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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 세미나 : 6강 『문학의 공간–릴케와 죽음의 요구』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그리고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릴케는 베라 오우카마 크노프, 19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 무용수를 위해 2부작 연작시 로 각각 26편과 29편을 지었다. 릴케 자신을 오르페우스로 베라는 에우리디케로 형상화한다. 오르페우스를 단지 악인(樂人)이 아닌 신의 위치로 위상시키고 있다.

그대가 가르쳐주는 노래는 욕망도 아니고/앞으로 끝내 얻을 것을 위한 구애도 아니다/노래는 현존재. 신에게 쉬운 일이다/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존재하나? (중략) 네가 노래한 사실을 잊은 법을. 그것은 사라진다./진실로 노래하는 것은 다른 숨결이다/ 무를 싸고도는 숨결. 신안에 부는 바람, 한줄기 바람.(Ⅲ)

오르페우스는 ‘노래’를 통해 자족적인 순환을 보여주고 있다. 존재나 사물이 행하는 모든 존재의 표현, 아름다움, 말, 짓기 등 그것을 행하는 존재로 무녀에게 찢겨 사라졌어도 만물 속에 깃들여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 존재로.

변화를 희망하라. 오 화려하게 모습을 바꾸며/ 네게서 빠져나가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불꽃을 열광하라/지상적이니 것을 마음대로 다루는 구상의 정신은/ 형상의 진동 가운데서 오로지 전환점만을 사랑한다 (중략) 스스로 샘물이 되어 쏟아내는 자. 그를 인식이 알아본다/ 인식은 황홀해하며 그를 해맑은 창조의 영역 속으로 이끈다./ 그것은 자주 시작하고 더불어 끝나고 끝과 더불어 시작한다. (2부.Ⅻ 일부분)

릴케가 강조한 변용과 전환점. “우리를 넘어서고 사물들을 번역하는 공간”, 열린 세계 “모든 세계가 그들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진정한 실재성을 향하는 것처럼 서둘러 다가가는” 공간 자체, 보다 거대한 순환과 끝나지 않는 변신의 공간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근원적이며 변용된 순환. 작가의 고뇌가 엿보인다.

- <두이노의 비가>

제 1비가:

“천사들은 살아 있는 자들 사이를 가는지 죽은 자들 사이를 가는지 때때로 모른다. 영원한 흐름은 두 영역 사이로 모든 세계를 끌어가나 두 영역 모두를 압도한다.”는 “삶의 진정한 형태는 이 두 영역을 통하여 넓혀지고, 가장 커다란 피의 순환은 두 영역 모두를 가로질러 돌아가고 있다.”

제 8비가:

“생물들은 온 눈으로 열린 세계를 바라본다./우리들의 눈만이 거꾸로 된 듯하며/ 생물들 주변에 빙 둘러 덫어럼 놓여/ 생물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막는다.” 열린 세계는 또 다른 곳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 자체로 갇혀진 이미지들이 어른거리는 의식에 대한 개념에 부딪치”며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순수한 관계”로, 죽음을 통하여 눈은 스스로의 방향을 전환하며 또 다른 곳으로, 그곳은 의식을 통하여 의식 바깥에 자리한 곳이다.


<릴케와 죽음의 요구 >『문학의 공간』 pp.166~209.

그는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 “극복하다”라는 말은 시가 필요로 하는 말들 중 하나이다. ‘극복하다’는 넘어선다는 것. 넘어서는 것을 견뎌내고 그것을 빗겨나지 않고 그 너머로 어떤 것을 겨냥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 자의적 죽음에 있어, 자신의 마지막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움직임, 자신의 형태와 한계를 부과하고자 하는 욕망은 큰 실수 중의 하나이다. 「이지튀르」는 이것을 뛰어넘어 우연에 종말을 부여, 자신과 균등하게 만들었고 무효화하며 그 투명함 속에서 죽는다는 도전, 죽음 없이 죽으려는 서원에 관련되어 있다.

자의적 죽음은 자의적 죽음의 초조함, 기다림의 거부, 우리를 초과하는 것 속에서 우리를 되찾게 되는 순수한 중심에 이르는 데 대한 거부이다. 지나친 죽음의 욕망은 성숙하지 못하며 폭력으로 얻은 죽음은 죽음이라기보다 우리의 욕망이다.

   1. 적절한 죽음의 탐구

A.자신에게 충실하게 죽는다는 것

오 주여, 각자에게 자신의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각자가 사랑과 의미와 슬픔을 만났던/진정 그 삶에서 비롯하는 죽음을.

