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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밤, 뜻밖의 읽기] 3강 후기

Jae 2022.07.29 22:54 조회 수 : 85

지난 주 토요일 송하얀 선생님의 "세 겹의 미시적 글쓰기" 강의에서 저는 "팔림세스트"라는 낯선 개념을 만났습니다. 팔림세스트는 양피지가 귀하던 시절 지워도 채 지워지지 못한 글씨들이 겹겹이 남은 양피지 사본을 일컫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적히고 더이상 지워지지 않는 글은 아마 그 양피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귀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메시지"를 담는 순간, 양피지의 글씨들은 보존되었겠지요. 그렇다면 그 전에 지워진 이야기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어쩌면 실패작인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팔림세스트가 매력적인 이유는 가장 마지막에 남겨진 중요한 메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래 겹쳐진 "지워진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송하얀 선생님은 왜 우리에게 "지워진 이야기"들을 들여보라고 하신 걸까요?

카프카의 <페스트>가 코로나19를 맞아 다시 불려나왔던 이유는 <페스트>가 가진 재앙 서사라는 "중요한 메시지"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하얀샘을 통해 <페스트>를 팔림세스트로서 읽어낼 때, 리외와 타르, 그랑의 "지워진 이야기"들을 볼 수 있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리외는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의 상황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글쓰기를 합니다. 얼핏 그는 거대 서사를 서술하는 인물이기에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인물로 보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관이 임금이 자신이 한 부끄러운 언행을 서술하지 말아달라는 말에도 "말"까지 기록했던 것처럼, 리외는 모순되는 상황에서 하나의 흐름을 선택해 서술하지 않고 모순적인 상황을 그대로 적지요. 사실 모순적인 두 가지 모습 중 하나는 공식적인 서류였다면 판단되고 생략되었을 것입니다. 지워졌을 이야기를, 리외는 지우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연대기는 단순히 "중요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워진 이야기" 또한 함께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타루의 글쓰기는 정말 소소합니다. 동네 노인이 고양이들에게 침을 뱉어 맞추는 장난을 하는 모습을 기록한 타루의 수첩 이야기는 일견 전염병과 관계 없어 보이지만, 전염병이 점차 성행하자 쥐들이 죽고, 고양이들이 죽어 더이상 장난을 치지 못해 우울해 하는 노인을, 전염병으로 인한 일상의 변화를 보여주지요. 이렇게 보면 현상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미시적인 이야기들조차 거대 서사와 항상 함께 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거대 서사를 위해 미시적인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겠지요. 마지막으로, 정확한 말을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그랑의 글쓰기는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앞의 두 사람과 다릅니다. 그랑은 아내가 떠나갈 때 아내를 붙들 적당한 말을 하지 못한 이전의 자신과 달라지기 위해, 글을 씁니다. 이전과 다른 삶을 향한 글쓰기, 그렇기에 비록 한 문장을 계속 붙들고 있는 그는 리외에게 "영웅"으로 불립니다. 그랑의 사후에 태워지는 그의 원고들은 "지워진 이야기"임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외의 팔림세스트를 통해 이 "지워진 이야기"의 흔적을 더듬거릴 수 있습니다. <페스트>에 대한 송하얀 선생님의 독해를 제가 전달하는 능력이 조금 부족하여 송하얀 선생님께서 전달하고자 하는 "지워진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도 같네요..그렇다면..!

저는 요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를 굉장히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요, 이 드라마도 하나의 팔림세스트로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드라마는 자폐스펙스트럼을 가졌지만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는 암기력을 가진 우영우라는 변호사가 대형 로펌에서 여러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연애 이야기와 출생의 비밀 이야기라는 큰 플롯은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갖는 것이지만 그만큼 많은 드라마에서 다루어졌기에 이 드라마를 특별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드라마는 오히려 매주 하나씩 다뤄지는 법정 사건들과 우영우와 주변 인물의 갈등 속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를 통해 삶의 어려운 주제들을 던집니다. "지체장애인과 어린이는 대변되어야만 하는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는 역차별인가?"와 같은 주제는 구체적인 맥락과 상황이 주어지지 않고서는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들이지요. 주인공의 연애가 결혼으로 결말을 맺을지, 주인공이 어머니와 어떤 관계로 결말을 맺을지는 이 극을 끌고가는 중요한 서사이자 작가가 하고싶은 미시적인 이야기들을 가능케 하는 장일지도 모릅니다. 팔림세스트로 이야기를 읽어내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래서 드라마 우영우를 보고 사람들이 주인공의 스킨쉽 장면 못지않게  "지체장애인", "어린이"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화두로 삼게 된다면 좋겠지요. 저도 제가 접하는 다양한 텍스트들을 팔림세스트로 읽어낼 수 있도록, 미시적인 이야기들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감각을 바꾸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팔림세스트를 선물해주신 하얀샘께 감사드리며, 이만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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