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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天葬: Sky Funeral)

 

                                                                                                     이 정 섭

 

 

두 축

 

 천장은 두 축으로 진행한다. 한 축은 사람들이, 다른 축은 독수리들이 주도한다. 먼저 한 축에선, 마을에 돌아가신 분이 계시면 가까운 이웃과 먼 친척들 그리고 천장사와 더불어 시체를 천장터로 실어 나른다. 다음 축인 천창터에서는 천장사의 간단한 염이 이어진 후 천장사가 독수리들을 모으면 독수리들은 사체 주변으로 모여든다. 독수리들은 서로 날개를 부딪치고 돌먼지를 날리며 앞다투어 사체를 거침없이 찢는다. 숨소리조차 삼겨 버리는 장면이다. 독소리의 퍼덕거리는 날개 부딪치는 소리만 울린다. 이 소리와 섞일 수 있는 것은 바람뿐이리라.

 여기선 어떤 통시적인 기억을 허락하지 않는다. 죽은 자에 대해 아무도 그의 생전의 삶을 회상하지 않는다. 사체가 천장터로 왔을 때 그 사체는 순전한 사체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사체에는 아무런 생존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에, 천장터의 사체는 다음 장면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생존의 끈을 완전히 단절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의 생전 삶을 가장 많이 기억하는 자들은 천장터에 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를 사체로 돌려 보랠 수 있는 최소한의 짧은 기억의 소유자들만이 그 여정에 동참한다. 살아계셨던 분에 대한 회상은 마을에서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우린 이 지점에서 천장이 품고 있는 한 축이 깊은 단절rupure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장은 필수적으로 삶과의 단절을 전제한다.

 천장터에는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난다고 한다. 아무리 비유가 강한 사람도 토하거나 헛구역질을 한다. 마치 별개의 땅에 들어서는 문턱처럼 냄새가 천장터를 강하게 에워싼다. 사체가 이 냄새의 문턱 안으로 들어오면 비로소 ’온전한‘ 사체로서 처신할 수 있게 된다. 천장사 조차 결코 떠나는 자와 남은 자 사이를 중재하지 않는다. 그는 가깝고 먼 준령들 사이, 고도의 높은 하늘에서 부는 바람 안에서 서서히 커지는 얼룩같이, 독수리들이 모여들기를 기도할 뿐이다. 그리하여 독수리들이 한껏 포식해 천장터 사체의 생고기 한 점 없이 사라지기를 기원한다. 그렇게 해체된 사체만이 대자연의 바람 사이로 퍼져나갈 수 있으리라. 이제 사체는 독수리가 되고, 궁극적으로 바람이 된다. 사체가 있었는지조차 식별 불가능한 지점으로 퍼져나간다. 시체의 바람-되기, 혹은 분자-되기가 이 축이다. 비로소 이 축 위에서 수많은 세대를 거쳐 수많은 생성을 낳은 천장의 의례가 완성된다.

 

‘단절’과 ‘되기’라는 개념은 『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사용한 것이다.

 

“평온함과 격노” 음악은 파멸, 온갖 종류의 파멸, 소멸, 절멸, 파괴, 탈구(dislocation)를 갈망한다. 그것은 음악의 잠재적인 파시즘이 아닌가? 하지만 매번 음악가가 <In memoriam>을 쓸 때마다, 문제는 영감의 모티브나 추억이 아니라, 반대로 ‘되기’(혹은 생성, 김재인 번역)이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추락할 것’을 무릅쓰고 자신의 고유한 위험에 맞설 뿐인 ‘되기’이다. 음악의 내용 자체이면서 죽음에까지 이르는 어린이-되기, 여성-되기, 동물-되기.

 

 들뢰즈/가타르(이하 들/가)의 음악은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한 축은 파멸, 소멸, 절멸, 파괴, 탈구(dislocation)를 감당한다. 그 축에서 탈영토화는 격노하듯 단절되는 과정이다. 다른 한 축은 ‘되기’ 즉 생성의 축이다. 이 축에서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추락할 것을 무릅쓰고 자신의 고유한 위험에 맞설 뿐인 ‘되기’의 축이다. 이 후자의 축이 ‘되기’ 혹은 ‘분자-되기’의 축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들/가에게서 ”모든 생성은 이미 분자적이다.“ 이 축에서는 탈영토화는 매개를 통해 연속적으로 생성된다.

