말로만 인류의 진보를 역설하는 진보주의자들과는 다른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사무관직을 권하는 지리학협회에 거절을 표한다.(252-254)

 

4. 페테르부르크의 상황–알렉산드르 2세의 이중인격, 관리들의 매수–민중 교육 확대의 걸림돌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온 크로포트킨이 보기에 그곳은 궁정 귀족층의 사교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유사상은 신랄하게 비난받았으며, 개혁 인사들은 모두 쫓겨나거나 한직으로 밀려났다.(255) 국립경찰청장 슈발로프 장군과 페테르부르크 시경국장 트레포프 장군은 러시아의 실질적 지배자로서 공포정치를 폈으며, 알렉산드르 2세는 그들의 행정관이자 앞잡이에 불과했다. 국고와 영지, 리투아니아 반란 후 몰수된 토지, 오렌부르크의 바슈키르족 거주 지역에 대한 횡령과 수탈이 대규모로 진행되었고, 이에 항의하는 농민들은 투옥되거나 태형 또는 총살에 처해졌다. 그 외에도 각 관청의 횡령, 특히 철도 및 공업 분야에서 행해진 횡령의 규모는 엄청났다.(256-258) 한편 교육에 신경을 쓰는 자는 없었다. 농촌의 사제들은 결혼식과 장례식을 주재하느라 바빴고, 고위 성직자들은 학교를 장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교육부는 기술 대신 어려운 고전을 가르치는 고등학교만 만들어 학생들이 읽고 생각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교육은 일종의 사치로 여겨졌고, 극소수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특히 기술 교육은 곧 혁명 사상으로 취급되어 금지되었다. 한편 과도한 세금뿐 아니라 연체세금마저 거두어가는 혹독한 정책은 농민들을 파산으로 몰아갔다. 이것이 페테르부르크의 상황이었다.(259-260)

 

 

***

 

Q1. 농촌의 영세 장인 가정에서 태어난 이래 평생 가난에 시달린 프루동과 대조적으로, 크로포트킨은 부유한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농노제 폐지에 찬성하고 민중의 역할을 강조했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동료 지식인들과 비지식인(민중)들 간의 소통의 어려움을 언급하거나, 민중에게 지식을 전파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목에서는 대중의 지적 쇄신을 통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계몽주의와 크로포트킨 사상과의 차이 및 연관성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낭객의 신년만필」(1925)에서 “크로포트킨의 「靑年에게 告하노라」란 論文의 洗禮를 받자”라고 주장했던 신채호 역시, 3.1운동 이후 아나키즘적 성향을 드러내기 전에는 민족자강론을 개진하며 국민 교육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사상을 표방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Q2. ‘노동자’ 또는 ‘농민’이라 해서 일관되고 단일한 주체인 것은 아니며,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특이성을 지닌 대중이 정치적 행동과 결정을 내리고 자생적·자율적인 연대와 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적 조직화가 불가피한데, 코뮌 형태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그러한 조직화 과정이 헤게모니와 통일성의 구축으로부터 자유로울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다소 의문이 들었습니다.

 

Q3. (가네코 후미코와 관련하여)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아나키즘은 반제국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이념으로서 수용되었기에 식민지 현실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 수업에서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아나키스트로 일컬어지는 박열의 경우 독립 국가를 목표로 했으므로 실제 아나키스트라 보기 어려울 수 있다고도 말씀해주셨습니다. 박열이 1921년에 조직한 흑도회의 선언문에는 “우리들은 철저히 자아주의자”이며 “어떤 고정된 주의는 없다”, “크로(크로포트킨)가 무어라고 하거나, 그러한 것에는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해 박열의 사상이 크로포트킨보다 실천적, 행동적인 아나키즘을 표방한다거나, 크로포트킨보다는 바쿠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연구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께서는 박열에 대한 견해가 어떠하신지 궁금합니다. 한편 국내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에 대한 연구에서 부차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 듯한데, 박열과 교제하기 전부터 슈티르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후일 자신을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라 규정하고 아나키즘 운동을 개진하였다고 하므로 그녀의 진술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가 필요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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