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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 11강 발제

김유나 2020.12.02 21:00 조회 수 : 44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1장 문학 그리고 죽음에의 권리

 

문학은 문학이 물음이 되는 순간 시작된다.

이 때 글은 작가를 바라본다. 그리고, 작품 내부에, 독자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문학이 된 언어가 던지는 물음이 깃든다.

문학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하찮은 것이며, 이 하찮음이 순수한 상태로 고립될 수 있다면

놀랍고 경이로운 힘을 발휘한다.

엄숙한 성찰은, 우리를 위압할 수 있었던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부식의 힘이 된다.

성찰이 누그러지면서 문학은 그때 문학이 포괄하는 철학, 종교, 세계의 삶보다

더 중요한 중대하고도 본질적인 어떤 것이 된다.

하지만 성찰이 문학의 권능으로 되돌아와 부식요소가 스며 있는 문학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질문하면서, 성찰은 마침내 그렇게 헛되고 막연하고 불순한 문학이라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밖에 없고, 이 헛됨은 그것대로 소진된다.

 

헤겔의 논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이 필요하다. 그러나, 쓰지 않는 한 재능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난점. 문학 활동의 본질에 해당하는 모순.

“개인은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활동 목적을 결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식주체로서 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서의 활동을, 목적으로서의 활동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 한편으로, 작품을 황혼 속에 쉬도록 버려둔다.

- 다른 한편으로, 작품을 시간 속에 펼치고 공간 속에 새기는 단어를 통해서만 가치와 진리, 그리고 현실성을 얻게 됨을 의식하면서, 작가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무 안에서 작업하는 무]

“글 쓰는 자는 상황이 어떠하건, 더욱이 시작, 중간, 끝을 염두에 두지 말고 즉각적으로 시작하고 즉각적으로 행위로 옮겨 가야 한다.”→ 순환 고리를 끊는다. →영감 가운데 문장으로 저자가 되어 자신의 존재를 이끌어내고, “문장은 이미 완벽하다.” → 예술이 목표로 삼는 깊고도 낯선 확실성.

 

뜻하지 않은 시련: 다른 사람들의 다른 관심은 작가가 자신의 최초의 완전함을 알아보지 못하는 다른 무엇으로 작품을 바꾸어 놓는다. 다른 책들을 닮지 않으면서, 다른 책들의 반영이기에 이해가 되는 한 권의 책. 작품은 현실의 반작용에 의해 이루어졌다가 부서지는 기이한 공적인 현실이 될 때 비로소 존재한다. 그는 작품 속에 온전히 머물지만, 작품 자체는 사라지는 경험의 순간이 중요.

작가가 지워지면 독자는 의식이자 쓰여진 것의 생생한 실체이다. 그러나, 독자는 미지의 낯선 작품을 원한다. 여기서 다른 사람을 위한 글을 쓰는 위험이 생겨난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소리를, 진실과도 같이 깊고 불편한 실제의 목소리를 원하는 것이다.

순수한 기술로서의 예술, 유일한 탐구로서의 기법에 대하여: 경험은 활동을 그 결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결과는 끝없이 변화해 가며 알 수 없는 미래에 맞물려 있다. 작품은 작가의 바깥에서도 만들어지며, 우연의 놀이 속으로 흡수된다.

작업하는 무. 작품이 사라지는 그 무엇과도 같은 맛. (= 헤겔: 그것 그 자체)

- 작품을 넘어서는 예술, 작품이 표현하는 이상, 작품 가운데 윤곽을 드러내는 세계, 창조의 노력 가운데 작용하는 가치, 창조의 노력의 본래성

 

주의: 문학에서의 성실함에는 이미 위선이 자리한다, 불성실한 의식은 진실이 된다. 작가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이 작품과 모든 작품의 정신이라는 미명 아래, 거기로부터 가르침과 영광을 이끌어낸다. 이 정직한 의식은 우리들 각자 가운데 깨어 있다. 작품은 실패하여도 그 의식은 괴로워하지 않는다. 실패는 작품의 본질이고, 작품의 사라짐은 작품이 실현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기와 낙담의 순간, 우연히 태어난 책이 사건들로 인해 걸작이 된다면...

작가는 누구보다 먼저 자신에게 속는 자이다.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순간마저도.