‘단절’과 ‘분자-되기’는 탈영토화의 두 축이기도 하다. 들/가는 탈영토화의 다섯 번째 정리에서 이 점을 지적한다.

 

 ”다섯 번째 정리: 탈영토화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시에 [~이] 되는(생성하는, 김재인 번역) ‘다수의 변수’와 ‘소수의 변수’의 공존을 함축하기 때문이다(되기 속에서 이 두 가지 항은 서로 교환되거나, 동일시되지 않고, 비대칭적인 블록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이 블록 속에서 하나의 항은 다른 항 못지 않게 변화하면서 이웃지대를 구축한다).“

 

 ‘다수의 변수’(김재인 역 대변수)와 ‘소수의 변수(같은 책 소변수)의 공존이 생성의 비대칭적 블록 속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항이다. 전자의 변수는 주체의 단절을 품고 있고 후자의 변수는 분자-되기의 매개를 설정한다. 후자를 통해 ’집합이나 상태로서의 소수‘는 ’생성으로서의 소수‘로 변모한다. 그리고 ’두 개의 공존하는 항‘은 니체의 주사위 놀이의 항들에 대응한다. 위로 던져진 주사위는 탈영토화의 단절의 선을 긍정한다면 다시 떨어지며 새롭게 형성되는 조합의 판은 분자-되기의 생성의 판을 긍정한다. 전자가 삶에서 죽음으로의 변모를 긍정한다면 후자는 죽음의 ’되기‘ 혹은 생성으로 변모를 긍정한다.

 이런 두 축 혹은 두 변수는 공생의 항들이다. 공생은 한 생명이 개체로부터의 단절과 관계로서의 생성이라는 두 항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톰 웨이크퍼드는 공생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서로 다른 생물이 다른 생물에 붙어 살거나 내부에서 살아가는 모든 경우를 일컫는다.“고 설명한다. 이런 공생의 원리하에서 사체를 분해하는 박테리아는 새롭게 정의된다. ”박테리아에 대한 언어가 죽음의 사자가 아니라 동적인 변환의 중개자로 점진적으로 변형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테리아처럼 개체의 죽음을 새로운 생성의 매개로 변환시키는 중개자들은 공생의 두 축을 완성한다.

 모든 생명이 공생체라는 원리는 천장에서 극단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어떻게 천장이란 의례가 상상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천장의 통상적인 티벳의 사회 문화 지리적 특수성으로 설명될 수 없다. 우리가 단절과 생성의 원리라 부른 공생의 원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면 천장을 설명할 수 없다.

 천장터에는 이런 공생의 원리를 체화하는 수많은 공생체들이 있다. 이들은 천장터의 모든 시공간을 응시한다. 이 응시의 시간은 크로노스의 단절과 카이르스의 생성의 시간이다. 천장터 주변에서 시간은 축을 잃었다. 시간은 요동치고, 수많은 자아들은 이 시간을 응시한다.

 

 

포식과 응시

 

"네, 당신을 따라 천장을 ’보기 위해‘ 이곳까지 왔지만 천장은 너무 잔혹하고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그렇군요. 그러나 나는 이번 여행 중 랑무쓰 천장터를 돌아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어요. 사람이 산 물고기, 소, 돼지 등을 잡아먹는 거나, 독수리가 사람을 먹는 거나 다 같은 이치라는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동물들도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지 않소?"

"허긴 그렇지요."

- 오마이 뉴스.20110519..독수리의 먹이로 육신 내놓는 사람들.. 최오균 기자

 

 천장은 응시하는 자들을 위한 장례이다. 독수리들이 시신을 포식할 때 망자를 기리는 사람들은 가까운 비탈에서 응시한다. 이방인들에게는 이 행위가 잔혹하고 두렵게 느껴지지만 천장 의례의 참가자들에겐 자신들을 넘어서는 어떤 화해를 경험한다고 한다. 포식의 일방성이 아닌 상호성은 이들에겐 당연한 자연적 원리이기 때문이리라. 이들의 포식은 이방인의 위계적인 피라미드 구조를 모른다. 평평한 포식, 즉 먹고 먹히는 공생의 포식만 이들은 알고 있다.