그 누구가 죽기를 바란다. 하지만 자기 방식으로. 그 누구는 하찮은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그 누구가 죽는다’는 익명의 죽음에 대한 경멸은 죽음의 익명적 성격이 낳게 하는 왜곡된 고뇌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죽기를 바라며 위엄 있는 죽음을, 그 누구는 사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 익명의 죽음에 대한 고뇌

릴케는 익명의 죽음에 대해 짐멜, 야콤센, 키르케고르의 시선들을 통해 확인한다. 비인칭의 죽음과 그러한 죽음이 인간에게 던져 준 얼굴을 보다 면밀히 들어다보지 않았으나 『말테의 수기』의 그 고뇌는 대도시의 익명적 존재, 세계 밖으로 떨어진 죽음과 관계가 있다. “소름끼치는 실존”을, 숨막힐 듯한 낯섦의 고뇌를 발견하는 두려움을, “변두리까지 슬픔으로 가득한” 이 도시에서 변화와 시련을 마주한다.

각자가 서둘러 사라지는, 집단의 죽음, 일련의 제조와도 같은 죽음, 익명의 생산품, 릴케가 언제나 비켜섰던 현대세계의 사물들의 모습을 한 가치 없는 대상 비교를 통해 우리는 헛됨을 보게 된다.

 -* 죽음의 임무와 예술적 임무

연속적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 잘 만들어진 사물들을 찬양, 죽음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예술가의 슬픔이 깃들어 있다. 죽음은 예술적 경험의 밝히기 어려운 움직임과 관계한다. 죽음에 대한 탐구는 어둠을 통해 예술적 ‘실현’에 있어서의 어려움을 밝히고 있다. 죽음은 우리 품속에서 익어가고, 죽음은 잎사귀이자 껍질인 우리가 품고서 키워야 할 열매, 감미로움과 어둠의 열매, 혹은 언제나 푸른 감미로움 없는 열매이다.

죽음은 살기 시작하면서 삶의 내밀성과 깊이 속에 존재한다. 죽음은 실존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실존인가? 이 이미지를 통하여 사는 자와 죽는다는 사실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지는가?

죽음은 언제나 보다 내면적이고, 보이지 않는 나의 형상, 몸짓, 나의 비밀의 침묵이어야 한다. 그것은 나의 작품이 되어야 한다. 이 작품은 나를 넘어서는 것이고 내가 밝히지 않는, 이르지 못하는, 내가 주인이 아닌 나 자신의 일부이다.

죽음은 그래서 우리가 채워야 할 빈곤, 신의 그것을 닮은 본질적 가난이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의 형상화가이자 시인이 되어야 한다.

  -* 참을성

참을성은 다른 시간을, 신속한 계획을 통해 달려가는 목표도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는 끝을 볼 수 없는 다른 작업을 말한다. 참을성은 본질적이다.

참을성은 초조함의 시련, 초조함의 감수, 초조함의 환대이고 가장 극단적인 혼돈 속에서도 여전히 견디어 가려는 일체감이다. 릴케의 참을성은 더욱 사물들의 침묵하는 평온으로 회귀를 혹은 사물을 순수한 힘의 무게 중심으로 끌어당기면서 사물의 부동의 충만함 속에 자리 잡고 쉬게 하는 침잠에의 순응이다. 릴케가 삶 속에 죽음의 내재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임무이고 그 임무는 단지 죽음의 낯섦을 참을성 있는 행동으로 인간화하거나 다스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초월성’을 존중하는 데 있다. “나 자신을 거역하지 않는 죽음을 죽고, 나 자신이 죽음의 진리와 본질을 거역하지 않고 죽는 것”이다.

 B. 죽음에 충실하게 죽는 것

  -* 말테의 경험

말테의 경험은 릴케이 다가갈수 없었던 감추어진 중심 주위를 맴돌고 있기에 신비롭다. 이 중심은 말테의 죽음 혹은 붕괴의 순간이다. 모든 경험은 삶을 넘어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바닥없는 공간으로서의 이 삶의 불가능성의 증거를 보여주려 한다.

릴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 “나는 사실상 이 책 뒤에, 나 자신 가장 깊은 비워지고 채울 수 도 없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생존자로 남아 있다는 걸 넌 이해할 수 있겠니?”. “커다란 절망 속에서 말테는 모든 것 배후에, 죽음의 배후와도 같은 어떤 한계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그에게 더 이상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죽을 수조차 없다”. 릴케의 경험 중에서 드문 기억해 두어야 할 이 말은 그의 경험이 여기 밤의 영역으로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죽음은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 아닌 불가능성의 공허한 깊이이다. 그에게 있어 모든 문제란 “사라진 자”가 부서진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불가능한 것을 시작으로 만들 수 있을까?

