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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서의 삶] 에세이 -황

황정 2021.06.28 18:20 조회 수 : 34

파레시아와 유머, 거슬리는 바깥의 삶들

푸코와 함께 카프카 읽기

 

 

2021년 1학기 인사원 [예술로서의 삶]

황정화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

1904년 카프카가 오스카 폴라크에게 보낸 편지 중

 

1. 물음-카프카 읽기의 관음적 불편함

 

일기와 편지 예술로서의 삶, 혹은 삶으로서의 예술에 가장 걸맞은 현대 작가는 프란츠 카프카가 아닐까. 작품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그가 생전에 남긴 파편 찾기는 프라하 인근에서 아직 진행 중에 있고, 카프카에 대한 전기적 사실과 결부된 작품 연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인간 카프카를 경유하지 않은 채 그의 소설을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카프카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K’들은 으레 카프카로 읽히는 것이 당연시되기도 한다. 그 어떤 작가보다도 카프카의 소설은 많은 평론가, 철학자들에 의해 삶과 분리시킬 수 없는 무엇으로 간주되어 왔다.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그의 작품을 오이디푸스적 발현으로 낙인찍기에 충분한 증거 자료가 되었고, 그의 일기와 편지 속에 등장하는 일상의 고민들은 그것을 확고하게 뒷받침하는 증언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삶 혹은 사생활 카프카 의지와 상관없이 묶여서 발간된 『일기』와 『편지』는 『성』, 『소송』, 『실종자』 등과 함께 카프카 전집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두 권의 책에는 창작 노트라 할 만한 많은 습작들과 글쓰기의 고민들이 날짜와 함께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어떤 날의 일기는 빛나는 아포리즘으로 읽히기도 하고, 때로 소설 작품의 프롤로그나 에필로그로 읽히기에 충분한 글들이 있다. 그것으로는 이 두꺼운 책을 읽어내기에 불편함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카프카의 일기와 편지를 통해서 카프카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은밀한 내면의 독백과 연애 과정의 실랑이와 감추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가족 이야기 등을 통해서 말이다. 어쩌면 사생활일지도 모르는 삶의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읽히기를 원치 않았을지도 모를 이 글들(작가 생전의 미완성, 미발표의 다른 소설들도 자유롭지는 못하다)을 우리는 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이 작품 읽기를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는 무구한 기대감이거나, 혹은 인간 카프카를 엿보는 무해한 관음증적 호기심일지라도, 어쨌든 우리는 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작가는 무엇을 기억하려고 일기를 쓰는 것일까? 작가는 자기 자신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일기는 작가 자신이 위험한 변신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예감할 때 스스로 자기 확인을 하기 위해서 작성하는 일련의 지표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순찰도로이다.(...) 여기 이 일기라는 길에서는 아직 진짜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루어진다. 말하는 자는 아직 이름을 소유하고 있으며 자기 이름을 내걸고 말한다. 일기-완전한 고독한 것 같아 보이는 이 책-는 종종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오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과 고뇌로 인하여 쓰인다. (...) 일기를 쓰는 작가들이 모든 작가들 중 가장 문학적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그렇게 일기를 씀으로써 문학의 극한성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 문학이 시간의 부재, 그 매혹적인 군림이라면 말이다.

쓰여진 망각 블랑쇼는 일기와 작품을, 작가와 작품을 분리한다. 작가는 작품이 예술의 추구가 되면 문학이 되는 순간부터 형태도 운명도 없는 중성의 힘을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품으로부터 자기 자신에 대한 권한을 박탈당하는 데 대한 혐오감과 불안감의 발현으로 일기는 쓰이는 것이다. 망각의 글을 쓰기, 즉 일기를 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독자를 상정한 글쓰기가 아니라 작가 스스로를 위한 작품으로부터 오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과 고뇌로 인하여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기가 작품이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어느 지점부터 일기는 작가와 멀어져 일기 속의 등장하는 ‘나’는 “그”라는 비인칭이 된 나, 타인인 된 나인가.

