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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는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을 함께 읽고, 물질의 생기성, 감응, 두 가지 외부, 배치의 행위성 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물질의 생기성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이어져 온 고전적인 질료-형상의 모델에 따르면 형상은 질료에 대한 우위를 갖습니다. 가령 어떤 책상을 이루는 것은 책상의 형태를 가진 형상form과 나무나 철제와 같이 그 형상을 구현할 수 있는 재료인 질료matter로 나뉩니다. 책상의 재료가 되는 나무나 철제와 같은 질료는 형상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것은 나무나 철제가 아닌 책상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나무나 철제는 의자의 형상을 만나면 의자가 되고, 책상의 형상을 만나면 책상이 되기 때문에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것은 형상입니다. 그리고 책상이나 의자의 형상은 다른 형상이나 질료와 구별되는 고유한 내부성을 가지게 됩니다. 반면 질료는 특정한 형상 속에서만 구체화될 수 있기에 그 자체로는 생기가 없는 어떤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제인 베넷은 이와 반대로 말합니다. 베넷은 물질 자체에 내재한 생기를 이야기하면서 이 물질이 형상을 조직하는 구성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금속과 같은 물질은 형상의 내부성에 포섭되지 않는 외부성을 가지는데, 이 외부성은 금속이 가진 그 자체의 질료적 힘입니다. 금속의 결정구조는 금속의 질료적 힘, 흐름이 응고된 것으로 형상과는 다른 독자적인 구조를 가집니다. 따라서 금속을 제대로 다루려면 금속의 질료적 힘을 따라가면서 다루어야 합니다. 만약 금속이 가진 질료적 힘을 고려하지 않고 금속을 다룬다면 금속에 적절한 형상을 부여하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금속의 질료적 힘을 따라가면서 형상을 다룰 때에만 적절한 형태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이는 금속의 질료적 힘이 형상의 내부적 구조에 거꾸로 작용하여 형상의 방향성을 바꿔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질료란 단순히 형상이 부여되길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형상에 작용하여 그것을 변환시키는 능동적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의 생기란 단순한 은유가 아닌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이때의 생기란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이 아닌 물질에 내재한 생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가진 내재적이고 생기적인 힘은 형상의 내부성에 작용하는 외부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의 힘은 형상의 내부성에 작용하여 그것의 방향을 유도하는 힘이고, 내부성에 침입하여 내부적인 것의 고유성을 변환시키는 힘입니다. 물질은 내부적 형상에 방향성을 부여해주며 형상을 다른 것으로 바꿔내고, 동시에 그 바꿔낸 형상에 다시 영향을 받아 자신의 형태를 바꿉니다. 형상 역시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질료와 형상은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며 그 결과에 다시 자신이 영향을 받는 내재적 관계에 있습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 모델이 가진 형상의 일방적인 우위와는 반대되는 질료-형상의 내재적 관계로 이해됩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내부성에 반하는 외부성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내부성에 작용하여 그것을 바꾸어내고 어떤 것을 구성해내는 구성적 힘으로서의 외부입니다. 이러한 외부성은 어떤 것의 구성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구성적이며 긍정적인 외부성입니다. 반면 부정적 힘으로 정의되는 외부성도 있습니다. 아도르노의 비동일성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아도로느의 비동일성은 주체의 개념적 규정에 저항하는 자연적 실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라는 외부적 실재는 주체의 일방적 개념화에 언제나 저항하고 이에 따라 주체는 끊임없이 자신의 개념화를 벗어나 자연이라는 실재로 향해야 합니다. 하지만 주체의 개념화 바깥에 있는 실재는 끝내 닿을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남습니다. 실재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아도르노의 비동일성은 이처럼 어떠한 규정에 대해 부정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부정적 외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도르노의 비동일성과 유사해보이지만 다른 블랑쇼의 불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블랑쇼 역시 절대적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블랑쇼는 불가능한 것이란 어떤 찾아낸 진리, 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아니오’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블랑쇼에게 불가능성이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그는 진정 말해야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불가능한 것을 말하기 위해 계속해서 불가능성에 다가가길 강조합니다. 이는 아도르노의 비동일성과 유사해보입니다.

하지만 블랑쇼는 아도르노와 달리 모든 실패는 또한 하나의 성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찾아낸 진리, 예술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패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것을 찾아냈기 때문에 그만큼의 성공을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진리와 예술에 대한 하나의 규정은 하나의 규정이기 때문에 실패인 동시에 그 규정만큼의 성공이기도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규정가능성을 향해, 불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만 거기에 따르는 모든 실패가 성공이 되는 기묘한 긍정을 띠게 됩니다.