릴케는 『말테의 수기』를 완성하고 「두이노의 비가」의 언어를 만나게 허락하면서 말테의 실존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과 똑같은 여건에서 출발하여 이 새로운 작품 속에서 삶이 다시 가능해진다고 분명하게 말할 것이다. 또한 뒷걸음질치면서 출구를 찾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힘든 길을 더 멀리 밀고 나아감으로써 그러할 수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2. 죽음의 공간

「두이노의 비가」에서 삶의 긍정과 죽음의 긍정은 하나를 이루는 것으로 드러난다.… 삶의 진정한 형태는 이 두 영역을 통하여 넓혀지고, 가장 커다란 피의 순환은 두 영역 모두를 가로질러 돌아가고 있다.(비톨드 훌레비츠에게 보낸 편지 내용 일부) 이 편지를 통해 릴케는 결코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기 위해 불리어 온 말들에 대한 고뇌 속에서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이해되고, 자신이 독서와 이해의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를 원했다.

 -* 또 다른 곳

“운명이라 불린다. 마주한다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 언제나 마주하여.”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자신 앞에서만 개입을 통해 자신으로 분리되고, 마주보기를 통해 사물로부터 분리되고, 현전 속에서 각각의 사물을 분리된다. ‘또 다른 곳’이란 여기 단 하나의 사물에서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 의하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우리의 시선에 의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그만두게 되는 그곳이다.

“이 땅의 피조물은 그의 모든 눈으로 본다/열린 세계를. 오직 우리의 눈만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만 같고(「두이노의 비가」). 또 다른 곳으로 다가가는 곳. 우리가 다가가는 방식의 변경일 수 있다.

열린 세계란 우리에게 하늘을, 대기를,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을 넘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열려진 자유를 얻는다. 신을 향한 마음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연장(延長)을 보게 될 때, 극히 순간적으로 거기에 대응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동물의 커다란 눈을 가지고 바깥을 바라본다”. 죽음을 통하여 눈은 스스로의 방향 전환, 또다른 곳, 그것을 벗어나 사는 것이 아닌 의식을 통해 의식 바깥에 자리하고 이러한 움직임의 황홀함 속에 던져진.

우리의 한계 그릇된 연장, 필연적으로 다른 사물을 밀치고 들어 앉은 다른 것을 감추면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그릇된 내면성으로부터 벗어나서, 바깥의 실재성이자 힘과 내밀성의 깊이, 자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의 침묵, 공간의 내밀성이자 바깥이 되는 지점이 있을 수는 없을까? 이것이 ‘신비한’형태의 경험(두이노에서 만나게 되는 경험)이 그 다음 시적 경험이 발견하게 한 릴케의 경험 벨트인넨라움(세계의 내적 공간)이다.

 -* 세계의 내적 공간

우리의 내면인 이 그릇된 내면은, 그릇된 의식은 과거의 감금하고 몰아내는 권능으로부터 벗어나 환대와 찬동의 능력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우리를 실제 사물들로부터 분할 가능한 공간을 벗어나는 지점에 우리에게 사물들을 복원시켜 주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전환을 통해 한 층 더 벗어나면서 가능하다. 의식의 전환은 의식을, 현실적인 것이라 부르는 것, 안정된 형태와 분리된 존재들의 안전 속에 머물게 되는 객관적 현실에 불과한 것으로 데려가는 대신에 의식을 의식의 표면에 대상과 보다 깊은 내밀성으로 벗어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내맡겨지고, 마음의 산더미 위에 자신을 드러내 놓고”, “내면과 외면이 하나의 연속된 공간에 모이는” 그 지점에 가장 가까이 머문다.

 -* 전환: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변모

의식은 여기서 그 출구로서 무의식을 찾고 있고, 의식은 의식이 동물의 위대한 무지의 순수성을 되찾게 되는 본능적 맹목 가운데 사라지기를 꿈꾼다고 가정해 볼 수 있지만 릴케는 의미 그 자체의 변모로서 경험으로 내면화이다. 내면적 의식은 “의식 속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지상의 실존으로부터 독립된 여건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의 그릇된 의식이 아닌 내밀성이 바깥의 터트림과 솟아남이 되는 초월의 힘으로 만드는 요구에 가까운, 순수한 의식.