러니까 이것은(일기)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일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글을 쓴다는 행위의 경험 그 자체의 흐름이기도 하다. 글 쓰는 행위의 시작에 가장 가깝고 또한 카프카가 글을 쓴다는 이 말에 부여하기에 이르렀던 가장 본질적인 의미로서의 글을 쓴다는 행위의 경험, 그 자체의 흐름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일기는 이러한 각도에서 살펴져야 할 것이다.

블랑쇼는 또한 작가들의 일기 쓰기를 글을 쓴다는 행위 경험, 그 자체의 흐름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기 역시 작가가 실존을 건 글쓰기의 흐름의 한 줄기 속에 놓여 있으며, 그 줄기는 사생활 혹은 삶의 글이 작가 개인으로부터 작품 쪽으로 뻗어나가는 흐름을 읽어야 한다는 뜻일 테다.

편지의 주체는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주체로 나뉜다, 즉 편지 쓰는 나와 편지 속의 나가 이중화되어 존재한다. 언표행위의 주체는 언표주체가 활동하는 편지 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언표주체의 결백성도 입증해 주는데. 왜냐하면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기 때문이다.

편지에서는 편지를 쓰는 개인 ‘카프카’와 편지 속의 ‘나’는 이중화되어 있다고 들뢰즈, 가타리는 말한다. 이때 편지는 쓰는 나와 쓰여진 나 사이의 근접성이 상실되고 그것은 오히려 글쓰기 그 자체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 행위로서의 편지 쓰기, 그 흐름으로서의 일기 쓰기는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읽을 이유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작품은 작가로부터 얼마나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것일까, 얼마나 거리를 두어야 할까. 아마 푸코는 분리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예술은 자기 구성과 삶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작품명 프란츠 카프카 그렇다면 다른 물음이 생긴다. 작가에 의해 쓰인 모든 글들은 작품의 지위를 갖는가, 최소한 발표된 글은(자의든 타의든) 의심의 여지 없이 작품으로 읽어야 하는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한다”는 푸코의 ‘실존 미학’을 따른다면 카프카의 삶은 그 어떤 개인의 삶 중에서 가장 먼저 예술 작품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 자체가, 카프카의 삶이 예술 작품이라는 한에서 우리는 그의 편지와 일기 읽기의 불편함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독은 벌만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나는 이 모든 불행에 거의 무감각하다.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나는 글을 쓸 것이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나의 투쟁이다.

카프카, 『일기』 중

 

2. 실존 미학의 같거나 다른 방식: 파레시아와 유머

 

‘너 자신을 돌보라’ 푸코의 실존 미학을 실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기예로서 자기 돌봄이다. 그것은 삶의 양태를 변형하고 다른 식으로 만들어 내기 위한 자기 구성의 가장 기본 행위이다. 그것은 삶의 다양한 차원에서 주의를 집중하고 나아가 예술작품의 애매한 본성에서 도래하는 지향과 영감을 갖춘 인간의 총체적 작업을 아우른다. 1980년대 이후 푸코의 관심은 ‘고백’. ‘고해’, ‘의식 점검’ 등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다양한 기술 등에 있었다. 푸코의 후기 사유의 핵심 개념인 ‘파레시아’는 진실을 말하는 용기, 위험을 감수하는 말하기, 비판적 태도 등을 뜻한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기울어진 권력 관계의 아래에서 위로, 위험을 감수하는 유형의 말하기는 자기 돌봄의 실천인 것이다. 파레시아는 실존을 걸고 하는 마지막 말일지도 모른다.

카프카적 자기 돌봄은 어떤가. 타자를 상정하지 않는 파레시아가 있다면, 그것은 카프카의 일기를 통한 자기 돌봄이 아니었을까. 『성』에서의 케이가 성 주위를 끊임없이 서성거리는 행위를 일종의 파레시아로 볼 수는 없을까. 파레시아가 자기 실존을 담보로 한다면, 자신의 위험을 각오하는 말하기를 실천하는 자라면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은 신체(실존)를 건 위험한 말하기의 파레시아트가 아닐까. 부당한,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짐지고 있는 나약한 존재의 진실 말하기의 방식으로 『변신』을 읽어내는 것은 어떨까. 마치 높은 성벽 주위에서, 마치 법의 문앞에서, 마치 아버지의 선고 앞에서, 그리하여 거대한 권력 앞에서 서성거리던 수많은 ‘K’의 이름으로 그의 외침은 벌레로의 변신이었을 것이다.