블랑쇼는 이런 실패이자 성공을 사물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시인들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시인은 기존의 규정에 대해 새로운 규정을 붙여주는 자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잘 알고 익숙하게 여긴 것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면서 그것을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만드는 이런 행위를 기존의 자리에서 구원하는 사물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구원하는 자를 구원하는데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구원하는 자의 시각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껏 세상을 보던 내 안의 누군가가 죽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내 안의 누군가의 탄생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죽음은 탄생과 이어지고 실패는 성공과 이어집니다. 지금껏 세상을 보던 내 안의 누군가가 죽는 이러한 사건을 블랑쇼는 비인칭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는 물리적 죽음과 구별되는 어떤 하나의 인격, 인칭이 죽는 것입니다. 아도르노와 블랑쇼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서의 비동일성,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갖는 의미는 이처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블랑쇼의 비인칭적 죽음은 들뢰즈의 초험적 경험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들뢰즈는 초험적 경험을 통해 진정한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초험적 경험은 말 그대로 경험을 넘어선 경험입니다. 초험적 경험은 내가 알고 있는 것, 내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마주할 때 발생합니다. 감각할 수 없으나 또한 감각밖에 되지 않는 어떤 것, 사유할 수 없으나 또한 피할 수 없이 사유해야만 하는 난감한 사태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감각, 생각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그것을 감각하고 그것에 대해 사유하게 됩니다. 감각할 수 없고, 사유할 수 없는 부정적 사태가 진정한 감각과 사유라는 새로운 긍정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초험적 경험은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을 파악하기 위해 반복해서 던지는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블랑쇼에게 불가능성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들뢰즈에게는 문제를 통한 물음의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칸트의 물자체, 아도르노의 자연은 규정 불가능한 실재입니다. 반면 들뢰즈에게 그것은 dx, dy로 표시되는 최소치의 미분적 성분입니다. 미분에서 dx, dy는 아주 작은 미시적 차이로 그 자체는 어떤 규정성도 가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dx, dy는 또한 그것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규정 가능성을 가지기도 합니다. dx, dy는 그 자체로는 너무 작아서 어떤 규정성도 가질 수 없지만 다른 것과 결합한다면 어떤 값을, 규정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자체로는 너무 작아 어떤 규정성도 없는 차이들이 결합을 통한 상호관계 속에서는 특정한 규정성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어떤 것이게 하는 것은 이 같은 최소치의 차이들이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이 최소치의 차이들의 결합관계가 바뀌면 기존의 규정은 다른 규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어떤 구조를 이루는 최소치의 요소(차이)의 관계, 어떤 사물을 포착하는 최소치의 개념(차이)의 관계, 어떤 존재를 이루는 최소치의 힘(개념)의 관계 등 모든 것은 이 최소치의 차이들이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으로 만들어집니다.

들뢰즈에게 문제란 이런 미분적 차이들의 관계를 파악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규정성을 이루는 차이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잇는가? 내가 알 수 없고 사유해야만 하는 저것은 ‘어떤’미분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어떤 것을 문제화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습니다. 문제화 속에서 우리는 지금의 규정성과는 다른 규정성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문제는 주관으로도 그렇다고 칸트와 아도르노적인 객관과도 다른 것이 됩니다. 어떤 것을 문제화한다는 것은 그 상황을 이루는 미분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기에 개인의 주관적인 관념으로 환원되지 않고, 또한 규정 불가능한 객관적 실재도 아닙니다. 다만 특정한 규정을 갖고 있기에 포착 가능한 어떤 것이고, 특정한 규정을 갖기에 모든 것을 설명하는 진리와 다른 것입니다.

이는 물자체로서의 실재와 현상간의 극복될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내는 것과도 다릅니다. 들뢰즈에게 실재란 결합관계에 따라 규정 가능한 어떤 것이기에 중요한 것은 문제의 반복을 통해 지금의 규정과는 다른 규정성을 찾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가령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대신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방식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언제나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의 방식으로 매번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의 규정성은 그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잠재성을 갖기에 우리는 다시 문제를 던지고 다른 것을 포착해야 합니다. 들뢰즈에게 불가능성은 이처럼 문제의 반복을 요구하는 미규정성입니다.

