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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104/ 2021년 봄학기 인사원/삶과 예술, 예술로서의 삶/고봉준]

 

 

다시-탄생되는 시인

-고정희,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에서 ‘듣는 자’의 존재

 

 

송하얀

 

 

1. 예술과 삶의 거리

: 고정희의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의 <시인의 말>을 점검하며

 

 

예술과 삶이 어떻게 서로 갈마들어 있는가. 예술의 자율성과 사회성의 문제는 근대 이후 오래된 논쟁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다시 지금-여기의 질문으로 만들려는 나의 시도 자체가 근대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전근대-근대-탈근대는 역사적 흐름만이 아닐지 모른다. ‘하나의 시기가 끝나고 다음 시기가 시작된다’라는 역사가 만들어 놓은 우화 속에서, 가상 속에서 우리는 잠들어 있지 않은가. 꿈 안에 누워 삶에서 벌어지는 가치 투쟁을 구경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다 끝난 싸움이야’라는 허무주의와 낭만주의의 삶에 대한 조롱을 넘어 여전히 가치 전도의 출구를 만드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또 하나의 가상을 만들어 내며 헛된 안락을 부순다. 그들을 우리는 예술가라 한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대상들에만 연관되고 개인이나 삶에 연관되지 않는 어떤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예술은 예술가인 전문가들을 통해 특수화하거나 시행된 어떤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삶이 하나의 예술작품일 수는 없을까? 등장이나 집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의 삶은 예술의 대상이 되면 안 되는가?

 

 

푸코는 현대 예술이 어떤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에 집중되어 있고 전문화·특수화되고 있음을 언급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 그 자체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는 예술은 없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삶을 잘 꾸려가는 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보다 가치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삶을 잘 꾸리는 사람을 우리가 예술가라고 부르지 않기에 푸코의 말에 일리가 있다.

하지만 삶을 잘 가꾼다는 것이 무엇일까.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어떤 예술가는 작품으로 기존 삶에 문제제기하고 참된 삶을 꿈꾸지 않는가.

 

 

시를 쓴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비로소 나를 성취해가는 실존의 획득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을 실현하는 장이며

내가 보는 것을 밝히는 방이며

내가 바라는 것을 일구는 땅이다.

그러므로 시를 쓴다는 것은 내게 있어 가리고 선택하는 문제를 넘어선 내 실존 자체의 가장 고상한 모습이다.

따라서 내가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 작업은 내 삶을 휘어잡는 핵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종의 멍에이며 고통이며 눈물겨운 황홀이다. 나의 최선이며 부름에의 응답이다.

나는 시를 쓰는 일이 여기가 될 수 있는 부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시 쓰는 일을 통해서 누구에게나 선사할 수 있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 못 가진 자신이 내내 가슴 아프다.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건 진실이 다 편한 것은 아니며 확실한 것이 다 진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너그러움이 다 사랑은 아니며 아름이 다 절망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내 실존의 겨냥은 최소한의 출구와 최소한의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고정희는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의 시인의 말에서 “나를 성취해가는 실존의 획득”이 시를 쓰기임을 선언하고 하고 있다. 그녀에게 시쓰기는 삶과 분리된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삶을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은 하나의 행위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시쓰기가 삶의 수행이다.

그녀가 성취해가려는 실존은 그녀가 “믿는 것”, “보는 것”, “바라는 것”이다. 그 세 가지는 “진실”과 “사랑”을 지향한다. 하지만 그 진실이라는 것은 불편할 수 있고, “다 진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믿고, 보고, 바라는 것 중 가려내야만 한다. 사랑 역시 진실과 마찬가지여서 너그럽지만은 않고 아픔을 품고 있다. 이 진실과 사랑은 실존에 있어서 “최소한의 출구와 최소한의 사랑”을 획득하려는 절박한 가치이다.

