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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 세미나 8강 요약발제문/ 안차애

안차애 2020.11.12 10:10 조회 수 : 33

                       블랑쇼 세미나 8강 요약발제문 <문학의 공간 – V부 1,2,3장〉 외/ 안차애

 

[문학의 공간 – 5부 1장 , 바깥]

 

 최초의 밤, 여기 부재가, 침묵이, 휴식이, 밤이 다가온다. 말은 말을 그 의미로서 보증하는 말없는 깊이 속에 완결되고 완성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밤 속에 사라졌을 때, ‘모든 것이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이것이 또 다른 밤이다.(p236) 최초의 밤은 맞이하는 밤이다. 사람들은 밤 속으로 들어가고, 잠을 통하여 그곳에서 휴식한다. 그러나 또 다른 밤은 맞이하지 않고 열리지 않는다. 그 밤 속에서 사람들은 바깥에 있다. 밤으로 다가가는 것, 그것은 바깥으로 다가가는 것이고 그것은 밤 바깥에 머무는 것, 그리고 밤으로부터 빠져나올 가능성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다. 밤 속에서, 죽음을 발견하고 망각에 이른다. 그러나 또 다른 밤은 발견할 수 없는 죽음이고, 망각 속의 휴식 없는 기억인 잊혀지지 않는 망각이다.(p237~238)

 

니키타 위에 눕다

 죽는다는 것은 이렇게 시간의 전체를 껴안는 것이고 시간을 하나의 전체로 만드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의 시간을 아우르는 황홀이다. 사람은 결코 지금 죽지 않고, 언제나 나중에, 미래에, 결코 현재가 아니고, 모든 것이 완성되었을 때, 모든 것이 완성되고 더 이상 현재가 없을 때 올 수 있는 그러한 미래에 죽는다. 이는 우리가 밤 속에서 발견하는 최초의 밤의 진리와도 같다.(p239) 인생에서 늘 성공한 상인 브레후노프(Brekhnouf)가 나아가는 걸음이 또한 뒷걸음질이 되기도 하는 공간에서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와 죽어가는 니키타 위에 몸을 누우려고 하는 것, 니키타의 세계 위에 자신을 펼치는 것, 모든 다른 사람들을 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 우리에게서 앗아 가는 이해할 수 없는 필연적인 움직임이다. 다만 밤 속에 누우면 서. 마치 이 밤이 아직은 어떤 인간적 모습에 대한 희망이고 미래인 것처럼.(p241~242)

 

밤의 덫

 최초의 밤, 그것은 아직 낮의 건축물이다. 밤을 만들고, 밤 속에 세워지는 것은 낮이다. 밤은 낮의 예감이며, 낮의 저장고, 밤의 깊이이다. 밤은 또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한계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간직하고 받아들여야 할 본질적인 것이다. 낮 속에 밤이 지나가야하고 낮이 되는 밤은 빛을 훨씬 풍부하게 하고 밝음을 표면의 반짝임이 아니라 깊이로부터 오는 광채로 만든다. 그리하여 낮은 낮과 밤의 전체이고 변증법적 움직임의 위대한 약속이다. 낮의 밤인 이 밤을 사람들은 진정한 밤이라 말한다. 또 다른 밤언제나 다르다. 밤 속에서, 또 다른 밤은 함께 하나가 될 수 없는 것, 끝나지 않는 반복,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충만, 근거도 깊이도 없는 것의 반짝임이다. (p243~245)

 다른 밤의 덫, 고뇌가 감추어 주고, 불안전이 거처가 되는 최초의 밤이다. 카프카의 (Der Bau)에서 짐승의 수고가 보여주는 움직임이 그러하다. 거기서 사람들은 땅 위의 세계에 대한 견고한 방어를 확인하나, 땅 아래의 불안전에 직면한다. 낮의 방식을 빌려 세우나, 그것은 땅 밑이고, 그리고 올라가는 것은 파묻히고 일어서는 것은 잠긴다. 내밀성은 위협적인 낯 섬이 되고 위험의 본질이 예고된다. 짐승이 다른 짐승의 소리를 들어야하는 순간, 이것이 또 다른 밤이다.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부재이고 짐승이 알아보지 못하고 짐승이 만나지 못하는 타자가 된 자기 자신이다. 또 다른 밤은 언제나 타자이고 거기에 다가가는 자는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여기저기를 오가는 자이다. 카프카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마지막 문장은 끝없는 움직임으로 열려있다. 밤에서 또 다른 밤으로 옮겨가는 정해진 순간이란, 멈추고 되돌아와야 할 경계란 없다. 자정은 결코 자정에 자정이 되지 않는다. 자정은 주사위가 던져졌을 때 자정이 된다. 하지만 주사위는 자정에만 던질 수 있다. 그러므로 최초의 밤에서 벗어나야하고 낮을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것, 땅굴을 만드는 것, 밤을 또 다른 밤으로 여는 것이다. 비본질적인 것에 자신을 맡기는 위험은 그 자체가 본질적이며 망각은 위험에 대한 기억의 깊이다. 그것을 예감한 자는 이러한 접근 속에서 본질적인 것을 보고, 거기에 모든 진실을, 모든 진지한 것을 바친다. 땅굴과도 공허와도 같은 그의 작품을 만들면서, (p246~248)

