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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량쇼 10강 발제

김동현 2020.11.26 18:40 조회 수 : 39

블랑쇼 ‘문학과 근원적 경험'

 

※ 아래 발제문은 블랑쇼 본문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옮겨 모았습니다. 

 

 

1장_미래와 예술에 대한 질문 

 

올바른 대답은 질문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순진하게 작품을 찬미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예술 활동 속에서 작품을 무익한 정념이 아니라 하나의 활동으로 만드는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 작품이 일반적 인간의 작업에 협력하게 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화해시켜야 할 것 같다. 

 

횔덜린은 위기에 처해 있는 프랑스 대혁명을 보고서 거기에 관해 그의 아우에게 편지를 쓴다. “어둠의 왕국이 어쨌든 뜻하지 않게 맹렬한 힘으로 나타나면, 그때 책상 아래로 펜을 던지고, 신의 부름에 응하도록 하자. 거기 위협이 가장 심각한 곳에, 우리의 존재가 가장 필요한 곳에.” 

 

 

2장_예술작품의 성격들

 

말라르메는 “비인격화 되는 한 권의 책은 인간의 부속품들 가운데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되었고 존재한다.” 라고 했다. 


작품은 유난히 작품을 이루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작품은 그 본성과 그 물질을 보이게 하거나 현전하게 하는 것이다. 

 

작품은, 적어도 작품이 작품으로 남는 한 결코 양립될 수 없고 진정되지 않는 상반되는 것들의 내밀성이고 격렬함이다. 양립될 수 없으나 그것들을 대립시키는 이의제기 속에 충만함을 얻는 대립 작용의 상반성에 마주하는 내밀성, 그것이 스스로 감추고 닫힌 채 남아 있는 것의 개화라면, 그 찢겨진 내밀성이 바로 작품이다. 

 

“시인은 던지는 존재와 간직하는 존재의 생성이다. 이 상반되는 것들의 고양된 결합” (르네 샤르) 

 

시인은 시 이후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시인은 시에 관한 자신의 ‘현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이러한 현실을 시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만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창조 이후에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는 시 속에서 죽으면서 살아간다. 이것은 게다가 시 이후에 시가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이 시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는 시인을 가리키지 않고, 시인은 어떠한 자격으로도 시 속에 그 근원으로 인용되거나 찬미되지 않는다. 작품을 통해 찬미된 것, 그것은 작품이고, 작품이 작품 가운데 모아 놓은 것은 예술이다. 그릭도 창조자는 이제부터 그 이름이 지워지고, 기억이 꺼져가는 해고된 자이다. 이것은 게다가 창조자는 그의 작품에 대해 권한이 없다는 것을, 그가 작품 속에서 자신으로부터 박탈당하는 것처럼 작품을 통해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창조자는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작품을 ‘읽는’ 수고가, 다시 말해서 작품을 다시 읽고, 매번 새로운 것처럼 읽는 수고가 그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은 말한다 : 시작

작품은, 작품 속에, 작품을 최초의 낮으로, 하지만 언제나 불투명한 깊이에 의해 다시 빼앗기는 낮으로 만드는 찢겨진 단일성 속에, 작품을 “던지는 존재와 간직하는 존재”, 작품을 듣는 자와 작품을 말하는 자의 대립의 상호관계로 만드는 원칙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존재의 현전은 하나의 사건이다. 이러한 사건은 시간의 밖땉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작품도 정신적인 것일 수만은 없다. 하지만 작품을 통하여 시간 속에 또 다른 시간이 일어나고, 살아가는 존재들과 잔존하는 사물들의 세계에,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모든 세계의 타자가, 언제나 세계와는 다른 것이 현전으로서 일어난다. 

 

작품이 솟아나고, 이제 작품이 있다고 작품이 선언하는 그 세계 속에서, 현행의 진리가 통용되는 통상의 시간 속에서, 작품은 이례적이고 엉뚱한 것으로서, 이 세계와 이 시간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서 솟아난다. 작품이 확인되는 것은 결코 현전하는 친숙한 현실로부터가 아니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을 작품은 우리에게서 앗아 간다. 그리고 작품 자체는 언제나 초과하여 존재하는, 언제나 결핍되어 있는 것의 잉여, 우리가 거부의 과잉이라 불렀던 것이다. 

 

