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 앞마당을 가로지른다. 새로 칠을 해서 밴들밴들한 바닥이 미끄러질 듯하다. 발을 조심스레 디디며 내려가 경사진 도로를 향한다. 정화스님과, 스님을 떠나보내는 두 분의 모습을 지켜본다. 아름답다. 늦은 목요일 저녁시간에 흐릿한 형광등 아래 모여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다가, 가르침을 주신 이를 떠나보내고 그가 떠난 빈 자리를 잠시 지키다가 자신들의 쉴 공간으로 흩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런 은은한 빛을 낼 수 있는 관계가 또 있을까? 부부가, 또는 엄마와 아들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열고 집으로 들어간다. 늦은 저녁, 평소와 다른 기운이 거실을 가득 채운다. 남편이 딸과 대화를 나누며 와인 한 잔, 두 잔 들이키시다가 내가 나타나니 후다닥 식탁을 정돈하는 분위기다. 남편은 곧 누군가에게 점령당할지 모를, 우리집 단 하나밖에 없는 욕실로 뛰어들어간다. 난 주위를 둘러본다. 식탁 위에는 와인병과 육포의 흔적(가루)이 남아있고, 싱크대 안에는 유리컵과 밥그릇, 과자봉지로 어수선하다. 피곤하다. 당장은 휴식을 취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피로가 몰려오고 감정이 ‘욱’ 한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화를 내거나 기분 나쁜 티를 내서는 안된다. 방금 정화스님의 ‘무위와 자재’를 공부하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절대로 그래선 안돼지.’
무위. 저절로 그러한 것. 무수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나의 세포 속에 녹아들어가서,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저절로 결론을 내리는 나의 ‘신체상’과 ‘자아상’. 오늘 나는 ‘설법의 아름다운 장’에서 ‘중생의 장’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나를 점검한다. 수유너머 1층 목요일 저녁 7시 반, 하얀 칠판 앞에서 펼쳐지던 그런 분위기는 아무데서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가르침이 이 어수선한 중생의 장에서 어떻게 적용이 되어야 하는 것을까. 오직, ‘지켜봄’만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무수한 경험을 통해 축적된 ‘기억’이 나에게 달라붙어 ‘필터’처럼 기능을 하면서, 마치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원래부터 그랬던’ 것으로 착각하도록 하기 때문에, 나는 내면에 굳어져 있는 판단들을 다시 흩어 놓아야 한다. 신체상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좋은 감정, 나쁜 감정, 그리고 자아상에 붙어있는 못남과 잘남의 감정을 분리시켜야 한다. 어떻게? 지켜보면, 마음챙김을 하면 분리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지켜보는 일을 반복을 하다가 ‘힘’이 생기면 지켜보는 일 자체가 ‘무위로 된다’. 반복적인 ‘유위’를 하다보면 그것이 ‘무위’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나에게 단 한번의 만남이 남아있다. 설법을 펼치는 분과 그 가르침에 귀를 귀울이는 사람들과의 만남. 이 인연의 장이 미래의 우리에게 어떤 ‘불꽃’을 터뜨릴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물론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미리 생각하는 것은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무엇이 오든 현재에 귀를 기울이고 ‘지금 여기’를 기뻐하고 온전하게 머물러야 한다. 2023년 한 해가 간다. 정화스님을 만난다. 올해, 단 한번의 가르침이 남아있다. 기쁘다. 오롯이 현재에 머물 것이다. 그것이 미래에 뭘 하든, 그냥 지금 여기를, 그리고 나 스스로를,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냥 지켜볼 것이다. ‘중생의 장, 나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도 또한 '그냥'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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