 

 

2. 술틀을 밟는 자와 듣는 자

 

 

새벽에 깨어 있는 자, 그 누군가는

듣고 있다 창틀 밑을 지나는 북서풍이나

대중의 혼이 걸린 백화점 유리창

모두들 따뜻한 자정의 적막 속에서도

손이라도 비어 있는 잡것들을 위하여

눈물 같은 즙을 내며 술틀을 밟는 소리

 

 

들끓는 동해 바다 그 너머

분홍 살 간지르는 봄바람 속에서

실실한 씨앗들이 말라가고 있을 때

노기 찬 태풍들 몰려와

산 준령 뿌리 다 뽑히고 뽑힐 때

시퍼런 눈깔 같은 포도알 이죽이며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아,

 

 

속이라도 비어 있는 빈 병들을 위하여

혼이라도 비어 있는 바보들을 위하여

눈 귀 비어 있는 저희들을 위하여

빈 바람 응응대는 민둥산을 위하여

언 강 하나 끌고 가는 순례자 위하여

아픈 심지 돋우며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아,

 

 

갈 곳이 술집뿐인 석탄불을 위하여

떠날 이 없는 오두막을 위하여

치졸들 와글대는 사랑채를 위하여

활자만 줍고 있는 인쇄공을 위하여

이리저리 떠밀리는 장바닥을 위하여

가야금 하나가 절정을 타고

한 줄의 시가 버림을 당할 때

둔갑을 꿈꾸는 안개 속에서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아,

 

 

잠든 메시아의 봉창이 닫기고

대지는 흰 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작은 길 하나까지 묻어버릴 때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아,

 

 

그의 흰 주의(周衣)는 분노보다 진한

주홍으로 물들고 춤추는 발바닥 포도 향기는

떠서 여기저기 푸른 하늘

갈깊 위에 나부끼는 소리 누군가는

듣고 있구나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지기의 노래」전문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는 “술틀을 밟는 자”의 행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1연에서는 차가운 북서풍이 부는 바깥과 따뜻한 자정을 보내는 ‘백화점’ 내부의 공간적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경계에 술틀을 밟는 자가 존재한다. 그의 술틀을 통해 포도가 술이 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이 술의 성분은 ‘눈물’로 이루어져 있다.

2연은 이 ‘눈물’로 이루어진 술의 질적 특성이 심화된다. 술의 재료인 ‘포도알’은 ‘시퍼런 눈깔’이라는 표현과 결합한다. 포도의 물질성은 눈물이 가진 슬픔의 감상성을 넘어서며 ‘들끓는 동해 바다’, ‘노기 찬 태풍’의 거대한 분노의 흐름 자체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 분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3연에서 5연을 통해 우리는 거대한 분노의 실체에 대해 다가가게 된다. 이 분노는 세계의 흐름과는 단절된 채 ‘속’, ‘혼’, ‘눈 귀’가 텅 빈 채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들은 그 실존이 텅 빈 채 자신의 세계가 안락하고 따뜻하다고 믿는다. 텅 빈 인간들의 행보는 인간 스스로를, 세계 전체를 소외 시킨다. 소외의 반작용으로 세계 전체도 인간을 버리고 있다.

이 거대한 작용과 반작용의 힘들 사이에서 ‘술틀을 밟는 자’가 있다. 술틀을 밟는다는 행위는 악순환의 흐름을 바꾸어낼 단 하나의 삶의 실천이다. 분노의 포도알의 신체성을 해체하며 생산하는 눈물 한 방울, 술로의 ‘둔갑’, 나는 여기에서 디오니소스적인 ‘두 번의 탄생’을 예감한다.

디오니소스는 두 번(Dio)-태어난 자(nysos)를 뜻하며 ‘어머니가 둘인 자’라는 디오메토르(Dio-metor)라는 별명을 가진다. 이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한 번, 수난을 넘어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또 한 번 태어났다는 뜻이다. 또 다른 별명 디티람보스(Dithyrambos) 역시 두 번의 문을 열고 나온 자라는 뜻이다. 니체는 이러한 디오니소스의 비극적 신화를 기반으로 디오니소스적 도취를 미학의 선결적 생리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술이 있으려면, 어떤 미적 행위와 미적 인식이 있으려면 특정한 생리적 선결 조건이 필수 불가결하다.: 즉 도취라는 것이. 도취는 우선 기관 전체의 흥분을 고조시켜야만 한다 : 그러기 전에는 예술이 발생하지 않는다. 다양한 기원을 갖는 온갖 종류의 도취는 모두 예술을 발생시키는 힘을 갖추고 있다. … 도취에서 본질적인 것은 힘이 상승하는 느낌과 충만의 느낌이다. …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충만함으로 인해 만사를 풍요롭게 만든다. : 무엇을 보고 무엇을 원하든 사람들은 그것을 부풀려서 보고 절실한 것으로 보며 강하고 힘이 넘쳐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사물이 그의 힘을 다시 반영해낼 때까지 사물을 변모시킨다. - 사물이 자기의 완전성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 바로 이것이 예술인 것이다. 그의 원래 모습이 아닌 것 전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기쁨이 된다. ; 예술에서 인간은 자신을 완전성으로서 즐기는 것이다.