언제나 작품은 진리를 반박하기 때문이다. 그 진리가 어떠한 것이든, 그것이 비록 작품으로부터 끄집어낸 것이라도 작품은 그것을 뒤집는다. 작품은 그것을 묻어버리고 숨기기 위해서 작품 속으로 다시 받아들인다. 하지만 작품은 시작이라는 단어를 맗고 그것은 낮에 있어서 극히 중요하다. 작품은 낮을 앞설 수 있는 낮의 상태이다. 작품은 입문시키고 즉위시킨다. “즉위시키는 신비”라고 샤르는 말한다. 하지만 작품 자체는 입문과 명백한 진리로부터 배제된 신비로운 것으로 남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품은 언제나 근원적이고 그리고 모든 순간에 있어서 시작이다. 이렇게 작품은 언제나 새로운 것처럼, 미래의 다가 갈 수 없는 진실의 신기루처럼 보인다. 그리고 작품은 새로운 ‘지금’이고, 작품은 작품이 입문시키고 더욱 더 현재로 만드는 것 같은 이러한 ‘지금’을 또다시 새롭게 한다. 마침내 작품은 언제나 우리를 앞서는 그리고 언제나 우리 앞에 주어진 근원이면서, 아주 오래된, 지독히도 오래된 시간의 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작품은 우리에게 우리가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는 것의 접근이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신성한 것의 위엄과 과도함을 빼앗음으로서 작품을 자신의 수준에서 보존하려 하고, 작품 속에서 주인으로, 성공으로, 작업의 다행스럽고 합리적인 완성으로 스스로를 확인하려고 하는 인간에게 작품은 적잖이 위험스럽다. 작품은 결코 주인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고, 성공 못지않게 실패에 관련되어 있으며, 작업하면서 만들 수 있는 사물이 아니고, 작품 속의 작업은, 작품이 그것을 요구할 때라 하더라도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깊숙이 변질된 것이라는 사실은 곧장 드러난다. 작품 속에서 인간은 말한다. 하지만 작품은 인간에게 있어서 말하지 않는 것에, 이름할 수 없는 것에, 비인간적인 것에, 진리도 정의도 권한도 없는 것에 목소리를 준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를 정당하다고 느끼지 못하며, 그는 더 이상 현전하지 않고, 그는 그를 위한 인간도 신을 위한 인간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도 아니다.

 

3장_근원적 경험

 

우리들, 무한히도 위험을 무릅쓰는 우리들......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전집 2권 541쪽) 

 

-왜 무한한가? 인간은 그 어떤 존재들보다 위험을 무릅쓰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위험 속에 두기 때문이다. 세계를 건설하고, 작업을 통해 자연을 변화시키는 일은 가장 손쉬운 것은 배격하는 모험에 찬 도전을 통해서만 성공을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 속에서도 보호받고 만족스럽고 안전한 삶에 대한 추구는 여전히 말하고 있고, 분명한 임무들과 정당한 의무들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위험에 처하게 한ㄴ다. 하지만 공동의 낮의 보호 아래, 유용하고, 유익하고 진리라는 것에 비추어서, 때로는 혁명 속에, 전쟁 속에, 역사적 발전의 압력 아래 자신의 세계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 하지만 언제나 더욱 원대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먼 것을 가깝게 하며, 있는 것을 보호하고, 그의 능력이 몰두하는 가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 한마디로 낮을 정비하여 능력을 가능한 것의 척도에 따라 확장하고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생 종 페르스는 그의 시들 중 하나를 ‘추방’이라 이름하면서 또한 시적 조건을 이름하였다. 시인은 추방되었다. 그는 도시에서, 규칙적인 일에서 그리고 한정된 의무로부터, 결과, 잡을 수 있는 현실, 능력이라는 것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작품이 그를 마주하게 하는 위험의 바깥 양상은 분명히 비공격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시가 비공격적이라는 것은 시에 순응하는 자는 능력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하고, 그가 할 수 있는 것, 가능성의 모든 형태 바깥에 던져지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는 추방이다. 그리고 시에 속하는 시인은 추방의 불만족에 속하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바깥에, 자신의 고향 바깥에 머물고, 그는 이방인에, 내밀성도 한계도 없는 바깥이라는 것에, 횔덜린이 자신의 광기 속에서 리듬의 무한한 공간을 보면서 이름한 그 간극에 속한다. 

 시라고 하는 이러한 추방은 시인을 떠도는 자, 언젠 길 잃은 자, 확싫ㄴ 현전과 진정한 거주를 빼앗긴 자로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심각한 의미로 들어야 한다. 예술가는 진리에 속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작품은 그 자체로 진리라는 것의 움직임을 벗어나고, 어떤 측면에서 작품은 언제나 진리라는 것을 철회하고 의미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때 작품은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것이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직 결코 시작되지 않은 이 영역을, 거기로부터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가장 위험스러운 미결정의 혼돈의 장소를 가리킨다. 영원한 바깥인 이 장소는, 인간이 가능성과 길이 되기 위하여 진리라는 것이 부정하여야만 하는 것의 시련을 받게 되는, 외부의 암흑이라는 이미지로 아주 잘 환기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은 어떻게 되어 있고, 문학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질문은 이제 특유의 격렬함 속에서 다시 제기된다. 우리가 예술을 갖는다면, 진리의 추방이고, 순진무구한 놀이의 위험이고, 인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바깥으로 그리고 가능성의 모든 형태 바깥으로 던져지는 그곳, 인간의 내밀성도 한계도 없는 바깥에의 소속을 긍정하는 예술을 갖는다면, 그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인간은 그 전체가 가능성이라면, 어떻게 자신에게 예술을 주는가? 이것은 이른바 본래적인 요구라는 낮의 법칙에 일치하는 요구와는 반대로, 인간은 죽음과 가능성의 관계가 아닌 관계를 갖는다는 것, 다스림으로, 이해로, 시간의 작업으로 이르는 관계가 아니라 인간을 극단적인 전복에 마주하게 하는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러한 전복은 따라서 작품이 가닿아야하는 경험, 작품이 가지는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이 계속해서 작품을 가지고 간직할지도 모르는 그러한 근원적 경험이 아닐까? 