 

[5부 2장 , 오르페우스의 시선]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향하여 내려갈 때, 예술은 밤을 열리게 하는 권능이다. 즉 최초의 밤이 허락된다. 에우리디케는 예술이 이를 수 있는 극단이고 몹시 어두운 지점이며, 밤의 본질이 또 다른 밤처럼 다가오는 순간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궁극의 요구는 작품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지점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서 이 본질을 붙잡는 것이다. 밤의 한가운데서. 그리스 신화는 깊이의 과도한 경험이, 경험 자체를 위해 추구되지 않을 때에만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에우리디케로 향하면서, 오르페우스는 작품을 무너뜨리고, 작품은 즉각 해체되며, 에우리디케는 어둠으로 돌아선다. 밤의 본질은 오르페우스의 시선 아래 비본질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그는 작품을, 에우리디케를, 밤을 배반한다. 그가 지옥으로 찾으러 간 것은 죽음의 충만이 살아있는 에우리디케를 갖고자 하는 힘이었다. 이를테면 밤 속에서 밤이 숨기는 것, 또 다른 밤을. 그러므로 오르페우스가 그에게 ‘뒤돌아보는’ 것을 금지한 법을 무시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는 그림자의 부재 속에서 무한한 부재의 현전인 에우리디케와 자신의 부재를 보았으며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도 죽었다. 세계의 고요한 죽음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끝없는 죽음, 종말의 부재에 대한 시련으로서의 또 다른 죽음을. 하여 그의 유일한 운명은 그녀를 노래하는 것이다. 그는 노래 속에서만 오르페우스이고 시를 통해서만 삶과 진리를 갖게 된다. 즉, 노래 속에서만,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에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나 둘은 이미 상실된 자이거나 흩어진 자이므로 오르페우스는 또한 무한히 죽는 자이다. 드높은 초조함과 내밀해진 정념으로 죽음 속에 무한히 거주한다. (p250-253)

 노래에 대한 염려 속에서, 법을 망각한 초조함과 무모함 속에서 에우리디케를 바라보는 것, 바로 이것이 영감이다. 영감은 밤의 본질이 비본질적인 것이 되는, 최초의 밤의 호의적인 내밀성이 또 다른 밤의 기만적 덫이 되는 바로 이 문제의 순간이 된다. 하여 영감은 실패를 향하여, 무의미를 향하여 나아간다. 영감을 얻은 금지된 시선은 오르페우스로 하여금, 그 자신뿐 아니라, 낮의 진지함 뿐 아니라, 밤의 본질마저, 모든 것을 잃게 한다. 작품은 영감을 통하여 오르페우스가 위협에 처하는 만큼이나 위태로워진다. 작품은 이 순간 극단적으로 위태로워진다. 밤에 관련된 욕망의 충동 속에서 작품을 망각하고 희생하는 시선 속에서만 근원으로 나아가면서 계속해서 작품으로, 작품의 근원으로 나아간다. 보상으로 실패의 확실성에 빠져들 때 밤 속에 누우면서. 마치 이 밤이 아직은 어떤 인간적 모습에 대한 희망이고 미래인 것처럼.(p241~242)

 

[5부 3장 , 영감]

 

 도약은 영감의 형태 혹은 움직임이다. 영감의 결핍 혹은 궁핍이기도 한 영감 속에서 훨더린은 시적 시간을 “비탄의 시간”으로 느낄 때, 이러한 조건을 신의 결여가 우리를 도와주는조건을 실험하고 있다. 고갈상태를 괴로워하였고 영웅적 결정으로 그러한 상태에 자신을 묶어 둔 말라르메 또한 이러한 상실이 단순한 개인적 쇠퇴를 표현하고 작품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의 만남을, 이러한 만남의 내밀성을 예고하고 있다.(P259)