이제 그는 자신은 독자의 관심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먼저 자신이 만드는 것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고유한 활동으로서의 문학에 관심이 없다면, 그는 글을 쓸 수조차 없다. 대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더라도 작가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란 작가 자신의 고유한 활동이다. 기만. 그렇다면 그 무엇에 대한 관심도 포기하면서 벽을 향하여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 해도 엄청난 애매함은 그대로이다. 벽을 바라보는 것도 세계를 향하는 것이며, 벽을 세계로 만드는 것이다.

 

작가가 순수한 내밀함에 빠져 있다면: 고독에 갇힌 작품도 모든 사람들에게 관련된 시선을 담고 있고, 시대에 대한 암묵의 판단을 담고 있고, 작품이 무시하고 있는 것과 공모 관계를 이루거나, 작품이 단념한 것의 적이 되기도 하고, 작품의 무관심은 모두의 열정에 위선적으로 끼어든다.

문학에서 속임과 현혹은 불가피.

말의 질병은 또한 말의 건강.

모호함 없이 대화는 없다.

오해는 우리의 암묵적 동의의 가능성.

공허는 말의 의미 그 자체.

 

어려움은, 작가가 단 한 사람에게 속해 있는 여러 모습이면서, 자신의 각각의 계기가 다른 모든 계기를 부정하고, 하나의 계기만을 위해 모든 것을 요구하며, 화해도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작가는 자기 자신에게 대립하고, 스스로를 긍정하면서 부정하고, 낮의 손쉬움 가운데 밤의 깊이를, 결코 시작하지 않은 어둠 가운데 끝날 수 없는 확실한 빛을 찾아야 한다.

 

작가의 활동 가운데 노동의 탁월한 형태를 인식:

노동 → 물건 생산 → 비현실적이었던 계획의 실현 → 그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들과는 다른 현실에 대한 확인, 새로운 물건들의 미래

이 물건과 더불어 변화한 세계 → 미래를 준비하게 될 또 다른 물건들을 내가 제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의미에서 또한 변화한 세계 → 사물의 상태를 변화시키면서 생산한 물건들은 나를 변화시킨다 ~~~ 그게 벽난로라면, 열은 나의 실존을 또 다른 실존으로 바꾸어 → 열 덕택에 내가 새로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나를 또다른 나로 바꾸어 놓는다 ~~~

역사는 존재를 부정하면서 존재를 실현하고 부정 끝에 존재를 드러내는 노동을 향하여 이루어진다.

작가는 자연적 인간적 현실을 변경시키면서 저작을 생산. 난로처럼 한 권의 책은 예견할 수 없는 하나의 혁신이고, 나에게 하나의 경험. 경험 앞에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책이 바로 다른 사람이 된 나 자신.

작가는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 전체를 우리의 재량하에 두기 때문에

행위의 의미를 손상시킨다.

문학은 일상적 현실과 간극을 두고 있고, 문학은 바로 이 간극이다. 이를테면 일상을 멀어짐으로, 순수한 낯섦으로 묘사하는, 일상 앞에서의 물러서기. 행동 문학은 한층 더 현혹적이다. [해야 할, 전체, 절대적]

 

작가의 주요 성향들

  • : 종이 위에서만 존재하는 세계의 인간. 작가 고유의 자유가 아니라 보편적 자유
  • : 전체에만 관계하기에 전체를 한꺼번에 부정

3. 불행한 의식: 우리가 자주 목격, 여러 상반된 계기들에 대한 고통스런 의식을 통해서만 작가가 될 수 있다고 할 때, 보다 심층적인 작가의 재능.

부정은 작가를 세계의 삶과 대중적 실존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는데, 그것은 작가가 글을 쓰면서 어떻게 그와 동일한 실존이 될 수 있는가를 알아차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전체가 물음으로 나타나는 결정적 순간, 무로 빠져드는 결정적 순간을 만난다. 그러나 역사는 사건이 된 절대적 자유이다. 이 시기가 혁명. 이 순간 자유는 전체가 가능하고 즉각적 형태로 실현되기를 요구한다. 혁명적 행동은 문학이 구현하고 있는 행동과 유사하다. 몇몇 단어를 나열하기만 하면 되는 작가와 동일한 위력, 동일한 순수의 요구,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은 최종 목적, 최종 행위.

이 최종 행위가 자유. 여기서는 자유와 죽음만 있다. 이렇게 공포정치가 생겨난다. 공포정치는 어깨 위에 죽음을 두르고서 생각하고 결정하는데, 그 사유는 절단된 머리의 자유를 갖는다.

 

‘죽었다’: 세계가 된 자유의 긍정적 측면

‘죽는다’: 개인의 내면적 드라마의 모든 가치를 상실한 구체적 현실이 없는 순수한 무의미,

진부함

작가는 혁명 가운데 자신을 알아차린다.