 위계적 포식은 주체와 대상의 구분을 전제한다. 포식당하는 주체는 스스로가 대상으로 전락하기에 열등한 단계를 떠받치고 있다. 포식하는 주체는 대상을 주체가 삼키기에 우등한 상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피라미드식 위계적 계열화는 순환이 없다. 만일 순환이 있다면 그것은 예외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경우이다. 이런 구조가 가장 안정될 때는 모든 생명체가 자기의 분수에 맞는 위치에 기거할때이다. 우린 이런 운명을 피라미드식 먹이사슬 구조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배구조에서도 똑같이 경험한다. 우리의 문명은 이런 구조의 답습인 것이다. 이 구조에서 주체는 포식할 지언정 포식당할 수 없는 주체이다. 그들은 안으로 더 단단해져 수많은 대상을 더욱 포식할 때 최대한의 역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평평한 포식에서는 하등/고등이라는 위계적 포식이 의미를 상실한다. 포식조차 공생의 관계에 포함된다. 이를테면 위계적 포식에서 가장 ’하등‘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 박테리아일 것이다. 그런데 이 박테리아는 가장 진화된 종들이라 여겨지는 상위 포식자들의 내부 소화기와 외부 피부층에 엄청난 수로 공생하고 있다. 인간만 하더라도 10조개의 피부세포보다 10배는 많은 미생물들을 품고 있다고 한다. 이들 미생물들의 포식행위는 인간 생존에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상호 포식하는 공생의 상상력은 제인 베넷에게서는 사물에게서 까지 구체화 된다. 그녀의 책, 『생동하는 물질』에 등장하는 무수한 사물들은 생명체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사물-권력을 발휘하고 있다. 예를들어 우리가 소화시키는 특정한 분자들은 역으로 우리를 조정한다. 이런 포식에 의한 공생의 상상력은 마침내 그녀는 사물들을 포함하는 모든 개체들의 정치 생태학을 제안하게 한다.

 이런 서구적인 공생개념이 아니더라도 티벳의 문화에는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공생의 의식이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에서는 라다크 사람들의 공생 의식을 추적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라다크의 원주민들은 가축을 포식하지만 그들의 포식행위는 인간들의 포획하는 행위가 아니라 가축들이 인간에게 베푸는 보시행위이다. 이 행위를 통해 가축은 부처가 ’된다‘. 라다크의 포식당하는 부처들이 가축이라면 천장의 독수리들은 포식하는 부처가 아닐까? 천장의 의례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깨끗하게 분해된 사체이다. 사체의 흔적조차 없이 분자 단위로 사라지는 사체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체만이 티벳의 고도에 부는 바람처럼 그들을 자유로울 수 있게 한다.

 티벳의 3천 미터가 넘는 산들, 그 사이 흐르는 바람 멀리 그 끝을 알수 없는 하늘, 척박한 대지와 사체 그리고 포식하는 독수리들, 이 장면을 응시하는 천장터의 참가자들! 이들은 주체가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해체되는 사체만큼이나 분해되는 주체들의 촉지적 ’응시자들‘인 것이다.

 ’응시‘ 개념을 지속적으로 사유한 철학자는 폴로티누스이다. 그리고 이 신플라톤주의의 고대의 철학자의 이 개념에 가장 천착한 철학자는 들뢰즈라고 한다. 들뢰즈가 자살한 날로부터 사흘 뒤인 199년 11월 7일 화요일 조르조 아감벤은, 『리베라시옹』지에 「인간과 개를 빼고」라는 추도문을 기고했다. 아감벤은 이렇게 회고한다. 들뢰즈가 파리8대학에서 퇴직한 1987년 봄,

 

”내가 쓴 노트에 따르면, 3월17일 그는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플로티누수의 관조contemplation 이론을 해명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모든 존재는 관조한다‘고, 그는 기억에 의존해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존재는 관조이다. 동물들도 식물들도 그렇다(기쁨없는[기쁨을 알지 못하는], 슬픔 동물들인 인간과 개는 빼고, 라고 그는 덧붙였다.)제가 농담을 한다고, 그건 하나의 농담이라고 여러분을 말할 것이다. 맞다. 하지만 농담조차도 관조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말년의 들뢰즈는 화이트 헤드의 『과정과 실재』가 출처인 자기-향유self-enjoyment에 집착했다고 한다. 아감벤의 시각에선 들뢰즈의 응시는 바로 이 자기-향유이 연장선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응시하는 모든 자연물은 스스로를 향유하는 것이다. 다만 몇몇 인간과 동물들은 응시하지도 향유하지도 못한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들/가는 이 응시 개념을 보다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응시의 두 양상을 대비시키고 있다. 하나는 주체subject에 의한 응시이고, 그리고 그들이 만든 신조어인 inject(공생체?)에 의한 응시이다. “철학은 응시contemplation도 반성reflection도, 소통communication도 아니다.” 이들 주체의 철학은 객관적 관념론과 주관적 관념론 그리고 상호 주관적 관념론의 방향으로 철학을 변형한다. 반면 공생체inject들의 응시도 있다.

