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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형이상학 후기

assa 2021.04.03 19:54 조회 수 : 31

"방법론적 믿음"에 대하여

 

  선험적 주체가 있어 대상에 다가가는 ‘방법’ 중, 유효한 수단으로써 ‘믿음’을 일컫는 것은 아니리라. 들뢰즈에겐 주체는 언제나 해체되어야만 하는 형식이니깐!  그 형식을 심지어 죽음이라 명명하기도 했으니 이런 의미는 단연코 아니다.

 매번 그렇지만 이 문장 역시 도치된 것같다.  '믿음의 방법'이라 해야하지 않을까? 

  주체가 자신의 형식을 낯설어하고, 스스로 파편처럼 흩어진다고 할 때, 대상 역시 해체될 수 밖에 없다. 주지하듯이 강도는 그 파편들의 미분적 관계에서 차이난 것으로 드러난다. 만일 주체가 있다면 그 강도를 응시하는, 즉 "나는 느낀다"고 표현되는 작은 주체들뿐이다. 

 그런데 위 구문이 다소 공허하다. 무언가 빠진것 같다. "왜 주체는 스스로의 형식을 낯설어할까?", " 의식이  파편화되어 떠 다니도록 왜 허락하지?" 그리고 "어떻게 주체는 이런 미분화의 계열에 뛰어든다는 거야?" 등등. 어쩌면 이런 공허함은 여전히 주체를  붙들고 있는 '나'가 아직 항의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진경샘은 넌지시 훈수둔다.

"그것은 믿음 혹은 사랑 때문입니다."

  맞다. 먼저 이 말은 경험적으로 맞다. 우린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해체될 수 없다. 대상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스스로를 해체시킬 수 없다. 선험적으로도 맞다. 사랑 혹은 믿음이라는 범주만이 대상과 나를 소통시킨다. 심지어 몰적인 억압이 우리를 짖누를때조차,  우린 그런게 사랑이야 하며 그 억압을 체화하거나, 새로운 사랑을 찾아 탈주한다. 광신과 탈주는 사랑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결국 믿음 혹은 사랑의 방법 만이 우리를 분자적으로 만든다. 

 그런데  주체는 항상 되돌아온다. 

 '나는 느낀다'라고 말하는 수많은 작은 주체들은 어떤 주체화의 물결을 담고 긴 흐름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돌아오는 주체는 이전의 주체와 본성상 다르다. 이전의 몰적인 주체는 강제된 형식에 맞게 제작된 주체이므로 죽은 주체이기 때문에 "아무도 아닌 자"임에 틀림없다. 반면, 돌아온 주체는  "누군가"가 된다. 그는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고유명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제 사랑 혹은 믿음은 "향유"가 된다. 그는 자신안에서 자신의 삶을 향유한다.   

 그렇다.  믿음의 방법은 주체를 해체시키지만 그 해체는 새로운 주체, 즉 향유하는 주체로 거듭나게 한다.  

  파브르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연구하는 방법을 실험실에서 조작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관찰하는 것이라 규정 했다. 그의 관찰 속에서 그의 몸은 쇠똥구리의 버퉁거리는 동작에 맞추기 위해. 직립보행을 포기하고 바닥에 깔 정도로 구부려져야 했으리라.  작은 쇠똥구리가 '똥'을 나를 때 이미 그 '똥'은 모든 인간들의 기호학적 표현에서 해체되어 쇠통구리와 관계 속에서 다시 의미부여되었다. 아마도 이 정도 되면, 코도 눈도, 그의 모든 감각기관도  이젠 인간의 신체가 아니지 않을까?

 그의 사랑과 믿음 그리고 호기심을 위하여 건배!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살필 타자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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