 

 

내가 미학에 도입했던 아폴론적-디오니소스적이라는 대립 개념은, 도취의 일종으로 파악된 양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폴론적 도취는 무엇보다도 눈을 자극시켜 환영을 보는 능력을 얻게 한다. 화가, 조각가, 서사시인은 환영을 보는 자들의 전형이다. … 디오니소스적 상태에서는 그 반대로 격정(affect) 체계 전체가 자극되고 고조된다 : 그래서 그 상태는 모든 종류의 표현 수단을 한꺼번에 분출시키고, 재현과 모방과 변형과 변화의 능력, 모든 종류의 흉내와 연기를 동시에 내몰아댄다. 그 상태에서 본질적인 것은 능숙한 변신, 반응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능력이다. … 그[디오느소스적 인간]는 격정의 어떤 신호도 간과하지 않으며, 그가 최고단계의 전달기술을 갖고 있듯이, 이해하고 알아차리는 데서도 최고단계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모든 피부와 모든 격정의 내부로 들어간다 : 그는 자신을 계속해서 변모시킨다.”

 

 

니체의 초기 미학을 살펴볼 수 있는 『비극의 탄생』은 도취를 두 가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대립 개념으로 제시한다. 아폴론적인 것이 이성, 가상, 꿈, 이상화와 관련되어 있다면 디오니소스는 감응, 신체, 파괴와 변화를 통한 창조와 관련된다. 이 대립쌍은 니체 미학의 후기에 와서 디오니소스로 흡수된다. 디오니소스의 “파괴할 때의 기쁨”은 도래할 미래 혹은 가상의 창조성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적 도취는 파괴/창조, 거짓/진실, 도덕적/반도덕적 가치들의 준거점을 흔들면서 사물과 자아, 세계를 변모시키고 잠재적 완전성을 준비한다.

이 지점에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로 돌아가보자. 이 시에서는 술틀을 밟는 자의 행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술틀의 소리, 슬픔과 분노의 포도가 생산해 낸 술의 향기를 세계적 흐름 속에 길어 올리고, 감응으로서 체험하는 또 다른 자가 있다. 바로 1연과 6연에서 등장하는 ‘듣는 자’가 이다. 우리는 이 ‘듣는 자’를 통해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참여하게 된다.

이 듣는 자는 4연의 “한 줄의 시가 버림당할 때/둔갑을 꿈꾸는 안개 속에서”라는 문제적 두 행과 결합하게 된다. 시 안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시’와 ‘둔갑을 꿈꾸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고정희는 4연에서 해결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열쇠를 시 안에서 찾을 것을 요구받는데 그것이 바로 ‘듣는 자’인 것이다. 이 듣는 자는 술틀을 밟는 자의 행위를 따라 삶의 미학적 가치를 시를 통해 길어 올린다.

이는 ‘듣는 자’의 개체적 의지라기보다 그의 버림받은 시와 술틀을 밟는 자의 술과의 결합을 통해서이다. 시는 그가 술틀을 밟는 자의 창조적 가치를 순식간에 도취로써 체험하는 순간 생성된다. 즉 ‘듣는 자’는 슬픔과 분노로써 감응을 넘어 창조적 삶의 방식을 시로 창조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도취는 그의 자아마저 텅 비우고 술틀을 밟는 자가 수행하고 있는 삶의 창조적 방향으로 흐르도록 한다. ‘듣는 자’에서 ‘시인’으로, 두 번째 탄생. 시인은 듣는 자로 존재했던 스스로의 삶을 재료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미래에 도래할 창조적 삶을 준비하는 시인 자신의 실존의 구축이다.