 

“수축이란 행위가 아니라 순수감각, 뒤따라오는 것 속에 잎의 것을 보존하는 응시이다. ~ 감각은 순수 응시이다. 왜냐하면 응시를 통해서 수축이 이루어지며, 감각 자신의 시원이 되는 요소들을 응시함에 따라 스스로를 응시하기 때문이다. 응시한다는 것은 수동적 창조의 신비인 감각을 창조하는 일이다. ~ 감각은 향유enjoyment이며 자기-향유self-enjoyment이다. 그것은 주체, 아니 차라리 inject(공생체?)이다.”

 

 이 문장 다음에 플로티누스에 대한 1장 정도의 긴 단락이 이어진다. 들/가의 문장이 아름답다는 것은 정평이 나있다. 그 문장 중 플로티누스의 이 단락 역시 그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식물은 자신을 생겨나게 한 요소들, 빛이며 타소, 소금을 수축시킴으로써 응시하며, 매번 자신의 다양성, 자신의 구성에 자질을 부여하는 빛깔들이며, 향기들로써 스스로를 채운다.”

 『차이와 반복』에서도 응시는 수축contraction과 같은 맥락으로 사용된다. 애벌레 자아는 타자들을 수축하는 수동적 종합을 통해 형성된다. 이 종합은 능동적인 이기적 주체의 종합이 아니다. 수동적인 한, 그것은 복수의 타자가 통합되는 사태이다. 이때 자아는 타자들을 더 잘 내세울수록, 즉 스스로 타자들이 될수록 더욱더 자기화 된다. 수동적 자아의 자기화란 결국 수동적 자아의 자기-향유인 것이다.

  이런 들/가의 응시 개념은 마치 『천의 고원』이 15개의 고원으로 멈춰질 수 없는 것처럼 수많은 다른 개념들로 흐를 수 있다.

“스피노자, 낭만주의, 화이트헤드, 질 들뢰즈와 가타리”를 따르는 벨벳도 응시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야생”에 대한 독특한 시각을 선사하며 들/가의 응시를 재해석하고 있다.

 

“사물-권력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친족 유사성을 가진 것으로, 이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야생이라고 부른 것, ~ . 이 야생성wildness이란 인간만의 힘이 아니며, 인간과 다른 신체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전환시키는 힘이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물질의 기묘한 차원, 외-부out-side다. 사물-권력은 ~ 절대적인 것~과도 유사하다.(중략) 절대적인 것은 느슨해져서 자유로워지는 것, 잡히지 않는 것을 뜻한다”.

 

  벨벳의 야생은 사물-권력이다. 이 사물-권력은 절대적인 어떤 것인데 그것은 기성의 틀에서 이탈하고 인간과 사물을 혼란스럽게하고 전환시키는 힘이다. 그것은 대상을 사물화시켜 주체를 안으로 함몰시켜 굳어가는 능동적 주체의 개체적 혹은 이기적 욕망을 해체시키고 사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이름을 말하게 하는 과정이다. 기실 이런 과정은 능동적 주체가 해체되며 수동적 자아가 구성되는 응시와 수축의 과정이기도 하다. 응시한다는 것은 환원할 수 없는 물질의 기묘한 차원을 긍정하고 절대적으로 딱딱하게 응축된 사물의 이미지를 느슨하게 하는 과정이고, 그 느슨해진 여백에서 분비되는 사물-권력으로서의 타자들에 수동적으로 매혹된 수많은 애벌레 자아들이 생성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자아들는 “인간만의 힘이 아니며, 인간과 다른 신체들”인 능동적인 주체를 “혼란스럽게 하고 전환시키는 힘” 즉 그 주체를 해체시킨다는 의미에서, 능동적 주체에겐 야생성일 수 밖에 없다. 수동성 속에서 응시하는 애벌레 자아들의 수많은 아우성들에서 우린 벨벳의 야생성을 발견한다.