폭로의 유머 푸코는 파레시아의 가능 조건으로서의 (견유주의자의)삶의 방식을 ‘폭로적’이라는고 하였다. 그릇된 믿음, 사회적 관습, 무의미한 의무 등과 단절하고 그것들이 은폐하는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들의 발화하는 신체는 다른 삶과 다른 세계를 열어주고 무한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길로 나아간다.

카프카의 『선고』의 주인공 게오르크는 “나는 지금 너에게 빠져 죽을 것을 선고한다.”는 아버지의 명령를 극단적인 순종으로 실행에 옮긴다. “부모님, 전 항상 부모님을 사랑했습니다.” 그가 나지막이 외친 마지막 말이다. 카프카의 유머는 이렇게 발생한다. 계약 혹은 복종의 관계에 있는 인물들의 강압적인 명령과 그에 대한 과잉된 복종을 통해서 황당한 유머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 복종이야말로 극단적인 복종의 행위를 통해서 강압적인 명령의 무의미함을 폭로하고, 오이디푸스의 누명을 어처구니 없음으로 끊어내는 것이다. 인물의 이 극단의 행위는 희극적 효과를 통해서 진실 말하기의 카프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파레시아 게임 파레시아스트와 그의 말을 듣는 대화 상대자 간의 계약, 즉 파레시아트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게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선고』에서 아버지와의 대화는 희극적 효과를 창출한다. 여기서 독자는 카프카와의 파레시아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카프카의 유머로부터 어떤 ‘진실 말하기’의 극단을 경청해야 하는 것이다. 단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 사로잡힌 원숭이는 인간의 명령에 의해 생존을 위한 복종을 시작한다. 원숭이는 인간을 관찰하고 인간을 흉내 내고 그리하여 유럽인의 평균 교양에 도달하게 된다. 스스로 부과했던 최고의 계명-원숭이의 인간되기-는 과잉 달성되기에 이른다. 원숭이의 첫 번째 선생은 자신이 거의 원숭이처럼 되었고, 곧 수업을 포기하고 은신처로 숨어 버려야 했다. 경계를 넘어선 복종의 과잉, 그 지점에서 카프카의 희극적 그로테스크에 의한 전복이 이루어진다. 원숭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서 유머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인 복종과 그 결과의 전복으로부터의 유머이다. 카프카의 이런 유머 게임의 약속된 청자로 우리는 실험에 참여하여 그의 유머로부터 어떤 진실 말하기를 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너의 불행 안에 불행한 자를 환대하라”

모리스 블라쇼 『저 너머로의 발걸음』

3. 저항의 미시적 기호 : 더 작은 것들의 존재-감

 

벌거벗음 푸코는 퀴니코스파의 삶의 양태, 즉 ‘벌거벗음’, ‘삶의 미니멀한 본질’에 대해 주목한다. ‘표현의 권리’를 갖지 못한 ‘차원 낮은 것’의 침입의 장으로서의 예술의 성질이 그것이다. 푸코의 “존재의 벌거벗은 요소의 침입의 장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카프카적 표현들을 그의 단편 소설에 찾아 보면 어떨까.

거슬리는 감각 카프카는 일기에서 ‘작은 문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용어는 카프카 문학을 설명하는 여러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 소수적 성격의 문학을 의미하기도 하고, 미완의 운명을 가진 소설들을 이르기도 하며, 말 그대로 단편 소설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할 테다. 또한 거기에 등장하는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것들이 존재함을 표현하기에도 적당할 듯하다. 소위 이 작은 문학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알 수 없는 벌레들, 나무들, 작은 유령, 재칼, 연구하는 개, 양동이, 보고하는 원숭이, 노래하는 쥐, 그리고 더 작은 존재들. 이러한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대개는 시각적으로, 다소 촉각적으로, 거슬리는 청각적으로, 이들은 감각적으로 존재한다.