혁명은 문학이 역사가 되는 시간이기 때문에 작가를 매혹시킨다.

홀로인 사드가 이해한 자유란 가장 무모한 열정이 정치적 현실로 바뀔 수 있는 순간.

문학은 혁명 속에서 스스로를 비추어 보고, 스스로를 증명한다.

 

혁명 = 공포정치 = 삶이 죽음을 떠맡고 그 죽음 가운데 삶이 유지되는 그러한 순간

= 진정한 이상 = 문학의 존재 그 자체인 ‘물음’

언어는 안심이 되는 동시에 불안

말의 소유는 사물을 다스리는 힘이자 위험스러운 것

말은 나에게 말이 의미하는 것을 주지만, 먼저 그것을 지워버린다.

말은 나에게 존재를 주지만, 존재를 박탈당한 존재를 준다.

신은 존재들을 창조하였으나, 인간은 그것들을 없애야 했다.

인간은 그것들이 사라진 그 죽음으로부터 인간 나름으로 그것들을 창조하였다.

존재자 대신에, 존재에 관한 것만 남았으며, 인간은 의미를 통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낮 속에 갇혀있음을 보았고, 그 낮이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로부터 분리되어, 더 이상 나의 현전, 나의 현실이 아니라, 객관적 비인칭의 현전, 나를 넘어서는 나의 이름의 현전, 돌처럼 굳어진 그 부동성이 나에겐 공허를 무겁게 누르는 묘석과도 같은 현전이다.

 

통상적 언어: 말은 말이 가리키는 것의 실존을 배제하고, 그 사물의 본질이 된 비실존을 통하여 여전히 그 사물과 관계한다. 분명한 존재 이유, 안정이 그 대가.

문학 언어: 불안, 모순

사물에 대해 그 의미에만, 그 부재에만 관심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부재 가운데, 부재를 위하여, 그 전체에 있어서 이해의 미결정의 움직임에 이르기를 바라면서, 그 사물에 이르려고 한다. 사물의 비현실을 언어의 현실로 옮겨 놓음 (이해의 끝없는 부재가 말만의 제한되고 한정된 현전과 혼동되는가? 속고 있는 것인가?)

언어 가운데 무는 투쟁하고 작업한다. 출구를 찾으면서, 그것을 가두는 것을 무화시키면서, 쉼 없이 파고든다. 말의 한계 내에서 말의 의미라는 유형 아래 무를 억류하였던 봉인은 이미 뜯겨졌다. 여기에 어느 곳에도 이르지 않는 “어투들”의 끝없는 미끄러짐의 통로가 열려 있다. 모든 언어가 움직임 가운데 호출되는 추적이 시작되고, 사물은 그 모든 말들을 다시 붙잡으려 한다.

 

문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존재자”는 말을 통해 그 실존 바깥으로 불려 나와 존재가 되었다. 나사로여 바깥으로 나오라. 존재들을 세계에 도래하게 하여 밝혀 주는 무서운 힘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배제되어야 한다, 부정은 부정이 부정하는 것의 현실에서 출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문학을 선행하는 순간에 대한 탐구; 사물의 ‘방침’ 속에서 잃어버린 나사로를 원한다. 나는 말한다. 한 송이 꽃이라고! 그 꽃을 끌어들이는 부재 속에서, 꽃이 나에게 주는 이미지를 내던지고 마는 망각을 통해, 이 무거운 말의 바닥에서, 나는 이 꽃의 어둠을, 나를 가로지르나 내가 들이키지 않는 이 향기를, 나를 적시나 내가 보지 못하는 이 먼지를, 나에게 길을 가리켜 주나 빛은 아닌 이 색채를 열정적으로 불러 모은다.

 

물리적인 것이 우선적: 리듬, 무게, 부피, 형상, 종이, 잉크의 흔적, 책... 언어는 하나의 사물-

쓰여진 사물, 껍데기, 돌의 파편, 땅의 현실이 남아 있는 점토 한 조각, 말은 사물을 사물 바깥에 실제로 현전하게 하는 주술처럼 작용. 문학은 나 없는 나의 의식, 광물의 빛나는 수동성, 멍멍함 그 밑바닥으로부터의 명철함. 밤이 아니라 스스로 놀라기 위해 끊임없이 깨어 있는, 그러한 까닭에 계속해서 흩어지는 밤의 의식. 낮이 아니라, 낮이 빛이 되기 위하여 버린 쪽의 낮. 문학은 그 자체가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이 나타나는 바로 그 움직임.

