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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 10강 발제

경해진 2020.11.25 04:13 조회 수 : 76

7부. 문학과 근원적 경험 요약

 

1장. 미래와 예술에 대한 질문

예술은 우리에게서 지나간 것이라는 헤겔의 선언 이후 예술은, 작품은 새로운 존재 형태를 요구받게 되었다. 그것은 활동으로서의 예술,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하나의 대상, 인간의 능력에 따른 실제적 작업을 통한 생산물로, 생산력으로 표상되기에 대한 요구이다. 순수한 주관적 내면과 생산하는 의지의 정복 사이의 끝없는 교환 작용으로 이해되는 현대에, 예술은 보편적 낮의 긍정에 봉사하기를 요구받는다.

한편 예술은 세계 속의 도구로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활동,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시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의 움직임을 추동하는 기능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현실적인 것에 속해있지 않고, 만들어진 사물의 현전 속에서 자신의 증명을 찾지 않으며, 증명 없이 긍정된다. 예술은 정당성을 기초하는 정당화되지 않는 것이다. 활동에 흡수/포섭되기, 그리하여 생산으로서 가치를 부여받기에 대한 거부. (이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권력이다.) 어떠한 효용성도, 생산성도, 기능도, 나아가 작품 외적인 어떠한 요구에 대해서도 거부하여, 스스로를 존재의 근거로 삼되 그 형태는 정답/답변/해명이 아닌 질문이며, 질문으로서 닫혀있음으로서 열려진 상태로 예술은 스스로 완성하고 스스로 존재한다.

 

2장. 예술작품의 성격들

용품(用品) 속에서 물질은 사라진다. 용품은 그것의 목적만을 보여주며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은 그것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절하게 기능하는가, 즉 용도로서만 받아들여질 뿐, 물질은 소외된다. 세계를 도구화하는 시선에서 존재는 사라지고 은폐된다. 예술은, 작품은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을 드러내고 찬미한다. 작품은 물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나타나게 한다. 대리석은 조각에 의해 부정되지 않고 오히려 긍정되며, 작품에 이르는 길로서 드러난다.

작품은 결코 양립될 수 없고 진정되지 않는 상반되는 것들의 내밀성이고 격렬함이다. 양립될 수 없으나 그것들을 대립시키는 이의제기 속에 충만함을 얻는 대립 작용의 상반성에 마주하는 내밀성, 그 찢겨진 내밀성이 바로 작품이다. 이러한 존재의 현전은 하나의 섬광과 같은 사건이다. 거부의 과잉인 작품은 그 충만함으로 솟아남과 동시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을 앗아가며 이로서 시작을 말한다. 낮의 독자는 이 섬광과 같은 작품의 "시작"이라는 말을 근면하게 낮의 작업으로, 진리로 전환한다. 낮의 독자는 작품을 용품으로 전환하지만 그것은 독자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작업이며, 작품은 그와 무관하게 솟아나고 앗아가고 또 다시 닫힌 채로 존재한다.

(→ 비유하자면 작품은 번개이고, 작품의 변증법이라고 일컬은 것은 번개가 치는 순간 발생하여 허공으로 퍼져나가는 에너지, 치자면 천둥과 같은 게 아닐까. 변증법적 과정, 역사적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은 번개 자체가 아니라 번개의 빛, 소리 등 그것이 존재했다는 흔적이다. 낮의 독자는 번개가 발생시킨 에너지(=역사의 시작)를 근면한 작업/노동을 통해 사용가능한, 유용한 에너지로 변환한다. 그렇지만 번개는 시작을 말한 동시에 사라져 그 자리에 없으며, 건전지에 충전된 전기는 번개가 아니다.)

 

3장. 근원적 경험

작품은 예술이 존재하는지 예술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극단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작품은 알지 못하는 것, 불가능한 것을 욕망한다. 작품이 언제나 진리를 철회(부정)하기에 시인은 한 순간도 진리에 머물 수 없다. 본질적 모호함, 불가능함, 이러한 것이 예술의 본질이자, 예술이 근원적으로 갖고 있는 위험이다. 작품의 위험은 '실수'이다. 실수는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시인은 낮의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바깥으로 쫓겨난다.

예술(시)에 순응하는 자는 능력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하고, 그가 할 수 있는 것, 가능성의 모든 형태 바깥에 던져지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능력과 가능성으로서의 인간의 극단적인 전복,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때 죽음은 개별자의 고유한 죽음, 1인칭의 죽음을 뜻하지 않는다. 이때의 죽음은 비인칭의 죽음이다. 그 누구가 죽는다. 비인칭의 죽음은 공적이다.

진리의 본질적 작업이 부정하는 것이라면, 실수는 넘쳐나는 충만 속에서 긍정하고 있다. 이러한 긍정은 영원한 회귀의 파도이다. 최초의 실수는 시작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존재란 처음이라는 것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또 다시, 또 다시! 모든 것은 언제나 다시 시작한다. 오직 다시 시작한다. 시작에 앞서는 권능으로서의 새로운 시작은, 바로 우리들의 죽음의 실수이다.

 

 

 

발제

1. 니체가 예술가를 표현하는 방식은 블랑쇼와 달라 참고할 만하다. 크리스토프 멘케의 <미학적 힘>이라는 텍스트에서 블랑쇼의 예술론과 상반된 니체의 미학을 소개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대비라고 생각되어 나누고자 한다. (참고자료: 이미지파일, 크리스토프 멘케, <미학적 힘>의 일부)

1) 블랑쇼는 예술을 통해 예술가는 능력과 가능성의 바깥으로 추방 당한다고 한 반면, 니체의 예술가는 할 수 없음을 할 수 있는 자이다.

2) 블랑쇼는 예술가는 극단적인 전복을 통해 비인칭의 존재로서 공적인 죽음을 맞이한다고 말하였는데, 니체는 실천적 세계를 미학적으로 변용시켜 다른 활동방식을 채택하기를 제안하는데, 그 다른 활동방식을 "삶"이라고 일컫는다. 니체의 예술가 모델은 행위하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을 제안한다. 블랑쇼의 죽음과 니체의 삶이 대비되는 것도 재밌다.

3) 공통적으로는 '예술은 어떠한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는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4) 블랑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작품의 변증법 파트에서 작품의 섬광이, 작품의 시작이라는 말이 낮의 독자들에 의해 역사로 날라진다, 이행된다, 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어서, 이 지점에서 나는 블랑쇼는 기본적으로 변증법적 세계관을 채택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리를 부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2. 낮에서 추방된 시인들은 왜 은퇴하지 않는가? 카프카도, 말라르메도 직장 생활과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낮에서 추방되어 능력을 상실하고 극단적 전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비인칭이라고 한 바 있다. 죽음에 이르는 것은 개별자의 고유한 죽음이 아니라 비인칭의 죽음이라고.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생각들은 거대한 웅얼거림을 만들어 말은 입안에서 문장이 되지 못한 채 썩은 버섯처럼 무너져내리는 것을 경험하는 비인칭은 그 신체를 가지고 있고 생명과 경제 활동을 수행하는, 낮을 살아내는 1인칭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생활인으로서의 낮의 경험과 문학의 근본적 경험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세간의 본캐/부캐 놀이와 같은 방식으로.?) 낮과 밤은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

 

 

<참고자료>

https%3A%2F%2Fs3-us-west-2.amazona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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