자동기술

자동기술은 낮에 여러 가지 권능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글을 쓰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낮의 바깥에서처럼, 밤의 방식으로, 일상적인 것과 그 거북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글을 쓰는 방법을, 여기서 초현실주의 역사에 있어서 글쓰기의 자유는 잠의 경험과 관련되고, 그것의 좀 더 진정되고 위험이 덜한 형태와도 같다.(P261) 자동기술은 구속을 제거하고, 매개물을 유예시키고, 모든 매개를 거절하려고 하였으며 글을 쓰는 손을 노예와 같은 도구가 아니라 독립된 권능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예술가를 또 다른 미학적, 윤리적 혹은 법적 권한의 판단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그를 모든 것의 중심에 서게 하지 않는가? 매혹적이고도 엄청난 일이다.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는 하나의 특권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치게 만드는 특권이다. 더 이상 선택이 가능하지 않는 순간에 이르고, 말하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하게 되는 지점, 그리고 시인이 아무것도 피할 수 없고, 아무것도 벗어나지 않으며, 피할 곳 없이 존재의 낯섦과 과도함에 자신을 내맡기는 지점을 얻는 것이다.(P263) 호프만슈탈은 영감을 받은 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있다. 말없이 자리를 바꾸면서, 오직 눈과 귀로만 존재하면서 그리고 오직 그가 근거하고 있는 사물들로부터 자신의 색채를 받아들이면서. 그는 관객이다. 아니다, 그는 모든 사물의 숨은 동반자, 말없는 형제이다. 그리고 자신의 색채의 변화는 그에게 내밀한 고통이다. 그는 사물들을 괴로워하는 동시에 즐긴다. ... 눈꺼풀이 없는 눈처럼 어떠한 사물에도 자신의 영혼의 접근을 금하지 말 것, 이것이 그가 따르는 유일한 법이다” “시인들이 끊임없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그를 생각한다. 사물들은 그의 내면에 있고, 그를 지배한다. 그 메마른 시간들, 그 우울, 그 동요마저도 비인칭의 상태들이고, 지진계의 튀어 오름에 해당한다.”(P264~265)

 

웅얼거림의 마르지 않는 특성

앙드레 브르통은 “마음에 드신다면 계속하십시오. 웅얼거림의 마르지 않는 특성을 믿으십시오”라고 말한다. 영감의 첫 번째 특성은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감은 중단되지 않는 것으로의 접근이기 때문이다. 릴케와 고흐가 작품을 멈출 수 없었듯이. 자동기술은 이러한 침묵 없는 언어의 긍정, 우리들 가까이 열려 있는, 우리 공동의 말로서,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은, 무한한 웅얼거림의 긍정이다. 말의 전부만이 아니라 근원으로서의 말을, 근원의 순수한 솟구침을. 영감 혹은 자동기술은 우리를 지워버리고 우리를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변화시키면서 우리를 가로질러 통로가 열려지는 말이다.(P266) 영감이 순수할수록, 영감이 이끄는 공간, 근원에 좀 더 가까운 부름을 듣게 되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자는 그만큼 더 헐벗게 된다. 이는 경이로우면서도 절망적인 밤의 상태, 떠도는 말을 찾아서 영감의 너무도 순수한 힘에 저항할 줄 몰랐던 자가 머무는 밤의 상태이다.(p268)

 

찬도스 경

 호프만슈탈은 「찬도스 경의 편지」에서 ‘찬도스 경’의 입을 빌려 “나는 생각이나 말을 통하여 어떤 주체를 지속적으로 다루는 능력을 상실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말들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눈앞에서 변신하고, 시선들이 되기 위해, 텅 빈 인상적이고 매혹적인 빛이 되기 위해, 말들이 아니라 말들의 존재가 되기 위해 기호이기를 그만둔다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언어에 대한 예감이며 라틴어도, 영어도, 이탈리아어도 스페인어도 아닌 내가 한마디도 모르는 언어, 말없는 사물들이 나에게 말하는 언어라는 것이다. (p269)

 글을 쓰고 생산하기를 바라는 자는 끊임없이 자신 속의 열광을 잠재워야한다. 영감은 부드럽게 혹은 격렬하게 우리를 세계 밖으로 밀어내고, 그리고 이 바깥에는 잠도 없고 휴식도 없다. 아마도 그것을 밤이라 불러야 하리라. 하지만 분명 밤은, 밤의 본질은 우리를 잠들게 버려두지 않는다. 밤 가운데 잠으로의 피난처는 발견되지 않는다.(p272)

 

작품, 영감으로 향한 길

 자동기술의 실패는 작가를 좌절시키지 않는다. 이 가치 없는 것의 공간 속에서 끈기 있게 나아가고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의 비탄을 견디며 완성에의 염려를, 완벽에의 권리를 지켜가야 한다. 작품은 작품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다. 위험이 본질적인 곳에, 실패가 위협하는 곳에 머물고 지탱하는 것을 요구하므로 작품은 예술가를 작품으로부터 멀리, 그 완성으로부터 멀리 밀어낸다. 릴케는 아내 클라라에게 “우리에게 고유한 일종의 이러한 방황이 우리의 작업 속에 포함되어”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경험이 내밀성을 깨트리고 그 자체를 드러내려고 하는 순간 그 경험은 상실될지 모른다. 자동기술은 대담하게 말한다. 경험의 순간만이 중요하고, 아낌없는 부재의 익명의 가시적 흔적만이 중요하다. 어둠은 낮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스스로를 말할 수 없는 것은 들려야한다. 죄의식의 불안 속에서가 아니라, 행복한 입의 무심함 속에서. 자동기술은 수동적이며 그 근원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욕망에 자신을 맡기는 말이다. 르네 샤르가 시는 욕망으로 남은 욕망의 실현된 사랑이다라고 말하고 앙드레 브르통은 욕망, 그렇다, 언제나라고 말한다.(p2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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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도스 경이 굴을 판다고?