 

 길게 우회하여 우린 천장터 위에 다시 돌아왔다. 천장터에서 벌어지는 평평한 포식을 응시하는 모든 사물과 인간들은 주체의 응시가 아니다. 천장터에서 포식하는 독수리들을 응시하는 것은 주체라는 망상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장터에선 주체들은 없다. 포식하고 포식당하는 공생체들이 있는 것이다. 그 확실한 표시가 티벳의 준령사이로 분자화 되어 사라지는 저 사체이리라. 수축하는 수많은 자아들, 자기 향유하는 응시들, 야생의 공생체들 이제 무대는 이제 천장터를 떠나 우주로 확장된다. 응시하는 자들은 이 공생하는 우주의 흐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드라마

 

 “기이한 관대함”이 있다. 가스트루가 관찰한 이 현상은, 아마존 인간 집단들의 가장 인간적이지 않을 것 같은 형식 아래 감추어진 인간을 바라보게 한다. 심지어 가장 인간적이지 않을 것 같은 존재자들도 자신을 인간처럼 볼 능력이 있다고 긍정하게 한다. 천장터는 독수리들과 사체, 그리고 독수리 날개짓에 날리는 돌먼지들과 사체의 찟어진 형용색색의 천들, 가까이 혹은 다소 멀리 떨어진 이름 모를 식물들과 거기서 풍기는 피비린내와 썩은 살 냄새까지, 그 사이 사이를 바람들이 채운 체 충만해 있다.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인간은 가스트루의 이 관대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이런 감정은 인간이 스스로 능동적이기를 멈췄을 때 가능하다. 이 감정은 인간종의 탁월함과 우월함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들이 비루하고 비천한 존재자들이라 믿었던, 그 비루한 바다에 빠졌을 때 우리가 그리게 되는 궤적이다. 이 궤적으로 다시 그려지는 인간은 수동자들이다. 이들의 수동성은 마치 배아가 개체화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처럼, 천장터에서의 시간을 감당할 수 있게 한다.

 

 들뢰즈는 1967년 1월 28일 한 학술 토론회에서 「드라마화의 방법」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후 그의 주저이고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한 『차이와 반복』의 4, 5장에서 「드라마화의 방법」의 내용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는 드라마화를 야기하는 동인으로 ’시-공간적 역동성‘을 강조한다. 역동성은 “공간과 시간을 규정하는 자신의 고유의 역량을 포괄하고 있다. 왜냐하면 미분비들, 독특성들(특이성들), 그리고 이념에 내재하는 점진성들을 직접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이 역동성은 칸트의 도식(schèma)을 대체하는 ‘이념의 드라마’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역동성에 의해, ‘현실화된 것’에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과정을 ‘드라마화(劇化, dramatisation)’라고 설명한다.

 이런 드라마화의 방법론은 가스트루의 제례에 대한 분석과 닯아 있다. 그는 레비 스트로스의 『스라소니 이야기』에 나오는 신화를 분석했는데, 그는 레비 스토로스가 분석한 투피인의 거대 신화는 모든 제례의 본질을 이루는 궤적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레비 스트로스를 통해 주장하는 이 궤적은 “유효 범위가 감소하는 대립들이 층층으로 이어져 있는 연쇄이며, 이 연쇄는 실재적인 것의 궁극적 비대칭을 손에 넣기 위해 ’절망적인‘ 노력 내에서, 점근성을 향해 수렴한다.” ’유효범위가 감소하는 대립들의 연쇄‘는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들의 ’미분비들, 독특성들(특이성들), 그리고 이념에 내재하는 점진성‘들을 반영한다. 이 연쇄는 ’비대칭의 수렴‘이라는 절망적인 노력을 통해 투피인의 제례 신화로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의 제례 신화에 대한 이런 묘사는 들뢰즈의 시-공간의 역동성을 통한 ’현실적인 고유한 시공간의 창조‘라는 드라마화에 대한 이해 없이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천장은 드라마다. 포식하는 독수리와 포식당하는 사체, 수동적 인간들과 수많은 비인간들, 각각의 임계적 거리를 두고 기거하는 수많은 개별체들은 그들의 비대칭을 유지한 체 하나의 기관없는 몸체를 이루게 된다. 그들의 노력이 절망적인 것은 각 계열들의 차이들 속에서 나오는 이질성과 비대칭성이 야기하는 차이나는 강도의 역동성 때문이리라. 이 강도들이 현실화하는 드라마가 천장터의 제례인 것이다.