 

 

3. 차라투스트라 : 장례를 치르는 자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의 시집에 「차라투스트라」라는 작품 역시 창조적 실존을 구축하려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으며 또한 고정희의 초기시에서 니체 사상의 영향 관계를 짐작케 한다.

 

 

(한 손에 물통과 두레박을 메고

남은 발에 쇠고랑과 문명을 끌고

죽어서 날아간 새 눈물을 밟으며

차라투스트라

차라투스트라가 가는 길)

 

 

1

그대들이여, 그대 정신 돌아왔는가

한 모금의 물이 고인 그대 영혼 돌아왔는가

여기 그대들이 버린 사막 한복판

샘물은 말라 대지 갈라지고

여기 영혼의 빈 두레박

그대들 빈 접시 소리 떠돌아

잡풀 위에 말(言)들만 쓰러져 우는구나

 

 

(…중략…)

 

 

2.

포도즙을 짜면서 목이 타는 그대

그대는 또 무엇을 잃어는가?

그대는 또 무엇을 버렸는가?

그대에게 멸시받은 것들을 그대는 잃었다

그대에게 보지 못한 것들을 그대는 버렸다

그대 가슴속에서 자라는 선인장은

결코 그대를 찌르지 않는다

가슴속 무성한 가시의 축제를

그대의 손은 더듬지 않는다. 가시 돋아

독 묻은 꽃송이를 어여삐 피우고

그대 몰골은 창밖에 떨고 있다

흔들리는 적도를 지나는 그대

삶을 떠난 자를 위한 애도를 바친다

죽은 자를 위한 정(釘)을 박는다

 

 

3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의 일

오 이천 년대 시체 앞에 꽃을 꽂은

그대들아 오라 장례를 지내자

한모금의 물이 고인 그대 영혼 위해서

앙금으로 주저앉은 그대 정신 위해서

수백 년 가불된 죽음을 보내자

경악으로 떠나가는 바람을 매고

(일찍이 없었던 황홀한 장례)

 

 

(…중략…)

 

 

그리고 다가와 일렬횡대로 서서

주검 속 번쩍이는 그대 거울을 향해

다소곳이 그대 허리를 구부리라

그때 그대는 알게 되리라

(그대가 만나는 최초의 그대)

우리가 보내는 이 최초의 장송 앞에서

슬픔도 기쁨 또한 떠나감을 보리라

이제 가라

가서 땀이 강처럼 넘치게 하라

그때 그대는 샘이 되리라

(일찍이 없었던 아름다운 장례)

 

 

-「차라투스트라」부분

 

 

「차라투스트라」, 1부는 ‘그대들’이 버린 세계의 모습을 사막으로 전경화하고 있다. 샘물이 말라 갈라진 대지 위 빈 두레박, 빈 접시가 굴러다닌다. 그곳에는 사물 뿐 아니라 정처를 잃은 말(言)과 칼을 가는 오기들이 웅웅대는 소리만이 무용하게 사막을 채우고 있다. 이는 ‘자지러진 자궁’이라는 표현을 만나며 시인이 현재 세계에 대해 인간이 창조성과 생명력이라는 가치까지 버렸다고 진단함을 알게 한다.

하지만 세계의 생명력은 인간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멸시되고, 인간이 보지 못한 것이라 해서 생명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2부에서는 황폐해진 인간 내부에서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자라나는 선인장이 주목된다. 이 선인장과 인간의 관계 안에 긴장감이 서린다. 선인장은 인간을 파괴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지 않는다. 단지 자기의 생존 본능의 흐름으로 가시를 돋구고, 꽃송이를 피운다. 선인장의 생명력은 인간을 ‘창밖’이라는 분리된 공간성으로 이동시켜버린다. 세계는 죽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삶을 떠났고, 그렇기에 ‘죽은 자’로 호명되고 있다.

그리고 3부에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가 펼쳐진다. 우리는 시의 서두에 등장했던 차라투스트라를 마주한다. ‘그대들아 오라 장례를 지내자’라고 말하는 자. 죽은 자들을 불러 모아 장례를 준비는 자가 바로 차라투스트라다. 이 장례는 근원적 본능에 반하는 인간의 무생명성, 무창조성을 떠나보내는 사티로스식 제의이다.