다음으로 감응affect입니다. 스피노자에게 감응이란 어떤 양태가 다른 양태에 의해 촉발되었을 때 발생하는 신체상태의 변화와 그에 따라 발생하는 정서적 효과를 가리킵니다. 스피노자는 감응을 촉발 받은 신체의 결과, 효과로 정의합니다. 들뢰즈는 여기서 한 번 더 나아가 감응을 객관화될 수 있는 것, 그래서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도 다룹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예술작품을 감응의 응결이라고 정의하면서 감응을 객관화되고 물질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술작품은 보는 이들에게 특정한 감응을 일으키는데 보는 이들 각각이 느끼는 것이 조금씩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느낀 것에는 일정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응을 촉발한 힘은 감응을 응결한 예술작품 자체에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감응은 대상 자체에 속한 물질화된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감응은 언제나 복합체의 감응이고 이행상태에 있습니다. 가령 커피를 마신다고 할 때 뇌는 커피에 의해 또렷해지지만 피로한 신체는 커피로 인해 괴로워하게 됩니다. 맛 또한 쓴 맛과 신 맛 등이 섞이는데 신체의 이 모든 감응은 복합적인 것이고 또한 계속해서 변화하는 이행상태에 있습니다. 신체의 여러 부분들이 느끼는 감응이 전부 다 다르기 때문에 신체 각각이 느끼는 미시적인 감응을 전부 포착할 수는 없습니다. 우린 그중 가장 강한 감응을 가진 것만을 포착해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커피가 쓰다. 시다. 등은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을 잡아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감응은 언제나 여러 감응이 섞인 것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 감응 하나하나를 뚜렷하게 구별할 수 없습니다. 이는 감응이 그것을 이루는 복합적인 힘들의 연속체임을 나타냅니다. 감응이란 그것을 이루는 복합적인 힘들의 연속체이고 따라서 강도의 연속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응은 강도와 마찬가지로 모호confused하게 섞인 힘들이 모여 만들어진 명료함clear을 갖습니다.

마지막으로 배치의 행위성입니다. 우리 강의에 계속해서 언급되는 배치란 어떤 것을 관계 속에서 다루는 들뢰즈/가타리의 방법입니다. 가령 두 번째 책으로 읽은 드 발의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본 것처럼 ‘동물의 생존이냐, 인간의 생존이냐?’라는 배타적 이접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동물과 인간을 둘러싼 관계를 보아야합니다. 동물과 인간의 생존은 언제나 그들이 현재 관계하고 있는 배치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동물과 인간이 속한 배치를 보는 것입니다. 동물의 생존이나 인간의 생존이라는 말로 표현될 때에도 그들의 생존은 언제나 동물과 인간이 관계하고 있는 배치의 생존의 문제입니다. 배치란 이처럼 어떤 것을 단일한 개체가 아닌 복합체로서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배치 속에서 다룬다는 것은 개인의 행동 역시 배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행동의 결과 역시 배치가 만들어낸 것으로 봅니다. 개인의 행동이 자신이 속한 배치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 결과를 만들어낸 것 역시 개인이 속한 배치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 행위자를 인간뿐만이 아니라 그 배치에 속한 모든 것으로 확대하는데, 이에 따라 사물 역시 주요한 결과를 만들어낸 행위자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생동하는 물질』에 나온 봉납 개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어떤 행위를 배치가 만들어낸 것으로 보는 이러한 관점은 행위자로 인식되지 못했던 것들까지가 실은 주요한 행위자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배치의 분산된 행위성은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개인의 행위 역시 배치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전부 개인에게 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행위의 주요 행위자가 사물이라면 책임을 묻는 것은 더욱 난감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사실 행위의 결과를 모두 개인의 의도로 돌리는 것은 책임을 묻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물이 행위에 주요한 행위자라고 한다면 그 사물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에 책임을 질수 있는 인간 주체에게만 행위의 원인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는 책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인간중심주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배치의 분산된 행위성에 주목한다는 것은 분명 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의 불가능성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책임의 정도는 결과에 영향을 미친 정도에 따라 물어야 합니다. 결과에 작용한 정도가 가장 큰 것이 가장 큰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히틀러 개인에게 모두 돌립니다. 모든 것은 히틀러가 시켜서 한 것이니 그 밑에 있는 수많은 나치들은 죄가 없다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합니다. 이는 가장 큰 책임을 행위가 발생한 첫 번째 원인으로 돌리는 일종의 신학적 모델을 가집니다. 동시에 가까운 책임을 먼 것에 돌림으로써 개인이 무책임해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홀로코스트에 참여한 나치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홀로코스트에 영향을 끼친 만큼의 책임을 가집니다. 더불어 히틀러를 비롯해 홀로코스트를 지시한 간부, 실제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한 군인들은 홀로코스트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이들이고 따라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합니다. 누군가 시켜서 했다고 한들 이들은 결과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이들이고, 이들에 대해 강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비슷한 일은 언제든 다시 반복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배치의 분산된 행위성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함에도 행위자로 인식되지 못했던 이들을 드러내는 것이고, 동시에 행위의 결과에 끼친 영향의 정도를 통해 분산된 행위자에게 각기 다른 정도의 책임을 묻는 것에 있습니다.

다음 주는 『생동하는 물질』 5-8장입니다.

발제는 정선율 선생님, 이정민 선생님입니다.

더불어 이번 주 에세이 프로포절 발표하시는 분들은 인사원 자료란에 포로포절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책을 읽다 궁금한 점이나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으신 내용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목요일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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