문학이 이름의 의미가 파괴되면, 대신에 일반적 의미가, 실존의 어둠의 표현으로서 말 속에 새겨진 무의미의 의미가 생겨난다, 그리하여 어휘들의 정확한 의미가 사라지면서, 이제 의미의 가능성 자체가 긍정되고, 낯선 비인칭의 빛으로서의 의미를 주는 공허한 능력이 긍정된다.

 

문학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뉘어져 있다

1. 부정의 움직임: 이 움직임을 단편적인 결과들 속에서 받아들이고, 그 자체에 있어서 포착하고, 그 전체성에 있어서의 결과들에 이르고자 한다. 여기에 비현실성이 문학의 먹이인 그림자가 생겨난다.

2. 실존에 대한 염려: 문학은 저항이다. 모든 것과 공감을 나누고 있다. 문학은 언어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절을 통해 밤으로부터 와서 밤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리는 데 만족하는 변덕스러운 비인칭의 힘으로 만든다. 단어들은 더 이상 의미하지 않고, 표상하지도 않는다. 불투명성이 단어들의 응답이요, 그 단어들이 말하는 것은 다시 접혀지는 날개의 가벼운 스침이다. 물질의 무게는 숨 막히는 밀도와 함께 단어들 가운데 드러난다. 변신이 일어났다. 그 단어들을 밝히는 변신의 의미가 다시 나타난다.

문학은 진정 단어들의 의미를 이겨냈다. 하지만 문학이 그 의미를 벗어나 있는 단어들에서 발견한 것은 사물이 된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의미의 조건을 벗어난, 의미의 계기로부터 분리된 의미이고, 공허한 능력인 양 떠도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가 그 자체로 도달하려고 겨냥하였던 침묵 대신에 끝없는 말들의 되풀이가 되고 말았다고, 실존에 전념하려고 했던 언어가 문학의 관습에 빠지고 말았다고 언어를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말 없음 가운데 말을 하는 침묵이다.

 

문학의 두 가지 방향;

산문의 방향: 의미, 지시

  • : 세계가 없을 경우 사물과 존재가 어떠할까에 관심. 비인칭의 힘에 자신을 맡긴다.
    문학은 이미 은밀하게 당신을 한쪽 경사에서 다른 쪽 경사로 넘어가게 하였으며, 당신을 당신이 없었던 곳으로 옮겨 놓았다. 이것이 문학의 배반이고, 문학의 교묘한 진실이다.

관찰하는 인물: 대상 – 관찰 – 묘사

퐁주의 나무는 퐁주를 관찰한 나무이고, 그 나무는 나무가 그를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묘사된다. 나무는 아는 것만을 말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있다. 퐁주의 묘사는 말이 사물을 맞이하러 오고, 사물이 말하기를 배운다고 할 수 있는 그 순간에 시작된다. 퐁주는 아직 말 없는 실존과 실존의 살해자인 이 말이 세계의 변방에서 서로 만나는 감격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언어는 죽음을 가져오고, 죽음 가운데 보존되는 삶이다.

문학을 문학의 모든 모호함을 감지하게 하는 움직임으로 귀결시키고자 할 때, 공동의 말로서의 문학은 유일하게 문학의 이해를 허락하는 종말과 함께 시작한다.

자연을 인간화하고 실존을 존재로 키우는 힘으로서의 죽음은 세계 속에서 비로소 죽음이고, 인간은 자신이 미래의 죽음이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이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인간을 잃어버리고 존재를 무화시키는 것이다. (요약)

 

사람은 죽지만, 진정으로 죽은 한 인간이 될 때까지 다시 산다. 인간은 밤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밤은 깨어남으로 이르고, 여기 벌레가 있다. ... 침대 맡에선 지난번 죽음의 실수가 있고, 기이한 상황이다. ... 그것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자는, 자신이 죽었음을 알면서도, 죽기 위해 헛되이 싸운다. 죽음, 그것은 저기인데,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성이고, 그리고 삶, 그것은 저기였는데, 잘못된 부름을 따라 떠났던 태어난 곳이다. (63쪽)

카프카는 이 주제를 통해 우리 조건의 실상을 되찾으려 하였다. 출구를 찾아주기 위해 가장 훌륭한 수단을 보았다.

문학은 사물의 결정되지 않은 비인간적 측면을 무 가운데로 밀어내고 사물을 규정하고 완성된 것으로 만든다. 동시에 문학은 사물을 그 실존에 있어서 부정한 다음, 사물을 그 존재 가운데 보존한다. 사물이 의미를 갖게 한다.