 

 

예술은 … 특정한 가치 평가들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키거나 [한다.]…[예술은] 예술의 의미인 삶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가? 삶이 소망할 만한 것으로 향하고 있지는 않은가?-예술은 삶의 위대한 자극제이다. … 비극적 예술가는 자신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인가? 그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끔찍한 것과 의문스러운 것 앞에서의 공포 없는 상태가 아닌가? - 그 상태 자체가 지극히 소망할 만한 것이다 : 이런 상태를 알고 있는 자는 이것에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그가 예술가라면, 그가 전달의 천재라면, 그는 그 상태를 전달하며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강력한 적수 앞에서, 커다란 재난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문제 앞에서 느끼는 용기와 자유-이런 승리의 상태가 바로 비극적 예술가가 선택하는 상태이며, 그가 찬미하는 상태이다. 비극 앞에서 우리 영혼 내부의 전사가 자신의 사티로스의 제의(祭儀)를 거행한다.

 

니체는 예술을 삶을 위한 장치로 위치시킨다. 끔찍하고, 의문스러운 것 앞에서의 공포를 전달하면서도 그러한 공포가 없는 삶을 전달하는 예술의 이중성. 이 운동에는 ‘용기와 자유’의 승리라는 기쁨이 넘쳐흐른다. 시「차라투스타라」에서 무생명성과 무창조성의 인간을 보내고 ‘주검 속에 번쩍이는 거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기쁨의 에너지 속에서 이뤄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시 한번 태어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인간을 장례 치르는 일은 ‘한 모금의 물이 고인’ 영혼, ‘앙금으로 주저앉은’ 정신을 살려내고 나아가 그것이 생명과 창조를 재생할 샘이 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이 장례는 황홀하고, 아름다운 장례가 된다. 현재적 파괴는 미래적 창조를 준비한다.

 

 

4. 탄생되는 시인

 

 

우리 서로 문 닫고 혼자인 밤에는

사는 것이 돌보다 무거운 짐 같고

끝내는 눈 덮인 설원 하나 곤두서서

더운 내 부분을 지나갑니다

무사한 날을 골라 반기는 그대

우리는 정말 친구인가요?

우리는 정말 시인인가요?

캄캄한 어둠이 우리 덮는 밤에는

제 십자가 무거워 우는 소리 들리고

한 사람의 시인도 이 땅에는 없습니다

 

 

-「탄생되는 시인을 위하여-예술 진화론을 죽이며」전문

 

고정희에게 있어 시쓰기는 실존을 구축하는 삶의 창조적 행위였다. 우리는 앞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예술가, 시인의 존재에 대한 고정희의 탐색을 살펴볼 수 있었다. 슬픔과 고통과 파괴를 넘어서 삶의 창조를 미학적으로 구축해내는 자로서 시인, 생명의 흐름으로 존재를 다시금 일구어내는 자, 그것이 고정희가 예비하는 미래이며, 황폐해진 인간 문명 속에서 ‘최소한의 출구’를 마련하려는 고투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예술로서 삶을 창안하려는 자가 얼마나 될까. 「탄생되는 시인을 위하여」에서 우리는 시인의 비극적 인식 앞에서 묻게 된다. ‘술틀을 밟는 자’의 소리를 신체로 듣는 자, 인간의 두 번째 탄생을 위해 장례를 마련하는 자. 이들은 세계 안에서 세계를 겪어내며 인간과 함께 있는 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에서 등장하는 ‘시인’은 무사한 날들을 골라서만 인간을 반기며, 인간이 고통 속에 있을 때 홀로 둔다. 그들 역시도 폐쇄된 채 고통이, 재난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그 고통 안에서 고통과 같이 걷지 않는 그들은 「차라투스트라」의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시인도 이 땅에는 없”다고 단언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비극적 시 안에서도 “제 십자가 무거워 우는 소리”를 누군가는 듣고 있을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시의 화자는「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에서 ‘듣는 자’의 변신, 탄생될 시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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