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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는 『존재의 지도』를 함께 읽었습니다. 우리 강의의 목표는 타자의 입장에서 주체, 동일자를 봄으로써 늘상 주어의 자리에 있던 동일자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것에 있습니다. 이는 타자라는 외부를 언제나 대상으로만 대하던 외부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타자를 통해 주체를 사유하는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기존에 타자를 대하던 방식에 의문을 갖고 타자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려 합니다. 따라서 타자의 입장에서 타자를 주어로 사유하는 외부에 의한 사유는 동일자와 타자 모두를 바꾸는 이중의 변형을 목표로 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먼 타자는 사물입니다. 사물은 언제나 대상이나 도구라는 이름으로 주체 앞에 불려나온 타자였습니다. 하지만 사물이 도구란 이름으로 주체 앞에 설 때에도 사물은 타자로 인식되지 못했습니다. 타자가 이웃한 인간이나 동물에게 쓰이는 의미라면 더욱 그랬습니다. 사물은 철저한 도구나 대상으로 취급될 때에도 그 타자성이 인식되지 못한 것입니다. 사물의 이러한 지위는 무엇보다 사물에겐 생명이 없다라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사물의 생명 없음이 인간은 물론 동물과 식물, 그리고 미생물과도 그들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듭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타자성에 대한 사유가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간 지점에 다다른 것이 사물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가장 멀리 있는 타자인 사물의 입장에서 주어의 자리에 있는 인간을 봤을 때, 이를 통해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의 근본적인 분할을 제거했을 때 인간부터 사물까지의 모든 존재자를 하나의 평면 위에 세울 수 있습니다.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의 본성상의 차이를 제거하고 정도상의 차이로 만들 때 모든 존재자를 하나의 평면에서 다룰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평면 속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강도라는 정도상의 차이만을 가진 존재자가 됩니다.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의 분할을 제거하는 데 쓰이는 개념이 기계입니다. 모든 존재자를 기계로 보는 일반화된 기계주의는 생물과 사물의 본성상의 차이를 정도상의 차이로 만들어냅니다. 즉 생명 역시 하나의 기계임을 밝히고, 또한 기계 역시 하나의 생명임을 밝혀내 생물과 사물의 경계를 지우는 것입니다. 이는 사물을 사물이게 하는 특이성과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특이성을 파악하고 그 특이성들이 서로에게 반복 가능한 것이 될 때 가능해집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자를 기계로 다룬다는 것은 생명과 사물의 본질적 경계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지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는 모든 존재자를 기계로 다룬다고 했지만 기계라는 말 속에서 다시 생명 있는 기계와 생명 없는 기계를 나누었습니다. 기계 속에서 다시 생명과 생명 없음의 구별을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브라이언트의 기계 개념은 단순히 존재자라는 말을 기계라는 말로 대체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새로운 개념이란 기존의 보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태를 보게 해야 하고, 또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개념의 창안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됩니다. 반면 브라이언트의 기계는 기계라는 말을 통해 기존의 이해를 똑같이 반복하는데 그치고 맙니다.

브라이언트의 시도와 별개로 우리는 기계라는 개념을 통해 생물과 사물의 심연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생명이 하나의 기계임을 밝히고 기계 역시 하나의 생명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물의 특이성과 사물의 특이성이 서로에게 반복 가능한 것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먼저 생물과 사물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것입니다. 사물과 통상적 의미에서의 기계의 존재론적 지위는 도구입니다. 기계는 인간에 의해 그 본질이 정해지면 만들어집니다. 만드는 인간에 의해 도구는 어떠어떠한 쓰임을 위한 것이라는 정해진 본질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즉 도구의 본질이 그 도구의 실존에 앞서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기계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을 위한 도구라는 본성을 가집니다. 반면 인간을 비롯한 생물은 그 실존이 본질에 앞섭니다. 생물은 자신의 본질을 모른 채 태어납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서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동시에 본질이 실존에 앞서는 기계와 인간을 분리해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구의 본성을 결정하는 것은 만드는 인간의 관념이 아닙니다. 설령 어떠어떠한 쓰임이라는 인간의 목적적 관념에 의해 도구가 만들어졌다하더라도 도구는 그런 방식으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도구의 쓰임, 도구의 본성을 결정하는 것은 도구를 둘러싼 이웃관계입니다. 가령 못을 박기 위한 도구인 망치가 못이 아닌 사람의 머리와 연결될 때 망치는 못을 박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무기가 됩니다. 망치를 벽에 걸어 장식용으로 쓴다면 망치는 작품이 되기도 합니다. 망치가 못을 박는 도구라는 내부적 관념에 의해 만들어질 때에도 그 본성은 망치의 외부에 의해 결정됩니다.