이러한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전환이 ‘극단적으로 순간적인’ 어쩌면 언제나 비현실적인 상태의 불확실성으로 환원되지 않아야 한다면 무엇이 거기에 위엄과 현실성을 부여하는가?

각각의 인간은 노아의 사명을 다시 시작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순수한 방주(피난처)가 아닌, 그곳에서 사물들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편협하고 노쇠한 삶의 덫과도 같다고 생각하는 그대로를 간직하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그 형태를 잃어버리고, 사물들의 보호 구역과도 같은 내밀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 형태를 잃어버린다. 거기서 순수한 미결정의 지점에, 그 자체로부터 보호되고, 온전한 존재. 변신은 그 자체로부터 이루어진다.

우리의 신속한 사라짐, 우리의 소멸의 자격,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노쇠, 죽음이라는 우리의 선물이다.

 -* 죽음의 공간과 말의 공간

인간은 무한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모든 것은 소멸된다. 모든 사물은 지나가고 변화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면서 우리가 변하는 그 곳, 작품이라는 가장 내면적인 것으로 가기 위한 이 움직임이 우리의 종말과 관계하는 어떤 것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된다.

릴케는 내면 공간을 “사물들은 번역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내면 공간은 사물들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낯선 외부의 언어에서 내면의 언어, 언어의 내부 그 자체로 옮긴다. “우리를 넘어서고 사물들을 번역하는 공간” 본질적인 번역자. 그 공간은 시의 공간이다. 거기에 현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부재 가운데 모든 것이 말하며, 모든 것은 열려진 그리고 부동이 아닌 오히려 영원한 움직임의 중심인 정신적 공모 속으로 들어간다.

“보이는 것을 부재의 언어로, 보이지 않는 것의 언어로 만들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견디고 어떻게 그것을 구할 수 있겠는가?”

열린 세계, 그것은 시다. “모든 세계가 그들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진정한 실재성을 향하는 것처럼 서둘러 다가가는” 공간 자체, 보다 거대한 순환과 끝나지 않는 변신의 공간은 시의 공간이다. 시인이 접근하지 못하는 오르페우스의 공간, 시인은 사라지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뚫고 들어갈수 없는 공간, 듣는 자를 침묵의 무게로 만드는 것처럼 그를 들림 없는 입으로 만드는 상처의 내밀성과 하나가 될 때에만 이르게 되는 공간, 그것은 작품, 하지만 근원로서의 작품이다.

 -* 근원으로서의 노래: 오르페우스

오 그대 잃어버린 신이여! 그대, 무한의 흔적이여!/적의에 찬 권능은 너를 찢으며 마침내 너를 흩트려야만 하였나니/우리를 이제 듣는 자가 되게 자연의 입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네(「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이 모호함, 보이는 것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변신에 열린 세계가 예고되고 있다. 세계의 내적 공간은 진정으로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해 인간 언어의 신중함을 요구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에워싼 숨결” 시의 진실과 같다. 신의 상징적 이름으로 주어지는 순수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을 희생하는 순수한 소비이다. “노래하는 것은 또 다른 숨결”시는 저 너머로 가는 것, 순수한 기욺인 움직임에 동의하는 것이다.

릴케는 기꺼이 변신을 영원 속으로 입구로, 이미지의 공간을 “파괴의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이해하고 있다. “지나가는 행위가 아니라 자유의 상태였던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며, 열린 세계의 환경이었던 것을 여전히 시간이라 이름하는 것을 나에게는 부당한 것으로 보인다.”

릴케에게 있어 죽는다는 것은 죽음을 벗어나는 것이 되리라는 그 순간이 이미 예고되고 있다. 그의 경험의 기이한 증발.


질문:1. 내가 의식하고 있는, 어떤 개념화된 의식에서 벗어나 동물의 시각, 사물의 관점 그 이상 너머에 시작 그리고 그릇된 인식이 아닌 변화된 인식으로 출발해야한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이 전환은 이론상이 아닌 현실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실현 할수 있을까?

 

2. 『말테의 수기』의 완성은 릴케 자신에게도 10년 동안 계속되는 위기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릴케의 경험과 함께 “그의 경험이 여기 밤의 영역으로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이 ‘밤’(문학의 공간, p.185)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죽음, 어두운 밤, 태초의 밤(열린 세계)...)

 

*** 책을 읽으면서 쉽게 설명하면 좋겠는데 참 어렵게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쉽게 간단히 설명하기엔 블랑쇼가 릴케가 그들이 언어의 언어의 집합체처럼 설명할수 밖에 없는 깊이처럼 느껴집니다^^ 잘 이해되지 못한 부분은 수업시간에 열심히 듣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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