 그리하여 끝은 인간에게 끝마치고, 한정하고, 분리하고, 따라서 포착하는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 끝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지독한 악무한(mauvais infini)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은 더 이상 “절대적으로 고유한 가능성”, 나의 고유한 죽음, “오 주여, 각자에게 고유한 죽음을 주조서”라는 릴케의 기도에 대답하는 그 유일의 사건일 수가 없다. 그것은 반대로 결코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코 나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 누구가 죽고”, 그 누구로서 언제나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중성의 차원에서, 영원한 라는 비인칭으로서 죽는다. 

 

릴케는 죽음 속에서 어떤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단어를 부정 없이 읽기(das wort “Tod” ohne Negation zu lesen)를 요구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부정없이 읽는다는 것은 거기서 결정의 단호함고 부정의 능력을 박탈하고, 가능성과 진리라는 것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진정한 사건으로서의 죽음에서 떨어져 나와, 불분명하고 결정되지 않은 것에, 종말이 다시 시작된다는 과중함을 갖는 텅 빈 이쪽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예술의 경험이다. 예술은 이미지로서 리듬으로서 어렴풋하고 텅 빈 바깥의, 아무것도 아닌 한계 없는 중성적 존재의, 인색한 부재의, 존재가 무의 형태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숨 막히는 밀도의 위협적인 접근을 가리킨다. 

 

실수는 우리를 돕는다. (das Irrsal hilft) 

 

시인은 고유한 것, 시인의 힘, 시인의 위험은 신의 결함이 있고 진리가 결핍된 곳에 시인이 머무른다는 데 있다. 비탄의 시간은 모든 시간 중에도 예술에 고유한 시간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신들이 결핍되어 있을 때 그리고 진리의 세계가 흔들리고 있을 때, 작품 속에서 염려처럼 솟아나는 시간이다. 작품의 유보된 부분을 담고 있는 염려인 양 작품 가운데 떠오르는 시간, 작품을 위협하는 시간, 작품을 현전하게 하고 보이게 하는 시간이다. 예술의 시간은 시간 이 편의 시간, 신성한 것의 집단적 현전이 그것을 숨기면서 환기하는 시간, 역사와 역사의 작업이 그것을 부정하면서 취소하는 시간, 그리고 작품이 무슨 소용이냐는 비탄 가운데 외현 저 속에 숨는 것으로서, 사람짐 속에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서, 극단적인 전복과 가까운 곳, 그 위협 속에서 완성되는 것으로서 보여 주는 시간이다. “그 누구가 죽는다”라고 할 때 작용하는 시간, 무의 형태로 존재를 영속화시키면서 빛을 매혹으로, 대상을 이미지로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되풀이의 공허한 중심으로 만드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실수는 우리를 돕는다.’ 실수는 예감하는 기다림이요, 또한 각성과도 같은 잠의 깊이, 망각, 성스러운 기억의 말없는 공허이다. 시인은 비탄의 내밀성이다. 오직 그만이 부재의 공허한 시간을 깊이 있게 살고, 그에게서 실수는 방황의 깊이가 되고, 밤은 또 다른 밤이 된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르네 샤르가 “위험이 너의 밝음이라면”이라고 적을 때, 조르주 바타유가 운(運)과 시를 마주하게 하고서 “시의 부재는 운의 부재이다”라고 말할 때, 횔덜린이 비탄의 현전하는 공허를 “고통의 충만, 행복의 충만”이라 이름할 때, 이러한 말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왜 위험이 밝음일 수가 있는가ㅏ? 왜 비탄의 시간이 운의 시간일 수가 있는가? 횔덜린이 바쿠스의 신관들처럼 성스러운 밤 이곳 저곳을 떠도는 시인들을 말할 때, 이 영원한 통과는, 장소가 없는 방황의 불행은 또한 풍요로운 이주가 되고 매개하는 움직임이 되며, 흐름을 언어로, 언어를 거주로, 언어를 낮이 거처하고 낮이 우리의 거처가 되게 하는 능력으로 만드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은 주어질 수 없다. 시는 대답의 부재이다. 시인은 그의 희생을 통하여 그의 작품 속에 질문을 열어 놓는 자이다. 

 

시간 이 편에 언제나 시작을 예고하는 예언적 고립이다. 

 

질문

1. 블랑쇼는 계속 작품에서 창작자가 추방되고 소멸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인간의 한계에 다달아야 하는 지점이다. 창작자가 소멸했을 때 창작자가 하나의 인간으로서 지치고 예술 활동을 접게되는 상황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작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인간’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2. 블랑쇼는 ‘문학과 근원적 경험’이라는 챕터를 통해서 예술을 예찬하고 있는데 예술작품이 미래를 예언하는 역할까지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왜 예술작품을 멀리하는 것일까? 

 

3. 예술작품을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될까? 작품은 모두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지향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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