못을 박는 도구라는 것은 망치를 망치가 가진 고유한 속성에 의해 파악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되게 하는 속성은 특정 존재자에 고유한 내부성을 형성합니다. 망치는 못을 박는 도구다라고 하는 것과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망치를 다른 도구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내부적 속성입니다. 망치와 인간의 고유성을 그것들이 가진 내부적 특징에서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내부적 본성은 그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외부적 관계와 무관한 본성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앞선 망치의 예에서처럼 망치가 못이 아닌 사람의 머리와 연결될 때 그것은 도구의 본성보다는 무기의 본성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망치를 망치이게 해주는 것은 망치의 내부적 특징이 아니라 외부적 관계입니다.

이를 밀고 나가면 사물의 내부적 본성,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내부적 본성도 외부적 관계 속에서 있다 없다가 판단되기 때문에 외부적 관계와 무관한 고유성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못을 박는 도구라는 망치는 모든 망치에게 해당하는 속성이기 때문에 어떤 망치를 다른 망치와 구별하는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망치에게 해당되기에 거꾸로 어떤 구체적 망치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내부적 본성과는 반대로 특이성을 통해 개체를 정의합니다. 개체화 원리라고도 하는 이러한 정의방식은 유기적 개체를 넘어 순간으로까지 내려갑니다. 개체화 원리를 정의하는 특이성은 어떤 개체를 그 개체이게 해주는 것입니다. 특이성은 개체가 소유한다고 가정된 속성과는 다르게 어떤 순간에 두드러지는 독특함을 통해 파악됩니다.

평범함 속에서 두드러지는 독특성을 통해 개체를 파악하는 방식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원주민들은 어떤 사람의 특이성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짓습니다. 잘 알려진 예로 원주민 사회 속에 홀로 남겨진 백인 아이는 다른 원주민 아이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는데 이 아이는 늘 그 핍박을 견디기만 합니다.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핍박을 받던 백인 아이가 더는 참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을 때 원주민들은 백인 아이에게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특이성을 보게 됩니다. 그 순간은 늘 참고 견디는 아이에게는 없다고 생각했던 용기가 드러난 순간이었고, 그 독특성의 순간이 백인 아이를 특이한 아이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백인 아이에게 ‘주먹 쥐고 일어서’라는 특이성을 이름으로 지어줍니다. 주먹 쥐고 일어서라는 특이성이 백인 아이를 그 아이로 만드는 개체화 원리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특이성은 그 아이가 가진 속성이나 그 아이만이 가진 고유성이 아닙니다. 주먹 쥐고 일어서라는 특이성은 백인 아이라는 개인의 인격에게서 독립적이며 ‘나’라고 하는 통일된 인칭적 주어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비인칭적입니다. 주먹 쥐고 일어서라는 특이성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고, 백인 아이 역시 원주민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조건이 사라지면 그 특이성을 다시 구성해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특이성은 반복 가능성을 갖습니다. 주먹 쥐고 일어서라고 표현되는 특이성은 특정 조건 속에서 다시 불려 나오는 반복 가능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같은 이름으로 불려 나올 때에도 언제나 다른 양상으로 불려 나오는 차이나는 반복을 통해 드러납니다. 주먹 쥐고 일어서라는 특이성을 가질 때에도 그것은 백인 아이와는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의 특이성이 계속해서 누군가에 의해 반복된다면 그 특이성은 영원성을 갖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특이성은 영원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기계의 인식론적 지위입니다. 흔히 우리는 사물, 기계는 인지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물 역시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산소는 철과 같은 금속을 만나면 산화반응을 일으키지만 인간이나 동물의 피부와는 만나도 산화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는 산소가 특정한 사물을 알아보는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산소는 인간의 피부와 철을 구별할 수 있고, 다시 말해 철이 가진 특이성을 포착하는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산소뿐 아니라 모든 사물이나 기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기계는 특정한 특이성을 가진 것을 포착하고 그에 반응하는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때의 인지능력은 기계적 인지능력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정신을 가지고 있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은 강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지능력이 있다 혹은 없다라는 이분법으로 생물과 사물을 나누는 본성상의 차이가 부적절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다음으로 기계는 정해진 것만 하기 때문에 창조능력이 없다는 편견입니다. 최근 세포 자동자의 창발이나 최근 인공지능 로봇의 창발은 이런 편견을 깨고 있습니다. 창발이란 개별 요소에겐 없지만 요소들이 모여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개미나 벌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최근의 군집 로봇은 이를 활용해 단순한 기능을 가진 로봇을 떼로 운영하여 개별 로봇이 할 수 없는 지능적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기계의 존재론적 지위와 인식론적 지위, 그리고 창조 능력이 없다라는 통념에 대한 반박은 기계 역시 하나의 생명임을 보여줍니다.