                                                                                         -호프만스탈의 「찬도스 경의 편지」와 카프카의 「굴」에 대한 단상

 

 지금 찬도스 경은 ‘또 다른 밤’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에겐 부분 수리중인 대저택이 있고 아름다운 아내와 제법 아버지의 잔소리를 알아듣는 예쁜 딸이 있고 그를 보면 모자를 벗거나 공수자세로 인사하는 많은 하인들이나 고용인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여왕 앞에서 그가 쓴 희곡이 공연된 적도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라틴어학자이기도 하다. 다가진 것이다. 그것도 약년 26세에. 그런데도 그는 아내에게도 집사에게도 들킬까 두려운 굴속의 밤을 보내고 있다.

 짐승처럼 맨 이마를 땅에 찧으며 끙끙 앓고 있다. 그의 명성을 드높였던 촘촘한 언어의 건축물들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새고, 벽들이 뫼비우스의 곡면처럼 휘어 돌며 그를 옥죄고 있다. 돌아보니 어느새 사물과 풍경이 말과 글이 되지 않는 이상한 나라의 굴속에서 진퇴양난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묻힐 묘혈을 스스로 판 사람처럼 그가 파고 광장을 다지고 매끈하게 갈무리한 곳곳이 검은 벽이 되고, 미로가 되고, 닫힌 출구가 되어 그를 위협하고 있다. 끝임 없이 들리는 타자의 굴 파는 소리가 그의 잠과 휴식마저 빼앗아 간지 오래다. 귀 기울일수록 소리의 중심은 흐려져 종국에는 자신의 가슴에서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그는 이제 명성과 박수소리와 사각거리는 펜촉소리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나라, 촛불 켜진 살롱의 언어들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나라, 양피지의 문서와 장정의 바이블이 재처럼 삭아 내린 밤의 왕국의 유일한 포로이다. 짐승의 숨소리와 피 냄새가 생으로 들끓고, 사물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끙끙대는 굴속에서 그는, 어제의 밤으로 돌아가야 할지 내일의 밤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 채 끝없는 실패만 예감하고 있다.

 찬도스 경의 언어와 기억과 불안이 밤보다 더 어두워지면 얼굴 없는 굴속의 밤이 그를 친구처럼 불러주는 시간이 올까? 비로소 드러난 사물들이 영어도 독일어도 라틴어도 스페인어도 아닌, 자신들의 언어로 그를 노래할 순간이 도래할까?

 부디 그날이 머지않았기를. 그날이 와도 또 다른 굴속의 밤이 덫처럼 미리 예비 되어 있다고 해도,

 

 

                                                           <질문들>

 

☞ 질문1: 1, 2장에서는 ‘최초의 밤’과 ‘또 다른 밤’이 끝없이 변주되는데 이 구절을 ‘비본질인 것’ 과 ‘본질적인 것’으로 바꾸어 말해도 되나? 또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물고 도는 이 밤들은 어떤 상관관계와 함수관계를 가지는 것인가? 어느 것은 극복되어야 하고 또 어느 것은 긍정되어야 하는 것인가?

☞ 질문2: 호프만슈탈은 ‘시인들이 끊임없이 사물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그를 생각한다.’(p265)라고 말하는데 이런 행복한 도치가 가능하려면 결국 시쓰기의 6단계처럼 서두르지 않고 보고 읽고 잊고 있고 기다리다 받아 적는 과정을 순순히(?) 거쳐야 하나? 덜 서성이고 덜 기다리는 다른 팁은 없는 것일까?......ㅎ

☞ 질문3: ‘자동기술은 대담하게 말한다. 경험의 순간만이 중요하고, 아낌없는 부재의 익명의 가시적 흔적만이 중요하다’(p275)라고 블랑쇼는 말하며 이는 ‘죄의식의 불안’ 속에서가 아니라 ‘행복한 입의 무심함 속에서’라고 부연하는데, 이는 우리가 익명적 비인칭적 사물적인 시선 속에서는 관습적 도덕적 언어적 당연성을 버리고 무의식적 욕망의 기재를 가감 없이 들어내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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