 이 제의가 매혹한다. 천장에 매혹당했다는 것은 어떤 계기, 어떤 장소. 어떤 매체를 통해 그 천장에 대해 멈출 수 감응affect를 가진 '누구'가 ’된‘ 다는 것이리라. 그 누구가 우리일 수도 있고 우리 안의 또 다른 분열증적 자아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 이 매혹은 어떤 의미 일까? 그 의미는 콜라주의 파편 같은 각자의 삶을 하나로 묶게하는 금속의 자성같은 특이성일 것이다. 그 매혹당한 자아들의 특이성 아래 당신과 나라는 작은 다양체가 서식하게 된다.

 

 천장을 처음 우연히 들었을 때, 죽음에 대한 낯선 담담함과 ’기이한 관용‘의 태도에 당황했었다. 그후 『오래된 미래』 등 몇 권의 책과 다큐멘타리는 천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곳은 모든 게 우리와 달랐다. 바람은 실체이고 힘이었다. 척박한 풍경은 깊은 내면을 마주하는 통로였고, 이웃은 마음까지 보살피는 친구이자 동료였다. 풍족하다는 것 만큼 가난한게 너무도 낯선 곳! 마을의 노래는 이런 생태적인 습속이 있었나 싶게 공생적 체험이 가득 담겨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미소는 자연스러웠다. 다만 거대한 라다크의 사원엔 거부감을 느꼈지만, ’롱타‘의 사연을 듣고 이내 편견은 사라졌다. 부처는 사원에 있지 않다는 것을 라다크 사람들뿐만 아니라 스님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천장을 다시 보았을 때 천장은 죽음의 드라마가 아니라 삶의 드라마였다. 적어도 내겐 죽음에 대한 최고의 경의 같았다. 그 후 들뢰즈를 읽게 되고 천장의 죽음은 바람-되기 혹은 분자-되기로 다가왔다. 터벳의 준령 사이를 떠 보는 부처님 말씀이 바람이 되어 퍼져나가는 것처럼 천장에서의 죽음은 응시하는 모든 자아들에게 영원회귀의 생성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천장의 단절과 생성의 두 축, 매혹당한 수동적 자아들의 응시들 그리고 현실화하는 시공간의 역동의 드라마는 야생, 사물-권력, 공생체, 이질적인 것들의 비대칭의 수렴과 이어진다. 그리고 공생의 신비를 찾아가는 실타래는 다른 새로운 자아들을 찾아가는 여정을 열어갈 것이다. 이 여정은 우릴 티벳의 풍토만큼 척박한 곳으로 안내할지 모른다. 하지만 천장의 지혜는 순례를 위해선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과 척박할수록 아름다운 것들이 더욱 많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 삶의 이야기가 순례가 된 여정이기를, 그리고 순례 안에서 점점 작아지는 자아들의 자기-향유하는 응시이기를, ’연대의 쾌락!‘

 

 

 

참고 문헌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나라, 티베트」 기자명 여경 2013.05.14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http://www.catholicnews.co.kr).

 

“천장” EBS 다큐프레임

 

오마이 뉴스.20110519..독수리의 먹이로 육신 내놓는 사람들.. 최오균 기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중앙미래

 

이진경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에두아르드 비베이루스 지 가스투루 지음 박이대승,박수역 역 『식인의 형이상학』

 

톰 웨이크퍼드 지음, 전방욱 역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

 

제인 베벳 지음, 문성재 역 『생동하는 물질』

 

질 들뢰즈, 김상환 역 『차이와 반복』

 

들뢰즈 가타리 지음 이정임, 윤정인 역 『철학이란 무엇인가』

 

들뢰즈 가타리 지음 이진경 역 『천의 고원 2』

 

들뢰즈 가타리 지음 김재인 역 『천개의 고원』

 

자바 마사야지음 김상운 옮김 『너무 움직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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