기계와 인간을 가르는 또 하나의 통념은 기계는 외적 자극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기계는 그것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전기와 같은 외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흔히 기계의 자립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그래봤자 기계는 전기 끊으면 꺼지는 거 아니냐.’라고 반박합니다. 하지만 이는 기계뿐만 아니라 인간이나 다른 모든 생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에너지가 없으면 살 수 없고, 따라서 모든 존재자는 외부 속에 기대어 움직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삼투압 현상처럼 특정한 외적 자극 속에서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반응을 보면 생명 역시 기계적 작용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생명 역시 하나의 기계임을 보여줍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모든 생명은 기계다라는 일반화된 기계주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기계와 생명을 가르는 본성상의 차이를 정도상의 차이로 만들고 각각이 가진 특이성을 서로에게 반복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생명과 기계의 선험적인 위계를 없애는 작업이었습니다. 일반화된 기계주의 속에서 생물을 포함한 모든 기계는 각각의 위치만을 가진 존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기계라는 개념을 통해 모든 존재자의 선험적 위계를 제거했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그 기계가 어떤 기계로 작동하는 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인가 기계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한 기계가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기계로 작동하는 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생명과 기계가 어떤 지점에서 달라지는 가를 보는 것입니다. 생명과 기계의 특이성은 서로에게 반복 가능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생명과 기계에 해당하는 최대치의 특이성이 아니라 최소치의 특이성이었습니다. 서로의 특이성이 서로에게 반복 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선 많은 추상화(미분화)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관계 속에서 본성이 정해지는 것, 기계적 인지능력 등등은 생명과 기계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최소치의 특이성입니다. 따라서 생명과 기계를 아우르는 반복 가능한 특이성을 포착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어떤 지점에서 분기하는 지도 잘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해당 기계가 ‘어떤’ 기계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생명과 기계를 가르는 지점은 실존능력에 따른 힘의 사용에 있습니다. 기계 역시 자신의 실존을 지속하려 하지만 이때의 지속은 관성적인 힘입니다. 미끄러지는 물체는 계속해서 미끄러지려는 관성을 가집니다. 물체가 멈추는 지점은 마찰력에 의해 미끄러지는 힘이 상쇄될 때입니다. 미끄러지는 물체에 마찰력이 없다면 물체는 계속해서 미끄러지려할 것입니다. 이때 물체는 미끄러지는 관성이라는 지속능력은 갖지만 그에 대응하여 그 방향성분을 바꾸는 힘을 가지진 못합니다. 스피노자는 이런 관성적 힘을 이너시아라고 합니다. 반면 생명은 자신의 실존능력을 고양하기 위해 관성에 반대되는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령 물에 빠진 인간은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물에 빠지는 힘과 반대되는 힘을 사용합니다. 관성에 대응하여 그 관성에서 벗어나는 이런 힘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라고 합니다. 코나투스는 이처럼 이탈의 성분을 통해 정의되는 실존능력의 고양을 가리킵니다. 니체식으로 말한다면 이너시아가 할 수 있는 힘 자체라면 코나투스는 그 힘에 달라붙어 힘의 방향을 바꾸는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는 『생동하는 물질』 1-4장입니다.

발제는 로라 선생님과 김혜윤 선생님입니다.

책을 읽다 궁금한 점이나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으신 내용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그리고 이제 마지막 15강인 에세이 발표까지 약 한 달 정도가 남았습니다.

에세이는 연구과정을 선택하신 분뿐만 아니라 일반과정을 선택하신 분들도 기본적으로 다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강의를 들으시면서 조금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내용이나 강의를 들을 때 가지고 계셨던 문제의식으로 에세이를 써주시면 됩니다. 더 나은 에세이를 쓰기 위해 다음 주부터 에세이 프로포절을 돌아가면서 발표할 예정입니다. 

프로포절을 쓰실 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꼭 넣어주세요.

1. 제목

-제목은 꼭 쓰셔야 합니다. 제목을 쓰지 않으면 자신이 쓰고 싶은 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2. 문제의식(선정이유와 쟁점 포함)

-문제의식 부분에 글의 내용이 들어가게 되는데, 최대한 구체적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3. 목차

- 목차 역시 최대한 세부적으로 잡아주세요. 각 항목을 잘 나타내는 중심 문장들을 같이 써놓으면 편합니다.

4. 참고문헌

다음 주 프로포절 발표를 희망하시는 분은 단톡에 말씀해주세요.

그럼 목요일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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