망각된 사물의 형태, 오드라테크 Odradek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이름의 낡은 실타래 조각. 그의 웃음 소리는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가 도대체 죽을 수도 있을까?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테크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왜? 그에게는 망각의 능력이 없는 것이다.

불안의 적절한 형태, 튀기 반은 고양이 새끼이고 반은 새끼양인 별난 짐승 한 마리가 있다. 아버지에게 상속받았지만, 내가 데리고 있는 동안에야 비로소 진전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두 가지 불안감, 즉 고양이의 불안과 양의 불안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 그래서 튀기에게는 자기 살갗이 너무 비좁다. 내게서 진전이 되기 시작한 이 불안의 생명, 튀기를 푸줏간 주인에게 맡길 수 없다.

등 뒤에 있는 맹목의 동반자 나이든 독신주의자 블룸펠트는 단지 동반자가 갖고 싶은 것이다. 등 뒤에는 파란 줄이 쳐진 두 개의 작고 흰 셀룰로이드 공이 널마루에서 오르락내리락 튀고 있다. 하나가 바닥을 치면 다른 하나는 공중으로 솟고, 그것들은 지칠 줄을 모르고 그 놀이를 계속하고 있다. 아주 작고 끊임없는 소리가 일으키는 온갖 불쾌함으로 블룸펠트는 괴롭다. 그것은 언제나 튀어 오르는 공, 동반자의 소리이다.

이유 없음의 존재들 이들은 작은 소설의 공간을 횡단하면서 새로운 변이 지대를 창출해 낸다. 그 전체가 아무 의미 없이 보이지만 움직임이 많아서 붙잡을 수도 없다. 그들은 리듬, 무게, 부피, 형상을 가진 듯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만한 유기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의 있음으로 인해서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늘 무엇으로든 어디에서든 감각된다. 그들의 존재 방식이다. 그림자만 남은 듯 낯선 비인칭적 다가섬, 경계를 그을 수 없는 존재들을 체험하게 된다. 이유 없이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일상의 평안을 거스르는 것들의 이 불편한 존재-감. 이 작은 것들은 무엇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선명하게 서성거린다. 이것들은 부단한 제자리 걸음은 주위를 기묘하게 교란시키고, 고요한 내면을 흔들어 놓는다. 우리는 이들 존재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권력 안에 내재해 있는 저항, 그보다 우리 속에 내재한 저항을 카프카적 기호로서 더 작은 것들은 존재감을 읽는 것은 어떨까.

 

 

“나는 지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카프카 『카프카의 일기』 중

 

4. ‘카프카’로서의 삶 : 실존을 건 글쓰기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푸코는 기성 질서의 비판적 해체, 즉 기성의 모든 형식에 대한 항구적 거부와 거절, 이것을 곧 혁명적 삶이라 부른다. 카프카는 어떠한가. 그는 1883년 프라하에 태어나 줄곧 거기에 살았고 14년 동안 ‘근로자 보험회사’라는 직장에 다녔다. 그리고 퇴근 후에 글을 쓰다가 마흔 한 살의 나이로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혁명과는 거리가 먼 프로필이다. 그러나 카프카에게는 또 다른 실존이 있다. 기존의 삶과 도래할 삶 사이 존재하는 글쓰기, 글쓰기는 카프카의 혁명적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소수적인 문학이 가장 사적인 것조차 사회적인 것인 것으로 다룬”다는 벤야민의 말로 카프카 문학을, 카프카의 삶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푸코의 예술론의 핵심은 주어진 자기가 부재하는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예술작품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이 예술이 되는 경지, 예술로서 삶이 카프카의 글쓰기에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경이로운 투쟁의 수단이다. 이 세계에서 추방 당한 자의 다른 세계에서의 투쟁의 수단으로서의 글쓰기, 곧 카프카인 것이다.

“나는 문학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이외의 것은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카프카의 삶은 그 자체로 작품인가 그렇다. 그는 글쓰기에 실존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기 구성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의 글쓰기는 자기 돌봄의 가장 위대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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