 

세계의 과제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문학은 실질적 작업의 결과가 아니다. 관점의 실현이다. 문화는 시간 속에서 점차 변화해 가는 인간의 작업이지, 시간을 배제하고 작업을 배제하는 허구적 변화의 즉각적 유희는 아니다.

작가는 비인칭의 힘의 먹이임을, 가장 훌륭한 작품이 가장 무의미한 행동보다 가치가 없음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문학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

카프카는 작가가 되는 것이 진실을 가지고 삶을 그르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면, 그런 수수께끼라면 그 비밀은 각각의 문학의 순간에, 각각의 문학의 결과에 긍정의 표시를 부정의 표시를 구분 없이 붙이는 문학의 권리에서 온다. 모호함의 질문에 관련된, 기이한 권리이다.

 

오해 또한 말의 길들 가운데 하나인데,

우리는 말을 물질적 현전으로서의 현실과 관념적 부재로서의 의미라는 두 얼굴의 괴물로 만들면서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일상어는 부재를 현전 속에 확실하게 감금하고,

문학에서 모호함은 모호함이 주는 편의 때문에 과도함에 빠지고, 소진된다. 여기서 모호함은 모호함 자체와 실랑이를 벌인다. 모호함은 가치의 절대적 성격을, 가치 없이는 행위가 중단되고 덧없는 것이 되고 말 수도 있는 그러한 가치의 절대적 성격을 보존한다. 모호함이 모호함 자체의 끝이 아니라면 모호함은 아무것도 아니고, 모호함은 끝이 없고, 모호함 자체를 벗어나 역사 속에서 완성된다.

 

문학과 언어 한가운데,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는 불안전의 지점이 마련되어 있는 것 같다.

풍화의 힘이 주는 효과. 이 풍화는 건설이기도 한데, 단어의 의미 뒤에서, 말의 내밀성 속의 힘이 건설과 파괴를 위한 무기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실존의 어두운 바닥으로의 회귀이면서 자신의 진실을 향한 단어의 움직임이기도 한 이러한 단어의 의미의 의미를, 파괴되는 부재의 모습을 오랫동안 질문하였다. 부재는 죽음을 안고 죽음 속에 보존되는 삶이요, 죽음이요, 위력이요, 자유이다. 부재의 힘은 언제나 또 다른 가능성으로 계속해서 긍정되고, 그 힘이 환원 불가능한 이중의 의미를 영속화하는 것이 전체이다.

죽음은 존재에 이른다. 무 자체는 작업하고 이해하는 인간으로서의 세계의 창조자이다. 죽음은 인간의 상처이고, 그의 불행한 운명의 근원이다. 우리의 실존을 박탈함으로써만, 죽음을 가능하게 함으로써만,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죽음의 무에 물들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이해한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를 벗어나면, 우리는 죽음의 가능성 밖으로 떨어지고, 출구는 모든 출구의 사라짐이 된다.

 

 

2장 카프카의 독서

 

<내면 일기>에서 카프카가 보여주는 것은 글을 썼던 자보다는 삶을 체험한 자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문학 너머의 진실로 돌려보내는 것: <소송>, <성>의 낯섦

그는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옮기고 있지 않다.

예) 논평에 사용한 언어는 허구로 빠져들고, 허구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의 사유는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규칙과 삶의 특정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지표 사이를 흘러 사라지는 유영과 같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을 옮기는 작업이 되는가 하더니

어느새 사건들의 의미를 찾는 작업으로 옮아가면서, 이야기는 설명과 뒤섞이기 시작한다.

카프카는 주어진 관념에 대한 일종의 선천적인 무관심 때문에 결코 진부한 것은 쓰지 않는다. 자전적 에세이에서 끊임없이 규범과 충돌하며, 갈등을 겪었으나, 아무런 결심도 하지 못한다.

그의 사색은 고독과 법, 침묵과 공동의 언어라는 두 개의 극 사이에서 동요한다.

사색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동요는 또한 동요를 벗어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의 사유는 고독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절대적 고독이 아니다. 그의 사유는 무의미를 의미로 갖기 때문에 무의미가 아니다. 그의 사유는 법을 벗어나 있지 않다. 그것이 자신의 법이고, 이미 법과 화해하는 유배이기 때문이다.

“다만 너 자신이 스스로 쥐며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쥐며느리에게 그가 하는 일의 목적을 묻게 되면, 너는 동시에 쥐며느리 떼를 말살시키게도 될 것이다.” 사유가 부조리를 만나자마자, 그 만남은 부조리의 끝을 의미한다.

 

카프카를 읽는 자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쟁이가 된다. 하지만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그의 예술에 고유한 불안이고, 그가 종종 주제로 삼는 우리의 운명에 관한 고뇌보다 분명 한층 더 깊은 불안이다. 우리는 우리가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위선을 직접 경험한다.

카프카는 절대에 대한 믿음을 가진, 절대를 희망하기도 하는, 절대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종교사상가이다.

그는 절망의 세계를 살아가는, 혼돈을 키우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평안 속에 머무르는 휴머니스트이다.

신에 이르는 여러 개의 출구를 발견하였다. - 막스 브로트

자신의 우선적 가능성을 무신론에서 찾는다. - 마니 부인

이상한 병에 걸린 한 인간, 먹이가 된 한 인간... 마지막 말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는 마지막 말을 가질 수가 없다. - 장 스타로뱅스키

카프카의 <일기>는 환자의 <일기> -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 수수께끼와 해답을 보존하려고 하는 독서의 불안을, 오해를, 이러한 독서에 대한 해석의 불가능성 속에서의 독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모호함은 미끄러지고 지나가는 방식으로 진실을 포착하는 술책인데, 이들 각각의 주장에 그 주장을 교란시키는 다른 주장을 대립시키고, 다른 방향의 주제들로 주제들에 무수한 뉘앙스를 주었다 하더라도, 카프카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믿음은 배제하지만 믿음에 대한 탐구는 배제하지 않는,

희망은 배제하지만 희망에 대한 희망은 배제하지 않는,

여기와 저곳의 진실은 배제하지만 최후의 절대적 진실을 향한 호소는 배제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모순은 통용되지 않는다.

카프카의 주요 이야기들은 단상들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결핍은 독서의 형태와 그 내용을 불안정하게 하는 불확실성에 대한 설명이 된다. 그 결핍은 결핍이 손상시키는 의미 자체에 통합된다. 허용되지도 거절되지도 않은 부재의 표현과 일치한다. 우리가 읽는 페이지들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여서, 아무런 결함이 없는 작품을 예고하고 있고, 더구나 작품 전체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듯 갑자기 중단되는 그 세심한 전개들 가운데 주어진 듯하다.

 

각각의 주제가 때로는 부정적 의미로, 때로는 긍정적 의미로 나타나는 비밀스러운 가능성:

이 세계는 희망의 세계이자 형벌의 세계, 영원히 닫힌 세계, 무한한 세계, 부당함의 세계이자 과오의 세계이다. 카프카는 종교적 인식에 대해 “인식은 영원한 삶으로 이르는 단계이자 아울러 이 삶 앞에 세워진 장애이다.”라고 했다. -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글조차 궁극의 가능성을, 미지의 승리를, 다가갈 수 없는 요구의 빛남을 표현하기 위해 글의 흐름을 뒤집을 준비가 되어 있다. - 부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긍정에 대한 탐구

 

부정의 모호함 = 죽음의 모호함

신은 죽었다 = 죽음은 가능하지 않다는 훨씬 가혹한 진실

<사냥꾼 그라쿠스>에서 불운 = 죽음의 불가능성

우리는 죽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더 이상 살지 않으며 우리는 죽었고, 우리는 본질적으로 생존자들이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끝마치게 하지만 우리의 죽음의 가능성을 끝마치게 하지는 않는다.

 

<변신>의 주제는 목표가 결핍된 문학의 고통, 희망과 절망이 끝없이 서로 응답하는 소용돌이로 독자를 몰고 가는 문학의 고통에 대한 예시이다.

그레고르: 실존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의 상황 그 자체, 실존한다는 것은 언제나 실존으로 다시 떨어진다고 선고받는 것. 벌레가 된 그는 추락의 상태에서 계속 살아가고, 동물의 고독 속으로 빠져 들면서 부조리와 삶의 불가능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그는 계속 살고 있고, 그의 불행을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불행의 내부에서 마지막 수단, 마지막 희망을 전달하는데... (영화 예고 같군요!)

 

카프카의 이야기들은 문학 가운데 너무도 어둡고 절대적 파탄에 극단으로 못 박힌 작품들에 속한다. 그리고, 희망은 금지되지 않기 때문에 희망에 가장 처철하게 고통을 가하는 작품들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배반하면서밖에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독서는 오해의 주변을 불안스레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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